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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갯벌에서
고 승 희
가끔은 일상을 벗어나 대자연을 찾아 떠나는 것은 왠지 모르게 마음 설 레 인다. 유난히 자주 내리던 비가 그친 후, 초가을의 높고 파란하늘이 눈부시게 곱다.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서해의 긴 섬 안면도를 향해 떠났다. 해안 마을이 가까워오자 차창 너머로 나지막한 산들이 푸른 소나무만이 빼곡히 들어차 숲을 이루고 있었다. 멀리 또는 가까이 스쳐 지나가는 소나무 중에는 굽어진 줄기에 가지를 늘어뜨린 그 고풍스러움은 다른 나무 들은 흉내 낼 수 없는 모습이다.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는 동안 한 폭 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여 마음은 신선(神仙)이 된 듯하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솔바람이 불어와 찌든 마음을 씻어 줄 것 만 같다. 태안반도는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떠 있는 듯 넓고 푸른 바다 풍경이 누군가 방금 그려놓은 그림 같아 시선을 이끈다. 내륙 방향을 바라보면 고도가 낮은 구릉 져 있는 산기슭에는 이곳의 특산물인 호박 고구마 밭이랑이 끝이 없어 보인다. 문득 겨울날 난로위에 익어가는 군고구마 냄새가 구수하게 나 는 것 같다.
수없이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바다를 응시하며 해 변가를 조금 달리면 아름다운 모래사장의 해수욕장이 금방 눈앞에 들어온다. 철지난 텅 빈 바닷가에는 썰물에 드러난 해수욕장의 은빛모래 위에서 갈매기 떼들이 아침비행을 하다가 낯선 우리일행을 반긴다. 태양이 이글거리던 지난여름 내내 북적거리는 해수욕객들이 떠나고, 갈매기들의 반가운 시선을 독차지 할 수 있어서 더한 즐거움이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쉼 없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파도의 포말이 내발을 유혹한다. 밀려가는 파도를 따라서 저 수평선까지 가봐야지 하고 걸어가다가 이내 뒤돌아 쫓겨 온다. 모래위에 뭐라고 쓸까. 고민하는 사이 파도가 밀려와서 방해를 한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구불구불한 해안가 모퉁이를 돌다가 잠시 멈추었다.
갯벌에서 무언가 채취하는 관광객들이 궁금하여 알고 보니 어른 손바닥만 한 꽃게들이 비닐봉지 속에서 바스락 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게를 본 순간 우리도 잡 을 수 있을 거라 는 자신감이 생겼다. 호기심으로 돌멩이를 들어 올리면 세 네 마리 도 넘어 보이는 게 떼 들이 돌 밑에 숨어 있다가 쏜살같이 달아난다. 작은 게 와 손바닥 만 한 게 중에 제일 큰 놈으로 재빠르게 겨냥하여 잡으려 하면 옆으로 기어가다가 성난 양쪽 집게발로 나를 향해 공격을 해온다. 서투른 게 잡이 초보를 알아보는지 손가락을 물릴 적 에는 너무나 아프고 아찔하여 나도 모르게 아~악~ 하고 저절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즐거운 비명 속 에 아무런 연장도 없이 온 게 정말 안타까웠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달걀모양의 검정색갑옷에 흰 반점과 성장 맥 이 거칠게 난 홍합(紅蛤)들이 바위에 무리지어 붙어서 바닷물에 목욕을 하고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 뾰족한 돌멩이로 홍합이 붙어있는 입 부분을 살살 때려보기도 하고 좀 더 세게 두들겨도 보았지만 마치 숫처녀가 윤기 흐르는 검은 실루엣 속에 소중한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하여 온몸으로 버티듯 좀처럼 떼어지지가 않는다. 접착성이 강해서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홍합은 나와 힘겨루기가 끝날 때 마다 내 손에는 피가 흘렀다. 갯벌에서 체험하는 내 첫 경험의 댓 가 로 붉은 혈흔이 흐르는데도 왜 이렇게 황홀하기만 할까?
강제로 떼어내 잡힌 홍합위로 꽃게들이 꿈틀 댄다. 그 움직임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자연이 주는 신비로움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얻는 게 있으면 분명 잃는 게 있게 마련이다. 간척지 사업으로 점점 줄어드는 서해 갯벌을 더욱 소중히 느껴보는 좋은 기회였다. 많은 생명체들이 살아 숨 쉬는 갯벌생태기를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부부동반으로 2박3일만에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일행은 꽃게에 물리고 돌에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된 손을 서로 내보이며 너무 아프다고 엄살을 떨어도 횡재의 기쁨은 숨길수가 없었다. 비닐봉지 속에서 언제 기어 나왔는지 작은 꽃게 한 마리가 바다로 돌려보내 달라고 투정부리듯 발뒤꿈치를 건드리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본 세월
권인자
탱자향이 짙게 풍기는 울타리 너머로 싱그러운 가을이 밀려온다.
청자 빛 하늘에서 쏟아진 소담한 햇살이 가슴으로 안겨오던 날, 칠순의 시어머니와 쉰의 며느리가 네 번째의 여행을 단 둘이 떠나게 되었다.
여행이래야 미국 시누이 집을 가는 것이지만 노년의 어머님을 모시고 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머무시는 만큼 내 가정과 생활에는 많은 공백이 생기지만 동행할 수 있도록 선택된 자의 기쁨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횟수가 거듭 될수록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닌 딸과 엄마같이 세월을 뛰어넘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또 여행의 설레임을 함께 느끼기도 한다.
외출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한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게 되었다.
스킨, 로션을 바르고 열심히 얼굴을 토닥인다. 마치 누가 누가 더 예쁘게 화장을 하나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화장품의 종류도 다르고 피부의 톤도 다르지만 시어머니는 연신 곁눈질로 살펴보신다. “이쁘다. 이뻐! 시집 또 가도 되겠다”고 하시는 시어머니의 말속에는 어쩐지 뼈가 있어 보였다. 요즘 들어 종종 거울 보기도 싫을 만큼 당신의 늙으심이 서럽고 사는 것이 재미가 없다고 하던 어머니셨다.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사십대의 후덕하고 맘씨 좋은 새댁같던 어머니는 이제 거울 앞에서 세월을 그리고 계셨다. 살아온 날을 글로 적노라면 몇 권의 책을 써도 될 만한 인생을 사신 어머니.
사는 동안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일들이 어찌 한 두 번 뿐이었겠는가. 내가 며느리가 된 날부터 어머니가 나를 잘 아는 만큼 나는 어머니의 아픔을 다 알 수가 없었다. 내 삶의 미흡했던 수많은 것들이 어머니 주름 속에 많이 녹아있는 것만 같아 너무도 죄송스러웠다. 오늘따라 화장이 잘 안된다며 푸념하시는 어머니의 눈썹을 새로 그려 드리고, 내가 즐겨 쓰는 핑크색 립스틱을 발라 드렸더니 금세 표정이 밝아지셨다.
몸이 늙어서 서럽고 아픈 것 보다 마음이 늙어진 것이 몸을 더 아프게 하고 서러워 지게 하나보다.
잡을 수도 없이 어느새 훌쩍 지나간 세월은 어머니의 귀를 어둡게 했고, 또 내 눈을 침침하게 해서 돋보기를 쓰고 신문을 보게 했다. 어찌 그뿐이던가. 어머니와 함께 잤던 이부자리를 들썩이며 누구의 머리카락이 더 많이 빠졌는가를 가리고 세어보기도 한다.
젊고 늙음이 아닌 같은 여자로서 세월 앞에서 함께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갈수록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생각은 더욱 단순해진 어머니는 매사에 서운한 것만 많아지셨다. 자식에서 손주까지 칠십 여년 만고풍상의 세월 속에 어머니의 사고는 간당간당한 댕댕이줄 만큼이나 야위어져가고 말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굳게 딛고 싶은 다리에는 힘이 빠져 비척거리게 되고 앉는 자리마다 졸고 계신다.
창 밖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이 더 이상 그리 새롭지만은 않으신가 보다.
어느 날 부턴가 우리 집에 오시면 내가 쓰는 화장품만 쓰셨고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 보기도 하셨다. 젊어지고 싶었고 세월을 되돌리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이셨을 게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어머니의 어깨를 툭 치며 실바람이 내려앉는다. 자꾸만 헛놓여지던 어머니의 발자국이 흔적도 없이 쓸려가 버렸다.
이십여 년 저만큼 앞서 가신 어머니의 세월을 어찌 되돌려 드릴 수가 있을까! 은근히 스쳐가는 바람 속에도 세월이 묻어 있었고, 무심히 떨어져 뒹구는 낙엽 속에도 세월이 함께 묻어 있었음을 모르고 살았었다. 혼자만 보았던 거울 속에 나는 언제까지라도 젊기만 한 줄 알았는데 어머니와 함께 본 거울 속에서 소리 없이 스쳐간 세월을 보게 되었다.
삼라만상이 곱게 치장한 자연을 언제까지 어머니와 함께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날까지 어머니와의 여행도 행복한 대화도 계속 이어가고 싶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아닌, 딸과 엄마같이, 아니 한 거울 앞에서 세월의 흐름을 함께 느끼는 같은 여자로서…
가을이 싱그러울 때 떠났던 여행은 가을이 시들해져서 돌아왔다.
코펜하겐의 하루
김여정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140만인구가 살고있는 북유럽의 제1의 도시이며,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로 안정감 있는 분위기였다.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지은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청입구에 코펜하겐의 창시자인 압살롬 주교의 상이 있고, 내부에는 옌스올젠이 설계했다는 천체시계가 있는데 제작기간이 27년이 걸렸다니, 이 시계야말로 덴마크인 들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리라. 시청 옆으로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준수한 좌상이 있어 광장일대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고 깨끗한 환경의 공원과, 박물관, 옛 성터, 명소 고적은 시청을 중심으로 집중되어있다.
시민들의 낙원으로 티블리 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테마 파크 이며 중앙에 아름다운 못과 분수와 콘서트, 영화관, 그리고 각종차량, 레스토랑 등이 갖추어져있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들의 가슴을 흐믓 하게 해준다. 넓은 면적의 녹지와 유서 깊은 궁전 등. 전원 풍경이 산책하기에 좋은 거리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런 것들이 코펜하겐을 북유럽에서도 아름다운도시 생기 있는 명소로 만들어 주고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과 활기찬 도시이지만 한 가지 없어서는 아니 될 햇볕이 부족하여 이곳저곳에 잔디에 누어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이 많이 눈에 뜨인다.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하여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 양산을 받고 다니는 모습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여왕이 궁전에 머무르고 있는 날의 전통적인 행사에 우리일행은 기다렸다가 근위병의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빨간색 상의에 곰 털모자를 쓴 군악대를 선두로 70여명의 근위병들이 로젠보그 궁전에서 출발하여 시내를 지나 궁전 광장에 입장하며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교대식 광경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위병행진 악대의 음악에 맞춰 따라다니는 관광객들도 한몫을 한다.
왕가의 옆 왼쪽에 국회의사당은 그리 크지 않고 청초한 맛을 느끼는 건물이었다. 국회의사당 광장에는 승용차는 거의 없고 한옆으로 자전거 거치장에 많은 자전거가 국회의원들의 출퇴근하는 자전거란다. 검소하고 소박한 국민들의 절약하는 정신과 실용적인 생활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의사당 정문 현관상부에 있는 네 개의 조각이었다. 귀를 잡고 있는 조각은 국민들의 소리를 잘 경청하라는 뜻이고 머리를 집고있는 조각은 듣고 잘 생각하라는 의미이며 가슴을 잡고 통증을 호소하는 듯 한 것은 잘 새기고 고민하라는 것이요, 눈을 가리키는 조각은 국민을 바로 보라는 뜻이 담겨있단다. 국민들의 아픔과 바램을 호소하는 듯한 이 조각들은 국회의원들에게 건강한 정치를 기대하는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코펜하겐은 한적한 어촌에 불과 했지만 정치인이나 국민들의 의지로 급전하여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상업에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것은 기초를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 지도자의 영향력으로 발전하여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0위안에 선정되기도 했다. 4통이란 제목의 조각이 의미하는 건강한 정치를 하라는 국회의원에 대한 경고이기도하리라.
