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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제목: 세상을 이기는 믿음.
본문말씀: 히브리서 11장 32~38절.
저는 주일날 아침이면 주보를 만들고 남는 시간에 커피를 내린 다음 교회 옆 정자에 앉아
바람을 쐬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얼기설기 섞여 있어서
미관상 보는 것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만 언덕에 위치해 있어서 주일 아침 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어 교회로 가다가 보면 오른쪽에 삼손 체육관이라는 큰 간판이 보이는데 매번
그냥 지나가다가 무심결에 생각난 것이 왜 하필이면 삼손 체육관으로 이름을 지었을까 였습니다.
하고 많은 인물중에 왜 하필 삼손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관장님은 교회 다니시는분인 것 같고
성경적인 인물중에 제일 힘쎈 인물이 삼손이기에 삼손 체육관으로 했을까?
차라리 헤라클레스나 뭐 다른 이해하기 쉬운 인물로 체육관의 이름을 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문뜩 제가 삼손에 대한 선입견이 참 많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삼손에 대한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실인이었다. 힘이 천하장사였고, 하나님의 사사였다. 그 힘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쳤고,
이방 여인과 결혼했던 사사였으며,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속아 머리를 깍여 힘을 잃고,
결국에는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서 눈이 뽑힌 후에, 이방사람들에게 조롱당하였고,
마지막에는 블레셋이 섬기던 다곤 신전 안에서 힘을 되찾게 되고, 그곳 신전을 무너뜨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죽고 자기도 죽는 시대의 풍운아, 비운의 이스라엘의 사사였다정도로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삼손을 평가할 때, 유독 삼손이 저 평가 되는 이유중에 하나가 여자문제입니다.
여자한명 잘못 만나가지고 하나님의 사명을 망각한 사사가 아니었는가? 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자문제에 참 민감하다는 겁니다.
유독 그런 것 같아요. 유교적인 문화를 가진 것이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문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독 여자문제에 민감합니다. 누가 바람을 피웠다더라. 누군가의 스캔들이 났다거나 하면 반드시
들어가서 클릭해서 보면서 욕도하고 파렴치한이 있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참 재밋는 것은 성경에 보면 다윗도 여자문제로 꽤나 큰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선한 왕이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쳤던 왕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삼손은 그저그런 사사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심지어 다윗 왕이 범죄한 것을 옹호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다윗 왕이 밧새바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밧새바가 오히려 성공에 눈이 멀어서 다윗을 유혹
했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최근까지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낮에 옥상에서 왜 목욕을 했냐는 겁니다. 하고 많은 목욕 밤에 욕실에서 하면되지 왜
옥상에서 보란 듯이 그렇게 해가지고는 다윗에 눈에 들어서 그렇게 짝짝궁하게 되었나. 다분히 밧새바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말을 들어보신분들도 계실겁니다.
그런데 최근에 구약을 전공하는 동기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밧새바가 유혹을 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 친구의 말은 밧새바는 정결예식 기간이었다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생리기간에는 부정했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었고, 정화하는 기간이 있었는데. 그래서 할 수 없이 옥상해서 그렇게 씻을 수 밖에 없었고, 성경에 보면 다윗과 동침후에 마치 허니문 베이비처럼 아이를 밴 것도 일종의 생리기간 이후에 가임기간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라고 본다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성경
안에 이야기가 설명이 됩니다.
일단 이야기가 옆으로 셋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 왕과 사사 삼손이 여자 문제로 우리에게 잘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은 최대한 좋게 평가하려고 하는 반면에 사사 삼손은 여전히 저 평가 되고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은 참 재미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삼손에 대해서 그런 평가를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다윗과 삼손 모두를 동등하게 평가하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사사 삼손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그중에 삼손을 특별히 ‘믿음의 사람’ 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읽은 말씀,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장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에 대한 말씀이 아주 자세히 기록된 곳이 바로 11장입니다.
우리들이 잘하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라는
말씀이 기록된 곳이 바로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도 봐서 알겠지만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보면 우리들이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삼손의 이름이
그 위대했던 선지자들의 이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평가가 어떠하던지 간에 , 하나님의 평가는
사사 삼손을 하나님의 사람 그리고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하셨을까요?
