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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정구(寒岡鄭逑)선생과 노(老)제자 구전김중청(句全金中淸)의 만남
김 주 한(金 冑 漢) : 전 대구광역시장 비서실장
Ⅰ 들어가는 말
한강선생(寒岡先生)에 관심을 가진 것은 3년 전 뜻있는 분들이 한강학회를 창간하려는 첫 모임행사에 김범일(金範鎰)대구광역시장 초청을 위하여 찾아오신 후예(문목공대종회 정재담/鄭在聃회장 등)들과 말씀을 나누는 과정에서 본 필자의 중시조께서 한강선생(寒岡先生)의 제자 문인록(門人錄)에 기록된 것을 보고 구전문집을 뒤져 한강선생(寒岡先生)과 관련된 내용들을 발췌하여 세상에 알리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라 생각되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은 한강선생(寒岡先生)의 문목공대종회에서 편찬한 일기와 필자의 12대 조부인 구전(김중청, 안동인)선생문집을 기초하여 재구성 하였다.
1. 한강선생(寒岡先生)의 행장 개요
먼저 한강선생(寒岡先生)의 일대기를 개괄하여보면 선생께서는 1543년(중종38년) 7월9일 지금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에서 탄생하셨으며, 관향은 서원(淸州의 옛 지명)이고 원래 조상들은 서울에 사셨는데, 할아버지가 한원당 김굉필선생의 사위이고, 아버지는 판서공 정사중(鄭思中)이며 한강선생(寒岡先生)의 외가가 성주이씨로 현풍에 살아 이곳 성주와 인연을 맺고 살게 되었다.
또한 1563년 한강선생(寒岡先生) 21세에 칠곡에 광주이씨(光州李氏)와 혼인함으로 칠곡과 성주지역에서 말년을 보내시는 계기가 되었다. 퇴계 이황선생과 남명 조식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1552년(명종7년)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의 추천으로 주부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공부에만 정진하셨으며, 선조 때 수찬인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이 천거하여 1580년(선조13년) 창녕현감에 나가셨다. 후일 함안군수, 통천군수, 강릉대도호부사, 강원도관찰사, 성천도회부사, 형조참판, 충주목사를 지내시고 62세 때 성주 서쪽 수도산에 무흘정사를 지어 저술과 제자를 가르침에 힘을 써오다가 65세 되시던 해인 1607년에 안동 대도호부사로 부임하셔 1년도 못 계시는 시간을 보내시고, 66세 에는 대사헌, 형조참판 벼슬을 끝으로 지금 행정구역인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과 사수동에 칩거하였다.
1620년(경신년, 광해12년)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정월 초5일 아침에 가례회통(家禮會通)을 열람하고 제명(題名)을 고치기를 의논하다가 유시(酉時)에 사수동 사양정사(泗陽亭舍) 지경제(持敬齊)에서 고종(考終)하시고, 인조반정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성주 동강서원(東岡書院),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 성주 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 학령서원(鶴翎書院), 통천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고, 저서로 한강집, 성현풍(聖賢風), 태극문변(太極問辨),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무이지(武夷志),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 와룡지(臥龍志), 역대기년(歷代紀年), 고문회수(古文會粹), 경현속록(景賢續錄), 관의(冠儀), 혼의(婚儀), 장의(葬儀), 계의(稧儀), 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2. 제자 구전 김중청(句全 金中淸)의 행장개요
다음은 제자 구전(句全)의 일대기를 개괄하여보면 제자 김중청의 자는 이화(而和), 호(號)는 구전(苟全)또는 만퇴(晩退),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1566년(丙寅年 병인년, 명종21) 봉화현(奉化縣) 절충첨지중추부사(折衝僉知中樞府使) 몽호(夢虎)와 나주박씨(羅州朴氏, 忠義衛 朴承仁의 딸) 부인의 장남으로 태어나 1629(인조 7)돌아가셨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정랑을 역임하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면직되고,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에 이어 승정원 승지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고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 되었으나. 서원철폐령(1868년)에 훼철 되었다가 최근 2006년도 봉화지역 유림에서 송록서원을 건립 배향하였으며, 구전문집(苟全文集)이 있다.
구전(苟全)의 5대 조부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정헌공(定獻公)이며,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과는 12촌(寸)이다. 구전(苟全) 27세 때인 임진년(壬辰年)4월에 난으로 여러 주군(州郡)들이 함락되자 백의(白衣)로 여러 고을의 선비들과 창의(倡義)하여 같은 조목(趙穆) 월천문인(月川門人)인 유종개(柳宗介)가 이끄는 봉화의진(奉化義陣)에 참모(參謀)로 참전(參戰)하였고, 임란이 끝나고 국가 차원의 포상(褒賞)이 있을 때도 백성의 도리를 다했다고 하며, 자신의 행적(行績)을 밝히지 않고, 상훈을 사양하였으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시대별로 구분해보면 8세부터 21세까지는 소고 박승임 선생의 문하에서 기초 학문을 닦고, 12세부터 41세까지는 조월천 선생의 문하에서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의 정수(精髓)를 받았으며, 월천 선생이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인 42세부터 55세까지는 정한강(鄭寒岡) 선생 문하에서 심학(心學)과 예학(禮學)을 심화(深化) 학습하였다고 구전문집(苟全文集)에 기록되어 있다.