‘한스와 쇠렌’의 도시라는 애칭으로 통하기도 하는 한스 안데르센과 철학자 쇠렌은 코펜하겐이 자랑하는 인물들이란다. 이곳 북쪽으로 가다보면 해안의 바다 위에 앉아있는 코페하겐의 얼굴마담 격인 인어동상을 볼 수 있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에서 모티브를 얻어 조각가 에드바르트 에릭센에 의해 만들어 졌단다.
안데르센이 사랑한 뉘하운 항구는 서민적인 냄새가 풍기는 곳이며 누구나 이곳에 오면 인어 상을 보고싶은 꿈을 가지고 온다. 실제의 모습을 보면 80cm 크기에 조그만 동상이 초라하게 느껴지지만, 얼마나 유명하게 알려졌으면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분비고 코페하겐의 상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데르센의 인어아가씨의 주인공을 모델로 하였기에 관광객들에 의해 코펜하겐은 발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다. 한 문학가의 맑은 영혼이 많은 세계인의 발길을 끌어들이니 샘물이 솟아나듯 무한의 가치가 아닌가. 작고 외소 하며 쓸쓸해 보이면서도 사랑스런 그녀의 모습은 여행자의 발길을 놓지 지 않고 누구에게나 기념사진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이곳에서도 몰지각한 사람의 소행으로 그녀의 머리가 떨어져 나간 일도 있었단다. 또 그 이후 팔이 잘리는 수난을 겪은 후 완전히 복원이 되었다지만 자세히 보면 이음새가 보인다. 몰려오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있지만 인간세계로도, 고향인 바다로도 갈 수 없는 반인 반어인 그녀모습이 처연해 보였다.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의 고향은 퓐 섬이며 자그마한 구두 방을 하는 가난한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집을 완성하면서 안데르센의 거리로 통하는 이곳67번지와 20번지, 18번지 의 순서로 옮겨 다녔던 동네이었다. 그리고 69번지에는 그의 기념관으로 안데르센 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었고 거리곳곳에 안데르센의 자취가 남아있는 건물에 작은 푯말들이 붙어있어 그의 흔적을 설명해주는 듯 했다.
지금은 관광객들로 분벼 식당들이 많아졌으며 덴마크의 또 다른 명소로 등장하고 있다.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이 살다간 그곳을 더듬어 보는 세계인의 발자취가 오늘도 내일도 이어지고 있으리라.
바람이 전하는 말
김 용 례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설렘이다.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에 민감했던 며칠이 지나고 마침내 떠났다. 공항에 일찍 도착한 일행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드디어 하늘 길로 제주에 도착 했다. 일정에 따라 북촌의 애기무덤에서 부터 제주보기가 시작되었다.
이곳은 1949년 4.3사건 이전부터 어린 아기가 병에 걸려 죽으면 묻던 곳이란다. 이런 곳에 연못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물길도 없고 제주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물이 고이지 않는다는데 바위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애기 볼처럼 볼그레한 연꽃 한 송이 그 연못에 피어있었다. 엄마 잃은 아기의 지친 울음 같은 가는 비가 내리고 일행은 하얀 우비를 입고 있었다. 누구도 한 송이 피어있는 애기연꽃을 보고 예쁘다는 찬사를 하지 못 했다. 너븐숭이 애기무덤가에 홀로 피어있는 꽃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북촌사람들이 밭일을 하다가 쉬어 가던 곳, 넓은 팡이 있어 너븐숭이라고 불리던 곳이란다. 4.3사건이 있었던 그 무서웠던 날 이곳에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같이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단다.
애기무덤 옆 북촌초등학교 운동장 팽나무아래서 대 학살 사건이 있었던 날의 슬프고도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다들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오래된 피의 흔적 눈물의 역사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비행기를 타며 들뜬 마음은 사라지고 아픈 역사의 날을 그 현장에 와서 뼈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희생자의 명복을 가만히 빌어 볼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코스 용눈이 오름을 향해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는 끝없이 이어진 돌담과 하얗게 부서는 파도,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어 자신의 존재를 만들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에만 울타리를 치는 줄 알았는데 제주에는 밭에도 돌담을 치고 있었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돌담에는 바람의 길이 나 있어 수백 년 쌓아올린 돌담이 쓰러지지 않는단다. 바람도 돌담을 지나갈 때는 바람의 길을 잘 찾아가나보다. 돌담에는 바람을 쪼개는 힘이 있다고 한다. 제주의 바람은 섬사람들의 숙명 같은 질긴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힘이 느껴진다.
용눈이 오름은 소녀의 젖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은 푸른 초원, 풀 뜯는 소들과 바람만으로 이렇듯 아름답고 평화로울 수 있을까, 그림 같은 오름이다. 김영갑 사진작가는 이십여 년 용눈이 오름을 찍어도 그 아름다움을 다 표현하지 못 했다고 한다. 우리일행 육십 대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누구도 어른이 아니었다. 다만 초원을 노래하는 동심이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의 소리가 끝없이 따라다닌다. 우리는 북촌을 잠시 잊고 용눈이 오름에서 바람과 진탕하게 놀아났다.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삼삼오오 갖가지 포즈를 잡으며 사진을 찍고 오름에서 바람과 한바탕 놀고 나니 무거웠던 가슴이 한결 시원해졌다. 제주에는 이런 오름이 368개나 된단다.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오름에 있는 그만큼의 바람과 함께 오름 한 개쯤 청주로 가져오고 싶었다. 내안에 가득 했던 욕심 분노 미움 이런 무서운 것들도 자연 앞에서는 무용지물 하찮은 감정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가보다.
아름다운 한사람 사진작가 김영갑을 만나기 위해 두모악 김영갑 갤러리로 갔다. 그의 제주사랑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시인 도종환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터였지만 갤러리에 와보니 그의 삶이 더 치열하게 느껴졌다. 김영갑, 그는 나와 동갑내기다. 그는 이미 세상을 다 살고 다음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지독하게 외롭게 살다간 사진작가 그가 만들어 놓은 정원에서 사진을 찍었다. 제주의 돌을 허리 높이로 쌓아 길을 만들고 제주 꽃을 심어 가장 제주다운 정원을 만들겠다고 아픈 몸으로 쌓았다 부수고를 반복하여 정원을 만들었단다. 그의 노고를 생각하니 돌 하나 나무하나 꽃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건지, 제주를 여행한다는 사람 있으면 꼭 이곳에 들려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김영갑 그는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허기진 배는 들판의 무나 당근을 뽑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고 한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이나 사람한테 내 인생을 다 바칠 만큼 노력 해 본 일이 있는가? 그가 쓴 “그 섬에 내가있었네”를 읽고 거울에 비친 나를 보았다.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더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갤러리에 남겨둔 채 발길을 돌렸었다.
나는 귀가 둔해서 제주의 바람이 전하는 말을 다 듣지 못했다. 다시 한번기회가 된다면 제주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다. 제주가 유혹하면 어쩌지? 김영갑 그 사람도 사진 찍으러 갔다가 제주에 반해 살게 되었다는데......
사나운 제주바람도 우리를 따라와 육지에 닿으니 기가 죽었는지 순해져있었다. 공항의 바람이 후끈하다. 출발 전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조금 내려 더 좋은 추억이 되었다. 슬픈 제주 아름다운제주 안녕
박이야기
김종숙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밤 조롱박이 매달려 비에 흠뻑 젖어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때문일까, 빗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 마치 울고 있는 듯 더욱 처연하게 보인다.
동에서 주민들을 위해 작은 쉼터를 만들어 지붕위로 조롱박을 심어 올렸다. 가끔 지나치다 보면 아주머니들이 부채를 하나씩 들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정겹고 그리움을 부르는 풍경이라서 나는 미소를 머금고 지나치곤 했다.
늦은 밤 텅 빈 골목에 힘겹게 매달려 비에 젖은 박은 외로움이 묻어난다. 오래전 외양간 초가지붕엔 탐스런 박이 서너 개씩 올려져 있었다. 가을밤 높은 하늘에 휘영청 달이 떠오르면 그 빛을 받아 하얗게 보이는 박은 가을의 또 다른 풍요로움을 주었다.
귀뚜라미가 노래하는 밤 잠자는 아이들도 꿈을 꾸고 지붕 위 살 오른 박도 꿈을 꾸었다. 그 시절엔 바가지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생필품 이었다. 집집마다 부엌문을 열면 서너 개쯤 까만 무쇠 솥이 걸려있고 그 뒤로 몇 개 의 바가지가 엎어져 있었다.
비가내리는 날이라든가 물에 젖은 바가지를 따뜻한 부뚜막에 엎어놓아 바짝 말려 쓰곤 했다. 그릇이 귀하던 그때 저 조롱바가지는 아주 쓸모가 있었다.
추수가 시작되면 마을에선 서로도와 품앗이를 했는데 새참이나 점심때 저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국을 퍼서 죽 돌리면 큰 양재기에 모듬밥 을 각자 퍼 국에 말아먹고 한번더 퍼선 나물에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서 맛있게 먹었다.
바가지는 사기나 놋그릇에 비해 가볍고 다루기가 간편해 요긴하게 쓰였다.
밤새내린 이슬을 맞아 작은 진주알 되어 함 초롱이 고개 숙인 하얀 박꽃은 순결하고 정갈한 여인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옛날엔 혼례 때도 액을 물리는데 바가지가 쓰였다.
먼 곳에서 온 신부가 대문 앞에 엎어놓은 바가지를 밟아 와지끈 깨버리면 액을 물리고 잘산다는 일화가 있었는데 아마도 신부는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잘 깨지면 다행이지만 깨지지 않으면 불길한 징조로 생각하는 어른들께 면목이 없으니 가슴이 소리죽여 콩콩 뛰었으리라 싶다.
세월이 흐르고 과학이 발전하여 살기 편한 세상이 되면서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플라스틱 바가지가 생기자 우리의 전통 바가지는 뒷전으로 밀려나 점점사라지고 흥부네 제비집 이야기도 잊혀져 갔다.
지금도 집집마다 바가지가 있지만 아무런 감정이 없다. 할머니가 구덩이를 파고 두엄을 부어 박씨를 심어올린 박은 할머니의 정성과 애정이 살아 있었다. 깨질까봐 조심조심 다루던 엄마의 바가지에도 인생사 애환이 담겨있어 부뚜막 위 바가지에도 엄마가 있었다.
물질의 풍요 속에 묻혀 사는 내 아이들도 내자리가 비었을 때 플라스틱 바가지에서 엄마를 볼 수 있을까, 경제성장과 개인의 고소득 핵가족화가 이기주의화 되면서 모든 것들이 정은 병들게 하고 서로를 관심 밖으로 밀어 내었다.
가끔 공예품속에서 상품화된 바가지를 보지만 조금은 낯이 설다. 그 옛날 나무가 타는 아궁이 위 까만 무쇠 솥 뒤 부뚜막의 엄마의 손때가 뭍은 바가지가 그립다.
수줍게 핀 하얀 박꽃이 순결한 여인을 연상케 하고 부뚜막의 바가지는 엄마를 보게하니 어디서 쓰냐에 달라진다. 쌀 독안 바가지는 언제나 보송보송 뽀얗게 분바르고 있지만 부엌의 물바가진 몇 칠씩 비가내리면 군데군데 검게 썩고 해서 언제나 부뚜막에 엎드려 제 몸을 말려야 했다.
