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시작되면 시골소년은 내일 아침은 꼭 일찍 일어나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청명한 새 소리와 함께 아침이 밝아 오면 달려간 곳은 돌담 밖 밭둑에 있는 몇 그루의 밤나무 밑이었다. 거기에는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똘망똘망한 알밤들이 이슬을 맞은 채로 수줍게 기다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불룩하게 채워진 밤들은 십리 길을 걸어 학교에 가는 시골소년에게 가을의 고소함을 선물하였다.
속껍질을 입으로 벗겨 내면서 떪은 맛이 입에 가득하고 옷이 갈색으로 물들어 어머니가 빨래를 걱정하시는 푸념은 그 고소함에 묻혀 버렸다.
밤나무의 원산지는 아시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낙랑시대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밤이 발견되어 그 역사가 20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마한 지역의 밤은 굵기가 배만하다.’고 기록하였고 송나라시대《후한서》에 ‘마한 사람들은 큰 밤을 생산하고 있는데 크기가 배만하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의 원효대사 탄생설화에는 어머니가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원효를 낳았는데 그 나무 밤 한 개가 바리(말이나 소의 등에 실은 짐을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에 꽉 찼다고 한다.
예로부터 밤은 구황식량과 관혼상제에 빼 놓을 수 없는 필수품으로 귀중하게 사용되었다. 밤을 제사상에 올리는 이유는 밤송이 하나에 밤알이 세알 들어있는데 후손들 중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을 배출시켜 달라는 기원이며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는 한결같은 효심의 표시이다.
밤은 땅에서 싹이 틀 때 껍질은 땅 속에 남겨 두고 싹만 올라오고 땅속에 남아 있던 껍질은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다. 이로 인해 조상과 자식의 연결고리 의미로 폐백과일의 필수품 이었고 위패나 신주를 밤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겨울 땔감으로 나무를 주로 이용하였던 옛날 사람들도 밤나무만큼은 베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관리들에게 밤나무를 심게 하고 벌채한 사람은 처벌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밤을 주워 식량으로 쓰게 한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태종실록》에는 왕이 병조에 명하여 ‘군인들을 귀농시켜 넉넉한 식량준비를 위해 밤을 주워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산과 들을 불태우는 것을 금하는 것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흉년에 상수리와 밤을 주워서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밤나무를 귀중한 목재로 오랜 동안 사용하였는데 경주 천마총의 내관 목책으로도 쓰였고 서양에서 포도주를 장기 보관할 때 밤나무 술통을 이용하였다.
아주 토실토실하고 찰진 농산물을 표현할 때 ‘밤맛’에 비유하는데 ‘밤고구마’ ‘밤호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뾰족한 가시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가시 속에 품고 있는 후손을 보호하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대항하기 위한 수단일 뿐 누구를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생으로 먹거나 삶거나 굽거나 각종 요리에 넣어도 고소한 맛이 변함없는 밤은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여 ‘천연영양소’로 불린다.
‘밤 세 톨만 먹으면 보약이 따로 없다’라고 할 정도이다.
아몬드나 피스타치오와 같은 수입 견과류에 비하여 몸에서 만들어 지지 않는 필수지방산인 리놀레산 함량이 높아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고 혈관건강에 도움을 준다. 또한 항산화 영양소인 베타카로틴과 비타민C는 피부미용은 물론 알코올의 산화를 도와 술안주로 그만이다.
성장기 어린이나 면역력이 떨어지는 어르신에게 특히 좋은 건강식품이다. 껍질을 까는 게 번거로워 잘 먹지 않는다면 영양 많은 음식을 놓치는 것이다. 까서 냉동실에 얼리거나 영하 2℃ 정도에서 보관하면 오래 먹을 수 있다. 이래저래 귀찮으면 깐 밤을 구입하면 된다.
우리나라 밤은 세계적으로 품질이 뛰어나다. 매년 5∼6천톤 정도를 중국, 미국, 일본과 같은 해외로 수출도 하고 있다.
생산지 중에서 공주 정안지역의 밤이 잘 알려져 있는데 당도가 높고 고소한 맛이 뛰어나 조선시대에는 진상하던 과일이다.
또한 인지도와 품질의 차별성을 인정받아 2006년에 산림청으로부터 ‘지리적표시’ 품목으로 등록되었다.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고 한다. 밤은 가을의 대표 과실로 결실과 풍요를 상징한다.
술 좋아하는 대한민국 남성들이여 !
올 가을 윤기가 흐르는 밤을 간식과 술안주로 선택하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