Ⅱ 늦은 첫 만남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65세에 안동 대도호부사로 부임을 하신 때는 1607년(선조40년)으로 제자인 구전김중청(句全金中淸)은 42세로, 4월에 대도호부사인 한강정구선생(寒岡 鄭逑先生)을 안동에서 뵈었다고 구전문집(句全文集)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한강선생의 연세 65세이며 첫 만남을 한 구전(句全) 또한 42세로 아직까지 과거를 하지 못한 백면서생의 상태였고 한강선생(寒岡先生)은 노련한 고급관리이자 대학자였다.
당시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는 안동대도호부에 부임하시자 바로 지역을 위하여 인재육성을 강조하시고 안동부(安東府)내의 여러 고을 선비들을 모아 심경(心經)을 강독(講讀) 하였으므로 구전문집에 보면 구전김중청(句全金中淸)이 찾아가 뵙고 그날부터 머물면서 배움의 길을 택하였다. 한강선생(寒岡先生)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3월에 부임하여 11월에 사임하였으므로 실로 짧은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김중청(金中淸)은 처음 만남부터 사임하시는 그날까지 계속 머물면서 사제의 연을 맺었다. 한강선생께서 부임 후 월여(月餘)가 지난 4월 한가한 날 문생들과 함께 청량산에 기행 하다가 치원암(致遠庵)에 이르러 벽 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께서 손수 쓰신 글을 보면서 암자가 너무 허술하여 중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초보 제자인 구전(句全)께 중수를 위한 시주를 권하는 글을 지으시라는 하명을 받들어 글을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강선생(寒岡先生)이 명하여 치원암을 중수하는데 시주를 권하는 글(구전선생문집293p)
한강선생(寒岡先生)이 안동에 부임한 4월에 한가한 날을 틈타 청량산에 올랐는데, 선사이신 퇴도(퇴계) 이선생의 유적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의 산봉우리와 절, 그리고 조그마한 풀이나 한조각의 돌도 모두 선사께서 일찍이 유람하여 글을 읊으신 대상이었으니, 그 감격스럽고 추모하는 깊은 정은 진실로 이미 그렇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런데 치원암의 벽 위에 선사 및 당시 문생 십수 명의 성(姓)과 자(字)를 우러러보며, 그것이 선사(퇴계)께서 손수 쓰신 글임을 알 수 있는데 이르러서는 마침내 옷깃을 여미고 공경을 표하고 인해서 한참동안 슬퍼하였다. 이윽고 탄식하기를, “우리 선사(퇴계)께서 여기에다 글을 쓰신지 벌써 44년이 되었고, 또 돌아 가신지도 38년이 되었다. 그런데 오래된 벽에 남기신 글씨가 오히려 태양과 별처럼 빛이나 늠름하게 대면하여 음성을 받드는 것 같으니 이번에 와서 얻은 바가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다만 암자를 비워 둔지 이미 오래 되어 비바람에 씻기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부러지려고 하며 형세가 장차 무너질 것 같다. 만약 지금 수리하여 예전처럼 복구하지 않는다면 선사(퇴계)께서 손수 쓰신 필적 또한 암자를 따라서 없어져 후학들에게 감격을 일으키게 할 자료가 없게 될까 매우 두렵고, 우리의 뒤를 이어 이 청량산을 유람하는 자 또한 앞으로 무었을 얻을 수 있겠는가? 뜻을 같이하는 우리 무리가 어찌 이 암자(최치원암)를 중창하여 선사를 한없이 존경하는 바탕으로 삼기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시므로 종유(從遊) 하던 5,6인이 모두 두 번 절하며 사례하였다.
인해서 이 일을 주관할 일훈(一勳)이란 이름의 중을 추천하여 화주(化主: 어떤 일을 맡아서 행하는 자)로 삼았다. 이에 한강선생이 중청(中淸)에게 명하여 한편의 글을 짓되 불가에서 권연(보시하기를 권함)하는 사례와 같이하여 중 일훈에게 넘겨주어 그로 하여금 벽에 쓰인 문인들의 후손 및 다른 후생으로 선현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재물을 구걸하여 그 일을 이루도록 하였다.
아! 한강선생(寒岡先生)의 스승이신 퇴계선생에 대한 그 지극한 존경심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이 거사가 어찌 구구한 하나의 암자에 관한 것이라고 말 하겠는가?
모든 우리의 가까운 이웃 사림들이 만약 이 뜻을 잘 이해하여 얼마의 쌀이나 베를 기부하여 조금이라도 돕는다면 역시 한강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 致遠庵重修勸牓
寒岡先生、、莅安東之四月乗暇日來、登淸凉山、爲訪先師退陶李先生遺迹也。見其峯巒、寺刹、寸草、片石、蓋皆先師之所嘗遊詠、則其激感追慕、之深固已無
所不然、而至於致遠庵壁上、仰觀先師及一時門生十數人姓字、知其爲先師手筆、則遂歛袵起敬、仍爲之愴然、艮久、旣而歎曰我先師之題于此、于今四十四年、歿又三十八年之久、而古壁遺墨、尙如日星、凛乎若面承警咳、今來所得、豈復有大於此也。但庵空已久、風雨飄揺、樑椽欲摧、勢將頹顚、若不及今修作、則深懼先師手迹亦且隨庵而泯滅無以起後學之感、而繼我遊此山者、又將何所得焉。爲吾輩者、盍謀所以重創是庵爲尊敬無竆之地耶從遊五六人皆再拜謝、因薦可幹僧一勳名者、爲化主、於是先生命
中淸、作一文字、如僧家勸緣之例、付諸勳師、令乞貨於所題門人後裔及他後生之慕先賢者、以成其事、噫寒岡之於退陶、其尊敬之至此可見矣今兹之舉豈爲區區一僧舎云乎哉。凡我近隣士林、若能見得此意、捐出米布若干、以扶萬一、則亦可謂寒岡之徒也已。
이 처럼 첫 만남부터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는 구전(句全)김중청(金中淸)에 대하는 것이 남달랐으며 사제로서의 자애로움을 보인 면을 볼 수 있다.
