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전 정통풍수지리 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임광묵
*본 자료는 사단법인정통풍수지리학회.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및 이외 학회의 답사기 및 답사안내를 참고자료로 작성하였습니다.
소중한 정보를 제공해주신 여러 학회 관계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임광묵 배상
------------------------------------------
의정부시
1) 신숙주 묘
의정부시 고산동 구성말에 있다.
무송군부인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묘전에는 묘비석, 상석, 문인상, 신도비, 한글창제사적비등 각종 석물들이 있는데, 그 중 한글창제사적비는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
조선 초기 문신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間齋). 본관은 고령(高靈).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 41년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42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섬[對馬島(대마도)]에 들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했다. 그 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明)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얻어 훈민정음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47년 집현전응교가 되었고, 53년(단종 1) 부승지가 되어 계유정란에 참여해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55년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다음해에 병조판서·대사성 등을 지냈다. 57년 우의정에 오르고 5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60년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로서 모련위(毛憐衛)의 야인을 정벌, 62년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곧 원상(院相)이 되었고, 68년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이 되었으며, 71년(성종 2)에 좌리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72년에는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정운(東國正韻)》 《국조보감》 《영모록(永慕錄)》 등을 찬수했으며, 《보한재집》 《북정록(北征錄)》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의 저서를 지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전하는 것으로는 《몽유도원도》의 찬문(贊文)과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양주시
1) 양주관아지 및 양주향교
양주시 양주읍 유양리에 위치하고 있다.
양주의 읍치는 원래 한양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1394년(태조3년) 조선의 수도가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서울 광진구 일대인 대동촌(大東村)으로 옮겼다가 다시 견주(見主)의 옛터인 지금의 양주군 고응리로 옮긴후 중종1년(1506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 복원한 관아가 있는 자리는 목사의 정청이었던 매학당이 있던 곳이다. 매학당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외동헌과 가족이 생활하던 내동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0칸규모였다.
향교는 공자등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양주향교는 조선 인조때 창건되어 많은 유학자를 양성 배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1년)재건하였고 6 25전쟁때 불에타 없어진 것을 1958년 복원하였다. 건물의 전체적인 배치를 보면 입구인 외삼문을 지나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 내삼문 안쪽에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와 서무가 있는 前學後廟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2) 권극관 묘
양주시 양주1동에 있다.
권극관의 가계는 할아버지 권홍, 아버지 권덕유로 이어지고 권극례, 권극지, 권극의등이 형제이다. 권극관의 아들은 권득기이나 권극례가 생부이다.
권홍은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초명(初名)은 간(幹), 자는 백도(伯道), 호는 쌍당(雙塘)·송설헌(松雪軒). 본관은 안동(安東).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균(鈞)의 아들. 1382년(고려 우왕 8) 문과(文科)에 급제, 89년(공양왕 1) 간관(諫官)으로서 정몽주(鄭夢周)의 당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조선 정종 때 좌보궐(左補闕)·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성균관악정(成均館樂正)을 지냈고, 딸이 태종의 빈(嬪)이 되자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권극례는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중(敬仲). 본관은 안동(安東).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예문관(藝文館)을 거쳐 전적(典籍)을 지내고, 정언(正言)에 올라 당시의 권신들을 탄핵하여 직언(直言)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589년(선조 22) 예조판서로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反)사건을 적발했으며, 1590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묘는 용과 혈등 풍수지리를 공부하기에 적합한 여러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3) 죽산안씨 연창위 종가(竹山安氏延昌慰宗家)
양주군 양주읍 만송1리에 있다
2001년 1월 16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죽산안씨 집성촌 입구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있다. 북쪽으로 약 8km 거리에 회암사(檜巖寺)가 있고, 회암사의 배산인 칠봉산(七峰山:506m) 능선이 뻗어내려 만송리를 감아돌고 천보산(天寶山:337m)으로 이어져 이 마을의 안산이 된다.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의 부마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손자이자 마을의 입향조인 안방형(安邦炯:1465~?)이 1500년(연산군 6)에 세웠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으나 영조때 마을에 정자 등을 세우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고, 그 후 부분적으로 보수하여 조금씩 변형되었으나 당시 사대부의 주택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전체적인 집의 구조는 ㅁ자형이며 바깥마당에 면한 바깥채는 퇴락이 심하여 현대식 건물로 개조하였다. 대청 위 종도리 측면에 묵서명이 있으나 판독할수 없어 현 건물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구의 치목이나 맞춤 그리고 공간구성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36대 종손 안민용(安玟鏞)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4) 김극핍(金克?,1472-1531)묘소
양주군 주내면 마전2리 내촌마을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 광산(光山)은 시호는 평정(平靖)
자는 자성(子誠)이다.
아버지는 공안공(恭安公) 겸광(謙光)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삼척진씨(三陟陳氏)로 사직 계손(繼孫)의 딸이다.
성종 21년(1489)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 5년(1498) 식년시 문과에 3등 23인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가 되었고,검열, 봉교, 전적, 예조좌랑, 수찬, 지평, 예조정랑이 되었다. 이 때 연산군의 정란(政亂)으로 언관(言官)을 주찬(誅竄)하자 고산현(高山縣)에 유배되었다. 중종 1년(1506) 중종이 즉위하자 귀양에서 풀려나와 교리가 되고 장령, 부정으로 옮겼고 승문원 교감(校勘)으로서 연산일기를 수록하는데 참여했고 그 후 사간, 집의 제용, 선공감정에 올랐고 직제학, 동부승지, 우승지,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좌승지, 도승지,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한성부우윤, 이조참판, 좌참찬, 병조판서, 세자좌빈객, 우찬성, 좌찬성 겸 세자이사에 이르렀다. 항상 음흉한 무리들의 횡포와 방자함을 임금에게 직언으로 간하여 출척(黜斥)할 것을 아뢰고 흉당들의 원한을 받았다. 중종 25년(1530) 김안로, 허항, 등에게 몰려 관작을 빼앗기자 단식 끝에 발병하여 서거(逝去)하였고 중종 32년(1537) 김안로 등이 사사(賜死)된 후 다시 복관(復官)되었다.
용모가 단아하고 식견이 풍부하였으며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교만하지 않았다.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광악군(純忠輔祚功臣崇祿大夫光嶽君)에 추증되었다.
※가계도
김철산-국광-극뉴-종윤-호-계희-장생-반-익겸-만기(대전 연기 번성)
-겸광-극핍-명윤, 홍윤(대사헌)......
5) 북창 정렴(鄭濂,1506-1549)묘
양주군 주내면 산북리에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이다.
어려서부터 음률. 천문. 의약. 지리. 복서등에 정통하엿다.
특히 약의 이치에 밝아 왕실에 들어가 진찰하기도 하였다.
태어날때부터 신령스럽고 특이하여 유불선 3교에 두루통하였으며 신인(神人)으로 알려져 숱한 화제를 남겼다.
6) 태종의 처남 민무질(閔無疾,?-1410)묘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묵은동에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제(霽)의 둘째아들,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어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지고, 1403년(태종 3) 예문관총제(藝文館摠制)로서 송판(宋板)의 시전(詩傳)을 자본(字本)으로 하여 동활자를 주조하였다. 의정부지사(議政府知事) ·좌군총제(左軍摠制) ·우군총제(右軍摠制) 등을 지냈다. 종친간의 이간을 꾀하였다가 탄핵되어 장단(長湍)에 유배, 사사되었다.
7) 한확 부인묘소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에는 청주한씨 한확(韓確/1403~1456) 선생의 부인 묘가 있다. 한확 선생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목단반개형(牧丹半開形) 명당에 있고, 부인은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다. 이는 부부지간이라도 명당을 찾아 일인일묘(一人一墓)로 쓰겠다는 당시 청주한씨 가풍에 연유한다. 홍씨부인은 조선초기 양촌 권근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인 한확의 부인이며 세조와는 사돈지간으로 인수대비(성종 어머니)의 어머니다.