사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구별되게 태어났습니다.
사사 삼손은 날 때 부터, 나실인으로 길러졌습니다.
본래 삼손의 부모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는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큰 불행이었고, 신에게 복을 받지 못했다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그의 부모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하십니다. 아들을 주겠다.
대신 그 아이는 구별된 나실인으로 길러라. 내가 그 아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본래 나실인은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길러진 사람과 기간제 나실인이 있습니다.
기간제 나실인 무엇이냐? 본인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이년 정도 하나님 앞에 나실인이 되기로
서원(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을 하겠습니다.
일종의 하나님 앞에 똑바로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스스로가 서원한 나실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삼손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고,
나실 인으로 길러졌습니다. 날 때 부터 나실인 이었던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삼손이 그랬고, 다윗에게 기름 부었던 사무엘 선지자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었습니다. 일종에 날 때부터 나실인인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하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삼손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삼손이 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정확하게는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삼손을 이끌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살았던 삼손이 정말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었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성경은 삼손에 대해서 성령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라는 표현이 참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려진대로 삼손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을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우리는 삼손이 단순히 블레셋 여인이 예뻐서 결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은
삼손은 절대 그런 생각으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 14장 3절~4절]
그러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타일렀다. "네 친척이나 네 백성의 딸들 가운데는 여자가 없느냐?
왜 너는 할례도 받지 않는 블레셋 사람을 아내로 맞으려고 하느냐?" 그래도 삼손은 자기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꼭 그 여자를 색시로 데려와 주십시오. 그 여자는 첫눈에 내 맘에 쏙 들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주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실 계기를 삼으려고 이 일을 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다.
삼손의 생각대로 자기맘대로 여자를 취했을까요?
심지어 삼손의 부모도 그 모든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블레셋을 치려한 삼손의 계획의 일부분 이었습니다.
삼손이 그 블레셋 여인을 맞이하러 갈 때, 젊은 사자가 삼손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힘이 쎈 삼손이 젊은 사자를 죽이고 갑니다.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찢어버렸다라고 말한 아주 잔인한 행동을 합니다.
힘이 넘쳐서 주체하지 못한 걸까요?/ 교만의 절정이라 그런겁니까?
힘이 있으면 피해가면 되고 사자를 쫒히면 되지 꼭 이렇게 피를 봐야할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삼손이 사자를 염소를 찢듯이 찢어서 죽였다라고 말합니다.
근데 그런 행동을 한 삼손에게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였다. [사사기 14장 6절]
결국 삼손이 한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라는 말이 됩니다.
왜? 하나님은 사자를 찢어서 죽도록 하셨을까요? 사자를 제물로 삼기라도 하셨을까요?
가장 설득력 있는 신학적 해석은 이렇습니다.
젊은 사자는 우두머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강한 나라를 상징하기도 하고, 젊은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힘쎈 우두머리는 수 많은 동물들의 왕입니다.
그리고 모든 동물들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이 젊은 사자는 신생 국가였던 블레셋을 상징 합니다. 이제 막 강해지기 시작한 강국,
당시에는 보기 힘든 획기적인 철기문명을 소유했던 나라. 그 철기문화를 전쟁도구로
이용해서 주변나라를 약탈하고 괴롭히는, 특별히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출신인 연약한 인간/ 보통 인간은 사자와 싸워서 이길 수 없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한 삼손이 젊은 사자를 죽임으로써.
블레셋은 하나님의 의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상징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블레셋 사람을 죽일 때, 그리고 여우꼬리에 불을 붙여 블레셋 곡창지대를
태운 것 등등 어찌 보면 장난치는 듯한 모든 일들 속에 순간순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다라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삼손을 힘만 쎈 천방지축의 사사로 평가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매 순간 순간 삼손과 함께 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삼손은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다라는 겁니다.
사사기 서의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사이클입니다.
사이클이 뭡니까? 사전적인 용어로는 반복을 뜻합니다. 다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
사사기의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반복입니다. 어떤 반복일까요? 죄의 반복.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징계를 통해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서와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은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게 되고,
회개와, 용서,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반복적인 것이 바로 사사기 안에 사이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그 의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신은 섬기지 않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여호수아의 고백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한목소리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어떻게 됩니까?