어찌 보면 여인의 삶과 많은 닮은 꼴 인 듯싶기도 하다 비는 쉬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다. 아마도 밤새 내릴 모양이다. 우산을 든 손끝이 저리다. 지금 내모습의 바가지는 어떤 것일까, 힘겹게 매달려 빗물에 젖어있는 저 박은 아니겠지! 내일은 해가 뜨고 조롱박도 웃고 있겠지,
나도 우산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내일을 위해 빗속을 걸어간다. 비 맞은 조롱박이 어느 집 쌀바가지 되어 뽀얗게 분바르고 웃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흰 가래떡
류 기 학
우리 집 김치 광 지붕 이엉 속에는 어머니가 넣어 두신 흰 가래떡이 긴 엄동설한 매서운 추위를 견디다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한 겨울에도 얼었다 녹다를 반복한 탓으로 매끈하던 가래떡 모습은 온데 간 데가 없다. 온 몸은 찢기고 갈라 저 버렸고 마른 나무 작대기 같이 바싹 말라 비틀어 저 버렸다. 마치 재 너머 쇠쪽 밭에 메조씨모를 세우기 위해서 하루 종일 밭을 매고 난 어머니 손처럼 그렇게 험하게 되어버려서 보기 민망 할 정도다. 작은 아들 휴가 나오면 먹이려고 어머니가 넣어두신 가래떡이다.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설 때 만든 가래떡을 뒤울안 김치 광 지붕 이엉 속에 서너 개 넣어 두시었다가 내가 휴가를 나가면 떡국을 끓여 주시곤 하셨다.
마지막 휴가를 나오며 자식을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 모습을 그려보면서 부대정문을 나온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서울 도봉동에 있던 후송병원이다. 집에 가는 길은 시내버스로 서울역까지 가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조치원역에서 내려서 다시 충북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내릴 곳은 주덕역이다. 주덕역서 가정리 우리 집 까지는 먼 십리길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충주시에 속하지만 전에는 중원군 이류면이다. 면 소재지 대소원에서 우리 집 가정리를 가려면 요도천 내를 건너가야 한다. 지금은 큰 다리가 놓여 있어 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겨울철에 임시로 사용하는 나무로 만들어 놓은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나무다리는 소나무 가지를 얼기설기 얹어 놓고 그 위에 는 잔디를 떼어다가 덮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다 보면 다리 중간 중간에 간혹 잔디가 내려 앉아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을 지날 때 딴전을 보다가 잘못 디디는 날이면 발이 갑자기 다리 밑으로 쭉 빠져서 나도 모르게 “아!” 하고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요도 천 나무다리를 건너면 고개 기리가 길어서 이름 부쳐진“장고개”란 긴 고개 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집에서 자식을 기다릴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잰 걸음걸이로 부지런히 장고개 마루를 향해 걷는다. 고개 마루를 넘어서면 헐떡거리던 숨소리도 진정되고 멀리 큰 느티나무가 있는 당저마을 모퉁이가 눈에 들어 오며는 벌써 집에 다 온 것 같은 들뜬 기분이다. 저기서 우리 집은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고개 내리막길이라 발걸음이 한 결 가벼워진다. 내 걸음 걸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빠른 편이다. 나는 걸음을 걸을 때 양쪽 옆을 보느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가는 버릇이 있어 걸음이 빠른 것 같다. 석양이 서산마루에 걸치는 저녘 때라 그런지 삼월 달 초봄인데도 아직도 매서운 찬바람이 씽- 하고 스쳐 지나갈 때 마다 내 볼때기가 떨어 저 나가는 듯 몹시도 시럽다. 집에 가면 반갑게 맞아주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더 부지런히 옮기다 보니 다시금 숨소리가 하늘에 닿을 듯 헐레벌떡 거린다. 숨이 차서 내뿜는 입김은 싸늘한 기운이 무서워서 인지 뿌연 안개로 변해서 안경너머로 사라지며 내 시야를 가린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리시며 반겨주시고는 또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신다. 아마도 또 내게 무엇을 먹이려고 준비하러 들어가시는 모양이다. 내가 집에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김치 광 지붕 이엉 속에 넣어두셨던 마른나무 작대기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흰 가래떡을 꺼내어 미지근한 물에 밤새도록 불리신다. 그리고 그 이튼 날이면 꼭 떡국을 끓여서 주시곤 하셨다. 소고기도 넣지 않고 맹물에 끓인 떡국이라 지금과 같은 떡국 맛에 비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가 끓여주신 그때 그 떡국은 참으로 맛난 별미였다. 군대가 있는 동안 세 번 휴가를 나왔는데 그때마다 이렇듯 지극 정성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인자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신 분이 내 어머니다. 그러셨던 분이 지금은 몹쓸 노인성치매에 걸려 식사하시는 것 이외는 자식도 몰라보시고 세상사 아무것도 모르는 생활을 하시고 계신다. 하루 종일 하시는 일은 옷 보따리를 쌓아 가지고는 집에 가신다고 방문을 열고 나오기도 하시고, 옆에서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신다.
또 어느 때는 방안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는“얘 밥 먹어라, 아이 착하다”하시면서 대화를 하시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거울속 자신을 다른 노인으로 착각하시고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화를 내시기도 하신다.
인정이 너무 많으신 분이라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늘 베풀며 사는 삶을 살아오신 탓으로 많은 분들로 부터 칭송을 받아오셨던 분이다. 이렇듯 마음씨 고운 어머니에게 자식도 몰라보는 고통을 안겨주시다니 정말로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올해 94세. 연세가 많으시지만 이제는 기력도 너무 쇠약해 지신데다 가 젊었을 때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허리는 구부시고 시력도 좋지 않으시다. 어머니 혼자서는 문밖을 출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 지난해 봄부터 노인정도 못 나가시고 항상 집에서만 계시자니 오죽이나 답답하실까? 늘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지금 내 처지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할 수 없는 형편이라 그저 가슴만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다. 그저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남들은 말하기 좋아서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를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를 그곳으로 보내는 것은 손발이 멀쩡한 자식으로서는 도저히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내가 조금은 힘이 들더라도 어머니 치매증세가 지금보다 더 심해지지 않는 한 내 집에서 계속 모시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 마침 날이 따듯하여 어머니를 목욕시켜 드리면서 깡마른 팔다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 옛날 어머니가 내게 떡국을 끓여주시려고 뒤울안 김치 광 지붕 이엉속에서 꺼내시던 바싹말라 비틀어진 흰 가래떡이 생각나서 잠시 눈시울을 적셨다.
수선화
모 임 득
봄볕 따사로운 날
해찰하며 걷는 골목길
돌담가 수선화
제 몸 낮추었다.
나르시소스*의 혼이 담긴 듯
마알간 얼굴
의미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없다고 일러준다.
하늘만 보고 사는 사람이 많아서 그러한가.
고개 숙인 채 생각에 잠긴 수선화
나도 따라서 누워버렸다.
*나르시소스: 물속에 비친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다 죽은 목동 죽은 자리에 수선화가 피어 남
그 길이 아름다운 이유
박 재 명
새벽에 출근길을 나서니 안개가 자욱하고 한기가 가득하여 몸이 움츠려들어 옷깃을 세웠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지금의 마음은 벌써 가을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가 보다.
늦가을의 아침 추위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잰걸음으로 바꾸어 놓았고, 나 역시 기차역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진다. 기차에 오르니 따뜻한 온기가 나를 반긴다. 사람이 간사하다고들 말하던데, 얼마 전까지 에어컨 바람을 찾다가 벌써 따끈함이 좋아지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사람의 마음이야 그렇든 말든 기차는 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안개 낀 새벽을 헤치며 철길을 달린다. 기차가 달리는 속도만큼 열차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제각각 바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아침을 깨운다. 충주까지 태워준 기차가 저만치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이제는 내가 발품을 팔 차례다.
기차역을 등지고 홀로 호젓한 들길을 걷는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봄부터 튼실하게 자란 벼들이 황금들녘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단했던 한해를 마무리 하는 듯, 탈곡된 볏짚이 되어 나란히 누워있다. 벌써 텅 비어버린 들녘을 바라보니 어느새 또 한해가 지나간다는 공허함으로 잠시 나를 쓸쓸하게 만든다.
그럴 즈음에 들판 길은 끝나고 탄금호 제방의 산책길에 다다랐다. 드넓은 호수면의 물안개는 생명이 숨쉬며 토해내는 입김과도 같아 살아 있는 듯하다. 살아 있으되 고요하고 평온한 모습이니 정중동(靜中動)이란 이런 모습일까? 탄금호는 그렇게 조용히 겨울맞이를 하고 있었다. 밤새 떨어진 가로수 나뭇잎이 산책길에 흩날려 어지러이 뒹굴고, 벌써 갈색으로 변해버린 길섶의 잔디가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얼마간 걸어가니 퇴색된 잔디 사이에 활짝 핀 보랏빛 쑥부쟁이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마치 가냘픈 몸매의 가녀린 소녀 같기도 하고, 단아하게 몸단장을 마친 아낙네를 보는 듯하다. 강하지 않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듯도 하지만, 청순하고 기품 있어 보인다. 꽃송이에서 절개 굳은 여인네의 자태를 보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향기에 취해 본다.
녹음방초(綠陰芳草) 무성하던 오뉴월의 천자만홍(千紫萬紅)은 모두 결실을 하여 겨울 준비하건만, 너는 무슨 생각으로 늦은 가을이 되어서야 꽃을 피우느냐? 세상 사람들에게 홀로 고고한 척 자태를 뽐내기 위해서, 외롭고 안쓰러운 모습으로 뭇 사람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위해서냐? 혹은 이 꽃 저 꽃을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봄 나비가 싫어서 이냐?
그도 저도 아니면 아직도 겨울 준비를 못한 벌들에게 희망의 꿀을 주고자 함인가! 겨울로 가는 길목에 사람이며 나무며 만물이 겨울준비에 한창인데, 너는 아직도 여유로움의 향기로 사람의 발길을 잡으니 그래서 매력적인가 보구나!
인생의 겨울은 언제이고, 그 겨울의 길목에 있는 인생의 늦가을은 언제일까? 퇴색되고 낙엽만 지는 가을길이라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길인가. 그것이 만일 인생의 길이라면 얼마나 메마른 자갈밭길과 같은 인생인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가을 길처럼, 내 인생의 가을 길에도 들국화 같은 꽃을 피워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떻게 가꾸고 피워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꽃 한포기 피지 않은 나의 미래를 상상해 보니, 살아 온 세월의 한과 시름만 투영되는 흑백의 영상으로 지나간다.
그 사이로 아침에 만난 들국화를 살짝 피워 올려 본다. 그러자 세월의 한시름과 무기력으로 얼룩진 흑백의 영상이 꽃향기 가득한 천연색의 화사한 세상으로 변했다. 늦게 피는 꽃이 더 아름답고 향기가 진하여 멀리 간다고 하지 않던가! 출근길에 만난 쑥부쟁이는 인생의 늦가을까지 피워야 할 꽃이 많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고 보니 지나간 날 중에 보석 같은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낸 날이 많았던 것 같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만난 들국화를 보며 내 인생의 남은 여정을 채워 줄, 나만의 들국화 한 송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언제 시작하고, 어떤 길목에서 어떤 모습으로 피울까 라는 생각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마음도 발길도 바빠진다.
어머니
송 보 영
소슬한 갈바람이 갈대숲을 흔들고 지나간다
떠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여름의 끝자락을 훠이훠이 내몰면서 불어온다.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듯이 오는 세월 또한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니냐고 갈바람은 그렇게 외처 댄다.
지난 여름날 그 길고 지루한 장마 속에서도 제 모습을 일치 않고 고운 자태로 피어난 들꽃에선 바람의 입맞춤으로 풋풋한 향기가 넘쳐 난다
향기를 따라 바람타고 날아든 벌, 나비의 간지러운 애무에 꽃잎들은 파르르 떨며 환호 하고 있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하고 우리네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겠거늘, 무엇이 어머니에게 주어진 그 인고의 세월을 온전히 살아내게 하셨을까!
어머니는 의식이 없으신 채 수년 동안을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의 온몸을 닦고 또 닦으신다. 손과, 발 얼굴 등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렇게 닦으신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은 정제된 맑은 물빛이다.
금방이라도 마알 간 슬픔의 알갱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육신이 무너지고서야 긴 방황을 끝내고 당신 곁에 머물게 된 지아비에 대한 애증의 물결이 가슴 깊은 곳에 침잠되고 난 뒤 솟아나는 먹먹한 아픔이 방안 가득 흐르고 있다.