인수대비는 예전 KBS드라마 `왕과 비`에서 채시라씨가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의 부인으로 나온 적 있다. 의경세자가 20살에 요절하자 아우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예종도 19세로 요절하자 예종의 아들(인성대군, 제안대군)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제9대 성종으로 등극하게 한다. 그리고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한씨(채시라 분)는 소혜왕후가 되어 성종의 정치에 많은 자문을 한다. 그만큼 학식이 깊고 경전에도 뛰어난 여걸이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출입을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성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녀를 폐비시켜 사약을 내리게 하기도 하였다. 이일로 나중에 손자인 연산군한테 머리로 바치고 며칠 뒤 죽게 된다.
어쨌든 똑똑한 딸(인수대비)과 성군인 외손자(성종)를 두어서인지 묘는 보기 드문 명당에 쓰여졌다. 한확 선생 묘보다도 훨씬 좋은 곳으로 청주한씨 양절공파(襄節公派, 한확의 시호)의 번영을 있게 한 묘로 알려져 있다.
신도비는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가져올 때 코끼리를 동원해서 왔는데 조선 기후에 적응 못한 코끼리가 죽자 부인 묘 앞에 코끼리의 무덤을 만들어 주어 지금도 전한다.
8) 남양홍씨 홍지 묘(洪智 墓)
경기도 양주군 남면 상수리 산15번지에 있으며 친구인 무학대사 소점지로 알려져 있다. 홍지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자는 명철, 본관은 남양(唐洪)이다. 고려 말 임진도승으로 재임하던 중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사재직장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선생이 별세하면서 일체의 관직 이름을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은 후환을 염려하여 사재직장의 벼슬을 명정과 묘비에 사용하였다. 태종이 이 사실을 확인한 뒤 `홍지가 드디어 조선의 신하가 됐다`며 그 후손들의 관직등용과 상수리 일대의 땅을 사패지지(賜牌之地)로 내려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남양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으로 나누는데 본관을 같이하면서도 시조를 달리한다. 토홍의 선영이 남양에 많이 있는 것에 비하여 당홍의 선영은 이곳 양주에 많이 있다. 옥녀산발형으로 머리카락마다 혈이 맺히므로 산 능선마다 혈이라고 하는 곳이다. 남양홍씨(당홍)의 발복지라 할 수 있다.
9) 의령남씨 남을진(南乙珍) 묘
양주군 은현면 봉암리 24번지에 있다. 남을진은 고려 공민왕 때 참지문 하부사로 성격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정몽주 길재 등과 교유가 있었다.
남씨의 시조 남민(南敏)은 중국 당나라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4년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신라 유린(有隣)땅(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에 기착하게 되었다. 그는 신라의 산수와 인심에 반하여 그곳에서 살기를 원하자 신라왕은 여남에서 왔다하여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 후 고려 후기에 이르러 그의 후손 중 3형제가 있었는데 맏형 홍보(洪甫)는 영양(英陽)에서,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에서,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 땅에 정착 세거(世居)하게 되면서 남씨는 3파로 본관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군보의 증손 중에는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조 들어 고려왕조에 반기를 들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적극적인 참여파와 고려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킨 충절파의 두 갈래로 나눈다. 참여파는 정권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정권의 중앙 무대로 진출 4색 당쟁에 관여하게 되었다.
반면에 충절파는 산속에 은거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을진으로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인 사천(沙川)으로 내려가 숨어 버렸다. 조선조 개국 후 태조의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남을진이 불응하자 "그 지조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하여 후세에 충신의 절개를 권장하고자 을진이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따서 사천백(沙川伯)에 봉했다.
그러나 남을진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수모를 당했다고 통곡하고 머리를 풀고 상패리에 있는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깊숙한 석굴에 숨어 죽을 때까지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사후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한다. 이에 비해 형 을번의 아들 남재(南在)와 남은(南誾)형제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조를 개국하는데 1등 공신이 됐다.
10)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선생 묘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산26에 있다. 백인걸 선생(1497∼1579)은 본관은 수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조광조의 제자이며 우계 성혼의 스승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실의 끝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 후 돌아와 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오래 있다가 검열·예조좌랑·남평(南平) 현감·호조정랑·지평·헌납을 역임하였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소윤(小尹)에 의해 파직되고 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51년에 풀려 나와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소윤의 거두 윤원형(尹元衡)이 죽자 복직하고 67년(명종 22) 70세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사임하였다. 78년(선조 11)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지적하고 군비확장을 강조하였다.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문묘배향에 거론되었으나 스승(정암 조광조)과 제자(우계 성혼)가 모두 배향 되었으므로 제외되었다는 설이 있다.
묘소는 효촌리 건너편 야산 8부 능선에 있는데 북향대지에 속한다. 북향(北向)으로 혈을 결지하는 조건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다.
11) 고종과 순종의 홍릉과 유릉
고종과 순종은 왕이 아니라 황제들이다. 모두 중국 황릉을 본떠 거대하고 화려하게 조성했으나 좋은 자리로 보기는 힘들다. 명당을 그럴 듯 하게 하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용과 보국을 조성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가국허화지지(假局虛花之地)로 일제가 조선 왕실의 맥을 끊기 위해서 일부러 망지를 선택하고 묘지 조성만 화려하게 하였다고 한다.
12) 의령남씨 남재 선생 묘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화접리에 불암산 아래에 있는 곳으로 본래 이성계가가 자신의 신후지지로 잡은 자리였다고 한다. 남재는 지금의 건원능 자리에 신후지지를 잡았는데 이성계에게 묘지 자랑을 하다가 결국 바꾸고 말았다.
그러나 이성계가 들어갈려고 했을만큼 큰 혈이다. <자세한 것은 나의 풍수 유적 답사기 참조>
13) 태조 이성계의 건원능과 동구릉
한양 동쪽에 9개의 왕릉이 있다고 하여 동구릉(東九陵)이라 한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과 갈등 때문에 근심이 많았는데 이 자리를 잡고 근심을 잃었다하여 망우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곳이다.
태조의 고향 함흥의 갈대를 심고 깎지말라고 유언하여 지금도 봉분은 갈대가 무성하다.
동구능 내에는 이성계의 동구릉을 비롯하여 제5대 문종(현릉), 제14대 선조(목릉), 제16대 인조의 왕비(휘릉), 제18대 현종(숭릉), 제20대 경종 비(혜릉), 제21대 영조 비(원릉), 제24대 헌종(경릉), 문조의 비(수릉) 등이 있다.
화성시
1) 청녕군 한덕급(1577-1660) 묘소
화성시 비봉면 삼하리에 있다.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득지(得之), 호는 월곡(月谷)이다.
선조(宣祖)때 우의정인 충정공 응인(忠靖公 : 應寅)의 장남이다.
선조 34년(1601)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추천(抽薦)으로 차례에 따라 봉사(奉事)에 임명하였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으니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 되었다가 주부(主簿)로 옮겼다. 외직(外職 : 지방공무원)으로는 옥천군수(沃天郡守)외 6개 군수와 해주(海州) 및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내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녕군(淸寧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소무원종공신(昭武元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다섯 왕조를 섬기고 84세에 별세하니 현종은 예관(禮官 : 예의, 제향 등을 담당하는 관원)편에 재물과 제문 등을 내리어 제사케 하였다.
묘표는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찬(撰)하고 대사헌 윤문거(大司憲 尹文擧)가 썼으며 현종 7년(1666)에 세웠다.
묘소앞 약300m전방(前方)에 공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우암선생(尤庵先生 : 宋詩烈)이 찬(撰)하였고 동춘당 송준길이 비문을 썼으며 대제학(大提學) 김수항(金壽恒)이 전(篆)하여 현종5년(1664)에 세웠다.
배위는 정부인 광주 김씨(光州 金氏)니 사계선생 장생(沙溪先牲 : 長生)따님이다.
슬하에 3남을 낳으니 장남은 청흥군 수원(淸興君 : 壽遠)이고 차남은 좌승지 선전관공 지원(宣傳官公 : 旨遠)이며 3남은 첨정공 지원(僉正公 : 志遠)이다. 부실(副室)에서 증 호조참판 만호공 성원(萬戶公 : 聲遠)이 있다.
