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갈라디아서 제 17 강 '나를 아신다'
본문: 갈 4:8-11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악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Introduction: 가수 이정현의 3집 Magic to go to my star가 발표되었습니다. 타이틀 곡은 '미쳐'입니다. 변심한 남자 때문에 미치겠다며 다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1집은 '테크노 여전사' 2집은 '이집트 여인'. 이제 3집은 '마술사'입니다. '말레미야 셀라토 베르나코'라고 뜻없는 말을 외치며 무대로 등장합니다. 디즈니의 만화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그의 여느 때의 등장처럼 이번도 파격입니다. 그는 현대젊은이들이 그들의 눈과 귀를 동시에 자극해야 감동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어떻게 매료시키는가를 이 가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들이 계속 히트를 치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이 가수가 현대의 문화를 정확히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허한 젊음의 마음을 파고들줄 아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아는 것, 이것은 자본이 힘인 시대에 대단히 유용한 기술입니다.
요즘 TV를 보면 참 많은 기발한 광고들이 등장합니다. 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최근 광고중 이런 게 있었습니다. 총알이 유리창을 뚫습니다. 유리벽이 산산이 부서집니다. 파편이 물방울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환상적인 음악이 어디선가 들립니다. N.A.T.E.라는 글자가 화면을 채웁니다. 시청자는 무슨 광고인지 잘 모릅니다.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은 광고의 한 기법입니다. 이것을 소위 '티져(Teaser)광고'라고 부릅니다. 티저의 사전적인 의미는 '약 올리는 혹은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그것을 위해 상품이나 상품명, 광고의 내용을 일시에 보여주지 않고 단계적으로 보여줍니다. 일정한 시점에 이를때까지 조금씩 베일을 벗깁니다. 그래서 소비자의 궁금증을 자극하자는 것입니다. 소비자의 마음을 붙잡으려는 시도입니다.
요즘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시기라고 부릅니다. 떴다 하면 몇 백만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잘 살펴보면 영화 자체의 내용의 우수성보다는 홍보에 기인한 측면이 큽니다. '영화는 마케팅으로 승부 난다' 이것은 할리우드의 공식입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 영화판에도 자리잡고 있는 듯 합니다. 실제로 이번에 뜬 '조폭 마누라'를 보면 내용은 별 것 없습니다. '아니다'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워낙 마케팅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가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30억 들어간 영화의 10억이 마케팅비용입니다. 그렇게 마케팅해서 초반에 얼마나 관객을 모으느냐에 흥행이 좌우됩니다. 초반에 사람을 모으지 못하면 끝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총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업 전략에는 아예 CRM이라는 기법까지 있습니다.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 관계 관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려면 고객의 특성과 소비성향을 정확히 파악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고객을 분석해 데이터베이스화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비욕구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서 제품을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는 영업기법입니다.
예를 들어 은행의 경우입니다. 은행의 고객 중에 50%는 비용만 증가 시키는 적자 고객입니다. 상위 7%의 고객이 순이익의 80%를 제공합니다. 당연히 자원과 인력을 흑자고객에게 집중합니다. 그것이 CRM-고객관계관리입니다. 또 한 미디어회사는 고객 중에 해리포터 1권을 구입한 고객의 이메일주소를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이메일을 따로 보내 해리포터전질을 구입하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질 1000세트를 일주일만에 팔았습니다. 대표적인 고객관계관리입니다. 어떻게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느냐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이렇도록 중요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렇게 마음, mind가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따르면 마음은 우리가 어떤 사실을 지각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어떤 것을 아느냐, 무엇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결정하느냐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알다, know라는 단어로 마음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아주 중요한 것을 아는 어떤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이것을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본래적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알아야할 너무도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알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심을 알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관계입니다. 마음은 관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마음이 통해야 관계가 형성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좀 쉽게 갑시다. 사람 사이에도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도 통하고 사랑이 오고 갑니다. 이게 커뮤니케이션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답답함을 해결해 보려고 존 그레이라는 사람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마음이 안통하는 커플이 너무도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썼는데 너무나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이 책의 전제는 남녀가 서로 출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고 마음의 구조가 다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해보자 이런 얘기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사랑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이해하여야 합니다. 여자가 받고자 하는 것은 관심과 이해와 존중과 공감과 확신입니다. 남자가 받고자 하는 것은 신뢰와 인정과 감사와 찬성과 격려입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여자에게 어떻게 점수를 딸 수 있습니까?