한강선생(寒岡先生)께 가르침을 받아 1609년(기유년)에 구전(句全) 김중청(金中淸)이 44세 되던 해 가을에 풍기 동당의 종장에 1등으로 합격 하였고, 45세인 1610년 경술년(광해2년) 이듬해 봄 명경복시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전례대로 정7품인 한성부 참군에 임명되었다. 이 짧은 만남이 대학자와 중년의 서생이 말년까지 같이하는 끈끈한 사제관계로 이루어진다.
그 한 예로 1607년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처음 만나 스승으로 모신지 7년후 인 1614년(갑인년) 광해 6년 구전김중청(句全金中淸)이 49세 되던 해 4월21일에 명나라의 천추사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허균을 정사로 하여 한양을 출발하여 7월에 명나라 수도인 북경에 도착하다.
8월에 명나라 황제에게 하례 하고 연회는 사양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시 사양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당시 태후의 장례를 겨우 치룬 상태로 우리나라에서 진위사가 한 달여 뒤에 출발하였으나 함께 예부에 도착하여있는 상태였다.
제자 구전(句全)의 행렬은 천추사로 길례에 해당하여 황제가 연회를 배 풀도록 영을 내렸으나 조선에서 바로 뒤따라 명나라 태후의 상을 당해 조문하는 진위사가 오므로 연회를 사양하는 글을 2번이나 올려 연회를 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세마 이광정은 구전(句全)이 이때부터 한강선생(寒岡先生)의 예학의 순수함을 물려받았다고 행장에서 밝힌바 있다.
Ⅲ 사수(泗水)에서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62세 되던 해인 1604년(선조37년) 성주 고을 서쪽 수도산(修道山)중에 무흘정사(武屹亭舍)를 짓고 7, 8년 동안 학문에 정진하시며 후학을 가르키시다가 65세 되던 해 인 1607년(선조40년) 3월에 안동 도호부사를 제수 받아 그해 11월까지 근무하고, 66세에 대사헌, 형조참판 벼슬을 끝으로 칩거하였다는 내용은 앞에서 밝힌바 있다.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칩거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과 함께 남명 조식(南溟 曺植)선생 문하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인데 정인홍(鄭仁弘)이 남명(南溟)선생의 문집을 독단적으로 편찬하여 문집을 왜곡 시키는 등의 갈등 때문에 예학에 밝은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는 61세 때인 1603년(선조36년)부터 절교한 사이었으며 또 다른 이유로는 정인홍은 광해군의 혼정을 부채질한 사람이기에 그를 멀리 하고자 하였다.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말년인 70세 되던 해에 노구를 이끄시고 1612년 성주 무흘정사에서 팔거현 노곡(1914년 이전에는 칠곡군 노곡면 지역 이였으나 왜관읍에 편입되었으며, 洛東江(낙동강)과 錦舞山(금무산)의 이름을 따 洛山里(낙산리)라 하고 있음..)에 노곡정사(蘆谷亭舍)를 지어 이사하였다.
선생께서 72세 되던 해인 1614년 이사한지 2년만(광해 6년)에 노곡정사가 화재로 평생 동안 저술한 서책은 거의 타고 말았다. 이후 1617년(광해9년) 선생 75세 되던 해에 사수벌에 몇 칸 집을 짓고 사양정사(泗陽亭舍)라 이름 짓고 선생의 호(號)도 사양병수(泗陽病叟)라고 하였다고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이곳은 지금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 금호․사수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현재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며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한강공원(寒岡公園) 1만2천평을 조성하여 인물 동산도 만들고 조그마한 정자도 짓는다고 한다. 이 사양정사는 후일 효종5년 (1651)에 사양서원으로 승격하였으며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석담(石潭)이윤우(李潤雨)를 배향 (配享)하였으나 숙종20년 (1694)에 현재 칠곡군 지천면 신리43-1번지(웃갓)로 이건하였다. 당시에는 묘우 (廟宇)와 강당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고종5년 (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지금의 강당인 경희당만 남아있으며 석담의 후예인 광주이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사수(泗水)는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말년을 보내신 곳으로, 넓은 들이 펼쳐 있고 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앞엔 금호강이 흘러 이곳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주자(朱子)가 살던 중국 신안(新安)에도 서쪽에 이천(伊川)있고 동쪽 낙강(洛江)으로 흘러들고 있는 것처럼, 이곳 달성(당시 달성군에 속함)에도 북쪽에 사수가 있어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모이니 옛 사람이 성산(星山)향교(鄕校)누각(樓閣)에 제(題)한 “이천(伊川)은 흘러 사수(泗水)와 이어진다는 말과 일치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Ⅳ 선생(先生)의 말년 만남과 이별
제자 구전(句全)은 1615년(을묘, 광해7년) 9월 정언으로 근무 할 때 경상우도 시관(試官)으로 차출되어 내려가는 길에 한강선생(寒岡先生)을 뵐 때가 73세였는데 이 해 5월에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중풍으로 오른 쪽이 불편한 모습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고 한다.