2) 좌의정 윤지선(尹趾善,1627-1704)묘소
화성시 남양동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린(仲麟), 호는 두포(杜浦)이다.
이조 판서 윤강(尹綱)의 아들이다.
현종 1년(1660) 진사가 되고, 2년 뒤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4년 헌납(獻納)·이조좌랑을 거쳐, 숙종 즉위 뒤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 부수찬·동부승지를 거쳐, 1681년 대사간·공충도(公忠道: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 1683년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1694년 병조판서로 의금부지사, 1696년 공조판서·좌참찬·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9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중추부행판사로 죽었다. 성품이 온건(穩健)하여 당화(黨禍)를 입지 않았으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3) 좌청룡이 아름다운 정원채 고가
화성시 송림동 320번지에 있으며, 경기도 민속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문간의 상량문(上樑文)에는 광무(光武) 8년(1904)에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안채는 이보다 시대가 이른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경기도 지방에서 많아 볼 수 있는 ㄱ자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안방의 옆으로 다시 작은 대청과 건너방을 두어 독특한 평면 구성을 하였다.
4) 조용필(趙容弼) 생가 및 선영
화성시 송산면 쌍정2리에 있다.
우리 나라 최고의 가수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의 생가터와 선영을 살펴보며 풍수지리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 살펴보자
5) 남이(南怡,1443-1468)장군묘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145번지에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태종의 외손(外孫)이며, 좌의정(左議政)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세조 3년(1457)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세조 13년(1467)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그에게 항상 질투를 느껴오던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였다. 또한 남이가 여진토벌(女眞討伐) 때 읊은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속의 ‘미평국(未平國)’이란 글귀를 ‘미득국(未得國)’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즉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순조 18년(18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6) 세종대왕의 후궁 신빈김씨 묘
화성시 남양동 산 131-17번지에 있다.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김원(金元)의 딸이다.
빈(嬪)이 낳아서부터 아름답고 덕이 있어서 행동함이 보통사람과 달라 12세에 뽑혀 궁안에 들어가 세종대왕을 섬김에 있어 마음을 작게 하고
공경하며 두려워하여 안방정사를 도우니 이로 연유해 대우가 날로 융성하여 세종 10년(1428) 작위가 소용(昭容) 종2품으로 송품되어 세종15년에 소의 정2품으로 올랐고 세종21년에 명하여 귀인 종1품이 되고 세종 29년(1447)에 신빈(愼嬪) 정1품에 책봉되었다.
세종이 돌아가자 머리를 깎아 비구니계를 받고 따로 자수궁(慈壽宮)에 거하였고 세조 10년(1464)에 병환으로 졸(卒)하였다.
7) 금호그룹 박정구 전회장 묘소
화성시 팔탄면에 있다.
8) 고축사(誥軸砂)가 아름다운 안곡서원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585번지에 있다.
조선 현종7년(1616년) 남양현감 민기중이 을묘명현인 도원제(道源濟) 박세희의 유풍을 숭모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유림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 서원(書院)은 조선(朝鮮) 현종(顯宗) 7년(1616) 남양현감(南陽縣監)으로 부임한 민기중(閔耆重)이 기묘명현(己卯名賢) 도원제(道源齊) 박세희(朴世憙)의 유풍(遺風)을 숭모하여 현 위치에 안곡서원(安谷書院)을 창건하고, 그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향사(享祀)한 것이 그 유래이다.
그 뒤 현종 9년(1668)에는 도원제의 백형(伯兄)으로 역시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송촌(松村) 박세훈(朴世薰)을 숙종(肅宗) 23년(1697)에는 남양유생 한덕봉(韓德鳳)외 150여명의 진장(陳章)으로 인재(忍齋) 홍섬(洪暹)을 추배(追配)·봉사(奉祀)하였다.
경종(景宗) 1년(1721)에는 안곡서원(安谷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영조(英祖) 5년(1729) 疊設書院(첩설서원) 철폐때 철액(撤額)되었다가 英祖(영조) 16년(1740) 남양유생들이 非疊設書院(비첩설서원)임을 상소하여 復額(복액)되었다. 그러나 고종(高宗) 8년(1871)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毁撤(훼철)된 후 1976년 유림들에 의하여 사우(祠宇)를 중건(重建) 3인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9) 남양홍씨(南陽洪氏)묘역
화성시 서신면 홍법리 산 30번지 일원에 있다.
홍언필(1504-1585, 영의정), 홍형(1446-1500, 우부승지), 홍담(1509-1576, 이조판서), 홍진도(1584-1649, 판중추부사)등과 관련한 조선중기 때의 묘역 문화재로 당대의 덕망 있는 학자, 정치가(조광조, 송시열, 한호)등에 의해 찬서(撰書)된 신도비와 묘길을 살펴볼수 있으며 보존이 양호하여 당시대의 문화수준을 짐작케 한다.
이곳에 근년에 지어진 "곡좌제(曲座齊)"란 사당이 있는데, 이는 묵제공(默齊公-홍언필)과 인제공(忍齊公-홍섬)께서 조정(中宗-仁朝)의 당상관(정일품 이상의 관직)을 지내면서 정사에 관한 토론이나 강론시에 비록 공석이라 하여도 부자지간이게 마주보고 앉을 수가 없어서 동서로 굽게 앉아 정사를 논하였다하여 세간에서 곡좌(曲座)의 집안이라 칭 한데서 유래한다.
10) 1700년경의 정용채 가옥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236에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주요민속자료 제124호로 지정 되어있다.
이 가옥은 대체로 서쪽의 낮은 산줄기를 등에 지고 동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평면은 크게 안채 공간과 사랑채 공간으로 나뉘고, 앞쪽에는 행랑(行廊)채가 길게 놓여 내정(內庭)을 구획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보아 월자형(月字形)을 이루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은 안채의 행랑채 사이에 마련된 협문(夾門)이 있어 그 남쪽에 있는 우물 및 텃밭을 통하여 외부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대문에 기록된 묵서(墨書)에 의하면 고종(高宗) 24년(188)에 세운 것으로 보이나 안채는 이보다 시가가 앞선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의 꾸밈은 대체적으로 잘 깎아 놓은 주초석(柱礎石) 위에 각주(角柱)를 세우고 부부연없이 홑처마 납도리의 3량 혹은 5량집으로 꾸몄는데 그 결구가 견실하다.
11)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묘
조선 초기 문신이며 대문장가인 사가정 서거정의 묘가 있는 경기도 봉담읍 왕림리에 있다. 과천 봉담간 고속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43번 도로를 따라가면 장안대학이 있고 고개를 넘으면 왕림휴게소가 나온다. 휴게소 앞산에 묘지가 있다. 본래 묘는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에 있었는데, 1975년 현재의 장소로 이장한 것이다.
서거정의 본관은 달성(達城)으로 양촌 권근의 외손자다. 여섯 살에 책을 읽고 글을 지은 신동이었다. 호는 사가정(四佳亭)과 정정정(亭亭亭)이다. 집 뒷동산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은 뒤 정자를 짓고는 「亭亭亭」이라는 현판을 걸고는 이를 호로 삼았다고 한다.
1444년(세종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제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1451년(문종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 박사 등을 거쳐 56년(세조2) 문과중시에 급제, 1457년 문신정시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4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이 되었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1)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45년 간 여섯 왕을 섬기면서 23년 동안 대제학을 지냈다. 그만큼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을 비롯,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했던 인물이다.
12) 수원백씨 백천장 선생 묘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기안리 윤건릉 근처에 있다. 수원백씨는 《제왕전승성원도(帝王傳承姓源圖)》에 의하면 황제(黃帝)의 후손인 백을병(白乙丙)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백씨는 백을병의 먼 후손인 백우경(白宇經)이 780년 신라로 건너와 정착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의 일은 전하지 않아 신라 때의 백창직(白昌稷)을 1세조로 하고, 고려 충선왕 때 수성(隨城=수원)의 수령을 지낸 백천장(白天藏)으로부터 본관을 수원으로 하였다고 한다.
