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泉州) 절도사 왕봉규는 고려 태조 왕건:
천주(泉州)는 현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8년(924년)에 따르면, '신라왕이 후당(後唐)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천주(泉州) 절도사 왕봉규(王逢規)가 역시 사신을 보냈다.'고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삼국사기 』에 웬 천주절도사가 튀어나오는가?
그 당시는 요(遼)가 916년에 산서성 태원(요 상경으로 추정)시 인근지역에서 막 건국되었으며, 왕건이 918년에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 태조가 된 시기였다.
또 후량(後梁, 907~923년)이 망하고 후당(後唐, 923~936년)이 들어선 시기로서 5대 10국 시대에 해당한다. 후량은 도읍지를 현 하남성 개봉시에 두었지만, 후당은 도읍지를 현 하남성 낙양시에 두고 있었는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즉, 당(唐, 618~907년) 말기에 신라 5소경과 진국(발해) 주요 지명들의 위치는 [그림 1]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근거: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6. 2. 11.).
[그림 1] 신라 5소경과 진국(발해) 주요 지명들의 추정지역
절도사(節度使)란 당(唐)에서부터 오대(五代)를 거쳐 북송(北宋)까지 존재했던 지방 군사조직 번진(藩鎮)을 통솔했던 수장을 말한다. 안사의 난(755~763년)을 일으킨 안록산은 현재의 하남성 낙양시에서 국호를 연(燕)이라 하고 황제를 칭했는데, 그 휘하에 있던 평로군이 황하를 건너와 청주(靑州, 현 하남성 개봉시로 추정)를 점령하고 반란군을 진압함으로서 평로절도사는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을 관할하는 치청(淄靑) 절도사 지위를 추가로 얻게 되었다.
이 때, 치청(淄靑) 절도사의 번진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 하남성 개봉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치청절도사 이정기는 당(唐)으로부터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라는 직위를 추가로 받아 진국(발해)과 신라와 외교교섭을 관장하였다.
또 치정절도사 이정기 3대는 점점 부를 축적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전국시대 '제(齊)'를 국호로 표명하였다. 즉, 치청절도사 번진의 위치는 현재의 하남성 개봉시로서 전국시대 '제(齊)'의 도읍지였던 익도(益都)와 같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에 이르러 819년에 당(唐) 토벌군에 진압되었다.
그 후, 많은 이들이 치청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후량(後梁, 907~923년) 때 882~902년 기간 중에 왕경무·왕사범 부자가 치청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후당(後唐, 923~936년) 시기에는 왕건립·왕안구 등 왕씨들이 치청절도사를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건이 918년에 고려 태조로 추대되고 견훤과 전쟁을 하던 시기가 후당(後唐, 923~936년) 시기에 해당하는데, 왕건립이란 자가 후당(後唐)의 치청절도사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왕건과 왕건립이 성이 같고 이름도 유사한데,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왕건은 고려 태조이고 왕건립은 후당(後唐)의 치청절도사로서 서로 동일인은 아니어도 최소한 같은 왕씨 집안에서 형제 또는 사촌 등등 서로 밀접한 관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唐) 시기에 절도사가 가장 많았을 때에는 50명에 이르기도 했는데, 천주(泉州) 절도사란 중국 23사에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천주(泉州) 절도사가 어느나라 절도사인가?
또 천주(泉州)란 도대체 어디인가?
그 당시 요(遼)가 후진의 건국(936년)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 16주를 할양받았는데, 연운 16주는 유(幽), 계(薊), 탁(涿), 단(檀), 순(順), 영(瀛), 막(莫), 신(新), 규(媯), 유(儒), 무(武), 울(蔚), 운(雲), 환(寰), 응(應), 삭(朔) 등 16개주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중에도 천주(泉州)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유주(幽州)가 현재의 북경시로 알려져 있으며, 삭주(朔州)는 현재의 산서성 삭주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가 유주(幽州, 계)에 있었으며, 당(唐) 대의 유주 총관부도 유주(幽州)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유주(幽州, 계)의 본래 위치가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幽), 계(薊), 탁(涿) 등 연운 16주의 본래 위치는 모두 현재의 산서성 남부 지역임을 알 수 있다.(근거:『조선 600년간의 비밀 요동과 부여 』,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3. 1. 10.)
아무튼 치청절도사 번진의 위치는 현 하남성 개봉시임을 알 수 있는데, 천주(泉州)는 도대체 어디인가?
그런데 『삼국사기 』에 따르면, 그 당시 양길과 궁예가 반란을 일으킨 지역이 신라의 북원소경으로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의 삭주에 해당하는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지역은 신라 무주 동남쪽 지역으로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안휘성과 산동성 경계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 무주 지역은 본래 마한의 땅으로서 백제가 차지한 지역인데, 신라가 무주를 두었으며, 견훤이 반란을 일으키자 무주 동남쪽 지역에서 호응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근거: 『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6. 2. 11.)
[그림 2] 양길과 견훤의 반란지 및 세력 확장 추정방향
또 『삼국사기 』에 따르면, 양길과 궁예는 북원소경에서 동쪽으로는 하슬라주를 공격했으며, 서남쪽으로 한산주에 속하는 30여 개의 성을 취하고 송악군(松岳郡)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양길과 궁예의 반란군은 북원소경에서 [그림 2]의 화살표 방향으로 세력을 키워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송악군(松岳郡)의 위치에 관해서는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과연 송악군(松岳郡)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또 『삼국사기 』에 따르면, 견훤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907년에 무주 동남쪽 지역에서 전주를 거쳐 신라 상주 방향으로 세력을 넓혀갔으며, 901년과 916년에는 남쪽으로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야성은 대가야의 도읍지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안휘성 합비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궁예가 처음에 도읍지를 송악군(松岳郡)에 두었으나 903년에 철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즉, 궁예가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황하 이북 지역으로서 명주(하슬라주), 삭주(우수주), 한주(한산주) 등에 해당하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도읍지를 옮긴 철원은 한주(한산주)에 속하는 지역이다.