아버지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손에는 항상 바느질감이 들려있었다. 어머니는 심지를 돋우어 놓은 등잔불 밑에서 밤이 깊도록 바느질을 하곤 하셨다. 각양각색의 고운 천들은 어느 규수의 결혼식 날 입을 폐백 옷이 되기도 하고 동네 어른들의 나들이옷이 되기도 했다. 유난히도 손끝이 여무신 어머니는 아버지의 철지난 바지 하나로 어머니의 저고리 두 개를 만드시기도 하셨으며 그런 어머니 덕분에 힌 저고리 검정 통치마를 입는 것이 보통이었던 어린 시절에도 나는 꽃무늬 원피스나 세일러복을 입었었다.
그렇게 바느질을 하고 계신 어머니 옆에는 당신의 철부지 어린 자식들이 있었고 방 한옆에 놓여있는 놋화로 위 뚝배기에선 항상 무엇인가가 끓고 있었다. 그건 이제나 저제나 지아비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어머니의 절절한 아픔과 눈물이 섞인 찌개였다.
밤마다 그렇게 일감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으셨던 것은 어쩌면 고요와 적막만이 노을처럼 깔려있는 긴긴밤 주체할 수 없이 밀려오는 애증의 시간 들을 견뎌 내기 위한 소리 없는 부르짖음이 아니었을까,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며 학문을 하는 사람이니 그만하면 족하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열여섯 어린 나이에 동갑나기 학생을 지이비로 맞으면서 시작된 긴 인생항로, 무엇하나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여자가 갖추어야할 덕목을 바르게 익히며 곱게만 자란 어린 신부는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 속에서 살아가는 외로움으로 그렇게 떨어야 할 줄은 상상도 못했으리라.
부부란 과연 무엇인가 ,어쩌면 향기 나는 젊은 날에 하늘의 뜻에 따라 귀한 인연의 고리로 엮여져 숱한 세월을 살아 낸 뒤, 노을 진 황혼의 들녘에서 손을 마주 잡고, 돌이켜 보면 슬픔도 분노도 살아가는 기쁨이었다며 지나온 세월을 반추해 보는 것 그것이 부부가 아닐까!
한복의 맵시가 유난히도 고운 단아한 용모를 가지셨던 나의 어머니! 여문 손끝으로 부족한 가정살림의 이모저모를 소리 없이 꾸려가곤 하시던 연약해 보이면서도 더할 수 없이 강 하셨던 어머니! 기다림에 목이 말라 가슴 안으로 피멍이 들어가면서도 눈바람 추운 겨울날이면 당신의 지아비 신발을 아궁이 앞에 놓아 따듯해진 뒤에야 신게 하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방황을 끝 낼 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내 가슴에선 항상 빗물 같은 슬픔이 흘러 내렸다.
어머니가 살아낸 수많은 고뇌의 시간들, 그 사유의 뜨락엔 무엇이 있을까,
당신의 무릎 앞에 잠들어 있는 어린 자식들 때문에 토해내지 못한 분노의 덩어리들이, 당신의 어버이 가슴이 검게 타버릴까 봐서 심연 깊은 곳에서 숨죽인 울음을 울어야 했던 슬픔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내려놓지 못했던 지아비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지 않을까!
만지기만 하면 바스러지는 가랑잎처럼 야위어 가시면서도 당신의 지아비 병상 앞을 떠나지 못하시던 어머니, 하염없이 당신의 지아비를 바라보는 그 간절한 눈빛 속엔 어쩌면 이제라도 꼭 듣고 싶은 한마디가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여보 그동안 정말 미안 했소, 아이들 자 키워 주어서 정말 고맙소, 그리고
지난 겨울날에 당신이 데워주던 구두는 정말로 따듯했소 라고“
언제 부턴가 주름진 어머니 두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감나무 斷想
이담. 안 광 석
자연의 이치도 잘 모르면서 언제부터 인가, 분재들을 땅속에다 반쯤을 묻어 놓고서 겨울나기를 해왔다.
올해도 분재를 묻기 위해 화단을 파다가 몇 년 전에 베어 냈던 감나무 등 컬이 땅속에서 동면을 했는지, 아직도 썩지 않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문득 감나무 생각이 떠올랐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 곱디고운 단풍잎도 낙엽이 되어 발길에 차이는 가을의 끝 녘에 서서 감나무 생각에 잠겨본다
감나무는 우리 집 마당가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자랐던 나무였다.
우연한 기회에 마당가에 심어놓은 감나무는 양분이 좋았는지 무럭무럭 자라서 몇년도 안 되어 감이 열리기 시작 하였는데 신기하게 아주 큰 감이였다
주렁주렁 달린 감을 보면서, 가을 내내 우리 집 식구들은 뜰 안의 정취도 마음껏 느껴왔고 감을 따서 나누워 주는 베풂도 터득했다.
옆으로 뻗는 가지들을 쳐내다 보니 미루나무 마냥 위로만 커가서 꼭대기에 달린 감은 따지를 않아 나무에서 홍시가 되어 아름다운 정경을 보여준 나무였다.
이렇게 좋은 감나무와 인연이 된 것은 감나무와 더불어 몇 해, 몇 달 동안 대화하며 “고진감래” 한 적이 있어서다
나이 들어 승진 공부 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며 굳은 결심 없이는 이겨내기 힘든 중노동이다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글귀를 책상 앞에 써 붙여 놓고 봄부터 몇 개월씩 책과 씨름하던 그때를 회상해본다
감나무에 감꽃이 피는 5월서부터 2층 골방에서 공부 하다가 눈이 침침 할 때나, 잡념이 생길 때면 창문을 열고 낮이나 밤이나 감나무와 둘이 대화하고, 위로를 받으며 머리를 식혔다
감꽃이 피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고 감이 익어갈 때 까지, 이 기간동안 들어 앉아 공부를 하면서 지칠 때는 아름다운 감잎 단풍을 보면서 피로를 풀었고, 시험이 임박할 무렵이면, 잎도 떨어져 완연히 들어난 주렁주렁 달린 선홍색 감을 보면서 보람의 결실을 생각하며 메마른 가슴에 푸근한 마음을 안겨줘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데 용기를 주었던 감나무였다.
그 후 직장 관계로 타지에서 생활하던 중 아내는 이제 감나무를 베여야겠다고 했다.
이유는 키가 너무 커서 온 집안이 감나무로 덥히고, 근래에는 많은 꽃과 잎, 열매가 모두 떨어져 집안마당 청소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잎이나 열매가 떨어지는 이유가 땅에 거름이 많다고 하여 다른 흙으로 교체해 보기도 하고, 뿌리에 막걸리를 부어도 보고 갖가지 처방을 해도 감나무는 한없이 커서 할 수 없이 감나무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 시켜야 했다.
감나무는 뿌리에서부터 껍질, 잎, 꽃, 열매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모두 약용으로 쓰이는 유익한 나무로 아쉽기만 하다.
감나무에 대한 생각이 왜 이렇게 떠오를까...
가을을 불태운 허전한 마음에서 일까?
잎 새를 떨구며 마음속을 비워내는 나무들을 보며, 쌓이는 수양 없이 바쁘기만 하는 나날 앞에서 감나무에 대한 생각이 가슴을 저 민다
나에게 인내심과 교훈을 안겨줬던 감나무가 없어진 텅 빈 자리를 이제야 깨닫게 되니 인생의 허무함과 외로움이 함께 밀려온다.
다시금 감나무를 심으련다.
이제라도 감나무와 더불어 헌신적 삶을 배우며 나의 여생을 전보다 나은 가치 있는 삶으로 승화 시켜 가리라.
2007. 11. 14.
소의 죽음
안순례
소가 분만 예정일이 며칠이 경과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끼 낳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소의 상태가 의문이다.
계절이 겨울철이라 소가 출산할 때는 지키지 않으면 송아지가 위험하니까, 사람의 도움이 꼭 있어야 한다.
드디어 송아지를 낳았는데 어미소가 식음을 전폐하고 통 먹지를 않는다. 미역국을 끓여주고 , 설탕물에 밀가루를 풀어 주어도 끝내는 되새김질도 않는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떠나지 않고 주위가 산만하다.
송아지는 수놈이고 짐작으로 보아 건강한 편이다. 우선 초유도 짜서 먹이고 발톱도 벗겨주고 엄마소의 젖에 주둥이를 가까이 하여 젖을 스스로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동물병원에 가서 약을 구입하여 먹이고 주사도 맞추고 하였어도 별차도가 나타나지 않아서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수의사를 불렀다. 하지만 수의사의 왕진도 헛수고인양 힘없이 서 있기만 한다. 온 정성을 다하여 간병을 하지만 병은 점점 깊어만 간다.
증평서 오신 수의사분이 소의 배설물을 검사해 보더니 간이 좋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이 와중에 송아지가 밖으로 탈출하였다. 상황이 너무 급한지라 도망 갈까봐 엉겁결에 송아지 꼬리를 잡았으나 송아지를 당할 힘이 없어 넘어지면서 바지무릎에 구멍이 나버렸다. 다행히 몇 사람의 힘을 빌어서 간신히 외양간으로 몰아넣기는 했다.
원래는 어미소가 송아지가 안 보이면 소리소리 지르고 야단인데 반응 없이 가만히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이른 아침. 오랜 고생만 하다가 출산한지 9일 되는 날 아침 일찍 나가 보니 어미소가 죽어 있었다. 그런데 송아지는 저의 엄마가 죽었는지 모르고 곁에서 머리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한이 없다. 송아지는 소 먹이는 집에다 50만원에 팔고, 큰 소는 궁리 끝에 논에다 묻기로 마음의 결정을 하고, 이웃의 도움으로 경운기에 실고 논에다 묻을 생각으로 근처 아스콘 회사 사장님께 부탁하여 장례를 지냈으나, 마음은 큰 짐을 진 것같이 무겁기만 하다.
왜 그런지 주위가 부끄럽고 말하기가 싫었다. 손해도 보고 속이 말이 아니다.
마음이 허전하고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가슴에서 맴을 돈다.
잊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때로는 지금도 생간이 난다. 그곳을 가면은 어느새 소 생각이
불현듯이 난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전임 교장 양 응 환
주성중학교 학생들이여!
여러분들은 지금 21세기 국제화 세계화
정보화의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다양한 삶의 문화를 체험하면서…
21세기를 지식 정보화 시대라고 한다면
미래에 펼쳐질 정보화 사회나 세계화의 무대는
분명 그대들의 사회가 되고 활동 공간이 될 것입니다.
주성중의 꿈나무들이여!
이글거리는 찬란한 태양을 응시하면서
가슴을 활짝 펴고 저 푸르른 창공을 훨훨 날아
미래의 무지개 빛 아름다운 꿈을 펼쳐가는 학생이 됩시다.
제군들은 반짝이는 영롱한 눈빛과
고동치는 심장의 끓는 피와 번뜩이는 叡智가 있고
힘찬 숨결과 우렁찬 함성, 씩씩하고 늠름한 기상이 있기에
그 순수한 마음과 혈기 넘치는 젊음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기에 그대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의 찬란한 미래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미래는
결코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오지 않는 법이며
내일이 있음을 믿고 준비하는 이에게만 온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국제화․세계화라는 문화사적
대 전화기를 준비하고 앞으로 전진 해 나아갑시다.
세계화된 선진 통일 조국의 역군이 될 미래를 꿈꾸면서…
어 머 니
오 춘 자
그리움을 삭히다 참을 수가 없어서 어두운 눈으로 더듬더듬 단축버튼을 눌러놓고는 내 말소리가 닿기도 전에 끊어 버리는 전화는 분명 어머니이시다. 내가 다시 전화를 걸면 이미 어머니 목소리는 젖어계셨고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린애 같은 애절함이 담긴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신다. “왜 엄마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그냥 보고 싶어서지” 다녀 온지 이틀 만에 보고 싶어 미치겠다 하시기에 다녀 온지 또 이틀. 보고 싶은 자식하고 함께 살자고 이리도 간곡히 바라고 또 바라건만 사위가 백년손님이라서 못 오시겠단다. 사위가 어려워 못 오시겠다는 말씀은 핑계이시다. 어머니는 70여년을 갈고 닦으신 세간이며 구석구석 당신의 손길이 배어있는 집을 내동댕이칠 수가 없으신 것이다.