임무를 마치고 귀경하니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彈劾)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다가, 박이립(朴而立)이 무고하여 중죄를 내리기를 청했으나 광해군이 불문에 처하여 구전(句全)은 면직되었다.
이렇게 예의에 어긋나는 정인홍에게 과감히 거절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선생(先生)의 예학을 전수받은 결과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대북파 들에 의하여 죄도 없이 면직된 구전(句全)에게 다시 직책을 주어야 하므로 이듬해인 1616년 (병진년, 광해8년) 신안현감(新安縣監)이라는 자리를 주었다.
요즘 말로 하면 중앙정부에서 밉게 보인 결과 다스리기 어려운 신안 고을을 맡겼다.
현감(縣監)은 보통 5품의 벼슬을 가진 자가 하는 자리지만 당시 구전(句全)은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로 품계에 맞는 자리는 아니었으나 왕명이었으므로 구전(句全)이 51세 되던 해 1월 11일에 서울을 떠나 21일에 신안현감(新安縣監)으로 임지에 부임하였다.
여기서 신안현(新安縣)에 대하여 간단하게 알아보면, 조선시대에 들어서 태종 때 군현제 개편 시 성주목(星州牧)이었다. 그러나 1614~23년에 신안현(新安縣)으로, 1631~40년에 성산현(星山縣)으로 강등되기도 하였으며, 지방제도 개편에 의해 1895년에 대구부 성주군으로 되었다가 1896년에 경상북도 성주군이 되었다.
사마 이광정이 쓴 구전의 행장에 보면 신안현(新安縣)은 원래 성주목(星州牧) 이었으나 그 고을 사람 이창조가 역적모의에 연좌되어 처형되었으므로 고을(州)이 현(縣)으로 1614년부터 10년간 강등되었던 기간이다.
따라서 실제는 고을 규모나 역할은 목(牧)의 수준이었고 현감으로 간 구전(句全) 역시 3품의 벼슬로 다스리기가 매우 어려운 곳에 부임 하였으나 구전(句全)이 날마다 조복을 입고 정무에 임하며, 또 스승인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성주(星州)고을에서 깊은 식견과 고매한 인품을 가진 분으로 덕행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부임하자 즉시 찾아뵙고 선생(先生)의 예학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정사에 임하니 고을 백성들도 모두 따랐다고 한다.
구전(句全)은 1616년 1월 21일 신안현(新安縣)에 부임하면서 먼저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찾아뵈었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구전(句全)이 생도로 있을 때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안동부사로 근무 시 그 문하에 사제의 연을 맺은 관계는 이미알고 있다.
또 인근 합천 출신 정인홍이 비록 절교는 하였지만 남명 조식(南溟 曺植)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한강선생(寒岡先生)을 해치려고 다시 이창조의 역모사건을 가지고 모함하여 없는 죄를 꾸며서 고변하는 문안을 만들려고 그의 조카 정담이라는 자를 보내어 신안현감(新安縣監)인 구전(句全)을 협박하여 관찰사에게 비밀리 보고 하게 하였는데 이에 동요하지 않고 저지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는 구전(句全)의 정신적 지주이자 말년에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성주목(星州牧)이 현(縣)으로 강등 되므로 고을 백성을 다스리기에 예학에 밝은 수령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예학의 정수를 한강(寒岡)께 사사 받은 구전(句全)이 중앙정부에서 보았을 때는 요즘 말로 적재적소에 배치되었다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예학의 정신적 지주인 한강께서 말년을 보내셨던 사수가 지근거리에 있으므로 한층 더 사제의 관계가 깊었으리라 생각된다.
신안현감 구전(句全)이 매월 한강선생에게 문안을 드리고 가르침을 받은 내용들을 구전문집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구전문집에 보면 부임 1달 후인 2월에 전례대로 휴가를 내어 부모님에 살고계시는 봉화현(奉化懸)으로 가는 길에 한강선생(寒岡先生)과 권희곡(權晦谷)선생을 찾아뵈었다는 기록과, 같은 해 8월에는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 사직단에 제사를 지낸 다음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찾아뵙고 천곡서원(川谷書院)의 향례에 참석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1617년(정사년, 광해9)에는 신안현감(新安縣監)인 제자 구전(句全)이 52세 되던 해 5월 봉화에 계신 아버지의 생신에 장수를 비는 주연을 마련하고 돌아오는 길 인 6월에 사수(泗水)에서 우거하시면서 사양정사를 짓고 계신 한강선생(寒岡先生)을 뵈었다.
같은 해 10월에 사수에 가서 한강선생(寒岡先生)을 뵈옵고 지나는 길에 장여헌을 방문하였다. 또 그해 12월에 순영(관찰사의 집무장소)을 갔다가 지나는 길에 또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찾아뵈었다.
더욱이 1618년(무오년, 광해 10년)에는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구전(句全)이 근무하고 있는 신안현(新安縣)에 다녀가셨으며, 그해 3월에는 사수에 선생(先生)을 찾아뵈었고 향당(鄕堂/향교에 딸린 방)에서 함께 유숙하시며 소고 박승임의 언행록의 초를 잡았다.
