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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나는 언어 실험극
──김경주 시집, 『기담』
이태희
최근에 70년대생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들춰보다가 당혹감과 낭패의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평론가가 ‘미래파’라고 명명한 바 있는 그들의 언어는 나에게 거의 ‘외계어’ 수준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 지면을 맡기에 능력이 태부족인 줄 알지만, 굳이 신간서평을 쓰게 된 이유 또한 그것에 연유한다. 이번 기회에 최근의 시들을 제대로 읽어보겠노라는 속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런 심정으로 골라 본 여러 시인들의 시집 중 가장 최근에 나온 김경주 시인의 『기담』을 읽어보기로 한다. 김경주는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고 2006년에 간행한 첫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로 일약 한국시단에 자신의 이름을 부각시켰다. 최근에 출간된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2.0』이라는 책에 그의 자세한 이력이 나온다. 1976년 광주 출생. 전남대 법대, 조선대 국문과, 원광대 문창과 등을 거쳐 서강대 철학과 졸업. 이 다채로운 학력에 직업적 이력도 만만찮다.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시나리오 작가, 대필 작가, 학원 강사, 단편영화 제작자 등을 두루 거치고 현재는 인디 문화 기획사 ‘츄리닝바람’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단다. 학교든 직장이든 어디 한군데 진득하게 붙어있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천성적인 유목민이다. 한편 그는 고비사막과 시베리아 벌판을 다녀와서 『패스포트PASSPORT』라는 여행 산문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1. 미지의 혀가 펼치는 언어극
김경주는 첫 시집을 낼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첫 시집 뒤표지에 추천사를 쓴 권혁웅은 이렇게 말했다. “이 무시무시한 시인의 등장은 한국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 시인으로서의 믿음과 평론가로서의 안목을 걸고 말하건대, 이 시집은 한국어로 쓰인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 시집 뒤표지를 장식하는 추천의 글이 대개 그러하지만, 이 글은 극찬의 헌사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예고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주목을 받았고, 출판시장에서도 호평을 얻었다. 앞에서 언급한 손기자의 글을 좀더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김경주는 벼락이었다. 김경주는, 21세기 벽두 한국 시에 내려친 벼락이었다. 2006년에 출간된 김경주의 첫 시집엔 힘이 넘쳤다. 강렬했고 뜨거웠다. 그러나 그 어떤 전통으로도 김경주의 힘은 풀이 되지 않았다. 지상에선 계통을 찾을 수 없는 힘, 그건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힌 벼락의 힘이었다.” 느닷없이 내리꽂히는 벼락과 같은 김경주의 시에 대해 ‘누구나 말했지만 누구도 틀어쥐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그것이 비록 ‘지상에서 계통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상의 언어였으며, 특히 여러 평자들이 밝힌 것처럼 첫 시집은 ‘음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반면, 이번 시집은 ‘연극’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우선 이 시집을 겉모양부터 살펴보자. 이는 “극이 시작되기 전 잠시 1~3막까지 각 막을 한 번 드르륵 넘겨주길 바라”는 시인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다.
다른 시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형식들이 눈에 띈다. 흡연구역을 위한 빈 페이지나 구球의 형태를 하고 있는 활자 배열(「다섯 개의 물체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시간」), 시집 속의 또 하나의 시집(「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음악악보의 등장(「어그야 혹은 파롤」), 채팅 화면식 언어 배열과 폐 사진(「릴리 슈슈의 모든 곳·1」), 자신의 판화 사진(「연출의 변」) 등. 이런 형식은 “언어가 배역이고 지면이 무대인 언어극”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그의 시집의 첫머리는 무대 지시문으로 시작된다.
때 : 알 수 없는 사이
공간 : 언어의 공동空洞
등장인물 : 미지의 혀
이 극에서 ‘암전’은 극 전반을 감싸는 소재와 상징으로 사용된다.
어둠 속에서 언어들만이, 지면 속에서 떠올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자연을 떠돌아다니듯이 부유하면 좋다.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암전.
