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지금도 나의 어머니께서 살고 계시는 내 고향 집 주소는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197 번지'이다.
번지수만 약간씩 바뀌었지 이 동네에서 450 여년 넘게 살아오고 있다. 또 우리 문중의 선산이 있는 곳이다.
수야리는 다섯 개의 작은 마을이 모여서 전체로는 300 호가 넘는 꽤나 큰 마을이었지만
최근에는 여느 다른 시골마을처럼 폐가도 생기고 오래 전 부터 인구 수도 많이 줄어가고 있다.
동네 뒤, 높은 산을 양 옆으로 끼고있는 큰 저수지는 郡內에서도 그 규모가 제일 커서 군 전체의
농업용수 공급에 지대한 역할을 요즘도 하고있다. 나의 아버지께서 청년의 젊은 시절에 이 저수지 공사의 현장
중간 책임자로서 열심히 일 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알고있다. 아마도 내 아버지께서는 큰 키에 힘도 장사이고 집단 통솔력도 있어서 그런 직책을 맡지 않았겠나 싶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6.25 전쟁 때에는 내 아버지께서 총 한 자루도 없이 동네 전체를 지키는 방공(防共)대장으로서의 일도 많이 하셨다고, 그 힘들었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도 들어서 알고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의 동네친구들도 밤만 되면 내 아버지의 적이 되어 나의 아버지를 잡으러 다녔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늘 그들의 공격 대상이었다고 하였는 데, 그 이유는 백부님이 당시에 현직 경찰이셨고 큰 집 큰 형님이 면에 다니는 공무원이었으며 아버지는 지역 방위대장 이었기 때문에 속칭 좌익 인사들에게는 당연히 눈엣가시인 셈이었다. 결국엔 어느 조상님 제삿 날 저녁에 동네에서 자생한 동네 빨갱이들 한테 나의 종조부님께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집에 불을 지를려는 잘 아는 동네 빨갱이를 제지하는 내 할머니의 어깨를 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어 평생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무서운 게 사상을 달리 한다는 것이라는 것도 그때 들어서 알게 되었다. 6.25전쟁 얘기 때문에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러간 것 같다.
세월은 흘러 내 고향 마을에도 개발의 붐이 일어났다. 골프장 건설로 온 동네사람들 끼리 잠시나마 서로 반목.질시하고 아웅다웅하다가 종국에는 젊은 한 사람이 감옥까지 가는 일이 있은 다음에야 겨우 끝이 났단다. 모든 게 돈 때문에 생긴 일이란다.골프장을 만들면서 기존의 길을 넓히고 포장도하여 동민의 생활여건은 다소 좋아졌지만 안 좋은 점도 많다. 승용차가 너무 많이, 그것도 벤즈,BMW같은 외제차 까지 다녀 동민들이 길 나서기가 겁이 난단다. 무서울 정도로 내 달리니까 특히 노인들이 겁이 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나도 걱정이다. 우리 집에서는 가까운 거리에 골프장 정문이 있어 어머니가 동네 마실 나가기도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안부전화할 때마다 묻는 게 길 안부이다. 2km 떨어진, 농협 마트 가는 길 조심하라는 말- 쉬엄 쉬엄 운동삼아 걷고, 길 한 쪽으로, 자주 앞.뒤 잘 살피고, 또 지팡이는 꼭 챙기라고 말이다.- 잠깐, 여기서 청도가 어디 있는지 혹시 모르시는 친구들을 위하여 쉽게 경부선 기찻 길을 따라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경부선 하행선,동대구역 - 경산 - 청도 - 밀양 - 삼랑진 -----부산역에 도착하는 비교적으로 서울에선 먼 곳에 있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수 년전엔 대구 - 부산간 민자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이 곳을 지나가고 있다.
원래의 내 고향 淸道는 요즘과는 많이 다른 고장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감의 고장- 씨 없는 단감, 잘 생긴 청도반시 등' 또 '소 싸움의 고장 청도' '청도 복숭아의 주산지' 정도일 줄로 안다. 원래 청도는 이서고국(伊西古國)의 옛 터전이요, 花郞道 정신의 發祥地이다. 그리고 근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가 청도인것도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삼한시대 이서국의 옛 터전이었던 청도는 예로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인심순후(人心淳厚)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던 고장이며, 가지산, 운문산, 비슬산, 화악산 등의 名山에 둘러 싸여 어떤 가뭄과 재난도 피해가는 福 祿의 勝地로 알려진 고장이다. 옛날부터 큰 비도 안 오고 폭설도, 혹한도 안 찾아 오는 곳이다. 또 다 아는 얘기지만 6.25전쟁 때에는 내 고향 청도~밀양~부산으로 좁다랗게 이어지는 곳들이 전 국민의 유일한 피난처이기도 했었다. 특히 내 고향 淸道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화랑정신이 태동한 곳으로 골짜기마다 운문사를 비롯한 명승고찰과 화랑유적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런연유로 정부로부터 화랑도정신의 계승.발전과 관련한 지자체 사업자금을 국고로 지원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대단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또한 청도는 조선시대 이래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을 연마하던 嶺 南 士 林의 本 고장으로도 이름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탁영 김일손 선생의 자계서원을 비롯한 여러곳의 서원과 서당들, 그리고 당시의 중등교육기관 정도인 향교 활동도 타 지역에 비해 많이 번성하였던 고장이었다.
청도의 古 稱, 대성군(大城郡)은 큰 城을 말 하는 것으로 곧 이서국을 가리킨 것이다. 오늘날의 도주(道州) 또는 청도라함은 中世의 일인데 이는 산자수명하여 산수정령(山水精靈)이 인걸을 낳게하고 四通五達된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향민의 생활이 평화로운 낙원이라 하여 '도주' 또는 '청도'라 하였는데 청도란 이름은 고려 때부터 문헌에 나타나 있다. 산수정령이라서 그런지 건국이후 우리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인물도 많이 배출하였다. 역사학자를 포함한 학계,실물경제 학자, 법조계, 군인 그리고 문화계 인사까지도 많이 출세시킨 고장이다.
어느 누구라도 자기 고향에 대해 애착이 없겠으며, 믿고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마는 나 또한 그렇다.
늘 고향이 그립고 고향 사람들이 보고싶다. 내가 그럴만한 입장에만 있다면, 즉, 재력적인 여유만 된다면 나의 고향마을을 위하는 데에 많은 정성을 쏟고싶다. 머지않아 봄이 오겠지. 고향 마을앞 넓은 들녘, 보리 밭 이랑에서부터 아지랑이 피어 나겠지.그 옛날,뒷 산 진달래 꽃 핀 하늘 위에 떠 있던 이상한 무지개도 지금에 와서 그립다. 어린시절의 내 고향이 다시 생각난다.소년시절 산에 올라 질렀던 '야 ~호~', 단짝을 기다렸던가 온 산이 '야~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야~호~' '야~호~' 하며 되 돌아왔다. 내 고향 이야기 하다가 잠시 私心이 발동한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말이다. 내 어머니 생각이 문득 홀연해져서 그런다. 아직은 겨울인데 차갑고 외로운 긴 밤을 홀로 지샐 걸 생각하면 내 마음 많이 아린다.
나는 내 고향 청도를 사랑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