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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우지 못한 끔직한 우리의 현대사 제주4.3사건
(*이승만은 백성이무지해서 친일파를 고용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친일파를 숙청하자 북한이 남한을 점령하는 과정에 이를 목숨 걸고 사수할 인맥이 친일파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즉 해방 후에도 남한의 경찰은 과거 친일파들이었고 제주도는 80%가 친일파 경찰이었다. 이게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문제는 우리 과거역사의 교훈을 알지 못했거나 망각한데서 비롯된 참극이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현재에 속하는 역사가와 과거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대화다.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국가의 명멸을 배우고 읽어왔다. 특히 조선 멸망은 순간이었고 백성의 비극은 10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근 현대사의 초기 500년 역사를 넘긴 조선이 왜 망했나. 실패한 역사일수록 뼈저리게 반성해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 탓으로 돌리는 대답은 정답이 아니다. 이에 맞서 우리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400년 전 조선의 임진왜란과 정묘재란을 겪은 서해 유성룡선생은 민족의 비극과 우환을 경계하고자 징비록(懲毖錄)을 말년에 7년의 세월에 걸쳐 그 실상을 기록해 후대에 넘겨줬다.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내가 그 일(왜란)을 징계하고 후환이 있을까 삼가노라)가 징비록의 제목이다.
이러한 선조의 뼈저린 훈계에도 조선말기의 군신들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1900년대 이완용 박제순 같은 신하는 일본에 나라를 팔아 넘겼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 선조는 의주까지 파천(播遷:다른 곳으로 피난)하고 여차하면 국경을 넘을 판에 명나라 구원병 요청은 물론 조선을 명나라에 합병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명나라 국경 수비대장은 이게 조선의 국왕이냐고 호통을 쳤다. 일개 국왕의 개망신이었다. 조선은 왕과 신하가 나라를 버리고자했거나 버렸다. 선조는 명나라에 나라를 버리고자하다가 일개 수비대장의 꾸지람을 받았고, 300년 후 1905년 이토의 을사늑약과 동시에 신하 이완용과 박제순은 일본에 나라를 넘겼다. 왕과 신하로서 조국을 위해 한목숨 버릴 각오를 하지 못했고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려는 졸장부노릇을 했다. 이 역사의 기록이 후대 2018년 중국의 시진핑이 한국은 중국의 일개 속국이었다는 빌미를 줬다. 민족의 수치였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1593년 정월 명나라 이여송이 4만의 명나라 병력을 앞세워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그해 4월 20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이 사실을 징비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성안의 백성들은 백중에 한명도 성한 사람이 없고 굶주리고 병들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거리마다 사람과 동물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심지어는 부자와 부부가 서로죽여 뜯어 먹기에 이르렀다.(至父子夫婦相食) 길가에 뒹구는 뼈들이 짚단같이 흩어져있었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잡혀있던 선조의 장자 임해군은 자기를 풀어주면 한강 이남의 땅을 떼어주겠으니 목숨을 부지해달라고 구걸했다. 자기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겠다는 장차 국왕이 될 인물치고는 졸개만도 못했다. 이즈음 왕정 망하지 않은 것이 주자학의 병폐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고대중국은 왕이 패도(覇道)를 걸으면 백성이 엎어버렸다. 공자와 맹자는 황제와 왕이 백성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 지도자를 엎어버리는 것은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지금의 중국이 공자가 부상하는 이유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몰아냈으나 세도에는 도의를 배반했고 그리고 공맹 사상을 패거리 당파에 유리하게 왜곡했다.
제주 4.3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역사의 맥락 속에서 우리가 돌아봐야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유성룡대감이 쓴 징비록의 반성과 질책 그리고 유언을 돌아보고 조선말 국가의 망국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오늘날 2018년도에 다시 바라보는 굴곡진 현대사의 한편이 사라진 사건을 다시 찾은 것은 그리고 금기사항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기 전에 역사적인 불행이다. 이 사건이 4.3사건이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발발한 사건으로 그 현상이 임진왜란 시 이여송이 한성(서울) 탈환시의 양상과는 달랐지만 그 비극은 너무도 닮았다. 그리고 그 사건을 다루는 과정도 위의 기록된 정치인들의 행위도 처신도 닮은꼴이었다. 더욱 가증스런 일은 이 민족의 사건을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에 이르기까지의 대통령들이 이 비극의 역사를 규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라나 이념을 떠나서 참혹한 시련을 견뎌낸 민족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야하는 이유는 참혹한 역사의 반복을 피하기위해서다. 이 4.3사건은 김대중 정부에 의해 제주특별법이 제정되고 노무현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서 지상규명을 지시하고 대 제주주민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를 발표하였다.