‘극’의 시간과 공간과 등장인물에 대한 지시를 통해 짐작컨대, 이 시집은 애시당초부터 규범적 세계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미지의 시간, 부재의 공간, 미지의 인물이 연출하는 세계가 바로 이 『기담』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시간에 언어의 빈 굴에서 미지의 혀가 이야기를 한다? 과연 그 이야기 속에 어떤 기담들이 펼쳐지는지 들어가 보자.
극의 형식을 취한 이 시집은 3막극으로 꾸며져 있으며, 제1막은 <인형의 미로>, 제2막은 <인어의 멀미>, 제3막은 <활공하는 구멍>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먼저 제목부터 풀어 보자. 시집의 제목 『기담』은 시집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시 「기담奇談」에서 가져 온 것이다. ‘기담’이란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기담이 가득할 것으로 예상하게 된다. 먼저 표제시 「기담」을 읽어 본다.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사실 이 첫 작품부터 온전하게 해명하기 어렵다. 1연에서 지도를 태우는 일과 지진을 연관 있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사실 지도와 지진은 전혀 무관한 세계이다. 이와 같은 어긋남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게 되면, 시집이 끝날 때에는 목에 깁스를 하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이 어떤 존재인지도 불분명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연인 “인간에게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는 전언에만 귀를 기울여 보기로 한다. 그러고 보면 이 시를 지배하는 질서는 ‘시간의 거스름’이다.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나 “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과 같은 구절은 시간을 되돌리는, 뒤집는 행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가상의 세계로써 ‘지도’와 실제의 세계로써 ‘지진’의 세계가 전혀 무관하다고만 여길 것은 아니다. 인과의 선후를 떠나서 가상과 현실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긋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시집 전체가 온통 그러하다. 다시 무대 지시문으로 되돌아오면, 시인이자 연출가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연출의 의도가 분명하고 운이 좋다면, 이 극은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만 만들어진 음악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언어들이 지면에서 빚어내는 무대이면서 언어극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 언어들을 섬세하면서도 모호하지 않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 언어가 심중에 보인다면 우리들 생의 배우이며 배후인 언어를 상대하는 것이다”. 곧, 이 시집은 한편의 ‘언어극’인데, 그 언어가 우리들 생의 ‘배우’이면서 ‘배후’라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인간에게 언어란 무엇인가? 인간이 언어를 통해서 삶을 표현하고 드러낸다고 할 때, 언어는 인간의 대역 곧 ‘배우’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런 언어라는 것이 인간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는 이면을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언어는 또한 ‘배후’의 몫을 하게 되는 것이다. 파롤과 랑그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발화된 언어가 ‘배우’라면 심층의 언어는 ‘배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극의 등장인물은 미지의 혀(언어)다.
2. 혼종의 언어, 감각의 과잉
그렇다면, 그 ‘미지’, ‘언어’, ‘부재’의 언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집의 해설에서 강계숙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것은 ‘혼종성’이다. 우선 혼종성의 실례를 들기 위해 다음 작품을 보자.
J, 밤이면 내가 쓰는 언어는 짐승의 빛깔이고 새벽이면 내 언어는 식물의 빛깔이 됩니다. 인간의 돌멩이를 피해 달아나 꽃을 안고 당신에게 달려가다가 나는 풀숲에 엎드려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목젖의 일이 입을 벌리고 내 미라를 꺼내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꽃들의 붉은 똥을 마시고 뼈에 연보라색 불이 들어오도록 음악을 종일 들었습니다. J, 인간의 곁으로 가기 위해 나는 경經을 버렸습니다. 사물로부터 불어오는 만물의 경계를 바라보며 사물과 맹목을 지나 나는 내 눈의 수액이 구름 속으로 스미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중에서
서정적 문체로 서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젤소미나에게(MONO)”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젤소미나’는 누구인가? 작품 속에 이렇다할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이탈리아의 고전적 영화 <길>에 등장했던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불한당 같은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에게 팔려가 기구한 운명을 살아가면서도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던 여주인공 말이다. 그렇게 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J’는 젤소미나의 약칭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Gelsomina’의 ‘G’가 아니라는 점에서 ‘J’는 이중적이다. 젤소미나이기도 하고, 젤소미나가 아니기도 하고. 그뿐이 아니다. 시의 화자도 ‘짐승의 빛깔’과 ‘식물의 빛깔’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화자가 “인간의 곁으로 가기 위해 경經을 버렸다”고 말할 때의 ‘경’은 ‘경전’과 ‘경계’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즉, 경전과 같은 규범도, 경계를 짓는 질서도 모두 버렸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러한 경계 넘어서기는 시집의 곳곳에서 일어난다.
