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이>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 빛에는 眞情이 있는 사람이 적다는 뜻.
▶ <유래> 이 말은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공자(孔子)가 발라 맞추는 말만 하고 성실성과 실천이 없는 사람을 싫어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2천 500년전에 갈파한 공자(孔子)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라고 생각된다.
▶ 구밀복검(口密腹劒)
▶ <풀이>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배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서, 겉으로는 상냥하지만 뱃속은 음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원전은 <<십팔사략(十八史略)>>[당(唐)]과 <<통감강목(通鑑綱目)>>이다.
▶ <유래> 양귀비(楊貴妃)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당(唐)나라 현종(玄宗)에게 후궁을 통하여 뇌물과 아첨으로 재상(宰相)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인물에 이임보(李林甫)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제의 의견이나 뜻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맹종(盲從)하여 알랑거리지만, 정의론(正義論)을 내세우는 사람만은 몹시 기휘(忌諱)하여 어떠한 구실을 써서라도 그런 사람들을 주살(誅殺)해 버리거나 추방하여, 황제와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가 퇴정하여 집에 돌아가 하룻밤 자면서 무엇인가 생각해가지고 다음날 등청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주살(誅殺)되었다고 한다. 이런 음험(陰險)한 자가 조정의 정권(政權)을 쥐고, 玄宗이 楊貴妃만을 총애하여 정사를 돌 보지 않았으니, 안사(安思)의 란(亂)(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이 일으킨 반란으로서 5년간이나 계속되었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李林甫를 두려워하여,
[林甫는 입에는 꿀을 담고 뱃속에는 칼을 지녔다]고 쑥덕공론을 했던 것이다.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풀이> 호랑이를 탄 형세라는 뜻으로서, 어떤 일을 시작하여 도중에 그만 둘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이다. 이로부터 일단 큰 일을 시작했다면 도중하차하거나 좌절됨이 없이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버티고 또 밀고 나가라는 교훈이 내포된 낱말로 되었다. 원전은 <<수서(隋書)>> [독고황후전 (獨孤皇后傳)].
▶ <유래> 남북조(南北朝)시대에 북조(北朝)의 마지막 왕조인 북주(北周)에서 기원 581년에 선제(宣帝)가 죽자, 당시 재상(宰相)이던 한족(漢族)출신 양견(楊堅)은 지금이야말로 오랑캐의 조정을 뒤엎고 또다시 한족(漢族)천 하를 만들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궁중(宮中)에 들어가 각방면으로 획책하여 끝내 北周를 폐지하고 그 해에 수(隋)나라를 세워서 스스로 임금자리에 올랐다.
[기호지세(騎虎之勢) 부득하(不得下)]라는 말은 그 북새통에 남편인 楊堅 에게 그의 아내(후에 독고(獨孤)황후가 되었다)가 격려한 말이다. 지금은
이 [騎虎之勢 不得下(기호지세 불득하)]를 줄여서 단지 [騎虎之勢]라고만 표현한다.
▶ 방약무인(傍若無人)
▶ <풀이> 옆에 사람이 없는 듯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방자하게 행동한다는 뜻인데, 근래에는 사람이 안중(眼中)에 없는 듯이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원전은 <<사기(史記)>> [형가전(荊軻傳)].
▶ <유래>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자객(刺客) 형가(荊軻)가 아 직 여러 나라를 유력(遊歷)할 때의 일이다. 축(筑)(비파같은 악기)의 명인인 고점리(高漸離)와 아주 의기 투합(意氣投合)하여 두 사람은 매일 같이 연(燕)나라 수도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술을 마셨다.
취하여 흥이 나면 사람들이야 보건 말건 高漸籬는 축(筑)을 타고, 옆에 있는 荊軻는 그것을 반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도 비분강개하여 감정이 솟구치면 서로 손을 맞잡고 울었는데 그 태도가 마치 옆에 사람이 없고 따라서 타인에게 방해 주는 일일랑 전혀 개의(介意)치 않는 듯 하였다.