6.25사변을 피해 갔다 돌아와서 다 타버린 잿더미위에 다시 벽돌을 쌓아 아버지가 손수 지으셨다는 이 집을 버릴 수가 없으신 것임을 나는 안다. 방 문설주에도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고 찢어진 벽지 사이로 흘러내린 흙냄새를 아버지의 향내로 아시는 어머님이시다. 이웃들로부터 새부자 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으며 사셨다는 어머니는 당신 남편이 지어주신 이 집을 차마 버리고 떠날 수가 없으신 것임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어쩌랴. 가꿀 힘도 지킬 힘도 어머니에게는 없으신 것을.
여지없이 나는 또 달려간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보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에게 내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가 온다는 전화를 받으셨으므로 12월의 싸늘한 날씨에도 어머니는 방문을 열어놓고 계시다. 추운데 왜 문을 열어놓았느냐고 하면 네가 오는 것 보려고 그랬노라 하신다. 나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안색은 더없이 안락한 표정으로 지극히 평온한 얼굴이 되신다. 이제 마악 엄마를 알아보는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의 행복한 얼굴이 그러하리라.
그 옛날 나도 그랬었지. 엄마가 안 계시는 밤이면 나는 벽을 향해 돌아누워 한 없이 울었었다. 어느 해인가. 날씨가 몹시 가물다가 비가 많이 와서 하늘바라기 논들이 벼 심기에 일손이 모자랐었다. 갑자기 일손이 모자라자 먼 데 사람들까지 데려다 모내기를 하는데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이라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모내기가 다 끝날 때까지 그 마을에서 계셨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는데 오늘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으신다. 어머니가 돌아오셔야 할 동구 밖 오솔길을 아무리 바라보고 또 보아도 시커먼 어둠이 성큼성큼 다가올 뿐 어머니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두움 저 넘어 어디 쯤 엄마가 오실 것만 같아 나는 마중을 나섰다. 발 몸 발 몸 꽤 먼 거리까지 왔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점점 어둠이 짙어오자 나는 무서워졌다. 비가 온 뒤라서 길은 질척거리고 먹장구름으로 뒤덮은 하늘은 칠 흙 같은 어둠만 내렸다. 저 만치 쌓아놓은 짚가리가 덩치 큰 괴물같이 보여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곤두서게 하고 가슴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도대체 엄마는 어디쯤 오시는 걸까.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돌아보지만 집에서도 너무 멀리 와있다. 진퇴양난이다. 울고 싶은데 무서워서 눈물도 나지 않는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길에서 서성였다.
나는 다시 걷기시작 했다. 얼마쯤 갔을까. 어둠속에서 수런수런 무슨 소리가 난다. 순간 한 발짝도 뗄 수가 없다. 정지될 것 같은 숨을 고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떡 장사를 나간 엄마를 위장해서 호랑이가 나타난다는데 혹여 호랑이는 아닐까? 온 몸을 공포에 떨면서 신경을 곤두세워 한껏 귀를 기울이니 사람들의 소리였다. 가슴속에 석산처럼 들어앉았던 돌덩이가 무너져 내리며 손끝 발끝으로 짜르르 힘이 빠져나감을 느끼는 순간 내 가까이로 다가온 사람들 속에 엄마가 계셨다. 깜짝 놀라시는 엄마를 보는 순간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밤 나는 세상에 두렵거나 부러울 것 없이 가장 평안하고 안온한 행복감으로 잠들 수가 있었다. 지금 내 어머니가 그 때의 내 마음과 같은 것은 아닐까. 그 옛날 어린 나에게 이 세상에 엄마가 전부였듯이 어머니에게 오직 나 하나 뿐은 아니신지. 그러므로 어제 보았는데도 눈물이 날 만큼 또 보고 싶으신 것일게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달려가는 것 밖에 없다.
김장을 앞두고
이 경 미
눈앞에 어지러이 날리는 낙엽들이 왜 이리 마음을 붕 뜨게 하는지 출근길에 나서면 이대로 끝없이 달려가고픈 욕구에 시달리곤 한다. 그렇게 날아가고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요즈음 잦아진 두 올케들의 전화다. 추석 때부터 집에서 김장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아버지께서 운을 띄워 놓으신 모양이다. 올케들의 걱정이 늘어졌다. 서투른 솜씨로 하는 것도 어렵지만 만약 잘못되면 한 두포기도 아닌 그 많은 김장 김치를 고스란히 버려야 되지 않느냐, 사먹으면 안되겠느냐 아버지께 넌지시 조율을 해달라는 눈치다.
어머니께서 가시고 처음으로 돌아온 김장철이니 같은 며느리 입장으로야 올케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지만 조심스레 운을 띄운 나에게 아버지는 사먹는 건 금방 질려서 싫으실 것 같다고 말끝을 흐리신다. 그러면 결국 올케들을 다독여 김장을 하게 만들어야하는 것은 고스란히 내 몫이다.
나 또한 여태껏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께서 일하는데 힘들다고 늘 김치를 해다 주셔서 완전 門外漢(문외한)이니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하지만 일단 살림 잘하는 친구의 노하우를 귀로 익히며 올케들을 설득했다.
‘각자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므로 주말에 모여 빠른 시간 안에 모든 걸 해치울 수 없으니 절인 배추를 사서 양념만 우리식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동안 어머니께서 하시던 것을 보고 배운 게 있을 테니 한번 해 보자’ 說往說來(설왕설래)속에 어쭙잖게 아는 것만 많아서 과연 제대로 될까 싶지만 그래도 그네들은 살림을 계속 했으니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맞대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아무튼 일단은 해 보기로 하고 날짜를 정하고 나니 이것저것 걱정이 앞선다.
결국 모든 사전 준비는 아버지 가까이에 있는 내 몫이 될 터이니 요즘 따라 남동생들만 둔 맏딸인 내 위치가 이처럼 부담스러웠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이렇게 커다란 사건까지 여기가 끝은 아니란 걸 알기에 한 고비 넘고 두 고비 넘어가는 시간들이 힘들지만 새삼 돌아가시기 전 환자에게는 체력이 가장 큰 밑받침인데 김장은 무리라고 말리는 우리들을 不得不(부득불) 몰아세우시며 일 년치 김치를 담그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힘들다 타박할 수도 없다.
하여튼 조만간 우리들 삼남매의 역작인 김장 김치가 탄생할 터인데 어떤 맛일지 걱정이 되면서도 ‘언니, 어머니한테 혼나지 않을려면 잘 담가야 돼요!’ 아마 드셔보시고 맛없으면 대뜸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며 늘 어머니 옆에서 꾸중은 제일 크게 들었으면서도 가장 많이 애틋해 한 큰 올케가 있어 조금 어설픈 김치가 탄생하더라도 내년엔 더 나아진 솜씨를 발휘하리라 기대해본다.
다음 주 주말엔 김장으로 인해 모처럼 온가족이 모여 아마도 김치 만드는 시간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시간이 반반이 되겠지만, 또한 매우 어설픈 김장을 담그겠지만 그래도 혼자 계시던 아버지는 모처럼 식구들 북적이는 소리에 절로 웃음이 나오실 테고 어머니는 영 신통치 않다 혀를 차시면서도 흐뭇하게 내려다봐 주시지 않을까?
그리고 제발 어머니의 그 맛은 다 흉내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먹을 수 있는 김치가 탄생하길 간절히 빌어본다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조각바위
이 복 남
몇 년 전에 보고 온 조각바위가 생각나 그 곳 옥화 대를 찾아갔다.
멋지게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조각바위의 형태는 그 형상 자체를 잃지 않고 변함없이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자리를 뜨지 않고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내 발길이 멈추어지는 바위는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며 소리 나지 않는 바위만의 이야기로 서로 먼저 사랑의 관심을 두어달라는 듯, 나의 눈길을 유혹하며 살며시 내 귓전에 다가와 자랑하는 멋진 자연그대로의 조각바위들-용의 모습이 새겨져있는 커다랗고 넓은 자연석으로 되어 있는 용 바위, 산의 형태를 드리우고 있는 산 바위, 금강산을 연상케 하는 금강산바위 등등은 그들만의 이름을 붙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각자 특색으로 뚜렷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모진비바람이 불어오면 비바람을 온몸에 받고, 눈보라가 닥쳐오면 눈보라를 받으며, 물살에 깎이고 바람에 깎여 멋진 형상을 만들어 자리 잡고 있는 조각바위들, 단단한 바위임을 증명해주는 듯 형상을 잃지 않고 제 모습을 지키고 있어 더 멋지고 아름답게 보였다.
잔디가 밟히면 밟힐수록 더 꿋꿋하게 자란다. 우리 인생도 풍파가 닥치면 닥칠수록 그 풍파를 온 몸과 강인한 정신으로 이겨내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바위처럼 단단하게 잔디처럼 꿋꿋한 인생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몇 년 전에 그 곳에 갔을 때는 물이 오염되지 않아 깨끗한 개울이었건만, 이번에 다시 찾아본 개울은 오염되어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던 그 개울이 아니었다.
오염된 물을 보는 순간 깨끗하고 맑았던 이 물이 왜 이렇게까지 더러운 물이 되어 흐르고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이 그렇게까지 오염된 데는 자연이 아닌 사람의 손에 의해 더럽혀졌음이 분명한데, 자연환경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흐르는 냇물을 그렇게 더럽히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저마다의 특색과 자기만의 형상을 지니고 아름다움과 멋짐을 들려주는 자연의 위대한 힘이건만, 자연의 힘에 비하면 작기만 한 인간의 작은 손과 마음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에 깨끗하지 못한 양심과 마음을 어떻게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냇물은 비록 오염되어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더러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흐르는 물에 몸을 담고 있는 바위는 멋진 그대로의 형태를 조금도 잃지 않고 바위마다 흔들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바위 그 자체의 단단함을 자랑 한다 .
멋지고 아름다운 바위를 뗄 수만 있다면 떼어서 가지고 오고 싶은 충동이 잠시 일었다. 그 바위가 아무리 멋진 바위라고 해도 만약 바위를 떼어서 집으로 가지고 왔다면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멋진 조각바위 만큼의 멋의 진가를 발휘 할 수 있겠는가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 조각바위를 보고 멋지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잠시나마 아름답고 멋진 조각바위를 뗄 수 만 있다면 떼어오고 싶은 욕심을 갖았던 나에게도 이기적인 생각이 아주 없지 않음을 알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연석인 조각바위가 비와 바람에 깎이고 자연 그대로의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람의 손에 의해 인공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만큼의 멋지고 아름다운 조각바위의 형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니, 대자연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낙엽 밟는 소리
이재부
부스럭부스럭 낙엽 밟는 소리가 산길의 적막을 깬다. 군데군데 하늘이 보이기는 하나 숲 속 산길은 음산하다. 퇴락(退落)의 슬픔도 말하지 못하고, 떨어진 낙엽은 벌써 산길을 덮어 버렸다. 고저 굴곡을 가늠하기 어렵도록 낙엽이 쌓였으니 천천히 더듬어 걷는다. 젊음이 남았으면 발로 차고, 구르며, 날려보고픈 장난의 유혹도 받겠지만, 마른 낙엽 같은 노구의 발길은 낙엽을 밟으면서도 종신(終身)의 허무를 느낀다.
살다 가는 것, 아름답게 살다 가는 것, 죽어서도 아름다운 것,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는 삶이 무엇일까? 끝없는 생각에 잠겨 산길을 오르고 있다. 1년도 살지 못하고 떨어진 낙엽이 무상을 말하는 듯 하지만 영생의 삶을 누리시는 선생님을 모셨다하기에 기리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님이 가꾸신 가사 문학이 만인의 가슴에 꽃으로 피어 누대(累代) 후인(後人)의 심금을 울리고, 향기를 전하니 어찌 영생(永生)이라 말하지 않으리요.
세인에 회자(膾炙)되는 가사의 구절 구절이 어려운 인생살이, 삶의 감성을 빛나는 보석 같이 응축해 놓았으니 세월이 흐를수록 추모의 정이 더하는 것이리라. 사미인곡, 관동별곡, 속미인곡……등 가사는 물론이요, 수많은 단가를 통해 인생의 애환을 풀어 내셨으니 만인의 벗으로 영생을 누리시리. 문장마다 구구절절 애절한 연정 같은 충심에 감동을 받는다.