첫시집을 읽으며, 온갖 권위적인 것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았지만 심적으로 내내 불편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어느 날 아버지의 귀두가 내 것보다 작아졌다”(「아버지의 귀두」)거나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의 드러냄은 읽기에 민망한 것이었는데, 이런 감추지 않는 자세는 두번째 시집에 와서는 더욱 거침없다. 예컨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빨 사이에 낀 서로의 ‘음모’를 퉤퉤 뱉으며 사랑했어요”(「미음, 미음을 먹어요」)라는 구절은 인용하기까지 매우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구절이다. 그러고 보니 김경주 시인이 ‘불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또, 그와 함께 ‘불편’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갑내기 시인 김민정의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에 실린 시 「음모陰毛 한 터럭 속에 세상 모든 음모陰謀가 다 숨어 있듯이」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들은 시를 통해 독자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불편함을 신형철은 “낯설지 않지만 충분히 낯익지도 않다는 이상한 인상”을 남긴다고 설명했다. 낯설지 않다는 것은 그의 시 대부분이 1인칭 화자의 고백이라는 서정시의 메커니즘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낯익지도 않다는 것은 그의 시가 관습적인 지각작용이나 상투적인 감응작용에 굴복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의 시를 몇 편 이상 연이어 읽어내려가기 쉽지 않은 것은 그의 시가 사유의 논리가 아니라 감각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감각의 과잉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어쨌거나 혼종성과 감각의 과잉은 시를 읽는 내내 불편을 제공하고 있으며, 느슨하고 헐거워진 우리의 감각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3. 오래된, 비극적 서정
그런 불편한 독서 중에서도 김경주의 시 읽기는 읽는 이에게 다중적 경험이다. 그의 시가 새로운 감각적 요소에 기반하고 있지만, 김수이의 표현대로 여전히 그의 시는 “오래된, 절실한 것들의 시적 귀환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독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경주의 시집을 읽으며 무언가 절실한 것들을 줍기 위해 밑줄을 긋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의 첫 시집에서 줄치면서 읽었던 구절들은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외계外界」)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드라이아이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못은 밤에 조금씩 길어진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다 가는 것이다(「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등이라면, 그의 두 번째 시집에서는
누구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짐승 한 마리 앓다 가는 거지(「짐승을 토하고 죽는 식물이거나 식물을 토하고 죽는 짐승이거나」)
육체를 구부려 꽃의 사인死因)으로 죽고 싶은 적이 있다(「구름이 백 년 전을 지나갔던 것일까」)
이번 생과 외교外交를 그만하고 싶다는 거다(「환풍기」)
안으로 듣는 귀가 외로울 때 소리는 위독하다(「내장기 에반 게리온」)
등과 같은 구절들이다. 모두가 비극적 잠언들이다. 충분히 증명하기 어렵지만, 그의 언어극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는 저 비극적 세계가 아닐까 싶다.
내심 김경주 시의 요체를 드러내고픈 심정이었지만,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혹자의 견해에 공감을 표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만큼 그의 시는 다채롭다. 가히 저 1960년대 김수영의 다채로움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김경주 자신은 어떤 계보에 놓이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 “시인은 언제나 자신의 언어가 가장 낯설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한 바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서평의 미덕은 텍스트의 미덕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김경주 시집의 미덕은 무엇일까?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멀미가 날 정도로 지루할 틈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덕분에 이 글이 정신없는 글이 되기도 하였지만, 한번쯤은 이 다채롭고 화려한 언어극의 ‘멀미’에 빠져봄직하다.
이태희 / 196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래 익은 사랑』이 있고 현재 인천대 국문과 객원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