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과 나
손호석
한의과대학 시절에 한의본과로 올라가면서 부터는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님 한약방에서 조수 생활을 하곤 했는데
그때는 아버님이 하시는 진료를 옆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내려주시는 처방을 받아 한약을 조제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말 그대로 한약방에서 아버님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한의과대학 졸업과 한의사 국가고시를 거쳐
보건사회부로 부터 한의사 면허증을 받아 풋내기 한의사가 되었을때
군대 입대를 8개월 앞둔 시절이라
이 기간을 나의 한의사 수련 시간으로 삼기로 하고.
경북 예천군 풍양면에서 “인성한약방”을 하시던 아버님 밑에서
나의 첫 한의사 수련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버님을 임상 진료의 스승으로 모시고 그 제자가 되어
한의과 대학에서 배운 이론에서 벗어나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면서
한의원에서 행하는 한방진료를 아버님께 전수 받는 기간이었다.
군대를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배치를 받은 곳은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의 의무실이었다.
한의사로서 가끔 침구치료는 했으나
옆에서 양방 군의관 치과 군의관들이 진료하는 모습들을
3년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의 시간이었다.
제대를 하고 처음으로 한의원를 개업한 곳은 의성군 안계면이었다.
면단위 이지만 7개 면이 장을 보는 농촌으로는 큰 장터였다.
그 당시는 한의대 수가 3개로 적은지라 한의원이 귀했는데
한약방 하나만 있었고 한의원이 없는 그곳에
아버님 한약방의 상호인 “인성”을 이어받아 “ 인성한의원”을 개업했다.
진료에 있어서는 군대 입대 전의 아버님 밑에서의 수련과 군인 시절
육군대학 의무실에서의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되어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수련하던 시절에
“시골에서는 한약방이 6개월은 그런대로 되고 6개월은 논다”
라고 하셨던 아버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대중교통도 불편하고 자동차도 귀하고
주로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장을 보러오는 시절인지라
안계 장터에 농한기 6개월은 유동인구가 많고 한의원도 잘 되었으나
농번기 6개월은 장날에도 사람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꿈 많은 사회 초년생으로 시골 생활을 2년 동안 하다보니
계절따라 내원 환자수 편차가 너무 심한 농촌이 서서히 싫어졌다.
계절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 보다가
도시로 가기로 하고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으로 한의원을 이전했다.
그 당시 천호동은 하남시로 있다가 서울로 편입된지 오래지 않은 곳으로
대로변은 아직 빈터가 많았고 뜨문뜨문 건물이 있었는데
서민 냄새가 많이 풍기는 곳으로 시골에서 올라운 나에게는 잘 맞았다.
대로변 버스정류소 앞에 내과 산부인과 치과가 있는 3층 건물이 있는데
1층에 임대가 나와 “인성한의원”을 개원하고 진료를 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500미터 반경에는 다른 한의원이 없으니 개업 장소로는 적당했다.
처음부터 잘 되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내과 산부인과 치과 한의원이 한 건물에서 진료하면서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그런대로 환자가 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울의 중간정도 수준이니 아주 높거나 까다롭지 않았고
그중 가장 좋은 점은 시골처럼 계절 따라 환자 수가 큰 변동이 없으며
진료에서 환자를 대하기도 훨씬 수월했다.
IMF가 잠시 있었지만, 큰 걱정없이 이 자리에서 16년간 진료를 해왔는데
이제 시절이 변하여 지역이 발전하면서 주변의 빈자리는 빌딩으로 가득찼고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어 200미터 떨어진 사거리에
강동구민회관역이 들어서니 나도 역 사거리 코너건물 2층으로 이전을 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한의과대학이 12개로 늘어나니
인성한의원 하나였던 500미터 반경 안에 한의원 10개, 한방병원 1개가 더 생겼다.
인구는 조금 늘고 한의원 수는 너무 많이 늘어나 서로 나누어 먹다보니
지역주민들 만으로는 한의원 운영이 어려운 시절이 되어버렸다.