“하룻밤 서릿김에 기러기 울며 갈 때 / 위루(危樓)에 혼자 올라 수정 발 걷고 보니 / 동산에 달이 솟고 북극에 별이 보여 / 임이신가 반기니 눈물이 절로 난다 / 맑은 빛 쥐어내어 봉황루(鳳凰樓)에 부치리라 / 누 위에 걸어 두고 온 세상 다 비추어 / 깊은 산 험한 골짝 대낮같이 만드소서” 님은 사미인곡 가을 편에서 연군지정(戀君之情)을 가슴 아리도록 읊어 내셨다.
산다는 것 참으로 힘든 길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무한히 아름다운 길이기도 하다. 전기에 의하면 정철 선생은 서울에서 나셨지만 그의 아버지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조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으로 이주하여 10년을 보냈다 한다. 이 기간동안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시문학을 배웠다.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또래의 유생들과 친교도 맺었다. 17세에 결혼하고 26세에 진사시에 일등으로 합격했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고 전한다.
사간, 집의로 시작한 벼슬은 우의정, 좌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벼슬길이 순탄치 못함은 치열한 당쟁과 임진왜란 같은 국난도 연유되겠지만 강직한 직언과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성격도 뺄 수 없었다고 전한다. 풍류와 술을 좋아하는 호걸의 성품을 누가 탓하리요. 술잔에 띄워놓은 시가(詩歌)의 향기를 보지 못한 처사이리라.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고관대작 벼슬길에서 수많은 사람이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 명성은 대부분 가라앉고 말았다. 선생도 치국의 업적이 아닌 천재적 가사 문학으로 후세인의 흠모를 받는다. 불멸의 작품으로 문학 창조에 터전을 닦고 아름다운 문화의 탑을 쌓았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없이 가지고싶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설파하였다. 문화의 힘은 오늘에 사는 우리뿐 아니라 미래 후손에게도 기쁨을 주며, 자긍심으로 전수되리라.
낙엽을 밟고 올라 고인을 대하오니 정분은 어디 가고 봉분(封墳)만 쓸쓸하다. 낙엽을 밟는 소리가 선생님 시 읊는 소리로 들린다. 묘역도 돌아보고, 비석도 살펴본다. 시선(詩仙)의 깊은 마음 내 어이 알까 만은 석양이 만추에 누워 낙엽의 한을 듣고 있으니 나 또한 낙엽 밟는 소리로 선생님 시가를 듣는다. “쓴 나물 데운 물이 고기도곤 맛이 있세/ 초옥 좁은 줄이 긔 더욱 내 분이라/ 다만당 임 그린 탓으로 시름겨워 하노라.”
묘소에 노을 들어 하산을 재촉하니 낙엽을 밟는 소리 가을을 쓸고 간다. 임 그린 사모의 정은 어디에 두고 갈까. 굽은 산길에 낙엽 밟는 소리만 따라온다.
(2007년 11월 3일 정철 선생님 묘소를 다녀오며)
가을호수
이 종 준
가을빛 깊어진 들녘에 차를 세우고 곱게 물든 산과 하늘, 그림 같은 마을까지 잠겨 있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봄, 여름, 가을 어느 계절도 편애하지 않고 품어 주는 가을호수이지만, 하늘만큼 맑아진 호수엔 풍파의 흔적도, 삶의 모습도 다 지운 것 같지만 깊이 가라앉은 호심(湖心)엔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가라앉아 있을 것만 같다.
긴 삶의 여정(旅程) 속엔 조그만 한 사연들이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도 많고, 끝없이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끈질긴 추억도 따라다닌다. 그리움 가득한 아름다운 추억이나, 마음 아픈 이야기는 감추려 해도 수시로 떠오른다. 살아가는 사람의 표정도 저 아름다운 호수 같이 깊은 내면과 표면이 다르리라. 가을 호수가 품고 비춰 내는 아름다운 가을풍경은 내면일까, 표면일까. 수면이 반사하는 산경(山景)이 실체보다 환상적이다.
젊음의 꿈을 키웠던 시절이 생각난다. 책 한권을 끼고 소를 몰고 이 언덕에 찾아오면 나와 소는 완전 자유이다. 고삐를 풀어놓은 소는 지천인 풀을 뜯고, 나는 제방에서 책을 열심히 읽는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어두움이 밀려오면 집으로 온다. 어느 땐가 아랫마을 옥수가 찾아와 “오빠’하며 내 등을 밀치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운 적이 있었다. 소가 없어지는 것도 모르고 해가지고 땅거미가 내리는 밤 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웠다. 아무리 소를 찾아보아도 소가 없었다. 몸이 빠짝 달아오르고 등에는 식은땀이 흐렸었다.
아! 이일을 어쩌나 이리저리 헤매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오는데, 집에서 야단이 났었다. 대문 뒤에 숨어서 보니까, 이웃집 주인께서 우리소가 옆집 콩밭에 들어가 다 익은 콩을 많이 뜯어 먹었으니 콩 값 내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어머니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다. 집으로 들어 갈수도 없고, 이일을 어쩌나 곰곰이 생각하다, 살그머니 신발을 감추고 내 방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여 보아도 잠은 오지 않는다. 왜 그렇게 배가 고프든지 그래도 꽃처럼 예쁘고, 귀엽기만 한 옥수와 밀어를 속삭인 것이 황홀 해 그 생각 속에 밤을 지새웠었다.
그 후로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만나서 밤이 가는 줄 모르게 속삭였으며 우리의 첫사랑은 이렇게 싹트기 시작했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방학 때면 만나서 푸른 꿈을 수놓으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이다음에 우리는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섬을 찾아서 꽃도 심고, 새도 기르며 맑은 샘 파놓고 행복의 복음자리를 마련하자고 약속했었다. 내가 다시 서울로 갈 때 마다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들던 옥수는 여고를 졸업하고 미국의 이모 댁에 갔다 온다 하고는 소식이 없었다.
얼마 후 고향에 와 그의 집에 찾아가 어머니에게 옥수 어디 갔어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린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자꾸만 물으니까 옥수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우리가 늘 거닐던 호수가로 갔었다. 나를 자리에 앉게 하고는 한숨을 수 없이 쉰 후 한참 만에 “저 하늘나라로 갔다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뭐라고요?” "다 피지도 못한 채 수 많은 사연을 남기고 이 호수에 침전물이 되었다네"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을 조이는 슬픔에 소리 내어 흐느껴 울었다. 어두움 이 깔린 호수가 에서 밀려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차가운 가을바람을 않고 밤 새것 울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사십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호수 깊은 바닥에 내 첫사랑 이야기가 침전물 같이 쌓여 있나보다. 거울같이 맑은 호수에서 청순하고 깨끗한 첫사랑의 추억을 건져 올린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가을호수에 이름 모를 철새들이 남실대는 물결위에 아름답게 수를 놓고 외로운 물새 한 마리는 조잘조잘 구슬프게 지져 귄다. 피다가 꺾어진 들국화 한 송이가 초라하고 측은하게 보인다. 들국화 송이를 집어 호수에 던지면서 물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깊어가는 가을 호수에서 내 인생을 더듬어 본다. 인내와 사랑으로 베풀지 못하고 오만하게 지내온 과거가 부끄럽다. 어느 시인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를 저어주오……”라 하지 안이 했던가. 추억은 아름다워도 삶의 침전물인 것을 느끼면서, 황혼이 물결을 곱게도 물 드려 놓은 가을 호수. 이제 잠시 머물던 자리에서 일어나 저 언덕 넘어 로부터 불어오는 가을바람 따라 발길을 돌린다.
백령도 산책
조 경 진
하늘과 바다가 까만 실금으로 맞닿아 있다. 먼 수평선 넘어 백령도를 향한 쾌속선에 몸을 실었다. 바다는 들뜬 마음을 달래는 내 마음 같이 가볍게 일렁이고 있었다. 거친 뱃길로 이름이 나 있는 백령도 가는 물길, 연안을 벗어날 때 까지 바다는 낮고 작은 하얀 지느러미만 물 밖으로 조금씩 내밀어 보일뿐 잔잔했다.
배가 연안을 벗어나자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검푸른 등을 세우고 격렬한 몸짓으로 달려들었다. 대책 없이 바다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바다는 자연에 도전하던 교만한 인간들을 굴복시키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포효했다. 바다를 늘 낭만으로 생각하고 그리워했는데 노한 바다의 모습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멀리 지나가는 어선이 파도 속에 묻혔다 떠오르며 가쁜 숨을 쉬는 듯 위태로워 보였다.
출발할 때만 해도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차던 선실은 배가 요동 칠 때마다 날카로운 비명이 예서제서 터지더니 시간이 가며 조용해진다. 모두 의자를 꽉 잡고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에도 파도가 치지 않는 날이 없는 듯하다. 파도에 밀리고 때로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넘기며 생을 이어가지 않은가. 삶은 살얼음판을 걷는 불안한 것, 바람 잘 날 없고 미래예측이 불가능한 불확실성이 우리네 삶이다. 물거품 같은 덧없는 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거대한 바다위에서 순종하느라 더욱 작아지는 나를 본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 엎드린 섬,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했다는 백령도. 외로움이 속속들이 배어있다. 바다를 울타리 삼아 버텨온 땅, 깎이고 부서지며 견뎌온 세월이 섬을 둘러싼 기암괴석으로 서 있다. 모두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린 가슴으로 절절한 사연을 안고 묵묵히 서있다.
북쪽 바다로 눈을 돌리면 인당수가 멀리 보이고, 그곳을 바라볼 수 있게 심청각이 서있다. 우뚝 우뚝 솟은 기암들이 북쪽을 향하고 있음은 심청이가 흘리던 눈물과 실향민의 서러움을 애처롭게 여겨서라고 하니 수 만 년 전 이미 우리의 운명을 예측했단 말인가? 수많은 전설과 설화에 귀 기울이며 아득한 북쪽 땅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에 자욱한 안개가 북녘 땅을 감싸고 있다. 쾌청한 날엔 몽금포 장산곶이 보인다고 하는데 그쪽을 향해 몽금포 타령이나 흥얼거려볼까.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보겠네.’ 소리가 자꾸 목안으로 기어든다. 애타게 그리워하는 수많은 실향민의 님은 언제쯤이나 만나보려나. 이제는 그리움이 절어 희미한 기억 속 옛 사람으로 남아 있을 텐데.
해안선을 따라 느린 발걸음 하며 눈에 넣을 것, 가슴에 담을 것 두루 챙기려 하는데 두문진에 와서는 괴이한 자연의 조화에 넋이 나간다. 어찌 보면 홍도의 기암과 해운대의 단애를 합쳐놓은 듯 한 풍광이다.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 서있는 기묘한 바위 숲은 모두가 독특한 제 모습을 뽐내며 전설과 설화를 몸에 안고 서있다. 석양에 붉게 물든 개성 있는 바위들의 위용을 담기에는 내 감성이 따르지 못하여 표현할 길이 없다. 옛 선인이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극찬한 선대암을 비롯하여 코끼리 바위, 촛대바위, 장군바위 등 모두 이름에 걸 맞는 형상이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린 마음으로 벌거벗고 서있는 바위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붉은 바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저 바위들도 부르트고 갈라진 틈새로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파도를 달래며 낡아가는 세월을 견디는 것이겠지. 오랜 세월 바람과 물결에 할퀴고 뜯겨져 검붉은 뼈대만 드러낸 바위의 모습이 처연하다. 말없이 제 몸 맡기고 서있는 바위는 체념일까? 달관일까? 한참을 묵상에 잠겨 해안을 걸었다.
뉘였 뉘였 지는 해를 쫒아 해변을 걷다가 노을빛에 내 마음도 붉게 물들고 말았다. 붉은 해가 거센 파도에 몸부림치다 피를 흘리는가? 온통 핏빛이다. 세찬 파도에 두들겨 맞은 콩 돌의 속울음도 피를 토해내 바다를 물들이고 있는가 보다. 거센 파도에 밀렸다 잦아드는 콩 돌에서 잔잔한 울음소리 들린다. 아니, 낮은 노래 소리가 들린다. 제 몸 깎아내며 세월을 껴안는 영혼의 소리다.