백천장 선생은 우경의 후손으로 고려시대 진사로 문과에 등과 후 한림학사와 정당문학을 역임하였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이부상서, 금자광록대부 등을 역임하다가 귀국하여 수성백에 봉해졌다. 백천장의 묘가 수원백씨들의 발복지로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 능이 화산에 조성되면서 10리 이내의 민가 묘는 모두 이장하게 되었다. 이곳도 이 옲겨질 위기에 처했는데 정조는 백천장 선생 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묘지 둘레에 깃발을 꽂아 제외되도록 했다. 그 후로 이곳 지명이 깃발을 꽂은 안동내라는 뜻으로 기안동이 되었다.
13)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융건릉)
조선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을 꼽으라면 단연 정조일 것이다. 정조의 나이 열한 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했다. 자신이 왕이 되자 아버지의 복권을 위해서 온갖 노력과 눈물겨운 효심을 바쳤던 왕이다. 오늘날 수원과 화성이 효행의 도시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본래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배봉산에 있었다. 너구리가 드나든다는 사실을 안 정조는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를 이겨내고 이곳으로 이장을 하였다. 그리고 한해에도 몇 번씩 능에 참배하였고,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옆 능선에 묻히게 되었다.
길지는 분명하나 과연 제대로 썼는지는 여러 가지로 검토해보아야 할 곳이다.
파주시
1) 인조의 장릉(長陵)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그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의 능으로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에 있다.
본래 파주시 운현리에 인열왕후(仁烈王后)릉을 먼저 조성하였다가 인조사후 옆에 인조의 능을 조성하였다가 영조 7년(1731년)에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2) 백인걸 선생의 집터 용주서원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298번지에 있다.
조선 선조때 유학자이며 청백리인 휴암 백인걸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서원이다.
선조 31년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던 옛집터에 지방유림들이 서원을 세웠으며 현재 휴암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3) 심악산(193.6m)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동패리에 소재하고 있다. 한강 하류에 있는 산으로 일산, 교하일대와 북한 개풍군 장단면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교하가 과연 통일수도로 적합한지 여부를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산봉우리 주위는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심부 10여평 남짓한 곳에 편편한 곳이 있다. 이 자리는 수십자를 파도 비세황토 흙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풍수지리설로 천자가 나올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으로 전해져 온다.
이 자리를 욕심내는 사람들이 밤중에 남몰래 시체를 암매장하면, 이상하게도 산이 울며 동네에서 병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상봉에 올라 시체를 파헤쳐 냈다. 이곳 턱 바로 아래에는 발복지지 2개가 더 있다고 전해진다.
옛날에는 심학산 주위로 물이 흘러 한강 가운데 있는 섬 있었다고 한다. 한강 물을 막고 있다하여 당초에는 수막산(水漠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홍수가 나면 한강물과 조수물이 넘쳐 수막산이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그래서 산이 깊은 물에 들어갔다 하여 심악산(深嶽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심악산은 경기 오악(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중에 하나로 불리었다. 심악산이 오늘날 심학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은 조선 숙종 때다. 궁궐에서 기르던 학 두 마리가 도망을 치자 궁궐에서는 이 학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으러 다녔다. 마침 학은 심악산에 와 있었다. 여기서 학을 찾았다 하여 그때부터 심학산(尋鶴山)으로 불렀다 한다.
이 산은 조선조에 유명했던 송구봉은 이 산의 정기를 받아 탄생하고 성장했다. 일설에는 송구봉이 출생할 때 정기를 흡수하여 이 산에 초목이 일시 고사(枯死)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4) 윤원형(尹元衡/?~1565) 묘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 파평(坡平)이다. 자는 언평(彦平)이며 소윤(小尹)의 영수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으로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세력을 잡았다.
누이인 문정왕후가 아들(후에 명종)을 낳자, 장경왕후의 소생인 세자(후에 인종)를 폐위하려다 세자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과 다투었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파직당했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9개월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면서 득세했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김명윤, 이덕응,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대윤을 제거하고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1546년(명종1년)에는 친형 윤원로(尹元老)와도 권력다툼을 하였다. 형을 유배 보낸 후 사사시켰다. 이듬해 양재역 벽서사건을 고의적으로 꾸며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윤원형은 이는 윤임팡에 대한 처벌이 미흡하여 생긴 것이라며 그 잔당세력을 척결하였다. 이 사건은 소윤 일파가 대윤을 몰아내기 위한 고의적인 것이었다.
1548년 이조판서, 51년 우의정, 58년 다시 우의정을 거쳐서, 60년(명종 15)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지고, 63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약20년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했다. 그러한 그도 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江陰)에 귀양가서 죽었다.
5) 정난정(鄭蘭貞 ?-1565, 명종20년) 묘
윤원형의 애첩으로 본관은 초계(草溪)다. 아버지는 부총관 윤겸이며, 어머니는 관노비 출신이다. 스스로 미천한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윤원형에 접근 그의 첩이 되었다.
문정왕후의 환심을 얻었다.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궁중에 무상출입하였다. 또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쫓아내고, 자신이 정실이 되었다. 이어 김씨를 독살하고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호를 받았다.
봉은사의 승려 보우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불교진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 모리행위를 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사림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강음(江陰)에 유배되자 함께 갔다.
이때 김씨부인 독살사건이 탄로나자 사사될 것으로 판단, 하인에게 금부도사가 오면 알려달라고 하였다. 금부도사가 평안도를 향하여 금교역을 지날 때 하인이 이를 알리자 윤원형과 함께 음독, 자살하였다. 죽은 뒤 본래의 신분으로 환원되었다.
6) 윤원로(尹元老/?~1547) 묘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파평(坡平).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오빠이며, 윤원형의 형이다.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잡고, 1537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44년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과 다투다가 파직·유배되었다.
45년 다시 윤임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경원대군(慶原大君:明宗)을 해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을사사화 때 풀려나와 돈령부도정(敦寧莩正)에 기용되었다. 46년 동생 원형(元衡)과 대결하다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고, 사사(賜死)되었다.
묘는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 있다.
7) 윤여필(尹汝弼/1466~1555) 묘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 있다. 조선 중종의 장인으로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507년 딸이 중종의 계비(繼妃:章敬王后)가 되자,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에 책봉되고 돈령부판사에 올랐다. 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80세 노령이라 화를 모면, 용인현(龍仁縣)에 부처(付處)되었다. 51년 풀려났으며, 죽은 뒤 복관되었다.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는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해서 양육되었다. 15살에 중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졌다. 이듬해 단경왕후 신씨가 자식이 없이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25살에 세자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6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동생이 대윤의 영수 윤임이다.
8) 윤번(尹磻)/1384~1448) 묘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온지(溫之). 시호 정정(貞靖). 평산윤씨(平山尹氏)의 시조. 음보로 신천현감(信川縣監)을 거쳐, 1428년(세종 10)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다.
수양대군 세조의 장인으로 군기시 부정(副正)에 승진, 이어 이조참의가 되었다. 34년 공조참판 등을 거쳐, 39년 경기도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40년 우참찬·공조판서를 지내고, 중추원사 때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47년 중추원판사가 되었다. 영의정이 추증,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봉해졌다.
9) 통일로변의 박석명(朴錫命1370∼1406)묘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군내면 점원리에 묘가 있다. 호는 신간, 본관은 順天, 밀직부사를 지낸 可興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1390년(공양왕 2) 우부대언·병조판서를 지냈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되자 歸義君 王瑀(공양왕의 아우)의 사위였던 관계로 7년간 은거하였다. 1399년(정종 1) 고려의 구신들이 등용되자 좌산기상시로 기용되고 안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하자 그 교서를 가져가서 태종을 옹립하였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3등이 되고 平陽君에 봉해진 뒤, 지신사를 거쳐 1405년 지의정부사, 이듬해 함경도선위사·전라도도체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젊었을 때 정종과 같이 이불을 덮고 자는데 꿈에 누런 용이 옆에 있으므로 돌아다보니 태종이었다. 그때부터 기이하게 여겨 서로 친구를 대하듯 더욱더 친근하게 지냈다. 태종이 임금이 되면서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지의정부사·판육조사에 올랐다. 평소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깊었는데 특히 태종에게 黃喜를 승지로 천거한 것이 유명하다. 시호는 文肅이다.