이 문제를 어떻게 타결할 것인가?
몇 일을 고심하다가 “인터넷 광고”를 하기로 했다.
“인성한의원 홈페이지”를 만들고 진료에 자신있는 종목 7가지
(당뇨병, 다이어트, 치질, 중풍예방, 알레르기, 공황장애, 간치료)를 선정해
다음, 네이버등에 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광고를 한지 얼마 안되어 전국에서 수많은 문의 전화가 왔고
멀리 제주도에서도 우리 인성한의원에 진료를 받기 위해 내원했었다.
그렇게 인생에서 호황을 누린던 그 시절이 내 한의사로서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울릉도에서만 오면 전국에서 다 내원한다”고 말한 후
1주일이 지나자 울릉도에서도 환자가 오는 것이 아닌가....
“이제 전국에서 다 왔다.“ 라고 소리치던 그때가 생각난다.
미리 홈페이지의 글를 읽어 보고 오시는 분들이라
진료를 하기도 쉬웠고 진료비도 미리 알고 오시니 수월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른 한의원들도 인터넷 광고를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경쟁을 하다보니 광고료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해
한 클릭당 500원이던 “다이어트”광고가 5년 사이에 1만원으로 올라가니
수지타산이 도저히 맞지 않았고 할 수없이 인터넷 광고를 그만 두었다.
이렇게 인터넷광고 시절 5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는 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유언 말씀대로
아버님이 하시던 예천군 풍양면 “인성한약방” 자리로 낙향을 했다.
수련 1년, 군대생활 3년, 안계생활 2년, 서울생활 24년...
도합 30년을 마치고 고향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향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평탄했다. 아버님이 50년 동안 자리를 잡은 곳이고
한의사 면허증 받고 바로 수련의로서 첫 진료를 한 곳이라.
대부분 잘 아는 분이라 편했고 아버님 단골이셨던 의성군 다인면 분들도 찾아주셨다.
시골의 면단위 이지만 풍양면과 다인면 분들은
1년에 보약 1제는 주기적으로 드시는 분들이라 한의원 운영도 잘 되었고
고향의 생활은 큰 재미보다는 평온한 날들이었다.
되돌아 보니 고향에서의 진료를 하였던 4년 중
첫해와 다음해의 2년간은 그런대로 한의원도 잘 되었고
큰 탈 없이 잘 흘러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3년째 부터는 환자수가 서서히 줄어 들기 시작했는데
그 원인은 인구 2000여명의 작은 풍양면에서 1년에 50명 이상의
인구가 사망 또는 요양원으로 입원했고 5일장의 모습도 점점 쇠락해져 가니
늙어가는 풍양면의 모습을 느끼며 이제 떠나야 하는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단골로 오시던 풍양면과 다인면 분들께 이전 안내장을 드리고
거리상으로 가까운 상주시로 한의원을 이전했다.
낙동강 건너!
지연 혈연 학연이 전혀없는 상주시에서의 한의원 경영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다행히 풍양면과 다인면의 단골분들이 상주를 찾아주시니
개원 초기의 어려움을 무사히 넘길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고
힘들어도 3년만 잘하면 상주에서 크게 자리를 잡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3년을 지나서도 상주는 화끈한 풍양과는 달랐고
미적지근하고 개인주의가 강하고 씀씀이에서도 아주 짠 동네 였다.
“상주는 5년을 지나야 자리를 잡는다”는 주변 분들의 조언을 다시 믿고
5년을 채우는 중에 코로나가 왔고 이제 상주에 온지도 5년을 넘어섰다.
고향으로 내려온지 만 9년... 이제 10년을 채우러 가고 있다.
환갑을 지난 나이에서 나도 늙어가고 농촌도 늙어가고 상주도 늙어간다.
10년을 채운 어느날 다시 젊은 도시를 꿈꿀 것 같다.
새로운 한의원 자리를 찾아서... 그리고 마지막 불꽃을 피우기 위해서...
-한의사 40년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