철원(鐵圓)은 중국 23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지명이다. 그러나 철원은 한주(한산주)에 속하는 지명으로서 백제의 관미성이었다가 신라의 매초성이 되었으며,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 광부고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백제의 관미성이 바로 대방이었으며, 백제 초기의 미추홀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근거: 『백제 900년의 비밀 관미와 고평 』,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5. 4. 29.)
또 궁예가 910년에 수군을 보내어 습격한 나주성(羅州城)은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하택시로 추정할 수 있다.
이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은 919년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으며, 920년에 신라의 강주(康州)가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즉, 신라 9주 중에 강주(康州)는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강소성 서주시로 추정할 수 있는데, 옛 가야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 강주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주(康州)는 현 강소성 서주시에서부터 현 안휘성 합비시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서주시 주변지역은 성산가야로 있었으며, 합비시 주변지역에는 대가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합비시에 대야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견훤이 920년에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즉,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 태조 왕건이 황하를 건너 나주성을 차지하고, 남쪽으로 강주(康州)까지 차지하게 되자, 견훤은 남쪽으로 말려갔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8년(924년)에 따르면, '신라왕이 후당(後唐)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천주(泉州) 절도사 왕봉규(王逢規)가 역시 사신을 보냈다.'고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927년)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몸소 백제를 정벌하였는데,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강주(康州)의 항복을 받고 백제를 공격하고 있는데, 후당(後唐)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의 직위를 주었다면, 누구에게 주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 』에 기록되어 있는 왕봉규는 바로 고려 태조 왕건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후당(後唐)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라는 직위를 실제 주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대 역사적인 지명들을 동쪽 또는 동북쪽으로 변이시키면서 고대 국가 간의 위상도 변이시키지 않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부여와 가야 및 삼국의 건국년도를 최소한 200년 이상 뒤로 늦추어 놓았는데, 왜 늦추어 놓았겠는가?
바로 유구한 역사와 앞서 가는 문명국의 위상을 깍아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쳤다는 기록들은 모두 갑과 을을 바꾸어 논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명(明) 대 초 1421~1512년 기간 중에 명(明)이 옛 고려 땅을 차지하게 되자, 비로서 중국 23사를 뜯어 고쳐 위사(僞史)들을 삽입하고 지명 변이를 시도했으며, 조선의 사관들은 『삼국사기 』 등을 뜯어 고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때 단순히 지명 변이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위상도 바꿔치기 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3] 고려 태조 왕건의 세력 확장 추정방향
그런데 『후한서 』 군국지에 따르면, 어양군(漁陽郡)에 천주(泉州)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연국(燕國, 광양군)에 천주(泉州)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운 16주에 어양군(漁陽郡) 또는 연국(燕國, 광양군)에 포함되는 지명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천주(泉州)는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천주(泉州)는 연운 16주의 동쪽 지역으로서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675년)에 따르면, 칠중성(七重城)과 매초성(買肖城) 등지에서 당과 신라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칠중성은 고구려 요동성으로서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에 위치하고 있는 광부고성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매초성은 백제 관미성으로서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에 위치하고 있는 요성노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상기한 신라본기 675년의 기록에 따르면,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唐軍)이 천성(泉城)으로 공격해 왔는데, 우리가 이겨서 1천,400명의 목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았았으며, 전마 1천필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군(唐軍)이 고황하수로를 따라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방향으로공격해 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바로 천성(泉城)이 그 당시 천주(泉州)였던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인근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4] 고려 초기 도읍지 천성(송악군)과 도읍지 이동 추정 경로
즉, 고려 개국 초기에 둔 도읍지는 천주에 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송악군(松岳郡)란 지명은 지리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더우기 '송악군(松岳郡)'은 고려 태조 왕건의 출신지로서 가장 비중이 큰 지명 중의 하나인데, 기록 자체가 부실하다는 것은 그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송악군(松岳郡)'을 현재의 황해도 개성(開城) 인근으로 기록한 것은 『삼국사기 』를 뜯어 고친 1512년 당시의 조선의 지명인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첫댓글 광개토왕 시절에 倭가 요동반도를 쳤거든요.
요동반도도 대방땅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므로, 관미성 = 대방땅이라는 설은 일리가 있는 셈입니다.
아마도 짐작컨데 관미성은 요동반도 어디일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하셨군요. 하하하.
@광화세계 건업신문에 보면은 '영희해석문' 하고 비슷한 광개토비문 해석문이 올라 와 있습니다.
거기 해독문에 요동반도에 있는 섬이름이 나타납니다..
@광화세계 관미성이 철원이라? 믿기 힘들군요..
@라디오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서에 위사들이 여기저기 포함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1) 지명 변이를 시키기 위한 위사로서 대표적인 것이 후한서 군군지입니다. 2) 부여, 가야, 삼국 등의 건국년도를 약 200년 뒤로 늦추었습니다. 즉, 국가간의 위상을 바꿔치기한 것으로서 누가 조공을 받는 관계였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고려하지 못한 채, 사서에 써있는 내용을 그대로 풀러서 강역이나 지명의 위치를 맞추려고 하는 것은 하나마나 하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광화세계 님은 안 되요..
@라디오 별 말씀을 다. 정주영 할아버지께서 '해 봤어'라고 하셨답니다. 되고 안되고를 판단할 수 있는 특별한 게 있는가 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