10) 한명회의 조부 한상질(韓尙質,1350-1400)묘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진동면 서곡리에 묘가 있다. 자는 仲質, 호는 竹所, 본관은 淸州, 밀직부사를 지낸 公義의 손자이며 판후덕부사를 역임한 脩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대군시학을 지내고, 1380년(우왕 6) 좌랑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양왕 때 형조판서에 이어, 우부대언·좌상시·예문관제학 등을 두루 거쳤다. 1390년(공양왕 2) 6월 천추사로서 명나라에 가서 尹彛·李初의 誣妄을 변명하고 돌아와, 12월에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로 나갔다.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개창될 당시 밀직사사로 있었는데, 조정 내에서 새 왕조의 국호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 문제로 耆老와 百官이 都堂에 모여 의논한 결과, 이성계의 고향인 和寧과 단군·기자·위만의 세 조선을 상징하는 朝鮮이라는 두 개의 칭호로 모아졌다. 이에 주문사로 명에 가서 국호결정을 요청하는 임무를 자청하였고, 명은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국호로 결정하였다.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고 이듬해 2월 귀국하였고, 그 공로로 태조로부터 田 50결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9월 양광도관찰출척사를 거쳐 다시 1397년 경상도관찰출척사에 부임하고 같은 해 예문춘추관대제학에 이르렀다. 총민한 재질과 후덕한 인품으로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많은 치적을 남겼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文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1) 한명회의 증조부 한수(韓 脩,1333-1384)묘
고려의 문신으로 진동면 서곡리에 묘가 있다. 자는 孟雲, 호는 柳巷, 본관은 淸州, 밀직부사를 역임한 公義의 장남이다.
일찍부터 뛰어난 문재를 보여 1347년(충목왕 3) 어린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충정왕 때 정방의 필도지에 임명되었으며, 왕이 遜位하고 강화로 쫓겨날 때 시종하여 함에 따라갔다. 1353년(공민왕 2) 전의주부로 기용되어 다시 필도지가 되고 이어 전리좌랑·성균사예·비서소감·병부시랑·국자감좨주 등을 두루 거쳤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하였으며, 귀경 후 사복시판사로 있다가 좌대언으로 승진하였다. 辛旽이 1365년 정권을 장악하자 왕에게 "그가 바른 사람이 아니니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로 폄직되고 얼마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다시 부름을 받아 이부상서·수문전학사로 발탁되고 곧 銓選을 관장하는 요직인 승선에 임명되었다. 계속해서 우왕대에 우문관대제학·동지밀직·상호군 등을 지냈다. 그러나 공민왕 시해에 관련된 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잠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378년 배소에서 돌아와 上黨君에 봉해지고 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이어 淸城君에 개봉되고 1383년 광정대부 판후덕부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詩書에 특히 뛰어났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하여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노국대장공주묘비」 . 「회암사지공대사탑비」 등과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 등에 필적이 있다. 李穡과는 일찍부터 두터운 교분이 있었다. `「柳巷集]라는 시집을 남겼다고 하며 「동문선」에 「永募亭行」 등 시 여러 수가 전한다. 시호는 文敬이다.
12) 원주 김씨시조 김거공(金巨公,?~1163)묘
진동면 서곡리에 있다.
초명 자표(子彪). 원주김씨 시조. 성품이 청렴하고 근신하여 서리(胥吏)로 시작하여 근시(近侍:內侍)에 이르렀으며, 1142년(인종 20) 사신으로 금나라 동경(東京)에 다녀왔다.
1148년(의종 2) 최함(崔麗)·최윤의(崔允儀) 등의 탄핵으로 김참(金浚) 등 7명의 내시와 함께 축출되었다. 다시 복직되어 1161년 이부상서를 지내고, 이듬해 추밀원지사·삼사판사를 거쳐 문하성지사·호부상서를 지냈다.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
13) 동의보감의 허준(許 淺,1546-1615)묘
조선 중기의 의술인으로 진동면 하포리에 묘가 있다. 자는 淸源, 호는 龜巖, 본관은 陽川, 경상도우수사를 지낸 琨의 손자이며 용천부사를 역임한 논암의 아들이다.
집안이 모두 무과 출신이었지만, 일찍이 의학공부에 뜻을 두어 당대의 명의로 알려진 劉義泰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이후 공부에 힘써 1574년(선조7) 의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다음해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을 진료하여 큰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 의학 관련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후 의학공부에 매진하여 1581 高陽生의 「纂圖영訣』을 교정한 「濤圖方論영訣集成」권을 편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히기도 하였다.
1587년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楊禮壽·李公沂·南應命 등과 함께 입진하여 쾌차시킨 공으로 호피를 받았으며, 이어 1590년 말에는 왕자의 痘瘡을 낫게 한 공로로 당상관의 자급을 받았다. 이때 정원·사헌부·사간원 관리들은 허준의 의료에 관한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의 가자를 받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여 여러 차례 그 가자를 거두기를 계청하였으나, 선조는 그것이 당연한 처사라 하며 무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인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하여 왕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보살핀 공로로 호종공신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모든 의료행정에 관여하였다.
그러던 중 선조의 명으로 1596년 金應鐸·李命源·鄭禮男·양예수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東醫寶鑑』 편집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작업이 한참 진행중이던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편집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을 맡기고 內藏方書 500권을 주어 고증하게 하였다. 이때 왕명을 받들어 어의로서 내의원에서 의무에 종사하면서 불철주야 책 편집에 진력하여 10여 년 후인 1610년(광해군 2) 완성을 보았다.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보인 『동의보감」은 전체 분량이 25권 25책에 달했으며, 조선 중기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전서로서 內景·外形·雜病·湯液·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높은 의학수준을 동양 여러 나라에 과시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 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 오늘날까지도 계속 간행되고 있는 귀중한 한방 임상의학서이다.
이외에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또는 한글로 알기 쉽게 해석하여 출판하였다. 대표적인 책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601년 세조 때에 편찬한 『救急方』을 『諺解救急方』으로 주해하였고 任元濬의 『瘡疹集』을 언해하여 「痘瘡集要』라는 책을 편찬했으며, 1608년에는 盧重禮의 『胎産要錄』을 『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퇴치하기 위하여 『新纂벽瘟方』 1권과 『벽疫神方』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반포하게 하였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동의보감』과 더불어 명의로서의 뛰어난 업적으로 남아 있다.
의학과 관련된 연구 업적만이 아니라 내의·태의·어의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특히 선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는데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지중추부사를 서임하였고, 1604년 6월에는 忠勤貞亮扈聖功臣 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 1필을 하사받을 정도였다. 계속해서 1606년 정월에 陽平君에 봉해지고 품계가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를 가자받았다. 이렇듯 중서급의 신분으로 다른 고관 대신들과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되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수 차례에 걸쳐 개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선조도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대신들의 끈질기고 계속적인 계청에 굴복하여 허준에 대한 가자를 취소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 깊어져 이듬해 2월 붕어할 때까지 입진의 首醫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논하는 모든 일을 총괄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깊은 신임을 받아 어의로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조가 죽은 뒤 종래의 예에 따라 주치의인 수의에게 책임을 물어 형식적으로 待罪하게 되었으나 광해군의 만류로 사면되었다.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자, 扈聖 공로의 어의로서 앞서 선조가 보류하였던 府院君과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이상에서 의관으로 내의원에 봉직하면서 내의·태의·어의로서 명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 및 수 많은 의학서를 편술하여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친 뛰어난 의술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간계층에 속하면서도 당상의 부국과 보국의 지위를 가져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오늘날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서도 생전에 명의로서 남긴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14) 안동권씨 왕후( 王 煦 1296-1349)묘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진동면 하포리에 묘가 있다. 처음 이름은 權載, 몽고명은 脫歡, 본관은 安東, 정승을 역임한 溥의 아들이다.