먼저 여자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신 그녀의 편에서 이해해 주라고 합니다. 남자 자신이 해결사인 줄 알면 끝장입니다. 여자의 외모에 대해 찬사를 보내라고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해내야 합니다. 남들 앞에서도 애정을 표시하고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하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경상도 남자들은 늘 실패합니다. 사랑의 편지나 시로 깜짝 놀라게 해주어라고 합니다. 저는 효과 좀 보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으로 파트너를 대하라고 합니다. 상당히 힘든 일이죠. 상대의 얘기를 들을 때는 '아하, 어허, 오, 음' 등의 소리로 호응을 보이며 눈을 쳐다보아라고 합니다.
자 공평하게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여자가 어떻게 남자에게 점수를 딸 수 있을까입니다. 우선 남자가 실수했을 때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라고 말하거나 충고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꼭 이런 충고를 합니다. 실망을 시켜도 뭐라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운전할 때 길을 잃어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라고 합니다. 열쇠를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말라고 합니다.
자, 이런 노력들이 다 무엇입니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관계가 잘 형성되고 서로간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잘 알고 그 앎을 기초로 해서 행동하면 관계도 나아진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봅시다. 앎이 중요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마음이 통해야 복음이 복음이 됩니다. 이 관계의 회복 자체를 복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회복을 위해 중보자가 계십니다. 이 화해의 사역을 예수께서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서 마음이 서로 통하는 상태는 복음의 큰 줄기를 이룹니다. 믿음이 딴 게 아닙니다. 이제 나를 창조하시고 또 주인되시며 친히 아버지되셔서 나를 자녀삼으신 그 분과의 관계가 바로되었음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단절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분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 하나님을 아는 것,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심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Point 1: 나를 아신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음에 대해서 본문은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갈라디아교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8절에 나오는대로 '가짜 신들에게 종노릇'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복음의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꾀임이 다가옵니다. 율법주의의 꾀임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래서 다시 옛적으로 돌아가려합니다. 이것을 9절 후반부에서는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다시 돌아간다'라고 표현합니다. 10절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두가 다 회복된 관계를 흐트려 놓으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딴 말로 하면 그 분을 경외하고 그 분께 순종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관계에 딴 것이 끼어드니까 딴 것을 두려워하고 그들에게 맹종하는 형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딴 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딴 것들을 맹종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우리의 자유가 보장된 순종입니다. 우리가 자유하지만 그 자유의 참 뜻을 알기 위해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유를 주신 분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나 이 순종이 없으면 딴 것들을 맹종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자유가 파괴됩니다. 세상에 나타나는 많은 광신과 집착의 현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좀 더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제일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 아닙니까? 저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두려우니까 사람 비슷한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두려움을 없애려합니다. 그게 신화들입니다. 또 자연을 두려워합니다. 동물도 두려워집니다. 날이 두려워집니다. 달이 그렇습니다. 절기와 해가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지켜야 귀신이 접근 못하고 액을 막아준다는 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리의 다스림의 영역에 속한 것들이 되려 주인의 행세를 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는 문화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해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들에 대한 분명한 책임이 있고 우리는 이것들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며 풍요로운 삶을 위해 활용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결코 이들은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해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즐거워야 할 축제의 날마저 우리 마음대로 못 정하는 어리석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몰라서 생기게 된 결과들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을 몰라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을 잃은 현상입니다. 목적을 잃으면 욕심이 상황을 지배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목적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모르는데 목적을 상실함은 당연합니다. 목적이 상실된 곳에 욕심이 날뜀은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권력, Power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service, 섬김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의 정치를 둘러보세요. 저는 우리가 정치에 대해 냉소적이길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 개인적으로 미국과 영국정치제도를 대학때 전공한 저로서는 귀한 정치가 이 땅에도 싹트기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냉소를 보내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service의 본래 정신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도할 부분입니다.