얼마나 오랜 세월 제 몸 갈고 갈아 콩 돌이 되었는가. 크나큰 바윗돌이 깨지고 부서져서 모난데 한 곳 없이 둥글게 세월을 두르고 있다. 모진 마음, 성냄, 탐욕과 이기심 다 버리고 스스로 갈고 닦아 온유해진 콩 돌을 바라본다. 파도에 밀리며 서로 몸을 부딪치며 내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면 울음이 아니라 화음이 잘 어우러진 합창이다. 아스락 바스락, 살그락 달그락 세월과 함께 부르는 노래. 콩 돌의 합창은 자연의 심오한 화음이다.
콩 돌 해안에서 바다의 교향악에 수많은 콩 돌 합창단의 합창이 쉼 없이 울려온다. 수없이 밀고 밀리는 파도의 다음계. 인당수에 뛰어들던 심청이 눈물.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넋의 울음, 고향을 곁에 두고 가지 못하는 실향민의 탄식 까지 모두 어우러진 울음인 동시에 진혼곡과도 같은 합창을 듣는다.
저녁노을도 스러지고 검은 파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소리쳐 일러주는 말을 듣고 있다. 잊혀져가는 사람들, 그들이 세상에 남겨놓은 아픔을 들려주고 있었다.
도토리와 추억 하나
조순희
가을로 물들어가는 지금, 여름이 아쉬운 양 마지막 옷자락을 살포시 거두어들이는 계절입니다. 가을의 정취에 빠지기라도 한 듯 어느 날 등굣길에, 나도 모르게 딴전을 피우듯 오솔길로 들어서 숲을 둘러보았습니다.
어느 체격 좋은 아저씨가 등산복차림으로, 모자는 옆으로 삐딱하게 쓰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또 한 손에는 도토리 자루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저씨의 도토리 자루를 보고서 나무 밑을 내려다보니 한눈에 나같이 자그마하니 야무지게 생긴 도토리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꼭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 때는 못 속이는구나. 사람들이 살고 가는 것처럼 도토리도 이제 좋은 시절 다 버리고 생기를 거둔 채 알암되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구슬픈 작별이라도 하듯 쓸쓸한 알몸으로 땅에 떨어져 사람의 품안을 찾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도토리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객인들을 산장으로 끌어들이고, 가을을 알리듯 도토리 소동으로 한마당 축제처럼 나무 밑을 찾게 하는 그 풍경에, 나 역시 힘들었던 묵에 얽힌 흔적을 돌아다보니, 돌아가신 시부모님이 그리워지며 좋아하시는 묵을 원 없이 못 해 드린 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묵이라면 누구나 다 좋아하지만 시부모님은 도토리묵을 유난히 좋아하셨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려운 시절이라 돈을 주고 사다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귀한 손님이 오시거나 어른들 생신이 돌아오면 동네 분들을 모두 모셔놓고 주로 묵밥으로 점심을 해 드립니다. 또한 생각지 않게 갑자기 손님이 오시면 찬 없이 해내는 음식으로, 부담 없이 간단하게 내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주로 손님 대접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벼농사 수확해서 토광에 저장하듯 도토리 계절이 오면 모든 일손 제쳐놓고 망태기 자루 메고 산으로 떠납니다. 더 이상 도토리가 없을 때까지 여러 날을 두고 주어옵니다. 흔히 도토리는 굴밤도토리가 있고 속쏠이라는 도토리가 있습니다. 굴밤 도토리는 빠져있는 것을 주어 오지만 속쏠이 도토리는 얕은 산 갈잎나무에 열려 빠진 것을 줍기도 하고 쏙쏙 빼오기도 합니다.
굴밤 도토리로 만든 묵과 속쏠이로 만든 묵은 색부터 다르며 맛의 차이도 있어, 속쏠이 묵의 맛이 더 독특합니다. 속쏠이 묵을 해 드리면 시부모님은 빛깔만 보시고도 속쏠이 묵이구나 하고 더 좋아하시며 갖다 드린 묵상을 앞으로 당겨 드시곤 했습니다. 너무 좋아하셨기에 잊지를 못합니다. 어렵던 식생활에 좋은 먹을거리였고 어른들께서 좋아하시기 때문에, 가을이 되면 도토리를 주어다가 일부는 보관하고 일부는 묵을 해서 파내기 옹기그릇에 저며 썰어서 물에 담가 시원한 쌀광에 보관하면서 맛맛으로 간간히 해 드리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도토리가 늘 일정한 양의 수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풍년이 될 때도 있고 흉년이 될 때도 있습니다. 때문에 계절에 따라 못 해 드릴 때도 있었습니다. 못 해 드린 해에는 치맛바람 숨죽여가며 눈치 살피느라 마음 편치를 않았습니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풍족해진 생활로 싫증이 나도록 해 드릴 수 있을 텐데, 세월이 다르니 어쩔 수가 없고 지난 날 더 못 해 드린 것이 죄인처럼 가슴 아픕니다.
요즘은 시장에 가나 식당에 가나 묵은 흔히 볼 수 있고 먹고 싶은 대로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거리든 시장이든 판매하는 곳에는 양념이 준비되어 있어 그 자리에서 맘껏 먹을 수가 있습니다. 살기 좋은 시절에 시부모님 못 모시고 아주 어려울 때에 모셨던지라 다 못 해 드린 것이 마음에 병으로 남았습니다. 어디서나 묵을 보면, 어른들께서 좋아하셨다는 생각에 살아계셨을 때의 그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며 지워지질 않습니다.
도토리 하나로 35년 만에 그리움과 애틋함을 마음속 가득 채우면서, 오늘 저녁은 쫀득하니 맛깔스런 도토리묵에 추억 하나 버무려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버지의 사랑
최미경
퇴근길 과일 가게 앞을 지나오다 불빛에 비친 홍시를 보며 세월이 빠르기도하지 벌써 홍시가 나왔구나. 속살이 훤히보이는듯한 먹음직스러운 홍시를 사서 들고는 문득 여학교때 배운 박인로의 조홍시가 한 구절이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磐中 (반중) 早紅 (조홍) 감이 고아도 보이난다
柚子 (유자) l 안이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난
품어 가 반기리 업슬새 글노 설워 하나이다.
쟁반위에 홍시가 고와서 품에 품어가도 반가워 해 줄 부모가 이미 계시지 않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는 시다.
남편과 아이들이 저녁식사를 하고는 거실에 둘러앉아 홍시를 한입씩 베어물고는 낮동안의 수고와 고단함을 한보따리씩 풀어낸다.
빨간 감을 보며 문득 이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 생각에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
약주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훤칠한 외모에 호탕한 성품을 가진 따뜻한 분이셨다. 한잔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가지 꺾어 수놓아가며 또 한잔 먹세 그려! 옛날에 태어나셨다면 송강 정철 못지않은 풍류 가객이 될법도한
노래 좋아하고 술좋아하시는 풍류를 즐기시는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들일을 가실 때면 꼭 나를 지게 위에 태워 주셨다. 아버지가 일을 하시는 동안 나는 넓은 바위에 앉아서 소꿉놀이를 하다가 들꽃으로 만든 밥을 아버지께 가져다드리면 하던 일을 멈추시고
“아 맛있다.”어린딸아이의 장단을 맞춰 주셨다. 참꽃(진달래)을 꺾어서 내 손에 쥐어 주시고는 지게 작대기를 받쳐 들고 일어서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게위에서도 난 장난스런 몸짓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떨어진다고 꼭 잡으라고 당부를 하시며 총총히 뒤따르셨다. 얼마나 행복한 기억인지 지금도 생생하다. 들일 다녀오신 아버지는 심부름 값 10원을 쥐어 주며 막걸리 한 사발 받아 오라고 주전자를 들려주셨다. 인심 좋은 가게 아주머니가 한 주전자 가득주신 술은 들고 오는 동안 찰랑찰랑 넘쳐서 주전자 꼭지에 입을 되고는 몇 번씩 쭉쭉 빨아 먹으며 집으로 들고 왔다. 달작 지근 한 술이 어린기억에 참 맛있었던 것 같다. 한손에는 주전자를 다른 한손에는 라면땅을 사서 오면
아버지는“아이구 우리 강아지 수고 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곤 했다.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 나의 어린시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시지는 않았지만 우리집 사랑방에서 이웃어른 들과 노동법이나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5일에 한번 열리는 가은장날 거나하게 취하셔서 막내딸 준다며 자전거 뒤짐받이에 싣고 오신 것은 생전 처음 맛보는 튀김 닭이었다. 누런 밀가루 부대에 쌓여있는 튀김 닭의 맛은 세상에 태어나서 맛보는 가장 진귀한 음식이었다. 유년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자라 성년이 되기 전에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제 새끼가 건강하게 부화되어 살아갈 수 있을 때 까지 지키는 가시고기 생각이났다. 못다 지켜주고 먼 길 가신 아버지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작은 홍시 한 쟁반 대접할 아버지 가 계시지 않음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비할까?
아!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가 태워주시던 지게를 타고 돌아오던 그 시절이 간절히 그립습니다.
스카프 자락에 머문 여심
최용규
가을을 보내기가 서러워서 일까, 추위를 몰고 올 비가 찬바람을 맞으며 내리고 있다. 땅에 떨어져 바람에 구르는 낙엽들이 가랑비의 설음에 젖고, 속옷까지 벗기어진 나목의 가지 끝에는 눈물 방울이 올올이 맺힌다.
가을의 끝자락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랑비의 빗줄기가 마음을 타고 흘러내릴 때면 아내는 묵은 옷장 속에서 새로운 계절을 하나둘씩 꺼내놓기 시작한다. 장롱 속 깊은 곳에서 외출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베이지색 바바리코트가 마침내 현신하게 되고, 가을 단풍잎을 연상케 하는 붉은색 실크 스카프도 따라 나선다. 바바리코트에 실크스카프 그리고 브라운 칼라의 핸드백은 늦가을에서 초겨울 문턱을 넘어가는 때에 맞춘 아내의 완벽한 코디중 하나이다.
가을은 오색 단풍과 잘 익은 과실이 있어 풍성하지만, 한편으로 수확을 끝낸 들녘과 잎새를 모두 떨구어낸 나목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애잔하게 그리고 허허롭게 만든다.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이때만은 가슴 절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무들은 계절이 바뀌면 입었던 옷을 벗지만 사람은 가을이가고 겨울을 맞으면서 옷을 하나 둘 껴입기 시작한다. 아내는 꺼내 놓은 바바리코트에 맞춰 실크 스카프를 목에 두르거나 혹은 한쪽 어깨에 살짝 덮어 포인트를 주어 한껏 멋을 낸다. 그리고는 거울에 뒷모습까지 살피며 옷맵시에 신경을 쓴다.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보면 여인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나르시스트란 생각이 든다.