충선왕의 신임을 받은 형 準의 도움으로 낭장에 오르고 다시 삼사판관으로 전임되었다.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의 부름으로 그곳에 가서 아들로 입적되면서 왕후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308년 충렬왕이 승하하자 충선왕과 함께 원에서 돌아와 사복부정을 거쳐 사헌집의에 올랐다. 1313년 3월 충선왕은 왕위를 층숙왕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 후 원나라에 들어가 있었다. 이때 충선왕의 요청으로 다시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시그루치가 되고 鷄林府院君의 작위와 전택을 하사받았다. 1316년(충숙왕 3) 부원대군으로 더하여 봉해지자, 당시 사람들은 왕의 아우라 칭하였다. 원나라의 환관 빠앤투구스의 모함으로, 1320년 충선왕이 티베트 지방으로 귀양갈 때 충선왕을 대신하여 가겠다고 간청할 정도로 충성심을 나타내 원나라 황제를 감동시켰다. 이후 세 명의 문객을 데리고 티베트로 가서 충선왕을 만났는데 마침 죄를 사한다는 원 황제의 명령으로 충선왕을 모시고 원의 수도로 돌아왔다.
1325년 충선왕이 세상을 뜨자 衰麻服을 입고 영구를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 정성스레 장사를 지냈다. 초하루와 보름마다 능에 가서 제사를 올리면서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충선왕의 시호가 내리지 않자, 1342년(충혜왕 복위3) 원나라에 가서 시호를 청하고 아울러 충숙왕의 시호도 받아서 돌아왔다. 1344년 2월 충목왕이 즉위한 후에 원에 성절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같은 해 우정승에 임명되어 정력적으로 국사를 처리해 나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정방을 혁파하여 전주권을 전리사와 군부사에 각각 귀속시켜 관인지배질서를 회복시킨 일, 권문세가에 소속된 녹과전을 본래의 땅주인에게 돌려줄 것 등의 조치를 취한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권문세가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음해 파직되었다. 1346년 입조하라는 順帝의 명에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좌정승 金永旽과 함께 교지를 갖고 돌아왔다. 뒤이어 정치도감이 설치되었는데, 金永旽 찬성사 安軸·판밀직 金光轍 등과 함께 판사로 임명되어 33인의 屬官을 시켜 각 도의 토지를 측량하도록 하였다. 이때 奇三萬이 자신의 친척인 奇皇后의 세력을 업고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 전횡을 일삼자 정치도감의 다른 관원들과 같이 그를 붙잡아 巡軍獄에 가두고 곤장을 때려 결국 죽게 만들었다. 1347년(충목왕 3) 영도첨의사사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다시 정승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개경에 기근이 크게 들어 楊廣道·西海道의 경우 그 피해가 극심하자 창고를 열어 많은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등 큰 혜택을 베풀었다 같은 해 12월 충목왕이 승하하자 德寧公主의 명으로 덕성부원군 奇轍과 함께 정동성의 일을 섭행하면서 李齋賢을 원에 보내 表를 올려 다음 왕의 계승을 청하였다.
1349년(충정왕 1) 원에 가서 성절을 축하하고 돌아오다 昌義縣에 이르러 병사하였다.
요동 관원들이 관을 전해 왔으며 모든 사람들이 부모를 모시듯이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權近의 건의로 원래 성인 權氏를 회복하여 권후라는 이름을 찾았다.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正獻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15) 고려 재상 경복흥(慶復興 ?∼1380)묘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군내면 방목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초명은 千興, 호는 淸義堂, 본관은 淸州, , 호부상서 蕃의 증손이고 우대언을 지낸 斯萬(사만)의 아들이다.
공민왕 외사촌 매부의 아들로 벼슬을 여러 번 옮겨 감찰이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윤3월 장령으로 재임 중 감찰대부 이연종의 탄핵을 받았고, 1354년 군부판서가 되었다. 1356년 7월 관제 개정 때에 판추밀원사로 임명되었고, 그 해 11월 참지문하정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지문하정사를 거쳐 지정사상의에 올랐다. 1358년 1월 참지문하정사 상의회의도감사에 올랐으며, 이어 그해 6월에는 참지정사로서 西京軍民萬戶府의 만호를 겸임하고 다시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어 북방 방어에 힘썼다. 또한 같은 해 7윌 남방의 잦은 왜구 침입과 불안정한 북방의 정세에 대비하여 도성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자, 지문하성사 鄭世雲, 동지추밀원사 柳淑 등과 함께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중지하게 하였다.
1359년 8월에는 앞서 1356년 5월에 있었던 奇轍·權謙盧 등 부원세력을 숙청한 공으로 1등공신에 봉해졌다. 홍건적이 침입하자 1359년 12월 서북면부원수가 되어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안주에 진을 쳤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못했다.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할 때 洪彦博이 경복흥은 청렴하고 독실하지만 장수노릇 할 재주가 없는 사람인데도 부원수로 임명한 것이 잘못이라고 두둔하자 무사하였다.
1360년 3월 제1차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盡忠同德協輔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이듬해 평장사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을 호종하여 안동으로 난을 피했다. 1363년 崔濡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참소하여 왕을 폐하고 德興君을 세워서 요양의 군사로써 호송하게 되자, 그해 5월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안주에 진을 쳤다. 또 그해 홍건적을 격퇴한 공과왕을 호종한 공으로 찬성사상의로서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최유가 군사 1만으로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고 다시 선천에 이르렀으나 崔瑩·李成桂 등이 이들을 정주의 달전에서 무찔렀다고 하는 첩보가 전해지자, 그해 2월 좌시중에 임명되었다. 1365년 3월 수시중이 되었지만 辛旽의 전횡으로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1365년 6월 파직되고 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10월 지도첨의사사 吳仁澤, 삼사우사 安遇慶, 삼사좌사 金元命, 응양군상호군 趙璘, 상호군 尹承順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로 귀양갔으며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은 관노로 편입되었다.
1371년 7월 신돈이 제거되자 유배지에서 소환되어 이듬해 9월 다시 좌시중에 제수되고 政房의 제조를 겸하여 관리의 인사행정을 맡았다. 1374년 6월 문하시중에 임명되었고, 공민왕이 시해되자 충숙왕의 왕비인 태후 홍씨와 함께 공민왕의 후사로 종친을 세우려 했으나 수시중인 李仁任의 주장에 의해 우왕이 즉위하였다. 이듬해 5월 정도전·이숭인·권근 등이 원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인임과 함께 미를 기각하고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는 정도전을 회진으로 귀양 보냈다. 1375(우왕 1) 12월 정방의 제조를 겸하고 있을 때, 우왕이 외척인 韓略을 臺官에 임명하려 하자 옛날부터 외척은 言官에 임명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철회시켰고, 우왕이 書筵을 게을리하는 것과 인사행정의 문란을 바로잡는데 노력하였다. 1377년 守城都統使로서 개성 근처까지 침범한 왜구에 대비했으며, 이인임·池奫 등이 권세를 천단하고 그들의 인척을 관직에 등용시켰으나 홀로 청렴을 지키며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자 노력하였다. 1380년에는 이들과 뜻이 맞지 않아 날마다 술만 마시면서 都堂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미워한 이인임·임견미 등의 참소로 그 해 3월 청주에 귀양갔다가 9월에 그곳에서 죽었다.
安義의 德泉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貞烈이다.
16) 공릉. 순릉. 영릉
경기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1리 산 15-1번지
공릉은 세조 7년(1461)에 만들어진 조선 제 8대 예종의 비 장순왕후(1445~1461) 한씨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1460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아들 인성대군을 낳은 다음 해에 승하하여 성종3년(1472년)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당초 세자빈으로 조성되어 초석과 난간이 생략되어 있다.
순릉은 성종 5년(1474)에 만들어진 조선 제 9대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장순왕후와 자매사이다.
세조 13년(1467), 11세에 결혼하여 왕비가 된 후 성종 즉위시 자식없이 18세로 승하하셨다. 조선전기의 능 양식으로 돌기둥 난간을 둘렀고, 상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돌로 된 양, 호랑이 등을 배치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영릉은 영조 27년(1751)에 만들어진 조선 제 21대 영조의 맏아들과 며느리인 효장세자와 효순왕후의 능이다.