이 제주4.3사건의 흐름을 살펴보자. 민족의 분단 38선은 어찌 보면 일본의 제국주의와 미소간이 저질러놓은 원한의 이념분단선이다. 피보다 이념이 중하단말인가. 어미와 자식 간에 천륜지간에 무슨 이념이 존재하는가. 이 이념을 주입한 자들은 우리민족이 아니고 외세였다. 일본이 1945년 연합군에 항복을 하고 한국에서는 북은 소련이 남한은 미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했다. 북한이 소련의 지령으로 단독정부를 세우려하자 1946년 이승만이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구 등 민족세력은 반대했다. 남북한 총선을 실시하고자했으나 소련이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친일파를 숙청한데 대하여 이승만은 친일파를 고용해서 당시 일정 순사들이 경찰이 되었다. 이승만은 무지한 백성보다 깨인 친일파를 고용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친일파를 숙청하자 북한이 남한을 점령하면 이를 목숨 걸고 사수할 인맥이 친일파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즉 해방 후에도 경찰은 과거 친일파들이었다. 이게 모든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리고 미 군정은 주적 일본이 항복하자 1945년 일본 항복과 동시에 소련은 북한으로 진주해있었다. 즉 한반도를 소련 위성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고 미국은 이를 저지하려는 외교전이 냉전으로 비화되어 한반도에는 미, 소간에 대립이 팽배하여졌고 주적이 일본에서 사회주의국가 소련으로 변화되어 미군의 입장에서 친일파는 이제는 더 이상 주적이 되지 아니했다.
1947년 제주에는 이 친일파 경찰들이 일제치하의 과거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해방 후 일본에 머물던 6만 명의 제주도민들이 고향으로 귀환할 시에는 모두가 신문물에 깨어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논리로 볼 때 제주의 경찰들은 친일파들로서 마뜩잖은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1947년 3월 1일 날....(제주도민 3만 명이 모임) 3.1절 행사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가 제주읍 관덕정에서 열렸다. 인민위원회의 동원에 의해 3만의 도민이 대회에 참가하였는데 당시 제주도민의 근 10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 대회가 끝난 후 가두시위가 벌어졌는데 기마경찰이 여섯 살 어린이를 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기마경찰이 이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달려가자 군중들이 돌을 던졌다. 경찰이 군중에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기폭제로 하여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던 제주도 사회가 들끓기 시작하였다. 여기까지가 민중항쟁이었다.
3월 10일부터 남로당 제주도당의 지휘 아래 총파업이 벌어졌는데 관공서, 은행, 학교, 교통, 통신 기관 등, 156개 단체 4만 여명이 참가하였다. 이와 함께 남로당은 김달삼을 사령관으로 하는 5백 명 규모의 인민유격대를 발족시켜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미군정 딘소장과 조병옥은 이를 수습하려던 제주 9연대장 김인열을 해직시키고 새로운 연대장 박진경을 임명했다. 이 박진경이 얼마나 악날하게 제주도민을 학살했는지 이를 목격한 부대원들이 총을 쏴서 박진경을 죽여 버렸다. 정부는 여수에 있는 13연대를 출동명령 시켰다. 그러나 13연대는 동족을 죽이라는 명을 받을 수 없다하여 항명했다. 14연대 내에서 남로당 조직책이던 지창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박정희 대위가 이 부대 소속으로 중대장이었다. 거지왕 김춘삼이 중사였고 박정희가 중대장이었다. 남로당 프락치사건에 박정희가 연루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자 김춘삼이 프락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참모장 백선엽에게 증언했다. 이 사건이 여수반란사건이다. 그래서 다시 미군정은 제주도에 경찰을 증파하였다. 이게 응원경찰이다. 본토에서 파견된 경찰에 대한 도민들의 반감은 커졌다. 미군정의 강경 진압으로 인민유격대는 정면충돌을 피하여 한라산 중간지대에 올라갔다. 남로당은 8월 25일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 대회에 파견할 김달삼 등 6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였는데, 김달삼은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제주도에서의 투쟁 경과를 보고하였다.
