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의 영적 맵핑
1.낙화암(落花岩)
소재지 : 초월읍 도평리 입구
병자호란 때 경상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남한산성밖 언덕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 근처 많은 백성들이 몰려와서 보호를 요청하므로 부녀자들만 을 군사들이 호위하게 되었다.
노도처럼 밀려온 오랑캐들은 가는 곳마다 살육과 노략질과 부녀자들에 대한 겁탈에 혈안이 되고 있던 때라 부녀자들만을 한 곳에 모아 보호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적군은 대병력을 몰아 쳐들어 왔다.
좌우병사는 전군에 명을 내려 양군은 서로 어울려서 한참 격전을 벌였다. 우병사 민영이 부하들에게 소리를 쳤다.
「아녀자들은 산성 안으로 피신시켜라」 「안됩니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서 뚫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뒷산 제일 높은 곳으로 대피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얼마 후에 보니 처음에는 어느 쪽이 우세한지 분간을 할 수 없었는데 차츰 아군들이 밀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승전의 기색을 알게 적군은 더욱 사나워졌다.
미쳐서 날뛰는 맹수들처럼 우리 편 군사들을 전멸시키려고 대들었다.
그러자 경상 우병사가 부하군졸들에게 소리소리 호통을 쳤다.
「사직의 존망이 걸려있는 싸움이다!. 물러가는 자는 한 칼에 벨 것이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라!」 그러나 일단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은 자꾸 밀리기만 했다.
이때 좌병사 허완은 단신으로 말을 몰아 성난 사자처럼 장창을 휘두르며 적진을 누비면서 순식간에 적병을 수 없이 찔러 쓰러뜨렸다.
쫓겨 가던 군사들도 주춤 돌아서서 다시 힘을 얻어 싸우기 시작했다.
무수한 화살이 날고, 장검이 번득이는 속을 종횡무진으로 달리며 싸우던 허완 장군은 마침내 집중하는 화살을 온몸에 받고 말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대세는 또 다시 바뀌어, 전세는 걷잡을 수 없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허완 장군은 명장답게 전사를 하고 말았으나 수하에 있던 수천 군사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서 우왕좌왕 뒷걸음을 치며 밀려오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던 여인들은 절망과 비탄에 빠져 간간이 비명만을 지르고 있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산 아래까지 도달한 적병들은 산 위에 있는 여자들을 보고 제각기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한 여자가 나서서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싸움은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녀자들은 이대로 오랑캐 놈들에게 붙잡혀서 더러운 굴욕을 당하느니 보다는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 온 몸이 오랑캐 놈들의 손과 발에 더럽혀지다가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백제시대의 삼천 궁녀들처럼 깨끗하게 죽음을 택합시다.
말을 마치고는 산 뒤쪽에 있는 벼랑으로 가서 몸을 던져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른 여자들은 잠시 멍하고 있었으나 곧이어서 모두 뛰어가 몸을 던졌으니 천추의 원한을 품은 채 장렬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수백 명의 꽃 같은 여자들이 절개를 지키어 이 민족의 고결한 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 광경을 바라본 우병사 민영 이하 전 장병들은 이를 갈며 다시 적병들과 용감하게 싸웠으나 워낙 중과부족이라 얼마 후 모두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가면 쌍령리라는 곳에 부녀자들이 몸을 던진 바위가 있는데 그곳엔 이러한 내력이 서려 있는 것이다. 후에 나라에서 사당(祠堂)을 짓고 원혼을 제사지냈다고 한다.
2. 천진암
한국 천주교회 창립년도는 이승훈이 영세한 1784년이 정설로 굳어진 가운데, 이벽의 천진암 강학회가 시작된 1779년을 한국교회 시작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천진암성지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23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제233주년 기념제’는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마티아)와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 등 3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6월 24일 천진암성지에서 열렸다.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 현장에서 열린 이날 기념제는 1부 기념식에 이어, 2부에서는 기념미사 봉헌 및 ‘창립선조 5위 묘역’에서의 신심예절로 진행됐다.
이 주교는 기념식사에서 “233년 전 이벽과 권철신 등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했던 거룩한 이 땅은 신앙의 발상지”라며, “과거를 되돌아보고 창립선조들의 정신을 이 시대 복음화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를 비롯한 전임 교황들도 1779-1835년까지 56년간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신앙 활동을 했던 한국 천주교회를 격찬한 바 있다”며, “순교 신심을 더욱 꽃피우기 위한 적극적인 관심과 실천적 노력을 80만 수원교구민들에게 요청”했다.
한편, 창립선조후손회 권혁훈 회장(가스발)은 <가톨릭뉴스>에 “거룩하고도 장렬한 죽음으로 진리를 수호한 선조의 후손인 것이 자랑스럽다”며, “굳건한 믿음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년도 논란
한편, 한국 천주교회 창립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한국 주교회의는 1784년 베이징에 가서 선교사를 만나 교리를 배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그해 9월에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준 것에서 한국 교회의 출발점이 마련된다고 밝혔다.
주교회의는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로서, “이 세례를 통해 우리나라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식을 맞아 방한해,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 103명을 시성한 바 있다.
그러나 천진암성지 전담사제 변기영 몬시뇰(베드로)는 교회의 기원은 “세례가 아닌 신앙으로 시작”되는 것이라며, 이벽의 ‘천진암 강학회’가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1779년에 이벽과,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이승훈 등이 모여 천주교를 공부하기 시작한 ‘천진암 강학회’가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으로서, 천진암 강학회가 없었다면 이승훈의 영세도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