▶ <풀이> 4 면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 또는 자기를 돕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고립된 경우를 이름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는 군사전략상으로는 일종의 심리전인데, 6·25 전쟁 당시 북진했던 UN 군의 어떤 부대를 포위한 중공군은 사방의 산꼭대기에서 야밤 중에 꽹과리,징 등을 침으로써 UN 군 병사들에게 공포심을 주고자 했던 것은 이런 심리전의 일부였다. 원전은 <<십팔사략(十八史略)>>[서한(西漢)]이다.
▶ <유래>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는 BC 202년 12월, 끝내 해하(垓下)라는 곳에서 한중왕(漢中王) 유방(劉邦)의 대군(大軍)에 포위되고 말았다. 항 우군(項羽軍)은 잔존군사가 얼마 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섬멸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허전한데다가, 밤만 되면 어디선지도 모르게 고향인 초(楚)나라의 노래가 들려오곤 했다. 그 노래가 점차 확대되어 東西南北 모든 방향에서 들려왔다. 이 노래를 듣는 項羽의 패잔병들 중에는 향수에 젖은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는 자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項羽도 [한(漢)은 이미 초(楚)를 얻었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항우기(項羽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兵少 食盡 漢軍及諸侯 圍之數重. 夜聞漢軍 四面皆楚歌, 項羽乃大驚曰 漢皆已得 楚乎 是何楚人多也(병소식진 한군급제후 위지수중. 야문한군 사면개초가, 항우내대경왈 한개이득초호 시하초인다야)]. 한편 우리나라<<초한가(楚漢 歌)>>라는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초패왕은 초를 장차 잃는단 말인가 역발산도 쓸데없고 기개세도 할일 없다. 칼 짚고 이러나니 사면이 초가로다]. 이렇게 사면에서 야밤중에 구슬픈 초가를 부르게 한 것은 기실 유방(劉邦)의 군사(軍師) 장량(張良)이 항우(項羽)의 패잔병의 사기를 더욱 꺾기 위해 꾸민 가성(歌聲)작전(일종의 심리전)이었다.
여기서 項羽는 사랑하는 애첩(愛妾) 우미인(虞美人)을 위해 막하(幕下)의 장수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項羽는 비분 통탄하여 스스로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서 불렀다.
힘은 발산(拔山)이요 기개(氣槪)는 세상을 덮도다
(力拔山兮 氣蓋世:역발산혜 기개세)
시(時) 불리(不利)하나 추는 죽지 않았구나
(時不利兮 騶不逝:시불리혜 추불서)
추 죽지 않았으니 너를 어찌할꼬
(騶不逝兮 可奈何:추불서혜 가내하)
虞야 虞야 너는 또 어찌할꼬
(虞兮虞兮 奈苦何:우혜우혜 나약하)
※ 추는 項羽가 타던 얼룩빛 名馬이름.
項羽는 자작시를 부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우미인(虞美人)도 죽음을 앞두고 애끓는 이별의 슬픈 감정을 담아 項羽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연회석에 자리를 같이한 제장(諸將)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전세(戰勢)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項羽가 노래를 그치자 이번에는 虞美人이 [천첩(賤妾) 어찌 살기를 원(聊 )하리오]하고 노래 불렀다. 이 노래를 부르고 나자 그녀는 項羽로부터 보 검(寶劒)을 빌려 달라고 하더니 그것으로 자결(自決)하였다 (<<사기(史記 )>> [항우본기(項羽本紀)]).
項羽는 철통같은 劉邦軍의 포위망을 뚫고 양자강(楊子江)가의 오구(烏口) 까지 도망쳐 나왔다. 뒤따르는 수하 장졸 수는 불과 28기 뿐이었다. 여기 서 楊子江만 건너면 고향인 강동(江東)땅이었다. 강을 건널 배도 이미 마련되어있었다.
烏口의 정장(亭長)이 강동(江東)땅에 돌아가 재기(再起)의 기회를 만들라고 項羽에게 간곡히 권유했다.
그러나 項羽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강을 건너와 서정(西征)길에 올랐을 때는 江東출신의 귀여운 자제 8천명이 같이 왔는데, 이제 한 사람도 같이 가는 사람이 없게 되었소! 설사 내가 강동(江東)땅에 들어간들 무슨 면목으로 그곳 부형(父兄)님들을 대하겠소.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 것이니 江 을 건너는 것은 그만 두겠소].
