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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박훈(朴薰)
1484년(성종 15) - 1540년(중종 35) / 향년 57세
조선 전기에, 사헌부장령, 사헌부지평,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叟). 좌찬성 박중손(朴仲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박미(朴楣)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박증영(朴增榮)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영달(朴英達)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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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집 권하 / 갈명(碣銘)
박 승지 묘갈〔朴承旨墓碣〕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크게 알려진 성씨로 신라 왕의 시조의 후예로부터 나왔으니 본래 귀한 집안이다. 그 선조는 명망 있는 문사가 많아서 고관대작이 줄을 이었으니 그 이름이 국사(國史)와 가첩(家牒)에 실려 있어 먼 옛날로부터 보계(譜系)가 이어져 왔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후손에 이르러 찬성에 추증된 휘 절문(切問)이 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찬성은 정난 공신(靖難功臣)으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진 휘 중손(仲孫)을 낳았고 밀산군은 예조 참의 휘 미(楣)를 낳았다. 참의의 아들 휘 증영(增榮)은 풍채가 훤칠하고 박식하며 견문이 넓어 경사에 박통(博通)하고 문장을 잘 지어 당대에 큰 명망을 독차지하였다.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이어서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쳐 문한(文翰)을 맡았는데 29세에 홍문관 교리로 죽으니 성종(成宗)께서 애석해하셨다. 그의 부인은 박씨(朴氏)이니 현감(縣監) 박영달(朴英達)의 따님이다. 공은 교리공의 사자(嗣子)이니 휘는 훈(薰),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叟)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됨이 장중하며 말수가 적었고 항상 정해진 곳에 앉아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놀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물건은 손에 가까이 두려고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조금 장성해서는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깨달아 마음속으로 ‘불쌍하게도 나는 태어난 지 9년 만에 선친께서 돌아가셔서 가정의 가르침을 귀로 듣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스스로 학문에 힘쓰지 않으면 입신하여 몸을 세우지 못하고 선대의 덕을 잇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발분하고 뜻을 가다듬어 오경과 사서 및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의 성리서를 가지고 전심하여 밤낮으로 송독하고, 의리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몸소 실천하고 자신에게 돌이켜 기어이 삼태기의 흙을 쌓아 산을 이루고 우물을 파서 물이 차오르게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였다.
또 역사서와 제자백가의 설에 두루 통달하여 그 근원을 궁구하고 그 흐름을 섭렵하여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오직 강학에만 힘을 쏟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하루라도 힘을 나누어 과문(科文)을 익힌 적이 없었다. 비록 모친이 계셔서 과장에 나아가 과거에 응시하기도 하였으나 본심은 아니었다.
홍치(弘治) 17년(1504, 연산군 10) 사마시에 입격하였는데 당시 공의 나이가 매우 어렸다. 교리 이탄수(李灘叟)가 공과 동방(同榜)인데, 공을 칭찬하여 “우리 방(榜)에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으며 행실을 닦아 조행이 있는 이로는 나의 벗 박형지 군이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명성이 더욱 알려져 공경(公卿)이 다투어 천거하고 칭찬하니 의영고 주부로 발탁되었다. 이윽고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사람들이 “임금의 곁에 두어서 보궐(補闕)과 습유(拾遺)의 일을 맡기는 것이 이 사람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외직으로 내보내 고을 수령이 되게 한다면 어진 이를 써서 알맞은 자리에 두는 것이 아니니 전조(銓曹)의 실정(失政)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옳다고 여겼다. 바로 감찰로 고쳐 배수되고 다시 공조 좌랑으로 옮기고 이어서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이때에 국가가 현량(賢良)을 선발하는 과거를 신설하여 약간의 인재를 뽑았는데, 공이 그 속에 이름이 오르니 선비들이 서로 축하하고 기뻐하였다. 장령으로 승진하여 검상과 사간을 거쳤고, 오래지 않아 동부승지에 초배(超拜)되니 이때가 정덕(正德) 14년(1519, 중종 14)이었다.