같은 해 4월에 순영에 갔다가 지나는 길에 사수에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찾아뵈었다.
이때 최현도 와있어 돌아오는 길에 사수에 들러 자고, 경상도관찰사 윤훤 공과 함께 주연을 베풀었다.
6월에 경상도관찰사 윤훤 공이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나가서 접대하고 지나는 길에 사수의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찾아뵈었고, 10월에서 12월까지 4차례나 사수에 선생을 뵈었고 석담과 함께 유숙하였다.
1619년(기미년, 광해11년) 1월에 해가 바뀌어 사수에 가서 한강선생(寒岡先生)을 뵈었다. 휴가를 얻어 어버이의 장수를 비는 주연을 마련하였는데 통정대부(堂上官으로 정3품임)로 승급하였기 때문이다.
그해 3월에 다시 찾아가서 소고(嘯皐)의 묘갈명(墓碣銘)을 검토해 주기를 청하고 석담과 함께 유숙하였다.
4월에 사수에 가서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찾아뵙고 최계승(현)과 이무백(석담/이윤우)과 함께 유숙하였다.
또 그해 7월 16일에 한강선생을 모시고 부강정(浮江亭)아래서 배를 띄워 울산으로 봉산욕행(蓬山浴行) 떠나는 선생을 배에서 전송하며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배가 남쪽으로 떠나려 하므로 새벽에 일어나 말을 타고 달려가
선생이 바닷길로 떠나심을 전송 하였네
많은 사연 가득 싣고 돌아오는 노가 빠를 터인데
언언이 처럼 성에 매여 있는 자신이 가련 하구려
(원문)十六日舟送寒岡先生蔚山行
船南走馬趁鷄鳴、爲送先生海上行。滿載三千歸棹疾、自憐言偃縶孤城。
7월 20일 지암을 출발한 정구 일행은 부강정(浮江亭)을 지나 금강 앞 여울에서 아침을 먹고 원당포(元堂浦)를 지나 노다암(老多巖)에서 이로․ 이서 등 10여명의 인사들과 만나 잠시 배를 멈추고 이들과 간단한 술자리를 가진 뒤 하행하게 된다.
이때 신안현감 이던 김중청(金中淸)이 병으로 직접 영접치 못하는 대신 이윤우에게 시를 보내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전해 왔다.
이에 정구는 편지를 보내 성의에 답하였고, 이윤우 등 10인[李彦英․ 盧世厚․ 이서․ 李潤雨․ 盧垓․ 李道長․ 李天封․ 李蘭貴․ 裵尙龍․ 李堉]은 주중에서 화답시를 지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주상시회(舟上詩會)’로 이어져 출범을 자축하게 된다.
이 날 오후 덕산을 지나 저물녁에 쌍산의 수문에서 이언영과 작별한 일행은 영파정을 지나 도동서원에서 첫날밤을 묵었다.
이튿날인 7월 22일 정구 일행은 출범 때부터 동행했던 곽영희․이명룡 등과 헤어진 뒤 고령의 어목․ 부래정을 지나 초저녁에 창녕 경계의 우산촌가에서 유숙하게 된다.
지암에서 우산촌가에 이르는 물길 200리 동안 정구 일행은 부강정․ 노다암․ 영파정․ 도동서원․ 어목정․ 부래정을 지나왔는데, 이곳은 일찍이 정구가 유람․ 경유한 ‘강안문화(江岸文化)’의 거점들로서 대부분 한강문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역사, 문화적 공간 들이었다.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봉래에 목욕을 하러 떠나실 때 이석담(李石潭/李潤雨), 승지(承旨) 이언영, 이평사 탁 그리고 구전(句全)의 아들 주우와 함께 가시는데 우암 아래서 전송하면서 석담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는 기록되어있다.
친구인 이무백(석담) 제군이 사로(한강선생)를 모시고 봉래에 목욕하러 가는데 석담에게 장난삼아 농담으로 써준 시의 내용은(구전문집171p) 다음과 같다.
“소미성(사대부에 속하는 별의 이름)의 빛이 정수 궤도에 비치는 가을에 노나라 늙은이가 어찌 바다놀이를 사양하랴? 나도 말미가 있으면 따르려 했는데 지금 병으로 누웠으니, 다른 번지(공자의 제자로 공자가 타시는 수레를 몬 적이 있음)의 무리들이 말 옆에서 모시고 가는 것이 부럽도다.”하였다.
(원문)李茂伯諸君陪泗老作蓬菜浴行用前韻戱寄
少徴光耀井躔秋(소미광요정전추)、魯叟寧辭海上遊(노수영사해상유)
從我有由今卧雍(종아유유령와병)、羨他遅軰御驂頭(선타지배어참두)
또, 성주군 수륜면 오암서당에서 간행한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1974년)에 보아도 늦게 만난 제자와 스승은 말년까지 아름다운 사제의 연을 가지고 있었으며 구전(句全)의 3째 아들인 주우(출입문인)도 아버지 구전(왕래문인)과 함께 문인록에 등제되어 있으며 만사가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구전문집(句全文集)의 기록으로 보아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봉래에 가시는 길에 구전(句全)의 아들인 주우(柱宇)께서도 동행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이 해 한강선생(寒岡先生)연보를 보면 봉래(현재 부산시 동래구 온천2동으로 조선시대 자연 온천지역임)로 6월 16일 목욕 가는 길에 도동원사(院祠)와 김해에 있는 신산원사를 두루 참배하였다.