또 봅시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를 기억해 보십시오. 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 자체는 절대로 축복이 아닙니다. 책임입니다. 잘 사용해서 서로 유익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이 목적을 상실합니다. 결국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것도 2000년 동안 수많은 장소에서!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 오는 두려움이 아닙니까? 또 목적의 상실이 있습니까? 그것 역시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생기는 것 아닙니까? 점검하고 또 점검할 부분입니다.
이제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안다, 나아가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 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악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9절 전반부를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복음이 설명됩니다. 복음의 진수요 핵심이 설명됩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복음입니다. You know God. 또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를 아심이 복음입니다. You are known by God. 그래서 그 본래적 관계, 즉 자유로운 교통이 있었던 그 처음의 관계가 회복됨이 복음입니다. 친밀함 그 자체인 아버지와 자녀됨을 확인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압니다. 이제 아버지로 압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자녀임을 확인합니다. 이 관계의 회복이 바로 복음입니다. 믿음이 역사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임을 내가 믿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내가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앎에서 너무도 귀한 것들이 나옵니다. 이 관계가 깊어짐에서 너무도 선한 것들이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관계에서 방향이 나옵니다.
구약의 한나의 이야기를 너무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답답한 상황가운데 있습니다. 아이가 생기질 않습니다. 거기다가 '브닌나'가 온갖 질투와 무시를 가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기도로 역사하시며 그 기도를 통해 방향을 주심도 알았습니다.
보세요. 결국 사무엘이 탄생했고 그에게는 한 민족의 방향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를 통해 바른 방향을 찾아감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정보가 부족해서 헤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보가 많은 시대에 삽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유없는 권태감에 사로잡혀 있고 삶을 지루하게 생각합니다. 방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광수생각'에 나온 내용입니다. 새 한 마리가 감옥에 갖혀 있는 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의 어린 날은 어땠어? 어린 시절에 나는 다리가 불편해서 잘 걸을 수 없었어. 정말? 지금은 멀쩡한 것 같은데.. 응, 어린 시절 부모님은 지극 정성으로 내가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하셨어. 그 노력으로 난 지금처럼 잘 걸을 수 있게 된거고... 한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질 않으셨어..' 걷는 것보다,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십시오. 광수생각.
참 의미있고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입니다. 대단히 복음적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방향과 목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복음의 기본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아시는 그 분에게 나아가시고 구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 하나 더 생각해 봅시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끝을 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 종말론적 세계관 바로 그것입니다. 인생의 시작이 그 분에게 있고 끝이 그 분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계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함이 있습니다. 여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반복해서 밝힙니다. 우리가 태어남이 축복입니다. 생명의 탄생이 축복입니다. 또한 우리의 떠남도 축복입니다. 성도의 죽음도 축복이라고 밝힙니다. 태어남이 그 분 손에 있다면 죽음도 그 분 손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세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을 아는 사람은 그 분의 다스림을 압니다. 생과 사를 다스리심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영생의 근본임을 압니다. 영생은 결코 영원한 지루함이 아닙니다. 영생은 가장 벅찬 감동의 영원함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영원히 누림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심을 아는 것, 그래서 인생의 끝이 그 분에게 있음을 아는 것, 종말론적 인생관을 가지는 것은 우리 믿음의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있고 없음에 따라 인생이 두려움으로 가득차느냐 아니면 담대함으로 인생을 사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두려움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앞은 불투명하고 보이질 않습니다. 그렇게 정보가 많은 세상인데도 지금 보세요. 앞날을 제일 예측하지 못하는 세대가 20대들입니다. 뾰족한 수가 안 보입니다. 각 캠퍼스마다 깊은 패배감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나라 미국은 요즘 더 한 것 같습니다. 한 시사 주간지는 커버스토리를 'The fear factor, 두려움의 요소'라고 뽑았습니다. 비행기테러로 인해, 또 계속되는 anthrax, 탄저균 테러로 인해 미 전역에 두려움이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제 2의 테러 가능성 때문에 원자력발전소를 비롯한 많은 공공장소에 비상조치가 취해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앞을 예측하지 못해 생기는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실제적인 위험과 상상속에서 커져가는 위험 속에 많은 사람들이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고무적인 것은 이들이 이 상황을 이겨갈 답은 알고는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미국 교회는 사상 초유의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가하던 교회들이 사람들로 꽉꽉 차고 있습니다. 미국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테러가 교회성장의 가장 큰 요소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전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님을 이들이 뼈져리게 느낀 것입니다. 인생의 끝을 인생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 있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워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끝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십니다.