간관이 되어서 강직한 말과 몸가짐으로 거리낌 없이 탄핵하니, 간사한 자들은 기가 죽고 무너진 풍속은 다시 살아났다. 승정원에 있을 때는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셨는데, 임금의 후설(喉舌)을 맡아 왕명을 윤당(允當)하게 출납하고 덕교(德敎)를 선양하였다. 다른 직임을 담당할 때도 모두 명성과 업적이 있었으니 조정이 바야흐로 그를 믿고 의지하여 ‘국기(國器)’라고 칭찬하였다.
애석하게도 간흉들이 눈을 흘기며 원수처럼 보다가 무리를 이끌고 공모하여 대궐 문을 열고 밤에 몰래 들어가서 입을 열고 혀를 놀려 임금을 속이니 여러 현인이 쫓겨나거나 죽어 한 사람도 화망(禍網)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공은 처음에 성주(星州)로 유배를 갔는데 여전히 가깝다고 하여 다시 의주(義州)로 귀양을 보내니, 사람들은 모두 공을 위하여 위태롭다고 여기며 화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그렇지만 공은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과 기운이 평온하여 그 모습을 보면 넉넉하고 여유로웠으니 생사가 갈릴 때도 동요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적소에 가서는 만 리 밖 죄인의 몸인지라 가묘의 제사를 몸소 지낼 수 없음을 슬퍼하였다. 선조와 선친의 기일 및 사시의 중월(仲月)이 되면 반드시 미리 재계하였고, 지방을 적어 신주로 삼아 제사를 지내어 조상이 살아 계신 듯이 모시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제수(祭需)를 극진하게 갖추어 집에 있을 때보다 풍성하였다.
13년이 지나 간흉들이 처형되니 이때부터 공정한 의론이 점점 되살아나 공을 안악(安岳)으로 이배하였고, 3년 뒤에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당시에 모친 태부인(太夫人)은 여전히 생존해 계셨다. 공은 태부인을 모시면서 늘 기쁜 모습을 하였고 잠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며 말과 안색을 잘 받들어 마음을 위로하여 편안하게 해 드렸다.
봉양에 쓰이는 물건의 경우 부드러워 몸에 맞는 옷과 입에 맞는 좋은 음식을 모두 다 갖추어 드렸다. 태부인이 병에 걸리면 의원을 찾아가 약을 구하여 장작에 불을 지피고 약탕기를 끓여 몸소 달여 맛을 본 뒤에 올렸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는 몸을 깨끗이 씻고 재계하여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태부인이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고 하늘을 부르며 울부짖어 눈물이 마르고 피눈물이 나왔다. 거적 위에 엎드린 채 밤에도 질대를 풀지 않고 지내느라 기운이 다하고 몸이 말라 마침내 병들고 말았다. 가정(嘉靖) 19년(1540) 3월 12일 상중에 죽으니 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초야에 있는 사람이나 놀라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향년이 57세이다. 천내산(川內山) 선친의 묘소 곁에 안장하였으니 예에 맞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덕기(德器)가 저절로 이루어져, 몸가짐이 반듯하여 모든 거동이 법도에 맞았으며, 마음 씀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남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았다. 매일 새벽 별을 보며 일어나 머리를 빗고 관을 쓰고서 자리를 바로 하고 무릎을 모으고 앉아 등과 어깨를 반듯하게 세우니 엄숙한 모습이 그림 속의 초상(肖像) 같았다.
집에 있으면서 효제로 근본을 세우니 노소가 다 기뻐하여 은혜로 서로 사랑하였고, 예법으로 다스려 상하의 법도가 반듯하였다. 자신의 옷은 몸을 가릴 정도만 취하고 화려한 것은 물리쳤으며, 아침저녁 밥상에는 몇 가지 음식만 놓고 특별히 좋은 음식은 차리지 않았다. 곁에 두고서 늘 사용하는 기물은 모두 조악하고 소박하여 단칠이나 금옥으로 장식하지 않았다.
사람을 접할 적에는 온화한 기운이 미간에 넘쳤고 상처를 줄까 두려워하듯 할 말을 감히 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비를 분별하고 사정(事情)을 가릴 때에는 말이 용감하고 예리하여 마치 태아검(太阿劍)을 휘둘러 햇빛을 가르는 듯 단호하였다.