7월에 울산 초정과 동래온천에 머물고 창원해정(海停)에서 조섭하고 10월에 돌아오셨다.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이러시며 다니시는 중 8월에 신안현감인 구전(句全)은 중앙정부인 조정에서 대간(臺諫)의 비평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즉시 사표를 내고 고향인 봉화현으로 돌아왔는데,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는 10월에야 봉래에서 사수로 돌아 오셨다.
선생(先生)께서 보내신 편지에는 “주민들이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들이 잘못을 구전의 잘못을 임금에게 보고하여 그 사실을 조사하기 전에는 다른 고을의 경우에는 수령이 업무 처리하기를 그대로 태연하게 하는데” 구전은 관아를 비워두고 홀로 떠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 편지에 대하여 답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한강선생(寒岡先生)께 답하는 글(구전선생문집 p274)
며칠 전에 고을사람이 돌아가는 편에 편지를 올렸는데 지금쯤은 이미 받아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삼가 하서(下書)를 받고야 온천에서 돌아 오셨음을 알았으며 체후(體候)도 신의 도움으로 만복하십니까? 별지(別紙)로 가르침을 주셨는데 삼가 감격스러움을 우러러 비유할 수 없습니다. 중청(구전(句全))은 대간의 탄핵을 받을 대상에 끼인 죄기에 서릿발 같은 위엄에 질려 잘못 생각하기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바야흐로 떨어졌으며 또 스스로 죄가 없다는 것도 감히 기필하지 못할 입장이니, 허위와 진실을 조사하여 경중으로 조치하는 것은 저를 출척(黜陟/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올리어 씀)하는데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단지 처벌을 기다리는 사람같이 되어 거취를 자기소신대로 하는 사람의 행동과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서 인부를 풀어 빈 고을에다 버려두고 돌아 와 버렸으니 아마도 큰 실수를 한 듯 합니다. 우선 근친(覲親)휴가를 상신하고 고향으로 물러가 엎드리고 있다가 조사가 끝난 뒤에 죄가 있다고 여겨 죄를 주면 그 죄를 인정하고, 죄가 없다고 인정되면 병으로 자신이 사면 상신하기를 전례대로 하며, 또한 조용히 공무나 사무를 처리하여도 적합하지 않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여 하인을 되돌려 보내려하니 그의 말이 인부(印府/관인(官印))가 여기 있으므로 감히 물러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억지로 보내려하면 저들 또 한 가지 않겠다고 하여, 마침내는 3. 4명이 머물게 됨을 모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벌써 매우 죄송한 일입니다.
그런데 조사결과를 아뢰는 일이 두어 달 동안이나 지연되었으며, 또 서울에서 온 편지를 보았더니 해조(該曹/관장부서, 여기서는 이조)에 보고하니 그대로 유임시키라는 명령이 있었고, 조사하지 않은 부분은 중지토록 하였다고 하니 이 말을 듣고부터 더욱 놀랍고 송구스러웠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니 비록 고을을 버려둔 형률은 자복한다 하더라도 지금 와서는 모면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므로 두번 세번 그 전 사자(使者)에게 모람되게 간청하여 계달(임금에게 의견을 아룀)할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필경에는 장(臟)과 고을을 멋대로 버려둔 법을 한 몸에 아울러 논의하지 않는다고 기필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신안고을에 대해서는 전임이라는 한 전(前)자를 얻게 되어 인부를 되돌려 주는 것이 적당하다고 이미 결정하였으니 어찌 중청에게는 불행한 가운데 지극한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때의 비방하는 말들은 어금니와 입술을 깨물어 진실로 하나하나 생각을 동요하게 할 수는 없었으나, 인부를 지금까지 돌려보내지 않으니 정말로 벌써 자신의 마음에도 타당하다고 하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어찌 외간의 떠들썩한 말들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사리에 어두워 깨닫지 못한 것도 아니고, 또한 한 고을의 수령자리를 탐내고 연연해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꼿꼿이 앉아 있노라니 일의 익숙하지 못함이 염려되며 두루 해보려고 하다가 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뜻이 일어나 도리어 미혹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 곁에서 구경하는 자들은 기꺼이 나를 용서하려고 하겠습니까? 유독 경상우도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곳에도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우가 보내준 편지는 특별히 서로 아끼는 인정에서 나온 것인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인편이 드물어 그렇게 늦어졌던 것입니다. 이미 파면하도록 계달하는 가운데 있고 향소(鄕所)의 공형(公兄: 호장, 이방, 수형리)도 아직 받들고 가는 것을 아끼고 있으니 매우 이상하게 여길 만 합니다. 나머지 많고 적은 일들은 조만간 문하에 진배하는 날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이렇게 갖추지 못합니다.