역사를 돌아보면 스카프에는 뭇 남성들을 사로잡는 마법의 힘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 긴 창을 들고 마상시합을 하는 모습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감상한 적이 있다. 기사의 창끝 가까운 위치에 스카프가 매어져 있다. 스카프는 기사가 사모하는 레이디나 귀부인이 건네준 사랑의 징표이다. 기사는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출전한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는 마상 시합에서의 패배는 죽음이 아니면 최소한 중상이다. 그래도 혈기 왕성한 젊은 기사들은 용맹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싸움에 몸을 던진다. 최후의 승리자인 마상시합의 영웅에게 돌아가는 찬사와 물질적 보상은 그에게 스카프를 내어준 레이디나 귀부인에게 바쳐진다. 그녀는 용감한 기사를 애인 혹은 사모하는 사람으로 두었다는 이유 하나로 명성을 누리는 것이다. 마상시합의 영웅과 그가 사모하는 여인 사이의 이야기는 음유시인의 노래로 지어지며 한 시대의 전설로 남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유교 규범에 묶여 살아야 했던 사대부댁 규수가 이웃의 양반댁 도령에게 품은 연정을 전하기 위해 손수건을 이용했다는 민담이 전해지고 있다. 청춘 남녀의 자유연애가 허용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어느 사대부댁의 규수가 이웃 양반댁 도령의 준수한 외모를 엿보게 되었다. 연정을 느낀 규수는 몸종을 시켜 자신의 체취가 묻어나는 손수건을 도령에게 전하게 하였다. 순백의 비단 손수건에는 규수가 붓을 들어 정성껏 쓴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글자는 적(籍)자 였는데, 뜻을 파자하면, “ 이달 스무하룻날 저녁 (昔) 대나무 숲(竹)으로 오셔서(來) 소녀를 만나 주십시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교양을 지닌 규수는 글공부에 힘쓰고 있는 양반댁 도령이니 자신의 뜻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양반댁 도령은 그녀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규수가 기다리던 그 시각,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규수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양반 유생들이 글공부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인 것으로 추측해본다. 그러나 이야기 중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여인의 손수건이 사모하는 정을 전하는 소통의 도구이자 메시지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손수건은 서양 중세 기사이야기 속의 스카프에 해당된다. 동서양에서 공히 여인의 몸을 감싸던 스카프가 그녀의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메신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스카프에는 남성의 열정을 이끌어 내고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혹은 금기를 깨는 모험을 감행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주목해야한다.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스카프는 그냥 한 장의 천 조각이 아닌 것이다. 그녀의 체취가 서려 있고 또 그녀의 사랑과 연모하는 마음이 머물러 있는 한 스카프는 그녀의 분신인 셈이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부는 가을날, 외출을 준비하며 화장을 하느라 바쁜 아내의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입고나갈 옷차림으로 바바리코트와 실크 스카프가 곁에 놓여 있다. 붉은색 스카프를 보며 중세기사와 레이디의 뜨거운 사랑을 떠올려본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는 중세 기사처럼 목숨을 던지는 그런 사랑을 하거나 하늘의 별을 따다 바치는 열정을 쏟지는 못했지만, 아내의 마음조차 읽지 못할 만큼 센스가 없지는 않았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또 앞으로는 더욱 그 마음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를 평생 아내의 곁에 맴돌게 한 인연의 끈을 스카프의 이미지와 은유로 곰곰이 되새겨 볼 생각이다.
얼굴 화장의 마지막을 립스틱으로 마무리 하며 포인트를 주듯 아내는 바바리코트 깃 위로 붉은색 스카프 자락의 매듭을 곱게 묶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다. 아내의 환한 미소와 생기 넘치는 몸동작이 붉은 스카프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스카프 자락으로 한쪽 어깨에 마지막 포인트를 주며, 아내는 내게 윙크한다. “여보, 나 예뻐요”
수줍은 가야금
최윤정
서둘러 아이들의 등교할 채비를 해주고 먼저 집을 나선다.
학교 앞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자모들이 돌아가면서 녹색어머니를 서는데 마침 차례가 되었다.
녹색깃발을 들고서 오고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등에, 양손에 무거운 가방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주어진 삶의 무게인것만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짠해 온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내 눈에 띄인 여학생이 있었는데, 두 손 가득 들고 있는 가방 말고도 크고 길다란 가방을 어깨에 들러 매었기에 호기심에 뭐냐고 물어보니 가야금이란다.
아, 가야금.
지난날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서 끼니걱정에 손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어린자식의 말문이 터져 “엄마! 엄마!‘ 하고 불러대니, 연탄불을 방에 피워놓고도 모진목숨 끊지못해 그 때부터는 이를 악물고 버티셨단다.
남의집 허드렛일은 물론이고 공사판에 나가 못 뽑는 일까지 안해본 것 이 없다는데,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살아낸 것이 힘이 되었던지 내가 중학교를 입학할 때쯤엔 살림 걱정에서 한시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생활고에만 바쁘시던 어머니였는데, 하루는 집 근처 있던 국악원에 구경가셨다가 이것 저것 배우기 시작하면서 삶에 변화가 왔다. 민요도 배우고 가야금도 익히면서 조금씩 목청을 높이시더니 옛것에 흠뻑 젖어들은 것이다.
지금이야 환갑집이나 칠순잔치를 가면 노래방 기기들로 분위기를 맞추지만 그때는 장구가락에 민요로 잔칫집의 흥을 돋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요즘 말로 초대가수 인 셈이다.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구성지게 시작을 해서 종일 그 집안의 분위기를 돋우는 일을 하셨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오실때면 잊지 않고 싸오시는 떡이며 부침개를 보면 내 생일인듯 신이났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입가에 흥얼흥얼 달고 다니는 민요 한자락에 덩실덩실 따라오던 어머니의 환한 미소는 보름달 만큼이나 일품이었다.
가끔은 청아한 소리를 내는 열두줄의 가야금을 멋스럽게 펼치고는 아리랑이며 늴리리아를 튕기시기도 했는데, 호기심에 눈을 못 떼는 딸을 위해 어쩌다 한 번씩은 작은 손가락을 가야금 위에 올려놓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그 방면으로 재능이 있으셨던지 가끔은 청주시의 큰 행사에 초대되어 흑백티브이 시절 화면을 통해 보기도 했고, 모충교 아래에서 단오행사가 벌어질 때면 무대에 서서 공연하는 모습을 뵙기도 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보는거 듣는 것만으로도 몸에 익숙해졌던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설픈 손짓으로 흉내를 내었다.
한번은 교내 재능발표회가 있었는데 무슨 뱃심인지 가야금으로 참가하겠다고 신청서에 덜컥 이름을 적어내었다. 지금은 학교에 가면 없는 악기가 없을 정도지만 예전에는 참가자가 악기를 가져오는 것은 필수였다.
집에 있는 가야금을 싸가지고 가면 편할 것을. 당신은 민요가락이 좋아서 해도 옛날부터 기생이 하던것이라, 너는 절대로 안된다고 완강히 반대를 하셨기에, 가지고 가기는커녕 말도 못 꺼냈다. 하지만 어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 있으랴. 엄마의 친구분께 간절히 청을 넣어 어머니껜 비밀로 하고 가야금을 빌려와 대회에 참가했다.
가야금보가 따로 없어 커다란 보자기로 대충 가린것을 풀어내고, 제 키보다 커다란 가야금을 품에 안고, 노란 저고리에 꽃분홍 치마를 질끈 동여매고는 고무신도 없는 버선발로 무대에 올랐다.
시작 소리와 함께 가야금을 튕기고 민요가락도 두어 소절 불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노랫소리는 소리가 되어 나가질 못하고 입안에서만 맴맴 돈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시던 담임선생님께서도 많이 안타까우셨던지 노래를 하려면 크게 해야지 그렇게 용기가 없냐는 말에 아무말도 못하고 잘익은 고추처럼 빨갛게 얼굴만 물들였다.
실수 연발이긴 했어도 참가한 의지를 높이 사셨는지 장려상을 받았다. 후에 학교 행사에 독무대를 제공받기도 했지만 두 번 다시 부끄러워 무대에 못 섰음은 말할것도 없다.
그 후로 잔칫집들의 풍경이 달라지면서 어머니의 외출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어머니의 입에서 흥얼거림이 사라지면서 민요가락에 옷을 입히던 가야금도, 멋들어지게 굿거리나 자진모리로 장단 맞추던 장구소리도 덩달아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도 친정 다락방을 찾아보면, 한 구석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겠지만, 어머니의 흘러간 세월따라 저들도 제 목소리를 잊은 지 오래다.
금박이 찍힌 고운 한복을 입고 한 손엔 장고를 들고 다녀올테니 집 잘 보라고 소리지르며 분주히 움직이시던 어머니모습이 그립다. 지난시절처럼 잘 닦고 조이면 잃어버린 어머니의 웃음도 찾아질까......
돌아오는 주말에는 수건 한 장 뒤집어 쓰고 묵은 악기들과 씨름 한 판 벌어야 할까 보다.
공연히 먼지나 일으킨다고 야단은 하시겠지만 그래도 어머니 가슴에 다시 환한 보름달이 뜨지 않을까?
문경새재
홍 성 란
길은 여전히 아름답고 쓸쓸했다.
구불거리는 저 길은 인생길과 닮아 보인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고개위에서 바라보는 아래 세상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고 덧없어 보이기도 하다.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에 있는 문경새재를 찾아왔다. 지금 고개 길은 넓어지고 퍼져 훤해졌다. 그 옛날 굽이굽이 눈물이 난다는 한의 되새김 보다는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려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구나 단숨에 고개 위까지 오를 수도 있는 문명의 상전벽해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리 외형이 변했다 해도 지나간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굳은살처럼 반들거리는 산길도 누군가가 지나간 발자국이 있었기에 뒷사람이 오를 수 있는 것이며, 인생에서도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가 있고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 일행은 새재 관문 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조령관에서 출발하여 조곡관, 주흘관이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바라볼수록 빼어난 경관이요 천혜의 요새답게 신묘한 곳이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검푸른 숲에선 아침안개가 뽀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옛길은 우거진 숲과 풀에 가려 엄두가 나지 않아 큰 길로 들어섰다. 길엔 마사토가 곱게 깔려 있어 오랜만에 맨발로 걸어본다. 장마가 막 끝난 직후라 땅이 눅진해서 알갱이가 발바닥에 닿을 적마다 전해지는 보송보송한 감촉이 싫지 않았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걸었을 옛사람들을 생각하면 호사스런 나그네 길이 아닌가. 누군가 세월은 가고 추억만 남았다고 했다. 과거를 보러 새재를 넘나들던 선비들과 상인들이 여독을 풀고 물류를 교환하며 머물던 조령 원 터와 주막, 신. 구 경상도 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빛바랜 교귀정터 앞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또 실감한다.
이룬 자와 이루려 했던 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아마도 이루지 못한 자는 한 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정을 나누고 고뇌에 찬 한숨을 쉬었으리. 이룬 자 또한 더 높은 곳을 향해 영욕의 시간 속으로 걸어갔으리. 덩그마니 남은 공간 속엔 적막감만 감돈다. 결국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흙으로 돌아 갈수 밖에 없는 것이 유한한 인생길 아닌가 싶다.
어느새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조곡폭포 앞에 다다랐다. 20미터의 3단 줄기로 장쾌하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한여름의 열기를 걷어낸다. 물소리를 귀로 들으며 눈과 가슴은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산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은 나무 수로를 따라 통로를 거치고 물레방아로 떨어져 구른 다음 발길을 따라 흐른다. 소리 또한 점점 작아지면서 유순해진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순리, 산다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단계를 거쳐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여정은 어쩌면 삶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인간의 길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단 한 번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인간사가 어디 그리 흔하랴. 한 방울이 모여 강물을 이루고 세상이라는 바다로 가기까지 수없이 많은 아픔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문경새재라는 이름 속에는 우거진 숲만큼이나 검푸른 한이 있지 싶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한이 산을 넘었던가. 희망과 좌절, 영광과 애환, 만남과 이별이 굽이굽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으리. 영남 선비와 상인 그리고 뭇 민초들의 한이 어찌 자신의 성공만을 위한 몸부림이었으리. 부모를 생각하고 가족과 가문을 생각한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은 일생을 전투전력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 작은 잎사귀 한 잎에도, 흐르는 물방울에도 그만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슬픔이 있기에 삶에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것이리라 생각 된다.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갔다. 발바닥에 박혔던 알갱이들은 물줄기를 따라 떠나고 흔적만이 남았다. 모래와 나는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졌다. 그리고 알갱이는 물을 만나 만남의 역사를 이뤘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어딘가로 흘러감으로 쌓이지 않는 우주의 순환.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다 아니 변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나고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곳 문경새재에는 돌 하나 잎 하나, 한그루의 나무에도 옛사람들의 따듯한 정과 사연, 눈물과 한이 풀 섶을 헤치고 역사가 되어 나그네의 가슴 속으로 촉촉이 스미고 있었다.
첫댓글 교수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막 서울 갔다가 홈에 들어와서 보았어요.저희들이 할것을 교수님이 직접 해 주시니 송구스럽습니다.
교수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