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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실패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문해력이 없는 자들에게 성서를 해석하도록 자격과 권위를 부여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마치 매뉴얼을 읽을 수 없는 문맹자에게 위험한 기계의 운행을 맡긴 것과 같습니다. 성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위험한 책입니다. 첫 번째는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의식을 일깨워 제국의 질서에 저항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제국의 권력에 위험한 책입니다. 두 번째는 문해력이 없는 사람이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었을 때, 사람들을 제국에 동조하며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험한 책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맞고 있는 위기는 두 번째 이유 때문입니다.
문자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의미를 가진 그림입니다. 문자를 읽고 그 의미를 유추해내는 능력을 문해력(Literacy)이라 합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은 한 사람의 교양을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그것은 문자 기표 너머에 있는 기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리터러시(문해력)라는 말은 차츰 어떤 사물과 매체에 대한 이해와 활용 능력을 말하는 쪽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터러시는 시대와 상황을 읽는 능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언자(Prophet)는 시대를 읽는 리터러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대와 인간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고 방향을 제시했던 사람들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이들을 예언자라는 이름보다 현인(현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지요. 김어준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에게 한반도 문제의 현인이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었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리터러시가 있다는 뜻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홀로코스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가장 충격적인 현상은 AI의 등장입니다. 1만 년 전의 농업혁명과 200년 전의 산업혁명, 그리고 70년 전의 정보혁명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충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호기심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자기 이익이 되는 쪽으로 재빠르게 활용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미디어에 대한 기능적 활용 이전에 그것이 가져올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은 고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고뇌하지 않고 소비하는 데 쾌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때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예언자입니다. AI의 메커니즘과 그것이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 나아가는 방향, 그로 인한 인간의 운명 같은 것들에 대해 리터러시가 있는 현인이 등장합니다. 우리에게 그 리터러시를 요구하는 사람이 박태웅 선생입니다.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이라는 직함보다 난 그를 선생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새로운 미디어 AI에 대해 잘 정돈된 논리로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책 <박태웅의 AI 강의>는 AI 시대가 시작된 이 시점에서 ‘현자의 돌’ 같은 책입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단순 소비되는 AI에서 인간을 위한 AI로 우리 의식을 전환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AI 홍수 속에 단순 소비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음 세대에게 리터러시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착한 사람입니다. 어려운 내용을 어린아이들에게 쉽게 설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똑똑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매우 친절하게 진심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현학적인 말로 아는 체 하기보다 쉬운 언어로 듣는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책은 그래서 읽기가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매우 깊고 진지합니다. AI 시대를 맞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AI를 알고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AI 리터러시’라고 말합니다. 모르고 사용하면, AI를 단순 소비하게 되고 그것이 가져올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결과들을 감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책에서 그 부정적 결과들, 즉 인간의 운명에 대해 비극적 전망을 내비칩니다. 하지만 그는 그 비극마저 드라이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행간을 읽어나가다 보면 위험한 사태에 대해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껴집니다. AI가 인간의 도구로 출발했지만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는 ‘특이점’이 오게 될 때 그것은 인간의 통제선 밖으로 벗어나게 되고, 터미네이터의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상과학이 아니라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김대식 교수의 <빅 퀘스천>이나 <인간 vs 기계>에서 충격을 받은 사람이라면 AI가 현실로 다가온 우리 시대에 박태웅 선생에게 치유와 전망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한 AI’를 요청하는 그의 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한 AI’로 만들기 위해서는 AI 리터러시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리터러시가 없는 자들에게 성서 해석의 열쇠를 맡겨놓고 파국을 향해 가는 교회처럼 AI에 대한 리터러시가 없는 사람들은 필경 비극적인 운명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종파의 몰락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닥칠 비극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이전에 AI로 인한 인류 멸망이 더 빠르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AI가 우리 시대의 묵시록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박태웅의 AI 강의>는 <박태웅 AI 묵시록>이라고 읽힙니다. 그는 친절하고 절제된 언어로 말하지만 읽을수록 섬뜩합니다. 그래서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묵시 2,7)라고 반복하는 요한묵시록이 자꾸 떠오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