효장세자는 1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으며 효순왕후는 13세에 세자빈이 되었으나 홀로 되어 37세에 승하하였다. 영조는 둘째 아들 사도세자의 아들을 효장의 아들로 입적시켜 정조를 즉위시켰고,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능호도 영릉이라 하였다.
왕과 왕비의 쌍릉으로서 규모는 왕릉보다는 작고 사대부묘보다는 크다.
17) 윤관장군묘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 최영(崔塋, 1316-1388년) 장군과 더불어 고려시대 대표적 명장인 윤관(尹瓘, 1040-1111년)장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서울 구파발 삼거리에서 1번 국도인 통일로를 따라가다가 벽제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의정부 방향 39번 도로를 타고 가면 좌측에 용미리, 광탄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길로 들어서 해음령을 넘으면 서울시립공원묘지가 있는 용미리(龍尾里)다.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석불입상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우측에 넓은 주차장, 커다란 신도비, 홍살문, 사당인 여충사(麗忠祠)와 함께 크고 웅장한 묘역이 있다.
또 다른 길은 통일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봉일천을 지난 뒤 우측에 307번 광탄 가는 도로가 나온다. 광탄에서 용미리 쪽으로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좌측에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왕조 34대 475년과 조선왕조 27대 519년을 합쳐 약 천년동안 삼한의 대표적인 문벌로서 번성을 누린 가문이다. 고려 개국 공신 윤신달과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조에 41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844명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다.
또 왕비 4명을 배출해서 청주한씨(淸州韓氏) 5명에 이어 여흥민씨(驪興閔氏)와 함께 두 번째에 해당된다. 그러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까지 포함하면 5명으로 청주한씨와 맞먹는 수다.
조선시대에 총 정승수가 365명이었는데 이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 안동김씨(安東金氏) 19명, 동래정씨(東萊鄭氏)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 12명, 여흥민씨(驪興閔氏) 12명, 파평윤씨(坡平尹氏) 11명으로 6위를 차지하는 등 파평윤씨가 명문(名門)이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파평윤씨들이 번창한 것은 5세조(五世祖)인 윤관 장군 묘가 조선8대 명당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현무봉에서 혈까지 입수룡(入首龍)이 36절룡(節龍)이어서 발복이 36대(代) 약 천년에 이른다고 하는 곳이다.
파평 윤씨 시조는 고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고,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윤신달(尹莘達)이다. 파평(坡平)은 문산에서 적성 가는 중간 임진강변에 있는 파평산(495.9m)을 주산으로 한 면소재지다.
파평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라 하여 잉어를 잡거나 먹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시조 윤신달과 윤관 장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미리에서 광탄리로 가면서 윤관 장군 묘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기세를 느낄 수가 있다.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부터 잘생긴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든 백만 대군이 행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도상에는 무명고지로 표시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묘지뒤쪽을 바라보면 단아한 탐랑체인 현무봉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균형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좌천을(左天乙) 우태을(右太乙)이 버티고 있다. 좌천을 우태을이란 귀인이나 장군이 앉아 있으면 그 뒤 양쪽에서 호위하고 서있는 장수를 말한다. 사람도 경호원이나 수행원을 거느릴 정도면 귀한 사람이지만 산도 귀하게 본다. 때문에 좌천을 우태을의 보호를 받는 봉우리에서 중심 맥으로 이어진 용맥(龍脈)에 혈을 맺으면 대개 대혈(大穴)에 속한다.
현무봉에서 혈까지 내려오는 용맥을 살피기 위해서 묘지 뒷산을 오르면 매우 급하게 내려오는 능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일직선으로 곧장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현자(之玄字)로 계속 굴곡(屈曲)하면서 마디인 절(節)을 형성하고 있다. 현무봉 정상까지 기세 있게 변하는 절수(節數)를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니 36절룡(節龍)이라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급하게 내려간 용이 마지막에 결인속기(結咽束氣)하여 기를 묶어주고 혈을 맺었다. 결인속기처는 담장 바로 뒤 약간 잘록한 부분이다. 여기서 기를 묶어주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라면 혈의 결지 방법은 결인속기법(結咽束氣法)에 해당된다. 그러나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하수사 등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좌우선룡법(左右旋龍法)과 태식잉육법(胎息孕育法)에도 해당될 것 같다.
태조산을 출발한 주룡이 수많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하고 험한 기운을 모두 털어 버리고 순수한 생기(生氣)만 모아 혈을 맺는다. 이때 생기가 흩어지지 않고 뭉치도록 하여 혈을 결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결인속기법으로 최종적으로 용맥의 목을 잘록하게 묶어 기를 모으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좌우선룡법으로 내룡(來龍)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도록 용맥의 끝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돌아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이때 물이 우측에서 흘러나오면 용맥은 좌측으로 돌아야 하고, 물이 좌측에서 나오면 용맥은 우측으로 돌아야 음인 용과 양인 물이 서로 음양교합을 할 수 있다. 이를 좌선수(左旋水)에 우선룡(右旋龍), 우선수(右旋水)에 좌선룡(左旋龍)이라는 표현을 쓴다. 세 번째는 태식잉육법으로 현무봉 중출로 처음 나오는 용을 태(胎), 과협이나 결인속기처럼 잘록하게 변화하는 것을 식(息), 혈장의 입수도두(入首倒頭)에 기를 모아 마치 아이밴 모습과 같은 잉(孕), 아이를 출산하여 기른다는 뜻으로 혈을 육(育)이라 부른다.
용맥이 혈을 결지(結地)하였는지 여부를 살필 때는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때로는 세 가지 현상 모두가 있을 때도 있는데 윤관 장군 묘가 이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묘역을 성역화하면서 너무 많은 정비를 하여 이를 자세히 살필 수가 없어 아쉬웠다
이곳까지 이어진 산맥은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철령 위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하여 백암산, 적근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현등산), 수원산, 죽엽산, 광릉 용암산을 거쳐 축석령을 지난 다음 양주군 주내면 불국산(470m)을 만든다. 여기서 다시 한북정맥은 산성, 호명산을 이루고 의정부 뒤 산맥을 따라 남진하여 서울의 태조산인 도봉산(716.7m)으로 이어진다.
파주 일대로 오는 산맥은 의정부 뒷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칠봉을 만들고 장흥유원지를 이루는 꾀꼬리봉과 앵직봉(621.8m), 계명산(621.3m)을 지나 뒷박고개를 넘은 다음 박달산을 만드니 이곳의 소조산(小祖山)이다. 박달산에서 기세 장엄하게 광탄 쪽을 향하던 산맥은 분수리에서 방향을 우측으로 틀어 넓은 국세(局勢)를 만들고 행룡을 멈추었다.
주산과 현무봉이 탐랑(貪狼) 목성(木星)체이므로 혈은 유두혈(乳頭穴)이 진혈이다. 유두혈이란 혈판이 마치 풍만한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겼고 혈심은 젖꼭지부분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용맥은 잘록하게 결인속기 한 후 수평으로 길게 늘어져 가는데 위는 가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어지다 다시 좁아져 끝을 맺는다. 이를 상세하거(上細下巨) 형태라 하는데 혈은 가장 넓은 부분에 자리한다.
윤관 장군 묘는 혈심(穴心) 보다 약간 위에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넓은 양 선익(蟬翼) 끝이 아니라 그 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혈 앞 순전(脣氈)이나 하수사(下水砂) 등은 너무 많은 인공적인 조장을 했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묘 아래로 길게 뻗은 능선 또한 자연 상태를 알 수 없어 설명하기 곤란하다.
청룡 백호는 여러 겹으로 감싸주면서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안산은 작고 귀하게 생긴 반월형(半月形)이다. 주변 사격은 사방(巳方)에 문필봉(文筆峰), 오방(午方)에 옥녀봉(玉女峰), 정방(丁方)에 거문성(巨門星), 유방(酉方)에 천마사(天馬砂), 신방(辛方)에 문필봉(文筆峰)등이 수려하게 있어 보국(保局) 안에 장엄한 기운이 감돌게 한다.