江東땅에 마음이 이끌린 나머지 무참한 모습으로 양자강(楊子江)까지 도 망쳐온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밀어닥치는 劉邦軍을 수십명이나 베었으나 끝내 힘에 부치자, 혼전 속에 스스로 자기 목을 칼로 찔러 장렬하게 죽어갔다. 때는 기원전 202년 12월이었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이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고전의 한 구절씩을 소개한다. [너는 우물안 개구리라 오직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도다. 서자의 겸인 지용도 검광에 죽었고, 초패왕의 기개세도 하성에 패하였나니 우직한 네 용맹이 내 지혜를 당할소냐] (<<토끼전>>).
다음에 약간 길지만 송대(宋代)의 증자고(曾子固, 이름은 공(鞏), 송(宋) 의 남풍(南豊) <강서성(江西省)사람, 당(唐).송(宋) 8대가의 한 사람, << 원풍유고(元豊類稿)>> 50권을 남겼다. 1019~1083)가 한.초 전적(戰跡)도 남아있지 않음을 슬퍼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라는 시제로 읊은 시 한 수와 그 배경을 설명코자 한다.
홍문(鴻門)의 옥두(玉斗)(홍문(鴻門)의 회견에서 범증(范增)이 劉邦으로 부터 받은 옥두(玉斗)를 칼로 쳐부순 일)는 깨어져 눈처럼 부셔지다. 10만 항병(降兵)(항복한 진병(秦兵)을 項羽가 학살한 것)은 하룻밤사이에 피를 흘리고 죽었는데, 함양궁전(咸陽宮殿)(項羽가 放火한 아방궁(阿房宮)은 석 달 동안이나 불꽃으로 붉었으니, 項羽의 패업도 이미 연기를 따라 멸망하더라.
강강(剛强)은 반드시 죽는 것, 인의(仁義)만이 왕(王)이라, 음릉(陰陵)의 실도(失道)(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봉양부(鳳陽府) 정원현(定遠縣) 서북 쪽에서 길을 잃고 漢軍에게 쫓길때 項羽는 이렇게 말했다.
[내 군사를 일으킨 후 8년동안 70여회를 싸웠으나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는 데, 이제 여기서 곤궁을 당함은 하늘이 나를 망침이요, 싸움의 죄가 아니 다])는 결코 천망(天亡)이 아니었다.
영웅(英雄) 본디 萬人敵을 배웠겠다(萬人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하면서 병법(兵法)을 숙부로부터 배운 일). 그것이 무슨 소용이리요, 고작 홍장(紅粧)(우미인을 가리킴)을 슬퍼했음이여, 三軍이 흩어 지고 정기는 꺾어지니, 옥장(玉帳)의 가인(佳人)도 순식간에 늙어지다.
향혼(香魂)은 밤이 들자 검광(劍光)을 따라 날라가고(우미인이 자살한 것) , 청혈(靑血)은 화(化)하여 무덤 위의 풀이 되었다.
美人의 꽃다운 마음씨는 적막하게도 가느다란 가지 끝에 매달린 듯, 그 모습은 옛 가락에 새삼 귀를 모으고 눈썹을 찡그린 것 같구나, 가슴에 품은 哀愁, 바람 속을 배회하며 시름에 잠겨 말이 없으니, 마치 四面楚歌를 처음 듣던 때와 같음이여
도도히 흐르는 물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으나, 漢.楚 흥망은 지나놓고 보니 兩者가 다 한줌 언덕의 흙이더라.
當年의 옛일은 벌써 자취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거든, 임의 술잔 앞에서 슬픔을 견디지 못해하던 그 몸부림, 지금이사 누구를 위하여 저리도 하늘거리는 것이뇨.