화장실 들어가기 전하고 들어간 후의 사람이 바뀌듯이 바뀝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징계를 줍니다. 그게 뭡니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를 붙여준 겁니다.
그것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사사 에훗의 시대에는 모압이, 드보라와 바락 사사가 싸우던 시기엔 가나안이 대적이었고,
삼손의 시대엔 블레셋이란 나라가 그 벌입니다.
그렇다면 사사는 어떤 사람들 입니까?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런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의 역할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들에 맞서 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키는 것이
사사의 역할이었습니다.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바로 사사였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 삼손의 시대에는 이 사이클이 깨집니다.
블레셋의 압제에도 불고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을 향해 대적하고 죄악 된 길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들과 손을 잡고, 구원자인 사사 삼손을 볼모로 잡아서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블레셋에게 갖다 바치는 것 일종에 친일 매국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악한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대적들과 싸움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삶을 그들 스스로가 포기한 것입니다.
삼손은 이러한 시대 가운데, 세상과 홀로 싸우던 믿음의 용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삼손의 모습을 보며,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삼손과 마찬가지로 같은 민족에게 포박당한체 갇은 모욕을 당하며 이방인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한 메시야를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아버렸습니다.
세상의 죄를 위해 고독하고 외롭게 홀로감당하신 분, 그 모든 것을 감당하신 예수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죄와 타협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탄의 자녀로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그 가녀린 몸으로 고통속에서 몸부림 치신 예수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쩌면 또 다른 의미에서 사사시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분명 우리 안에 예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인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타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 친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는 모습은 예수를 아는 사람보다 더 선하게
삽니다. 사실 제 모습만 보더라도 그 친구는 저보다 훨씬 성실하고 모범적이고 착하고
진실합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선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렇다면 왜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까?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보란 듯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믿음 때문에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믿음 때문에 죄를 더 짓고 사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수많은 죄들 특별히 자범 죄들을 저지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 죄를 정말 모르고 짓습니까?
저의 삶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제가 할 것이 죄인줄 알면서 짓더라구요. 융통성이라는
미명하에 스스로가 합리화하고 편하게 쉽게 죄에 대해서 생각하며 짓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도 자신이 할 것이 죄 인줄 알면서도 짓습니다.
그런데 왜 죄를 짓습니까?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죄를 사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믿는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돈을 주고 과자를 사듯이 너무도 쉽게 믿음을 가지고 죄를 사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무서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죄와 타협하지 말고 몸부림치며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죄를 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이 것이 바로 현대판 사사기의 모습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우리들은 삼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삼손은 그 시대에, 블레셋을 홀로 감당한 , 믿음의 용사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심지어 부모역시도 자신의 계획을 몰랐고, 심지어 같은 형제인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결박한 당한체 적들에게 넘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생해서 블레셋을 쇠퇴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할까 합니다.
아까 두 번째에서 언급했던 젊은 사자를 죽인 삼손의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그 사자의 사체에 무엇이 생긴 줄 아십니까? 꿀이 생깁니다.
사체 사이에 꿀이 생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생깁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을까요?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적과 손잡지 말고, 그 대적을 물리쳐라. 그리할 때, 젖과 꿀이 흐른다.
죄와 타협하지 말고, 죄가 죄 인줄 알았다면 대적해야 한다. 그것이 맞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죄의 댓가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몸부림치며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 보다 더 달다.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너희를 삼키려해도,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대로 살 것이라.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사탄의 대결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비단 저뿐인가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지금의 현재를 살아가고 계십니까?
삼손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삼손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38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중에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말씀을 수호하며, 말씀대로 사는 사람.
귀한 믿음의 유산으로 죄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담대히 죄를 물리치는 사람을
더 찾으십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왜곡된 신앙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믿으며, 죄를 사고,
자기 소견의 옳은대로 융통성을 발휘하며 쉽게 쉽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죄와 타협하지 말아라. 오히려 믿음으로 그것을 물리쳐라.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 보다 더 달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 믿음의 용사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