늘 은혜를 베풀고 남을 구제하려는 마음으로 녹봉이 집에 들어오면 가난하여 집안을 꾸려 갈 수 없는 사람에게 먼저 나누어 주고 혼례나 장례에 경비를 후하게 보내 주어 부족하지 않도록 도우니 녹봉을 다 써 버려 남은 것이 없었다.
함께 교유한 사람들은 당시 석유(碩儒)나 명현(名賢)이 아닌 이가 없었는데, 특히 대사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매우 친하여 폐부를 환히 터놓고 지냈다. 정암도 공을 공경하고 믿어서 나라의 대정(大政)은 반드시 공과 함께 의논하여 공이 옳다고 하는 것은 시행하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공이 이르는 곳마다 선비들이 사모하여 그의 풍모를 우러러보기를 물고기들이 거북과 용을 높이 받들어 모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것처럼 하였다. 그의 부인은 변씨(卞氏)이니 공보다 먼저 죽었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희원(煕元)과 선원(善元)이고, 딸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이언명(李彦明)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오식(吳軾)에게 시집갔다.
선원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승현(承賢)이고 둘째는 사현(嗣賢)이다. 이언명의 아들은 이순(李淳)이고 오식의 아들은 오종범(吳宗範)이다. 아, 철인이 태어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하늘이 큰 덕과 뛰어난 재주를 주고 또 그의 몸에 큰 임무를 내린 것이다.
공이 처음 조정에서 벼슬할 때 하늘에서 받은 것을 베풀어 세상을 경륜하고자 했을 터인데, 한번 참소를 당하고 쫓겨나 종신토록 세상에 버려져 쓰이지 못하여 왕좌(王佐)의 뜻을 끝내 펴지 못하였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아, 애통하도다. 사(辭)는 다음과 같다.
난초가 어찌 향기롭지 않으랴마는 / 蘭豈不香
악초의 냄새가 그 향기 빼앗았네 / 蕕臭掩奪
사람이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마는 / 人豈不賢
간사한 자의 칼끝에 화를 입었구나 / 姦鋒怒觸
도를 펴지 못한 채 몸은 죽었으나 / 道屈身死
아름다운 이름 더욱 드러났네 / 令名益彰
이 옥돌에 명(銘)을 새기니 / 刻銘貞珉
후세에 길이 전해지리라 / 其傳者長
<끝>
ⓒ한국고전번역원 | 변은미 손해진 장미나 정재호 진유라(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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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朴承旨 [薰] 墓碣