(崔仁旭역 [古文眞寶], 乙酉文化社 1973, PP.91-92)
이 시(詩)는 항우가 멸망한 원인인 폭거(暴擧)를 책망하고 영웅도 눈물이 있으니 우미인을 위해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린데서 우미인초(虞美人草)가 자랐다는 전설을 염두에 두면서 그 우미인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가냘픈 모습을 우미인 생전의 자태에 비유하여 그녀의 슬픈 죽음을 애도한 것이다.
이제 이 시를 감상하면서 이 우미인초(虞美人草)가 나오게 된 역사적 배 경을 시의 구절에 따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본다. 홍문(鴻門)에서 한(漢).
초(楚) 양 거두가 만났을 때, 항우(項羽)가 유방(劉邦)(후에 한고조(漢高 祖))을 없애려다 놓치자 범증(范增)이 노발충관(怒髮衝冠)하여 劉邦이 자 기에게 준 백옥(白玉)술잔을 칼로 쳐부수고 [수자 더불어 도모할 위인이 못되는구나]고 한탄하였다.
항우의 패망조짐은 이미 이때에 나타났던 것이다. 항우는 항복한 秦의 군 사 10만을 하룻밤사이에 학살하고 화려.웅장.광대한 아방궁(阿房宮)을 불 태웠는데, 이러한 폭거는 한때 천하를 제패했던 그의 위업을 마침내 이 연기와 더불어 날려버린 것이었다.
자고로 [힘센 아이 낳지 말고 말 잘하는 아이 낳아라]는 속담처럼, 자기 힘이 강함을 자랑하고 남을 누르는 자는 반드시 꺾이고 인덕(仁德)과 의리를 존중하는 사람은 왕자(王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항우가 말년에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고 劉邦軍에게 쫓길 때 천운(天運) 이 자기를 망침이요, 싸움을 잘못하여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큰 소리쳤지 만, 그것도 무도(無道)한 짓으로 스스로의 멸망을 자초한 것이었다.
그는 본디 영웅으로서 萬人敵의 兵法을 배웠으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었던 가. 고작 화장한 한 사람의 여인인 虞美人을 위해 슬픔을 견디지 못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도다.
해하(垓下)에서 적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듣고서 [ 우혜우혜(虞兮虞兮) 나약하(奈若何)]하고 탄식했다. 그만한 영웅도 우미인을 위해서는 마음아픔을 견디지 못했나보다.
3군이 지리멸렬되어 흩어지고 적을 위압하던 정기창검(旌旗槍劍)도 땅에 넘어져 꺾이거나 빛을 잃었고, 구슬포장안의 우미인도 수심에 잠겼으니 그 얼굴이 금시에 늙어 보였다.
그 날 밤 우미인은 스스로 칼을 빼어 자인(自刃)하니 번득이는 칼날의 광채 와 함께 그의 향기롭던 영혼도 날라가고, 꽃같이 아름답던 몸에서 흐른 피는 무덤 위의 풀로 변했도다. 우미인초(虞美人草)가 바로 그것이다.
그 여인의 아리따운 마음을 기다란 가지 끝에 적막하게 걸고 있는 우미인 초의 모습은 마치 그녀가 세상에 있을 때 해하(垓下)에서 초가(楚歌)를 듣고 눈썹을 찡그렸던 그 슬픈 모습을 닮았는가 싶다. 가슴에 애원을 품고 바람 속을 배회하며 시름에 잠겨 말이 없으니, 그것은 처음에 楚歌를 듣던 그때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것이 아닌가.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은 옛날에도 흘렀고 지금도 여전히 흐르지만 세월은 예와 지금이 같지 않으니 漢은 흥하고 楚는 망했다지만, 이제 와서는 흥하고 망한 자가 다 함께 언덕 위의 한줌 흙이 되었을 뿐이다.
옛일은 벌써 자취도 찾아볼 길 없이 사라지고 말았거니 우미인초야, 일찍 이 그대 사랑하던 사람의 술잔 앞에서 슬픔에 견디지 못해하던 그 몸부림, 그 몸부림인양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 ― 지금은 그 누구를 위해서 춤을 추듯 하늘거리는고
▶ 사족(蛇足)/화사첨족(畵蛇添足)
▶ <풀이> 뱀을 그린 그림에 뱀에게 없는 발까지 덤으로 그린다는 뜻으로서, 쓸데없는 군일을 하다가 도리어 실패한다는 비유. 한편 이 말은 단순히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일을 망쳐 버린다는 뜻도 포함시켜서 사용한다.