제주도 사태를 다잡기 위해 서북청년회도 투입되었다.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자 공산체제에서 살아갈 수 없는 지주, 기독교인은 38선을 넘었는데 이 숫자는 1945년 8월 해방에서 1946년 4월까지 8개월 동안에 50만을 넘었다. 공산당에 땅을 잃고 내려온 서북청년들은 반공의식이 특히 치열하였다. 미군정 경찰부장 조병옥과 장택상 수도청장은 공산당과 싸우기 위해 서북청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영등포 철도 공작창에서 김두환 등과 함께 싸운 투쟁이 이것이다. 제주 폭동을 진압하는데도 있어서 서북청년회의 활동이 컸는데 여기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평안도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남한으로 내려와 자칭 경찰이 되었다. 정부는 이를 용인했다. 이들의 학살은 끔찍했다. 서북청년단, 경찰, 군인 등이 행동대 토벌대로 제주해안에서 5키로 까지는 살리고 5km에서 한라산까지의 주민은 모두 이유 불문하고 학살하게 된 사건이 제주4.3사건이다.
이 끔찍한 실상이 현기영씨의 순이삼촌이란 소설에서도 나타난다. 현기영씨는 이런 이유로 투옥되어 불순분자로 몰리기도 하였다. 토벌대의 학살은 참혹했다. 제주 빌레못에서 토벌대를 피해 숨어있던 주민들이 발각되었다. 이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토벌대들은 3살박이 어린애를 두 다리를 잡고 바위에 산채로 패대기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3살박이가 무엇을 안다고 이런 만행을 민족 간에 저질러야하나 과거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연상된다. 이는 서북청년단의 짓이었다고 단언한다. 그들의 일부는 지금으로 말하면 조폭이었다. 가증한 사건이다.
또 다른 사건은 당시 13살이었던 안인행씨의 증언을 들으면 그들은 제주해안에서 5km 밖의 소박한 농사군 집안이었다. 해안선 5km 이외이므로 학살 대상이 되었다. 토벌대들이 이들을 굴비 엮듯이 묶어 끌고 가려하자 13살 10살 7살 4살 아이를 둔 엄마가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애걸하자 토벌대는 4살, 7살, 10살 아이만 두고 13살 안인행씨와 어머니는 밧줄에 굴비 엮듯 묶여 끌려가다가 갑자기 기관총소리에 어머니는 아들 인행씨를 안고 쓸어졌고 인행씨는 어머니가 흘리는 피에 온몸이 핏덩이가 되었다. 잠시 후 대검으로 확인 사살을 감행하며 어머니를 대검으로 등어리를 쑤셨다. 어머니는 단말마를 일으키며 사지를 떨다가 숨을 걷웠다. 어머니품속에서 목숨을 부지한 당시13살의 안인행씨는 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나의 손주가 내년이면 13살이다. 역지사지한다면 이민족도 아닌 동족의 만행이 이럴 수가 있는가.
또한 4.3사건으로 턱이 달아난 할머니는 음식을 씹을 수 없어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슬픔보다도 그 참상을 말하지 못하는 슬픔이 더 슬펐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들은 역사를 아프게 하고 모두를 울린다.
과거의 4.3폭동도 이제는 4.3사건으로 바뀌었다. 4.3 사건을 추모하는 데 있어 이러한 전후를 가려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4.3 사건을 국가폭력으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민간 피해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편파적이다. 이는 건국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으로서, 군경과 민간의 피해를 아울러 다루어야 한다. 건국 과정에서의 남로당의 간악한 수법도 가려져야 한다.
제주도는 오래 동안 본토와 분리되어 살았다. 제주도는 유배지다. 광해군이 추사김정희가 유배당한 곳이며 조선에서 대우받지 못한 땅이다. 또한 제주도 방언은 본토에서 온 사람이 알아듣기 힘들다. 몽골의 침입 이래 주민은 조랑말이든 기마든 말을 기르고 공출하는 과중한 짐만 져서 제주도민은 본래 중앙에 불만이 많았다. 좌익의 준동(蠢動:소동)이 서북청년의 대공 적대의식에 불을 붙여 비극이 커졌다. 건국 전이었으므로 사태를 지혜롭게 처리할 국가 및 군 지도력의 부재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부패와 무능 사대와 모화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절망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앞날에 자신이 있다면 전통은 아무리 더러워도 견딜 수 있다. 실패한 역사의 책임을 묻고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실패한 역사 1910년의 망국과 제주4.3사건의 원인에 대하여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제주 4.3사건으로 희생된 영령들에게 삼가 조의를 진심으로 표합니다. 글 : 율천 / 사진 : 이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