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이 돌아오면 교회에선 연례행사로 삶은 계란을 교우들에게 나누어준다. 시선을 끌기 위하여 화려한 옷을 입는 동안 계란은 어느듯 짭짤하게 간이 맞추어지고, 계란에 얽힌 그럴듯한 전설은 마치 텁텁한 계란의 흰자위가 되어 그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그리고 달걀의 부화(孵化) 과정을 성서의 ‘부활’로 비유하는 메시지는 마치 계란의 노른자 위처럼 되어 버려서, 부활절의 의미는 계란과 함께 어느덧 우리들의 ‘입맛’에 익숙하여진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이러한 연례행사 덕분에 계란값은 폭등(?)하기도 하며, 까다로운 교우들을 고려한 유정란이 그 몸값을 자랑하기도 하고, 계란 모양만 한 고가의 초콜릿과 우주선으로 무장한 캡슐 계란의 등장은 한층 부활절기 ‘계란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계란에 얽힌 줄탁동기(茁啄同機)란 한자성구가 있다. ‘줄’(茁)이란 부화 과정 중에 있는 새끼 병아리가 부화가 될 때 알 안에서 밖으로 나오기 위하여 껍질을 쪼는 것을 말하며, 알을 품고 있던 어미 닭이 이 소리를 듣고 병아리가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하여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데 이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줄탁’이 병아리나 어미 둘 중, 한 쪽의 일방적인 노력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동시에 발생하여야만 한 생명체가 비로써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단히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병아리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 새 생명을 고대하는 어미 닭의 섬세한 배려가 서로 만나지 못하면 병아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껍질을 사이에 둔 두 영역에서, 두 존재가 서로 하나가 되려는 몸짓이 바로 계란에 얽힌 부화의 의미인 것이다.
부활절의 의미가 계란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나려면, 그 부활이 계란의 생산과 교환, 분배와 소비라는 한 경제 현상으로 전락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계란을 통하여 본 부활은 ‘생명’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 생명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몸의 현상’이다. 거기에는 부활하려는 생명과 그 부활을 돕는 더 큰 생명의 엄숙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활절에 그 의미가 드러나야 할 생명은커녕 어지럽게 널려진 계란껍질이 우리들의 일상을 채울 것이며, 그 의미도 먹다 남겨진 찐 계란처럼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매년 돌아오는 부활절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더 큰 소리가 우리를 인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충만하여야 할 것이다. 이럴 때 부활절기에 나누어지는 계란이 사람과 사람을 통하여 생명을 전하며, 그 공동체에서 서로를 깨트리는 줄탁(茁啄) 소리와 함께, 생명을
축하하는 진정한 환희와 감사의 찬양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