▶ <유래> 전국시대 초(楚)나라에서, 간밤에 제사 지낸 어떤 대갓집 주인이 집안 머슴들에게 술 한 병을 내주었다. 모두가 애주가이지만 한 사람이 마 시기에는 양이 많고, 그렇다고 여러 사람이 나눠 마시기에는 너무도 양이 적었다. 그래서 의논 끝에 땅 위에 뱀을 그리되 그것을 먼저 그린 사람이 이 술을 혼자서 마시기로 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재빨리 뱀을 그리고 나자, 술병을 끌어당겨 왼손에 들 고 우선 목을 축이면서 자기의 솜씨 빠름을 자랑하기 위하여 [나는 발까지 그릴 수 있다네]하면서 오른쪽 손으로 거기에 쓸데없이 발까지 그려 넣었다. 이 때 뱀을 그리고 난 또 한 사람이 [뱀에는 원래 발이 없다네. 그 러니 자네는 실격이야. 이 술은 내 차지일세]하면서 그 술병을 빼앗았다.
이 말은 <전국책(戰國策)> [제책상(齊策上) 민왕상편(閔王上篇)]에 나오 는 고사로서 원문은 다음과 같다. [楚有祠者 賜其舍人扈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請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蛇先成 引酒且飮 之. 乃左手持扈 右手畵蛇曰 吾能位之足. 未成一人之蛇成 奪其扈曰 蛇固無 足 子安能爲之足. 遂飮其酒 爲蛇足者 終望其酒.]
▶ 연목구어(緣木求魚)
▶ <풀이> 山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 한다는 것으로서, 헛다리를 짚는다든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우리 속담에 [산에서 물고기 잡기]와 같은 말이다.
▶ <유래> 전국시대의 대학자요 철인이며 1 등급의 변론가인 맹자(孟子)가 어느 때인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이다. 선왕(宣王)은 맹자(孟子)에게 춘추시대의 패자였던 제(齊)의 환공(桓公),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패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였다.
선왕(宣王)의 야심을 간파하고 있던 孟子는, [상감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신하와 백성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또 이웃 나라와 원한 사는 일을 그렇게도 좋아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王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좋아 하지는 않지만 감히 그것을 하고자 하는 것은, 과인에게 大望이 있기 때문이오].
孟子는 이 자리에서 여러가지의 유도질문과 교묘한 변론으로 宣王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게 되자 직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대왕의 욕망이란 이미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영토를 확장하여 진(晋)과 초(楚) 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조공(朝貢)을 바치게 하고, 나아가서는 천하를 지배하여 주변의 이민족들까지도 복종케 하려는 것이 아니오리까. 그러나 말씀하신 바 이제까지와 같은 武力 동원방법으로 그것을 얻으려면 마치 연목구어(緣木求魚)와 다를 바 없겠습니다].
맹자(孟子)는 목적과 수단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경고를 이런 말로 표현한 것이다. 즉, 나무에 올라 매미를 잡는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냇가에서 잡아야 할 물고기를 山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잡고자 하니 성사(成事)시킬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처럼 대학 입학 경쟁이 치열할 때, 공부 안하는 자식을 보고 그의 어버이가 이렇게 타이를 수 있다. [얘야, 너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목표하는 대학입학 예비고사에서 290점 을 맞을 수 있겠냐. 그렇게 하다가는 마치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옛말과 꼭같이 되겠구나. 좀더 열심히 공부하렴]. 이 고사는 <맹자(孟子)>[양혜왕(梁惠王)상편(上篇)]에 기록된 것인데 원문은 [以若所爲求若所欲猶緣木求魚也]이다.
▶ 오리무중(五里霧中)
▶ <풀이> 짙은 안개 속에서는 방향을 알 수 없음과 같이, 무슨 일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비유.