(원문) 答寒岡先生書
日者、因縣人歸、上簡、想今已獲關聽矣。伏承下書、仍審浴還、體履神相萬福、別紙下敎、竊㐲感戢、無以仰喩、中清被叅之初、怯於霜威、謬慮以爲、查命方下、未枝自必其無罪、虛實其覈、輕重其處、固在於黜陟、我者、當是時、只爲待罪人、非如去就由已者之比、悻悻解却印符、委置空縣而歸、恐爲失中又失、姑呈覲由、退㐲家鄕、旣查之後謂、有罪罪之、則服其罪、否則呈病自免如例、亦或從容、以公以私、禾爲不冝矣。及到家還、其下人則乃曰、印符在此、不敢退去、我強而渠亦強、卒未免三四人之留、已是未安之甚、而敫啓之
稽廷、至䦎兩箇月、又得洛下書、因該曺啓禀有司、仼之命而以未查還止云、自聞此言、㔫極驚懷、於是思之、尉壁服棄官之律、不如及今圖免之爲愈也。故再三冒懇于舊使、獲蒙啓處、畢竟贜與擅棄之典、未之不並議於一身、而得一前字、於新邑、已决印符之當還岌、奉中清不辜中至幸耶。此時齒舌面不可一一動念、而印符之至今未還、果已未妥、於日家心、豈無外間之紛紜、然實非昏然、不覺亦非、貪戀一縣官者也。而正坐慮事生踈欲周、未周私意起而反惑之耳。佊傍觀者、其肯爲我恕否、不獨江右爲然、此間亦
有云者、李友之示、特出於相愛之情、而地遠便稀、其亦晩矣。今則旣在啓罷之中、而鄕所公兄、尙斳捧去、深可▣也。自餘多少、只在早晩、門下進拜之日、姑此不備。
Ⅴ 맺음말
늦게 만난 노 스승과 늙은 제자의 정은 정말 요즘 세태에서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고 하겠다. 세월은 14년여 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75세인 1620년(경신년, 광해12년) 1월 5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었으므로 봉화현에 있는 제자 구전(句全)은 열흘 뒤인 15일에 선생의 부음을 듣고 곡을 하고 만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스승의 만년에 만난 제자에 대하여 만남을 구전(句全)선생문집의 발문에서(465p) 한강선생(寒岡先生)과의 사제 관계를 읇은 내용 글을 맺음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중략) 당시 사우가 월천조목(月川趙穆)선생 문하의 선비들을 품평하면서 번번이 제일 먼저 구전(句全)을 꼽았다. 월천(月川)선생이 떠난 이듬해에 정한강 선생이 안동도호부사로 부임하자, 구전(句全)이 달려가서 한강선생(寒岡先生)을 뵈고 그곳에 머물면서 심경을 강독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만년에 외직인 신안현감으로 나가게 되자 그곳에서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종유하기를 거의 거르는 달이 없을 정도였으며, 공자 문하의 자유와, 자로와 같음을 자처하였다. (중략) (순조24년, 1824년7월8일 광산 김시찬(金是瓚) 쓰다)
또 다른 발문에서는
(중략) 구전(句全)은 일찍이 박소고(朴嘯皐/朴承任)와 조월천(趙月川/趙穆)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늦게는 또 한강정구(寒岡/鄭逑)선생에게 배우기를 청하면서 퇴계 선생께서 남기신 학문 사업을 사숙하였으니 (중략) (현종9년, 1843년 족손 무공랑 시강원 설서 겸 춘추관 기사관 윤근(胤根))
Ⅵ 부록
1. 구전선생 문집에 사수와 금호강에 관련된 시 3수가 있으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사수 노인을 모시고 저녁에 금호에 도착하여 술을 마시다.
금호에 해가 뉘엿뉘엿 하니 어두운 그늘이 깔리는데
사수가의 바람과 달을 장난삼아 그대로 읊도다.
곁에 있는 사람들 이상(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같은 나그네를 비웃지 마오.
냉수며 땅을 파서 만든 술두루미가 취한 마음을 풀리게 하도다.
(원문) 侍泗老飮夕到琴湖
西日琴湖落暝陰、泗濱風月弄仍吟。傍人莫笑如泥客、玄酒汚尊解醉心。
(2) 16일 울산으로 떠나는 한강선생을 배에서 전송하다.
배가 남쪽으로 떠나려 하므로 새벽에 일어나 말을 타고 달려가
선생이 바닷길로 떠나심을 전송 하였네
많은 사연 가득 싣고 돌아오는 노가 빠를 터인데
언언(言偃/ 자(字)는 자유(子游)/공자의 제자)이처럼 성에 매여 있는 자신이 가련 하구려
(원문)十六日舟送寒岡先生蔚山行
船南走馬趁鷄鳴、爲送先生海上行。滿載三千歸棹疾、自憐言偃縶孤城。
(3) 금호강 옛날 운에 차운하다.
가벼운 배를 우연히 흰 갈매기기 놀고 있는 가에 띄우니
열엿새 날이 마치 임술년(적벽부에 임술년)과 같구려.
보슬비내리는 삼경에는 구름 속에서 달빛이 새어나오고
잔잔한 물결 십리겨울이 하늘과 분간 되도다.
시를 지으려는 등잔불은 고기잡이 하는 배에서 빌린 불이고
차를 끓이는 솔의 연기는 물가 마을의 연기와 섞여있네
사년동안 벽진에서 무슨 일을 이루었기에
오늘 같이 다행스럽게 신선놀이 하는가.
