다큐영화 -<노회찬, 6411>
1. 노회찬이 세상을 떠난 지 약 3년이 흘렀다. 한국 진보정치의 상징이었던 그는 김경수 지사의 트루킹 사건 특검 중 트루킹 세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비록 어떤 대가를 약속한 자금이 아니었지만 평생을 불법자금을 비판했던 정치적 행위와 불일치 때문에 고민했고 그 결과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2. 노회찬은 비록 불미스런 죽음을 맞이했지만, 한국 정치인 중 누구도 보다도 청렴했으며, 권력과 부정에 맞서 싸웠고, 약자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진보정치’라는 쉽게 이룰 수 없는 정치적 신념의 세계 속에서 한 순간의 휴식도 없이 철저하게 몰두했던 정치인이기도하였다. 하지만 어깨를 누르는 부담감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유모아가 넘쳤고,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활력을 만들어냈으며, 적과의 투쟁 속에서도 상대를 혐오하지 않는 매력적인 투쟁가였다. 자료로 남아있는 TV토론은 그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공간이었다. ‘50년 묵은 삼겹살 판’으로 대표되는 그의 촌철살인의 비유는 비록 자신들이 공격 대상이었음에도 웃을 수밖에 없는 보수 정치인들의 모습을 통해 노회찬이라는 인물이 지닌 정치적 능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다큐 <노회찬, 6411>은 용접공이라는 노동자로 시작하여 정치인으로 마무리된 그의 삶을 남아있는 자료와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노회찬은 어떤 일을 하든 시작하였다면 진심으로 몰두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용접’의 기술이 늘었을 때 흥분했던 당시를 증언하는 동료의 말 속에, 진보 정당을 조직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고 헌신하던 모습을 통해, 노회찬이 지닌 에너지의 집중도를 알게 되는 것이다. 다큐에는 나오지 않지만 친구가 말했던 “어부가 되었어도 진짜 어부가 되었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진정함이 그에게 고통스럽고 험난한 진보 정치의 도전을 멈추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4. 정치인 노회찬의 가장 큰 장점은 유연함과 타협의 중시였을 것이다. 험한 막말과 잔혹한 공격이 일상인 정치판에서 노회찬의 말과 행동은 결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가 사용하는 화려한 비유는 공격을 세련되게 만들었으며, 상대의 분노를 야기하지 않고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2012년 전국구 국회위원선발로 불거진 통합진보당 사태 때에도 그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반대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석기와의 동반사퇴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철저하게 공익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5. 노회찬의 수많은 장점 중에서도 보통 사람들이 느꼈던 가장 소중했던 모습은 ‘약자와의 연대’였을 것이다. 인터뷰에 등장했던 많은 사람들은 노회찬이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어려움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형식적이고 일시적인 공감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함께 하였던 존재였다. 그는 ‘비를 맞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큐의 제목 ‘6411’은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애환을 대표하는 언어였다. 새벽에 버스 ‘6411’을 타고 서울 곳곳에 내려 마치 투명인간처럼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노회찬은 환기시켰던 것이다. 우리 시대에 그만큼 약자들의 아픔을 진실하게 표현한 정치가가 있었을까? 그것은 단순한 위안의 시선이 아니었고, 아픔을 겪는 사람들과의 진실한 교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공감의 언어였다.
6. 영화 마지막 부분, 노회찬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그의 삶을 계승하자는 움직임에 대한 냉소적인 댓글이 달린다. “부정한 행동을 한 사람의 삶을 계승하자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었다. 영화는 손석희 당시 JTBC앵커의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이라며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린 그 차디찬 일갈을 듣고 난 뒤 마침내 도달하게 된 저의 결론이었습니다”라는 말을 통해 그의 죽음을 정리한다. 손앵커의 말은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허무와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7. 2021년 대선에 나선 수많은 정치인들의 속내가 곳곳에서 공개되고 있다. 그들은 온갖 부정과 도덕적 문제를 가졌음에도 오히려 뻔뻔하고 공격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회피하고 있다. 그들의 부끄럼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면서, 노회찬의 지나치게 커다랐던 ‘부끄러움’의 크기를 안타까워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세상은 또다시 흔해빠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전형적인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악당들이 설치는 무대를 또다시 허용해야 하는가? 누구는 어쩌면 사소한 정치적 실수에도 목숨을 버리는데, 대다수의 탐욕스런 정치가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탐욕의 크기가 커질수록 인기가 높아지는 비극적인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적과의 싸움’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매력이 사라진 지금의 정치판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토록 오랫동안 학습했던 ‘시민적 자유’의 가치와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핵심을 상실하고 있는 것일까? 짜증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현재의 정치판의 진행 속에 개봉된 <노회찬, 6411>은 우리에게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와 가치를 상기시키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인은 ‘적’을 깨부수는 킬러가 아니라,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고 포용하면서 공동체의 궁극적인 발전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노회찬의 순수하지만 치열했던 미소가 그립다.
첫댓글 죽음 후의 이야기라 씁쓸한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