오늘날에는 방침(方針)이 서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 때에도 사용한다. 원전은 <후한서(後漢書)> [장계전(張桂傳)]
▶ <유래> 후한(後漢)도 중엽시대에 장계(張桂)라는 재야학자(在野學者)는 대단한 석학(碩學)인데다 선술(仙術)에도 능하여 문전시(門前市)를 이룰 정도로 제자(弟子)지원자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조정(朝廷)에서 고관자리를 줄 터이니 몇 번이고 出杜하기를 요청했으나 그는 절대로 관리되기를 거절했다.
이 張桂가 특히 잘하는 도술(道術)은 5리안에 안개를 자욱하게 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찾아왔을 떠는 이렇게 안개속으로 숨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 온고지신(溫故知新)
▶ <풀이> 옛 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안다는 뜻이다. 즉 지금까지 배워 온 고전(古典)을 복습하여 자기 것으로 하면 새로운 문제를 알게 되고, 이렇게 하면 사람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인데, 전통에 대한 이해와 현실인식의 의의가 이 말에 부여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격언이다.
▶ <유래> 이 말은 <<논어(노어)>> [위정편(爲政篇)]의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옛 것을 재 복습하여 새로운 것을 안다면 사람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와 <<中庸>>의 [溫故而知新 敦厚以崇禮(온고이지신 돈후이숭례)]에서 나온 것이다.
▶ 우공이산(愚公移山)
▶ <풀이> 무슨 일이든 간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비유.
▶ <유래>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은 옛날에는 원래 기주(冀州)의 남쪽, 하양(河陽)의 북쪽에 있었다. 이 산 밑에 이미 90 이 되려는 우공(愚公)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디에 가려 해도 언제나 가로막힌 이 산에 방해받았다.
하루는 가족회의를 열고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 왕래에 편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우공(愚公)의 늙은 부인만이 그것은 도저히 무리이고 또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반대했으나 다른 아들. 며느리가 찬성했기 때문에 곧 공사에 착수했다. 산을 허는 사람, 흙을 져다가 遊海에 버리는 사람--모두가 꾸준히 일했다.
이것을 본 지수(智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하여 일생동안 산을 허문다 해도 불과 얼마 헐지 못할 겁니다. 도저히 山을 옮기기란 어렵겠어요]라고 말하면서 이름 그대로 우직하고 미련한 노인네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우공(愚公)은 오히려 상대방을 가엾게 생각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으니 그가 이 일을 계승할 것이고, 그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고, 그 손자의 아들이 또 있을게 아닌가. 이와 같이 대대손손 내려가면서 꾸준히 일을 계속한다면 이 산을 옮겨 평지로 만들지 못한다는 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늘에서 이 말을 들은 천제(天帝)가 우공(愚公)의 불요불굴의 꾸준한 노력과 성의를 가상히 여겨 힘센 神에게 명하여 그 산을 져다가 하나는 삭동(朔東)땅에, 다른 하나는 옹남(雍南)땅에 옮겨 놓게 했다.
이 우화도 <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중국(中國)의 모택동(毛澤東)은 이것을 즐겨 인용하여 공산혁명을 촉구한 바있다. 이리하여 중국은 공산당원 필독논문인 <노삼편(老三篇)>에도 이[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를 넣고 있다.