(원문)次錦江古韻
輕舟偶泛白鷗邊、旣望還同壬戌年。細雨三逕雲漏月、平波十里鏡分天。詩燈火借漁船火、
茶鼎烟和水國烟。四載碧珎成底事、如今何幸作遊仙
2. 만사 2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양부자(한강/사양정사에서 호를 사양병수라고함)는 규장(고귀한 인품을 비유)을 닦은 듯
공경과 의리를 설명한 병풍 경희당에 펼쳐 놓으셨네.
벼슬길에 나가고 물러나기를 수시로 하며 가난해도 즐거워 하셨으며.
조용하고 편안하게 여기기를 힘써 늙어도 더욱 건강하셨네.
예설을 편집 완성하여 겸해서 가르침을 전하셨고
춘추대의의 글로 부연하여 임금에게 건의문을 올렸었네.
국가가 시달림을 당하는데 현인은 이미 옛사람이 되었으니
후생들은 어느 곳에서 태산과 들보 같은 존재를 우러를까?
(2)
선생께서 안동도호부의 지방관이 되셔 잘 이끌었는데
소자(제자)는 예날 벽진에서 제구실 못하는 수령이었네
낙동강 좌측에서 당년에 처음 덕스러운 모습 뵈었으며,
사수가에서 해마다 몇 번 어진 이를 가까이 모셨었지
덕의로써 사람을 교화하니 삼천제자가 부럽지 않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 읊으니 도리어 오륙 명이 부러워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금호강 배위에 술잔 올리던 일이
그대로 대현인과 영결할 때가 될 줄이야
(원문)
泗陽夫子琢圭璋、敬義屛開景晦堂。仕止以時貧亦樂、閑存着力危逾強。編成禮說兼垂敎、
筆演春秋獨抗章。邦國瘁来人已古、後生何處仰山樑。
先生作宰花山府、小子尸官古碧珍。江左當年初覿德、泗濱連歲㡬親仁。薰甄不羡三千子、
浴詠還歆五六人。豈意錦江舟上酌、仍成永訣大賢辰
3. 제문으로는 “한강선생 영위에 올리는 글”(구전문집 p354)
한강선생(寒岡先生)의 대상을 치르고 난 다음해 봄인 1622년(임술년, 광해14년) 3월 구전(句全)이 승정원 승지로 임명되고 4월에 선유사에 차출되어 영남지역을 안찰하며 성주(星州)를 지나가다가 한강선생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이때에 지은 제문은 다음과 같다.
아 아 ! 국가의 운명이 쇠하려 할 때에, 선생님께서 병이 드셨고, 유교의 바른 맥을 장차 떨어지려는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대궐에서 호소하기를 두 번도 못하였는데, 누가 인륜과 기강을 부지하겠습니까? 나아가 의문을 결정할 곳이 없어졌으며, 애처롭습니다.
우리 후학들이! 사양(泗陽)의 물가도 황폐하고 쓸쓸하며, 매원(梅園)도 적막하게 되었습니다. 공경심을 지니고 의리를 밝히시려고, 평생 동안 힘쓰셨으며, 유를 나누어 능력을 발휘하고, 가르침을 주신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호방하고 의젓하신 자질이셨으며, 영특하고 순수한 모습이셨습니다. 이제는 모두 끝이나 뵙기 어렵게 되었으니, 하늘을 보아도 흐리멍텅해 보입니다.
소자가 문하로 들어간 것은 많은 문하생중 나중이었으나, 성주 수령으로 있던 4년 동안, 극진한 가르침을 많이 받들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해가 바뀌었는데, 놀랍게도 돌아가셨음을 들었습니다만, 멀리서 기어서라도 가겠다고 생각한 기약이 이미 두 번이나 지났습니다.
슬픔을 저절로 항상 간절하여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왕명을 받들고 이곳을 지나면서, 다행스럽게 사우(祠宇) 아래서 회포를 펴오니, 옛날 배를 타고 술을 권하시며, 작별하신 말씀 귀에 가득하옵고, 향을 술잔을 올리니 마치 저승에서 뵙는 듯 합니다.
인사(人事)는 잘못되고, 시운은 어긋나고 있습니다. 통곡하려 해도 할 수 없어서, 상한 마음으로 한잔 술을 올리오니, 밝으신 영혼께서, 변함없는 정성에 흠향하소서.
(원문)祭寒岡先生文
嗚呼、邦國欲瘁、先生病矣。道脉將墜、先生逝矣。呌閽未再、孰扶倫紀。就正無地、哀我後學。
泗濱荒凉、梅國
寂寞。持敬明義、平生着力。發揮分類、垂敎膚公。豪毅之資、英粹之容。已矣難覿、視天夢夢。
小子及門、三千之後。宰縣四載、飽家諄誘。歸去歲換、驚聞啓手。遠稽匍匐、期已再過。慟自常切、
情同有妥。王程歴兹、幸展祠下。乗舟昔酌、別語耳盈。燒香此酹、若接匪明。人事之謬、時運之舛。
欲哭不可、傷心一奠。庶歆赤誠、不昧惟靈。
(편저자)
* 김주한(金冑漢) 사회복지학박사(전, 대구광역시 공무원교육원장, 현, 영남이공대외래교수)
* 이글은 한강학연구원 제3차 학술대회(2014.3.29. 경북대학교 IT대학 2호관)에 “한강학 연구 어떻게 할 것 인가” 참고자료로 필자가 쓴 글임을 밝혀둔다.
첫댓글 한강선생과 구전선조의 만남에서 이어지는 귀한 인연 공부하고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