미국의 한 심장전문의가 스트레스와 심장의 관계를 연구하여 그 결과와 스트레스 극복방법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대부분 앞을 예측하지 못하여 생기는 두려움이 그 원인입니다. 그 의사는 먼저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분하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큰 일이란 없다 그렇게 여기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믿음으로' 믿음 좋은 의사인가 봅니다.
여러분,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의 간증입니다. 믿음이 담대함의 근본이 됩니다. 왜 입니까? 믿음으로 끝을 붙드신 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주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이 나를 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피난처되시며 산성되시는 그 분을 바로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내가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 14장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근심말라. 두려워말라. 근심말라'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 당신과 우리의 관계, 성령님과 우리의 관계를 하나 하나 설명해 주십니다. 그 분과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를 상세히 밝혀 주십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바로 이것이 우리 믿음의 담대함입니다. 여기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두려움들이 있습니까? 앞길이 안보여서 두렵기도 합니다. 또한 삶의 현장가운데서도 수많은 답답함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에 대한 갑갑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명백한 실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우리의 방향과 우리의 끝을 붙들고 계심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그 분과 우리가 너무도 친밀한 관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복음의 사람입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 청년 여러분, 지난 주간 미국 뉴욕의 양키스구장은 우리에게 쓰라림의 장소였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우리의 절망으로 바뀌어간 장소입니다. 역시 쎈 팀은 쎕니다. 방울뱀 김병현이 홈런 세 방에 완전히 맛이 갔습니다. 많은 한반도의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습니다. 제 아내는 어제 새벽에 깬 후 김병현이 불쌍해서 잠까지 설첬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경기중에 은혜받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찢어진 성조기 때문입니다. 뉴욕양키즈 구장에 찢어진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왠 찢어진 성조기일까요? 내용인즉 월드트레이드센터 현장에 걸려있던 바로 그 국기라고 합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앞으로 계속 걸어두기로 했답니다. 그 찢어진 국기는 그들에게 치욕과 수치의 상징입니다. 이번 테러사건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주역이 스트레이트 한 방 맞고 쌍코피터진 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치욕의 상징을 계속 걸어두겠다는 것입니다. '역시 저력있는 나라군'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되게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바로 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알고 계심을 잊지 않기를 안타까움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치욕의 사실도 그 안에서 교훈을 찾을 때 얻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 인생에 고귀한 것들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심을 모르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많은 것들을 두려워하고 있진 않습니까? 또한 방향과 목적을 잃고 있진 않습니까?
복음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근본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방향과 끝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와 날마다 동행하시고자 우리와 함께 우리의 옆에 계십니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하는 믿음의 사람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희를 아심이 너무 큰 힘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또한 능력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심을 나날이 더욱 더 알아가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믿음의 연약함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믿음 적음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신 복음을 더욱 붙들게 하시고 담대함으로 자녀답게 살게 이끄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