▶ 이심전심(以心傳心)
▶ <풀이>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는 뜻으로서,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한다는 의미인데, 마음속에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
▶ <유래>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영취산(靈鷲山))에서 어느날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단지 연꽃을 손에 들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자들은 그 뜻을 몰라 잠자코 스승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연꽃만을 바라볼 뿐이었다.그런데 그 중에서 오직 한 사람 가엽(迦葉)만이 알았다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그러자 부처님이 가엽(迦葉)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엽(迦葉)에 대한 석가의 이 법문(法文)이 부속의 말을 [염화미소(捻華微笑)]라고 하는데 그후 이것이 선(禪)의 기원이 되어 이심전심(二心專心)의 묘(妙)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조대사(五祖大師)도 [석가모니 입적후 법(法)은 가엽(迦葉)이 전수받아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하게 되었다(佛滅後 附法於迦葉 以心傳心 <전등록(傳燈錄)>)]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선종(嬋宗)에서는 언어와 문자의 설명에 의하지 않고 중생의 자각으로 곧 부처님의 마음으로써 중생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 [염화미소(捻華微笑)]의 이야기는 대장(大藏)중의 경론(經論)에 쓰여있지 않고, 중국에서도 당대(唐代)중기 이후에야 겨우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후세의 참선자(參禪者)에게는 실로 좋은 테마가 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 말이 쓰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그거야 당연하지 않나! 나와 그녀와의 사이거든. 입에 담아 똑똑히 말한다는 것은 벌써 그 자체가 촌스런 이야기가 된다네. 그저 이심전심이지]하는 식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 자포자기(自暴自棄)
▶ <풀이> 자포(自暴)는 자기 몸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것, 자기(自棄)는 스스로 몸을 버린다는 뜻으로서, 요컨대 자기 몸을 망쳐 버린다는 것인데, 절망상태에 빠져 비관한 끝에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도의상 옳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을 말한다.
▶ <유래>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자포(自暴)하는자 하고는 더불어 논할 바 못되고, 자기(自棄)하는 자하고는 더불어 행동할 수 없다. 입을 열면 예의도덕을 헐뜯는 것을 자포(自暴)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성을 인정하면서도 인(仁)이나 의(義)는 자기 따위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도덕률로 생각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하느니라(自暴者 不可與有言也.自棄者 不可與有爲也.言非禮義 謂之自暴也.吾身不能居人由義 謂之自棄也. <맹자(孟子)> [이리(離婁) 상편(上篇)])고 하였다.
원래 인간의 본성은 선(善)하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인(仁)(도덕의 근본 사상)은 단란한 가정과 같은 것이고, 의(義)(올바른 조리)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정도(正道)이다.
사람들이 단란한 가정을 버려 두고 살고자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리고 그것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참말로 한탄스런 일이라는 것이 맹자(孟子)가 自暴自棄라는 말에서 지적하고자 한 원 뜻이다.
▶ 전전긍긍(戰戰兢兢)
▶ <풀이> 매우 두려워하여 조심하는 태도를 형용하는 말이다. 어감이 좋아서인지는 모르지만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쓰인다. 예컨대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라면 [이번에는 내가 지명될까 바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마침 시간이 끝나는 벨이 울려서 살아난 기분이었어]하는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 <유래> 이 말은 <시경(詩經)> [소아편(小雅篇)의 [소민(小旻)]이라는 시의 마지막 한절인[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전전긍긍 여임심연 여리박빙](전전긍긍하기를 마치 깊은 연못가에 서는 것 같고, 살얼음장을 밟는 것 같다)에서 온 것인데, 이 시는 정치가 위태롭다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마지막 구인 [여리박빙(如履薄氷)]도 대단히 위험에 처해진 상태를 형용한 것으로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 전전반측(輾轉反側)
▶ <풀이> 괴로운 나머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도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형 용.
▶ <유래> 이것은 시경(詩經)>> [주남관수(周南關誰)]라는 제시(題詩)에 나 오는 문구이다. 이 [관수(關誰)]라는 시는 [關關誰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琴瑟友之(관관수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금슬우지)](물수리는 강변(江邊)에 서 꾸꾸 하고 울고, 요조숙녀는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데 그 제 3구에 [求之不得 寤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구지부득 오매사복, 유재유재 전 전반측)](오매에도 잊지 못할 좋은 배필을 구하지만, 이를 얻지 못하여 전전 반측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이라는 시구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이다.
<詩經>은 中國에서도 가장 오래된 앤돌러지(anthology,시문(詩文)의 선집 (選集), 사화집(詞華集)인데(제1편 中國의 名著解說의 [시경(詩經)]항 참조), 이 [關誰]라는 시를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문명인의 산문적(散文的) 인 불면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의 인텔리들이 흔히 [자네는 자기 전에 술을 한 잔 마시면 잠 이 잘 온다고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네. 자네 말을 듣고 술을 마시고 잠 들어 보려고 했더니, 오히려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지지 않겠나.
