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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6:25-28절
요한복음 8:31-36절
참 자유를 찾아서
2012.6.24일
▣ 벌써 2012년이 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참 세월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늘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나의 존재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삶을 한번 점검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하여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올해 첫 주일에 각자 삶을 고민하면서 기록한 “유언장”을 돌려드립니다. 한번 올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들 안에 생각하고 결단 했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남은 반년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보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오늘 지난주일 보려고 하다고 못 본 영화를 보려고 합니다. 독일 영화인데 2003에 개봉된 영화입니다. 제목은 ‘신과 함께 가라’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1693년 교황으로부터 이단을 파문당한 칸토리안 교단의 수도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칸토리안 교단은 “성령은 목소리와 함께 임하시고 찬양으로 주께 나아가라.”라는 말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성부로 부르는 찬양을 4음부로 부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들은 찬양을 통하여 기도하고,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게 됩니다. 이들의 선율을 잠시 감상해 보시지요.
▣ 영화1장면(CD1, 00:04:52 - 00:07:11) : 4명의 수도사의 찬양
▣ 칸토리안 교단은 파문을 당한 뒤에 교인들은 다 흩어지고 수도원도 다 문을 닫고 여기 이 수도원도 겨우 4명의 수도사들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도 경제적으로 어려워 경매에 들어가게 되고, 문을 닫게 됩니다. 원장님은 마지막으로 운명 하시면서 칸토리안 교단의 정신이 담긴 규정집을 마지막으로 남은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에 갔다 주고 그곳에서 생활하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그래서 3명의 수도사들인 세상으로 나옵니다. 벤노, 타실로, 아르보 수사는 걸어서 이탈리아로 향합니다. 그들이 만난 세상의 모습을 잠시 보시지요.
▣ 영화 2장면(CD1, 00:15:33 - 00:17:08) : 기찻길에서
▣ 영화는 로드 무비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까지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평생을 수도원에 머물면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 3명의 수도사들이지만,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그들을 종노릇하게 하는 얽매인 요소를 찾게 됩니다. 먼저 아르보 수사에게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수도원에 들어와서 항상 남자들 사이에서 생활하다가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여기자 ‘키아라’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아르보 수사는 여인과의 사랑을 통하여 자신을 종노릇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실로 수사는 가족이었습니다. 이탈리아로 가는 도중에 자신의 고향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0년 전에 어머니가 재혼을 하는 과정에서 새아버지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집을 나와서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타실로 수사는 고향 집으로 돌아갑니다. 노년이 되어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어머니는 혼자서 힘든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본 타실로 수사는 어머니 곁에 남기로 경정합니다. 마지막 벤노 수사는 지식이었습니다. 학구적이고, 아주 원칙적인 사람인 벤노 수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신학교 동창인 클라우디스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친구는 지금 신학교 학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돈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벤노 수사는 신학교 도서관에 보관된 수많은 찬양 악보를 보는 순간 자신의 욕망인 지식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친구인 클라우디스 교장이 무엇을 원하는 지도 알지만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그곳에 남기로 결심합니다.
▣ 이와 같이 수도 생활하던 수사들은 자신을 얽매고 있던 모든 것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그들을 얽매고 있는 것에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8장 36절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어디엔가 억눌려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엔가 억눌려서 자유를 박탈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노예로 얽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는 자유로운데 무엇에 얽매였다고 왜 그렇게 말하지?’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에게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3절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아무런 억압과 얽매인 것이 없는 존재였을까요? 그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고, 율법의 노에로 살아가고 있었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얽매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 우리는 깊이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지금 얽매여서 자유하지 못하는가? 나를 참된 자유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얽매인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돈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지배 받고 흔들리고,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0-21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늘에 쌓는 돈이 있고 하늘에 쌓지 못하는 돈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번 돈은 하늘에 쌓고 그렇지 않은 돈은 땅에 쌓는 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돈을 이웃과 선한 일에 사용하면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본질적인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에 이끌리게 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는 것은 욕심에 이끌리어 지상의 물질을 보물로 여기지 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보물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명예를 최고로 여기면 야심이 그 사람을 장악하고, 돈을 최고로 여기면 탐욕이 하나님 나라를 점령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많은 돈을 벌어서 좋은 일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돈에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 또한 우리들은 무엇에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에 대한 인정입니까? 아니면, 자식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를 얽어 매는 것의 근본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뿌리인 원죄에 대해서 이해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하십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지만 오직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마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마라’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 명령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의 원칙을 심어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무의 열매 하나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원칙을 정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너는 앞으로 살아갈 때 네 욕심을 따라 살 것이냐 아니면 내 말을 따라 살 것이냐 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너의 삶의 주인을 너 자신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으로 할 것이냐를 결정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으로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고 이해가 가든 이해가 가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여 자신들의 욕심까지 제어하면서 살아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실패하고 맙니다. 사탄의 유혹은 “네가 네 삶의 주인이 되어 너의 욕심대로 살아가라”고 유혹합니다. 그것이 자유로운 삶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 의미로 “죄란 하나님으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을 삼지 않고, 자신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바로 이런 죄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음으로 해결하십니다. 바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대가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죄의 짐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무거운 짐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참된 자유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 영화로 돌아와서 벤노, 타실로, 아르보 세 명의 수사가 세상에 나와서 그들이 얽매이고 종노릇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회개의 과정도 그들이 평소에 찬양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감을 배웠듯이 찬양으로 그들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벤노가 드리는 가톨릭 미사에서 찬양으로 회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보시지요.
▣ 영화3장면(CD2, 00:29:15 - 00:31:51) : 3명의 수도사의 찬양
▣ 단성부로 부르는 가톨릭 미사에서 화음을 넣어 찬양하는 과정에서 먼저 아르보를 사랑하는 키아라가 회개하게 됩니다. 아르보를 사랑한 것이 자신의 욕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벤노는 자신 안에 권력의 욕심과 지식의 욕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타실로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에서 해방됩니다. 이 찬송은 우리가 갖고 있는 찬송가 312장의 찬양입니다.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일평생 주 만 바라며, 너 어려울 때 힘주시고, 언제나 지켜 주시리, 주 크신 사랑 믿는 자 그 반석위에 서리라”입니다.
수사들은 이 찬송의 가사에 자신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나를 이끌어가는 그 어떤 것에서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언제나 힘주시고, 지켜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흔들리지 않고 반석위에 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 오늘 요한복음 8장 32절에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진리”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였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어떤 방법이나 다른 무엇으로도 우리를 얽매이고 있는 짐에서 해방하게 할 분이 없습니다. 그분 안에 잇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목자 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의 문제가 주님의 문제가 되고, 주님께서 해결하여 주식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비결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는 참된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맛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책임을 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를 섬김의 종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비밀을 깨닫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