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4. 설교문
음악405
기원 49 빌립보서 2장
묵상기도 사는게 아더매치합니다. 주여, 용서하옵소서
신앙고백
찬송 94 예수님은 누구신가
기도인도 유에스더 집사
성경말씀 마태복음13:53~58
찬양
설교 사는게
봉헌찬송 4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봉헌기도
광고
찬송 499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축도 장미꽃 위에 이슬과 같은 인생, 이제 그만 옹졸하지 않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모두 비켜라
안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웁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매주 토요일 불후의 명곡을 합니다.
MC신동엽은 참 재주가 많은 친구입니다.
어쩜 그렇게 진행을 잘하는지 감탄하곤 합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내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고
오히려 약점이 드러난 자신들까지 웃지요.
방금 제가 청승맞게 불렀던 노래를 어제 어린 루나가수가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선곡한 이유가 어느 청각 장애우에게 온 편지 때문이랍니다.
그 청각 장애우는 루나가 부르는 노래를 듣지 못하지만 표정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며
루나가 불러주는 노래 표정을 보며 용기와 위로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청각 장애우 한 사람을 위하여
수화까지 하면서 부르는 모습이 천사였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 형님도 어릴 때 자주 불렀습니다.
항상 학교 둥둥치기가 일이었던 형님은 어머님께서 꾸짖으시면
쥐구멍에도 해뜰날이 있다며 이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은행 상무이고 형님의 딸은 서울대하교 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쥐구멍에 해가 떴습니다.
이렇게 긍정의 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늘 제 설교도 한 사람을 위하여 준비 했습니다.
5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54절,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55절,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절,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57절,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절,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이 본문에는 다섯 개의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는가?
둘째, 예수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셋째, 그의 모친과 형제들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넷째, 그의 누이동생들도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다섯째, 예수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는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놀라서 제기한 질문입니다.
촌놈이 어떻게 된 것이냐는 것이지요.
이렇게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말씀은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비유 속에 등장하는 가시밭이나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 누구겠습니까?
매사에 불평하고, 훼방하고, 없는 말 지어내고, 의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가라지와 먹지 못하는 가시고기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들은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11:20~24)
이들은 예수님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잘 안다고 얼마나 잘난 체 했습니까?
그래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로, 권사, 집사, 전도사,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불신, 의혹, 시기, 다툼이 있습니다.
너무 잘 알아도 병입니다.
제 이웃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저를 정 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30년, 20년, 10년전의 기억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가에 가면 처남이 어른입니다.
지난해 장인이 돌아 가셨습니다.
급히 달려갔습니다.
임종 예배를 못 드리고 있었습니다.
처남은 군산에서 전주까지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섬기는 교회 목사님께서
못 오신 것입니다.
나를 보더니 매형이 임종기도 해 주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입관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남이 다니는 전주교회에서
성도님들을 밀물처럼 우르르 몰고 영정 앞에 둘러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썰물처럼 우르르 성도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교회 동아리 세과시라도하는듯 보였습니다.
목사님부터 조금도 경건한 모습을 볼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족들은 지하실로 내려가 수의를 입히고 입관을 하는 절차가
아주 경건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입관 예배를 영정 앞에서 드렸는데도
그냥 입관하기가 쓸쓸하고 뻘쭉했던지 또 매형이 기도해 주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유족들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 기도 소리를 듣고 처가 어느 어르신은 반했다며 극찬하셨습니다.
이때 저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막둥이뻘 되는 집사처남이 목사인 나를 대타로 시키는 모습이 우습기도했지만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우리 집 형제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집안 추도 예배가 있을 때마다 제가 집례를 합니다.
그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다른 가정 집례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맹숭맹숭한 얼굴들을 보면서 말씀을 증거 한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목사님을 모시면서 성도들 맘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지금껏 제 목숨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던 노 전도사님, 나 집사님 등이 앉아
있을 때 한 목사님이 담임 목사하시고 내가 떠나면 어떻겠냐는 말을 던졌습니다.
노 전도사, 즉시 하는 말 하나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나 집사님은 왜 그런 말씀 하세요.
그러더군요.
우리는 2년이 넘도록 함께 동거동락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노 전도사는 내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니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다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고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노 전도사는 제 친동생이라고 이보다 더한 변호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처음으로 노 전도사 남편에게서 온 편지를 한 목사께 보여 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도 네 치지 않고 이렇게 사랑해 주는 내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노 전도사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노 전도사는 자주 성도들과 다투는 문제로
저한테 꾸중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구구절절 변명하는 모습이
저와 다투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노 전도사는 한 번도 저에게 불순종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벌써 30년을 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그런데도 제 가족들은 저를 잘 모릅니다.
우리 가족도 저를 다 알지 못하는 데 그 누가 저를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우리목사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를 더 잘 모릅니다.
저는 눈이 1.5 정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면 작은 글씨가 보이지 않습니다.
노안이라고 합니다.
가까운 글씨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너무 가까이 있다보면 그 사람의 소중함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돌아가시니 지금 얼마나 뵙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제 곁에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오늘 새벽 2시 50분경에 가슴이 좀 아파서 일어났습니다.
우리 나 집사님 나이에 일찍 돌아 가셨습니다.
주님! 저도 빨리 데려가시면 않되겠냐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가래침 튀 벹으면서 하는 말이 있잖습니가?
뭣같은 인생이라고.
다툴 일도 아닌데, 싸우고, 험담하고
그래서 기도하면서도 죄짓는다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옹졸합니까?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향 사람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나
지금 우리들이나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목사이니까
내가 권사이고 집사이니까
그리고 오랫동안 믿었던 성도 이니까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래된 신앙인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봤습니까?
그럼 당신은 누구입니까?
Who are you?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who am I?
열질 물속은 알아도 한질 사람 속은 모릅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아닙니까?
나 자신도 모름니다.
여기에 허물, 흉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왜 목사가 되었을까?
제가 잘나서,
공부를 많이 해서,
돈이 많아서,
정직하고 진실해서, NO! 아닙니다.
흉도 많고 허물도 많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불쌍하니까 이제 주님의 일만 하라고
그래서 새벽부터 천사의 말을 흉내 내며 기도하고
예수님처럼 삶을 연습하다보면 착해지지 않겠습니까?
7살박이 소녀와 동네 목사님이 길거리에서 만났습니다.
애야, 너 하나님을 믿지?
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구?
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분이지?
그냥 하나님이요.
교회에 다니니?
아뇨.
왜 안다닐까?
다 알고 있으니까요.
뭘 알고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줄도 알구,
사람을 사랑할 줄도 알구, 고양이도, 개미도, 꽃들도...
이 모든 것들을 내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줄 아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얼 얼 만큼 알고 계십니까?
이런 가정도 있습니다.
남편은 매독에 걸렸습니다.
아내는 심한 폐결핵 환자입니다.
며칠 전 아이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남은 아이 셋이 있는데 결핵으로 살아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임신 중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똑똑한 사람이 낙태수술해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똑같은 상황에서
다섯 번째 아들로 베토벤이 태어났습니다.
힘드십니까?
죽고싶으세요?
울고 있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 앞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