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수(壽) 81세
근세에 수보(修譜)하는 집들이 대저 동관(同貫)을 수합(蒐合)하는 것을 성대한 일로 삼고 이를 높여 대보(大譜)로 삼으니, 나는 평소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까운 것을 돈독히 한 후에 먼 데까지 미치는 것이다. 친소(親疎)는 천리이거늘 수보하는 집이 동일시하니 족보는 하나로 할지언정 정의(情意)는 동일할 수가 있는가.
정의는 끝내 동일할 수가 없다면 족보를 비록 널리 한다고 해도 족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파보(派譜)를 만드는 것이 낫다. 동조(同祖)이고 또 동종(同宗)이며, 분묘도 같은 터에 있고 내외척도 같은 집안이다. 성기(聲氣)가 서로 이어지고 고락도 서로 접하니, 비록 혹 친속이 단문(袒免)을 지났을지라도 말을 배우는 아이조차도 이미 마음으로 그 족인(族人)임을 알고 있던 처지인 것이다.
이에 또 보계(譜系)를 밝혀 거듭 결속하는 것이니 옛적의 이른바 “인심을 관섭(管攝)하여 종족을 수합하고 풍속을 후하게 한다.”라는 것이 이에 빈말이 되지 않는다. 소위 가까운 것을 돈독히 한다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멀리까지 미침은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경전에 명문이 있다. “사람마다 그 어버이를 친히 하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나만 홀로 독실히 하면 남이 또한 독실하게 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원주 이씨(原州李氏)의 오늘 족보는 옳고, 과거로 두 번째 임인년(壬寅年)의 전보(全譜)는 그릇된 것인가. 이는 고집스런 의론이다.
임인년에 전보가 있는 것은 오늘날 파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개 때가 같지 않으면 사리도 변동되어 머물지 않을 것이니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이 족보는 고려의 영중랑장(領中郞將) 휘(諱) 반계(攀桂)로 원조(遠祖)를 삼고,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천익(天翊)을 분파(分派)의 조상으로 하고 있다.
대개 초조(初祖) 병부 상서공(兵部尙書公)으로부터 중랑장공에 이르기까지 13세이고, 중랑장공으로부터 종부공에 이르기까지 3세이다. 13세의 사이에 어찌 지파가 나뉘어간 몇 집안이 없겠는가. 3세의 사이에도 갈래가 나뉜 파는 또 더욱 번창했다.
그러나 이 족보는 미처 널리 수합하지 못하고 오직 종부공의 두 아들인 현감(縣監)과 참의(參議) 두 공의 자손만을 보록(譜錄)하였다. 이것이 근세에 수보하는 집에서 겸연쩍게 여겨 불만스러워하는 바이지만 나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고 마침내 이와 같이 해설하였다.
또 말하기를 “제군들은 보편(譜編)을 널리 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도타운 인정과 화목이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하라. 생각마다 이 족보에 부끄러울까 두려워하면 멀리까지 미칠 도리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감공의 휘는 간(榦)이요, 참의공의 휘는 각(慤)이며 현감의 손자 종호(種毫)는 상장군(上將軍)이요,
그 아들 세화(世華)는 음성 현감(陰城縣監)이요, 후손 형옥(馨玉)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청양 현감(靑陽縣監)이요, 참의의 증손 성로(成路)는 진잠 현감(鎭岑縣監)이요, 성해(成蹊)는 도사(都事)이다. 이것이 벌열(閥閱)로서 기술할만한 사람들이다. 그 숨은 행적과 기특한 절의가 왕왕 있는데 이는 두루 거론하기 어렵다.
임인년에 족보를 만들 때에는 봉서(鳳瑞)와 천복(天福) 두 공이 실로 일을 주장하였는데 봉서는 현감의 집안이고 천복은 참의의 집안이다. 봉서는 더욱 문행(文行)이 깊어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와서 글을 청한 사람은 지윤(枝潤)과 구환(九煥)인데, 지윤은 봉서의 증손이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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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原州李氏族譜序
近世修譜家。大抵以蒐合同貫爲盛事。尊閣之爲大譜。不佞尋常所不喜。篤近而後。可以及遠。親疎天也。修譜家一之。譜可一而情意可一乎。情意終不可一。則譜雖廣。猶無譜也。其派譜乎。同祖又同宗也。墳墓同原也。內外戚同家也。聲氣之相連。苦樂之相接。雖或屬過袒免。學語童子。已心知其爲族人矣。於是又明譜系以申束之。古所謂管攝人心。收宗族厚風俗。於是不爲空言矣。所謂篤近者然矣。其及建也柰何。曰經傳有明文矣。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而我獨篤。人亦有不篤者乎。然則原州李氏今日之譜是而再。去壬寅之全譜非歟。曰此膠瑟之論也。壬寅之有全譜。猶今日之有派譜。蓋時有不同。則事理亦爲之變動不居。何可同也。此譜以高麗領中郞將諱攀桂爲遠祖。判宗簿寺事天翊爲分派之祖。蓋自初祖兵部尙書公。至中郞將公十三世。自中郞將公。至宗簿公三世。十三世之間。豈無分支之幾家。三世之間。分支又益蕃昌矣。然而此譜未遑廣收。惟宗簿公二子縣監及參議二公子孫是譜。此近世修譜家之所歉然不滿。而不佞獨曰否否。遂爲之解說如右。且告之曰。諸君無患譜之不廣。患惇睦之未至。念念恐羞此譜。則及遠之道。其在斯乎。縣監公諱榦。參議公諱愨。縣監之孫種毫上將軍。其子世華陰城縣監。後孫馨玉文科靑陽縣監。參議之曾孫成路鎭岑縣監。成蹊都事。此閥閱之可述者。若其隱行奇節。𨓏𨓏有之。此難徧擧。壬寅譜時。鳳瑞,天福二公。實主張之。而鳳瑞縣監家也。天福參議家也。鳳瑞尤以邃文行知名當世云。來徵文者。枝潤,九煥。其名枝潤。鳳瑞曾孫也。<끝>
노사집 제19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