朴爲著姓。出自新羅王始祖之後。本貴胄也。其先多名人聞士。相繼爲冠冕大官。名載國史家牒。班班可見。歷世綿遠。至其末裔。有諱曰切問者。贈贊成。於公爲高祖。贊成生靖難功臣封密山君諱仲孫。密山君生禮曹參議諱楣。參議之子曰諱增榮。爲人魁偉。博達多聞。以通經史。能爲文辭。擅一世重名。早歲登第。繼而又捷重試。歷踐淸班。職典文翰。年二十九。以弘文館校理卒。成廟惜之。其配曰朴氏。縣監英達之女。公校理公嗣子也。諱曰薰。字馨之。號江叟。自在幼齒。莊重少言。坐有常處。不逐群兒與戲。游弄之具。亦莫肯近其手。人皆目而異之。及年少長。一日惕然自悟。心語口曰。閔余小子。生九歲先子見背。趨庭之訓。耳不得聞也。今我不自力爲學。無以立吾身嗣先德。於是。發憤勵志。取五經四書及周程張朱性理遺編。下帷讀誦。夜以繼日。硏精義理。反躬踐實。期至於覆簣成山。鑿井次水而後已。又能旁通諸史百氏之說。窮其源而涉其流。無不貫穿。專務講學。莫肯治擧子業。雖一日。未嘗分力學爲科文。雖以母夫人在。時就有司獻藝。然非其志也。弘治十七年。中司馬科。時公年甚少。李校理灘叟與公同榜。稱公曰。吾榜多英髦俊乂之士。而好學不倦。修行自守者。吾友朴君馨之爲其冠首也。自是令聞益張。公卿交口薦譽。擢拜義盈庫主簿。已而。除報恩縣監。未之官。談者曰。置之君側。任補闕拾遺。豈非斯人之職乎。而今也出爲外邑宰。是用賢處非其地。無乃銓曹之失政乎。聞者以爲然。卽改拜監察。轉工曹佐郞。仍遷司憲府持平。是時。國家選賢良。新設科試取若干人。而公又登名焉。士林相慶以喜。陞爲掌令。歷檢詳,司諫。未久。以選超拜同副承旨。是歲正德十四年也。其爲諫官。抗言直己。擧彈無所避。姦佞氣死。頹俗生風。在政院。職親地禁。司王之喉舌。出納惟允。宣揚德敎。其莅他職。亦皆有名蹟。朝廷方倚重之。稱爲國器。惜乎奸兇側目。視爲讎敵。引黨合謀。闢天門。潛身夜入。張喙弄舌。誣動天聽。群賢斥死。無一人網漏。公初謫星州。猶以爲近。再貶義州。人皆爲公危之。或恐禍不止此。公不爲之懼。心平氣定。視其貌。浩浩然也。其不爲死生所撓者如此。旣至謫處。痛身爲萬里縲囚。不得躬親家廟之祀。每値先祖考諱辰及四時仲月。必宿齋 。豫戒紙榜標記。設位祭之。致其如在之誠。至於饋奠之饌。亦極備物。豐於在家時。歷十三歲。群兇亦以罪蒙顯戮。自是公議漸行。移公于安岳。後三年。蒙恩賜環歸鄕里。時太夫人尙無恙。公進侍。常有惋容。未忍少離帷床之側。承順言色。慰安心志 。至於奉養之具。衣柔而適於體。膳甘而悅於口。亦莫不畢給。有疾。謁醫徵藥。吹薪𤒈鼎。躬自烹煎。嘗而後進。人事之旣窮 。則潔齋禱天。請以身代之。及其遭大故也。擗踴呼天。泣盡繼之以血。伏身苫席之上。雖夜不脫絰帶。氣竭形枯。遂成疾。嘉靖十九年三月十二日。以其服卒。官居野處。莫不震悼。享年五十有七。祔葬于川內山先墓側。禮也。公稟質純粹。德器天成。行己貞正。動中規繩。處心寬仁。典物無忤。每日見星而起。理髮戴冠。正席斂膝而坐。肩背竦直。儼然若畫中像也。其於家。以孝悌立本。老幼訢訢焉以恩而相愛。禮法齊之。上下井井乎有條而不紊。儉於自奉。衣取蔽體。斥去華靡。朝晡盤楪。止於數器。而亦不設厚味。置在左右。常所取用之器。皆麤粗朴陋。無丹漆金玉之飾。其接人。和氣浮於眉宇間。言不敢盡。若恐傷之 。至於剖析是非。辨決邪正。辭鋒勇銳。若太阿橫截秋光。常以施惠濟人爲心。俸祿入門。輒先班諸親故之貧不能家者。嫁娶喪葬。亦必厚遺之。助其不及。費且盡。殆無餘儲焉。所與游無非當世碩儒名賢。而尤與趙大憲靜庵最相知。與之通肺腑。靜庵亦敬重公。國有大政。必從公與議之。公之所可者施之。所不可者罷之。所到。衣冠懷之。瞻仰風姿。如鱗介之宗龜龍。咸不得攀而偸之。其夫人曰卞氏。先公卒。生男二人。曰煕元。曰善元。女二人。長嫁李彥明。次適吳軾善。元生二男。長曰承賢。亞曰嗣賢。彥明之男曰淳。軾之男曰宗範。噫。哲人之生。夫豈偶然哉。天旣與之以碩德英才。且降大任于厥躬。公之始位於辭朝 。庶冀得施所受於天者。經濟一世。一爲䜛說所中。斥逐終其身。廢棄不用。使佐王之志卒莫之行。時耶命耶。嗚呼痛哉。其曰 。
蘭豈不香。蕕臭掩奪。人豈不賢。姦鋒怒觸。道屈身死。令名益彰。刻銘貞珉。其傳者長。<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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