잠은 오지 않고 새벽녘까지 전전반측 했더니 오늘은 정신이 멍하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관수(關誰)]라는 낱말에서 [관수화(關誰化)]라는 용어가 파생하였다. 이 것은 周나라 文王과 그의 王后의 성덕(聖德)을 찬양한 말이다.
즉 文王이 가정도 잘 돌보아 내외간의 금실이 좋아 가정이 매우 화락하였는데, 이러한 모범과 德이 만 백성의 가정에까지 침투하여 백성을 감화했다 하여 이 [관수화(關誰化)]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 파죽지세(破竹之勢)
▶ <풀이> 칼로 대나무를 쪼개듯이 멈출줄 모르고 힘차게 나간다는 뜻으로서, 군대의 맹진격을 형용하는 말. 원전은 <<진서(晋書)>> [두예전(杜預傳)].
▶ <유래> 위국(魏國)을 공략한 진(晋)은 다시 남쪽에 있는 오군(吳軍)을 이제 한고비만 더 넘기면 섬멸할 단계에 이르렀다. 晋의 총사령관 두예(杜 預)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때 여러 부 대장들은 멀지 않아 양자강(楊子江)의 물이 불어날 것이므로 도하작전이 불리하니 일단 총 공격전을 멈추었다가, 내년에 다시 시작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杜預는 그런 의견을 반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군사는 사기가 높고 기세가 당당하오. 마치 대쪽을 쪼개듯이(破竹) 두 마디, 세 마디만 쪼개면 그 뒤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단번에 끝까지 쪼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단숨에 추격하면 적을 힘들이지 않고 섬 멸할 수 있을 것이오](預曰 今兵威己振 譬如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예 왈 금병위이진 비여파죽 수절지후 개영인이해).
▶ 호연지기(浩然之氣)
▶ <풀이> 도의(道義)에 바탕을 두고 자기가 반성하여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굳센 의지나 유쾌한 마음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스트레스 따위가 쌓인 화이트 칼라들이 선선히 (아-, 정말 골 치가 아프군! 어디 교외나 바닷가라도 나가서 浩然之氣나 키우고 와야겠군!) 하는 식으로 사용하여 조용하고도 생동적인 和氣를 이를때가 많다.
이 말은 <맹자(孟子)> [공손축(公孫丑) 상편(上篇)]에 있는 것이다.
▶ <유래> 맹자(孟子)의 제사 공손축(公孫丑)(제(齊)나라 사람)이 어느날 스승에게, 만일 스승께서 제국(齊國)의 재상이 되어 도(道)에 맞는 정치를 펴 나간다면 제(齊)나라로 하여금 천하를 패자(覇者)가 되게 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스승께서도 아마 마음이 움직일 것이 아니냐 하고 물었다.
그러나 40의 불혹(不惑)나이가 지나서부터는 이미 그런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는 孟子의 대답을 듣자 공손축(公孫丑)은 크게 감탄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제지간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不動心)는 테마를 중심으로 문답이 벌어졌다.
맹자(孟子)가 이렇게 말했다. 즉, 孟子의 논적(論敵)인 고자(告子)(<맹자 (孟子)>의 [고자편(告子篇)]에 등장하는 바, 맹자와 논쟁한 상대방, 그에 의하면 告子는 사람의 성(性)에는 선(善)도 불선(不善)도 없다. 따라서 도덕 특히 맹자의 의(義)라는 것은 전혀 후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의 부동심(不動心)과 자기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공손축(公孫丑)이 이것의 차이성을 물었더니 孟子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별로 애씀이 없이 不動心을 얻으려는 것이 告子의 방법인데 그것은 너무도 소극적인 면이다. 그러나 자기는 언(言)(도리에 밝은 말)을 알고 있다(지언(知言))는 점에서 고자(告子)보다 차원이 높은 것이다. 게다가 자기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고 있다.
그런데 이 [기(氣)란] [극히 강건(剛健)하고도 올바르며 또 얌전한 것이므로 이것을 소중히 키워나가면 천지(天地)간에 차고 넘치는 것인데, 이 것을 키울 마음의 자세를 항상 가다듬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 기를 쓰며 무리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