그러나 이곳도 흠은 있다. 명당은 평탄하나 원만하지 않고, 명당 가운데로 흐르는 물길은 혈을 감싸주지 못하고 반배(反背)하였다. 안산은 똑바로 혈과 조응하지 못하고 약간 비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용과 혈은 좋으나 주변 산이나 물이 완벽하게 보호를 못해준다. 이러한 곳은 똑똑한 인물은 나오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가 있어 이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윤관 장군 생애와 비슷한 자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답사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묘 자리도 살아 생전 그 주인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덕을 쌓지 않으면 절대로 명당에 못 들어간다고 강조한 것 같다.
들판의 물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꼭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 나가는 파구를 정미(丁未) 방향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좌측 용미리 쪽에서 나와 우측 광탄 쪽으로 흐른다. 물은 반드시 산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파구는 경유(庚酉) 방향이며 좌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여 문고소수(文庫消水)에 해당된다. 문고소수 향은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총명수재하고 문장이 특출하여 부귀상전(富貴雙全)하는 길향(吉向)이다. 그러나 혈이 아닌 곳에서는 이 향을 놓으면 음탕하지 않으면 바로 패절(敗絶)한다 했으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향이기도 하다.
고양시
1)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洪鳳漢) 묘소
고양시 문봉동에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며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다.
자신의 권력과 당파를 위해 사위인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섯던 비정한 인물이기도 하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른다. 그의 묘소는 6.25때에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져 있었다고 한다.
풍산 홍씨의 발복도를 드리겠읍습니다
2) 권필(權畢) 묘소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 상감천마을에 있다.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송강 정철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당대 제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의 척족들의 방종을 질타하는 글을 썼다가 대로한 광해군에 의해 친국을 받은후 귀양가는길에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한후 동대문밖에서 죽었다고 한다.
3) 함종어씨(咸從魚氏) 묘역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 진밭마을에 있다.
이번 답사지중 가장 좋은 자리라 생각된다.
고봉산을 주산으로 어계선을 비롯한 많은 묘소가 산능선에 조성되어 있는데 중첩된 안산이 일품이다.
4) 계원군(桂原君) 묘소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 성석동 진밭마을에 있다.
5) 장희빈(張禧嬪)의 아버지 장경묘소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 소개울 마을에 있다.
9) 명당(明堂)의 견본 무학대사(無學大師) 소점지
고양시 일산구 산황동에 있다. 무학대사가 세그루를 심었다고 하는데 한그루만 살아있으며 주민들은 나뭇잎이 피는 위치에 다라 그해의 모심는 순서를 정했다고 하는데 ...나뭇잎이 밑에서 부터 피면 흉년이 들 징조라 점쳤다 한다.
하남시
1) 광주이씨 시조 이당 부인묘소(廣州李氏 始祖 李唐夫人 墓所)
하남시 풍산동에 있다
광주이씨는 시조를 이당(李唐)하여 많은 명신들을 배출하였으니 가히 명문가라 할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문형(文衡)2명, 정승 5명, 문과급제자 186명을 배출한 집안입니다.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최연소 문형과 정승으로 유명한 이덕형(李德馨), 5형제 등과 및 봉군으로 유명한 이극배 형제, 둔촌 이집, 영의정의 이준경, 세종대왕 왕릉자리의 원래 주인으로 알려진 이인손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2) 광주향교(廣州鄕校)
교산동에 위치하고 있는 광주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의 창건연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또한 광주향교가 처음 창건되었던 장소와 그후 현재까지 몇 번이나 옮겼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다만 『광주군지』에서는 1846년에 간행된 홍경모의 『중정남한지』를 인용하여 “본래 고읍(古邑) 서쪽 2리에 있었는데 1703년(숙종 29)에 광주부윤 이제(李濟)가 고읍터로 이건하였으며 남한산성에서 북쪽으로 10리”라고 하였고, 『중정남한지』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광주부읍지(廣州府邑誌)』나 『광주부지(廣州府誌)』에도 똑같은 기록이 있으므로 장소를 옮겨 세운 것은 사실이다.
3) 민응협(閔應協 , 1597~1663)묘소
하남시 춘궁동에 있다.
본관 여흥. 자 인보(寅甫). 호 명고(鳴睾).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 ·필선 ·사간 ·수찬 ·장령 ·교리를 거쳐 1644년 외직으로 광주목사가 되었다. 잠시 내직으로 돌아왔다가 동래부사 ·안변부사 ·경상감사 ·함경감사 ·강화유수를 거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병조참판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동래부사로 있을 때에는 형률을 엄격히 함으로써 왜인들에 대한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1653년에는 왕조실록을 5사고(史庫)에 분장(分藏)하는 데 참여하였다.
좌의정 민희(閔熙), 우의정 민암의 아버지이다.
4) 세종의 아들 밀성군(密城君)묘역
하남시 초이동에 있다.
세종의 다섯째 서자
이름은 침(琛). 자 문지(文之). 처음 시호 장효(章孝), 개시(改諡) 효희(孝僖). 어머니는 신빈(愼嬪) 김씨.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세종으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7세에 밀성군에 봉해지고 13세 연상의 수양대군(세조)과 우애가 깊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힘이 되어주고 세조 즉위 뒤 중요한 자문역을 하였다.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部都摠官) ·의금부도위관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6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전주이씨 100여개파중 가장 명문가로 인정받는 집안이다.
광주시
1) 최항 선생 묘 (巳座亥向)
광주군 퇴촌면 도마리에 있다.
최 항(崔恒, 1409-1474)의 자(字)는 정보(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이며, 본관은 삭녕(朔寧)이다.
영의정으로 추증된 사유(士柔)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당대의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의 매형(妹兄)이다. 1434년(26 세)에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이 되어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세종 때에는 주로 편찬 사업에 관여하여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등을 만들어 벼슬이 대사헌에 올랐다.
세조 때「경국대전」편찬에 관여하여 예종 원년에 왕에게 바쳤다. 1467년 영의정에 오를 때까지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최씨 가문에서는 이 묘와 부인 묘(서씨)의 발복으로 3대 대제학이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유혈(乳穴)의 혈장에 꿩이 엎드려 숨은 복치형(伏雉形)의 형국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묘역 앞으로 거문(巨門) 토성체(土星體)와 부봉사 등의 귀사(貴砂)가 연이어져 혈장에 응기한다.
2)광산김씨 김익훈 묘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자(字)는 무숙(懋叔), 호는 허새(許璽)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 반(槃)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손자.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연산서씨로 증 참판 주(澍)의 딸이다.
1648년(인조 26) 음직(蔭職)으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고 사옹원 직장을 거쳐 전생서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시복시로 옮겼다. 첨정에 승진되어 내승(內乘)을 겸했고 장성부사로 취임,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공조정랑, 한성서윤, 군기시첨정, 사도시정, 장악원정, 돈녕부도정을 거쳐 외직으로 남원부사, 수원방어사, 충청병사를 지냈다. 1678년(숙종 5)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았다.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병사로 임명되었으나 또 반대파의 반대로 1680년(숙종 7) 다시 광주부윤에 임명되었다. 가선에 승진되어 한성부 우윤에 부총관을 겸했고 경신대출척의 공으로 부사정훈에 추록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1689년(숙종 16)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세력을 잡자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고 시호는 충헌공(忠獻公)이다.
3) 조영무 묘
광주시 퇴촌면 광동2리 산16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흥(永興),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정몽주(鄭夢周)를 선죽교에서 격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전중시판사(殿中寺判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1394년(태조 3) 중추원상의사(中樞院商議事),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그 후 문하부참찬사(門下府參贊事)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삼군부참판사(三軍府參判事) 때, 왕명으로 사병(私兵)의 혁파(革罷)가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西北面都巡問使 兼 平壤府尹)으로 나갔다. 1405년 우정승(右政丞), 1408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이듬해 훈련관도제조(訓練觀都提調)를 거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며, 죽은 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벼슬은 우의정을 역임하였으나 묘비(족보)에는 영의정으로 기록되어 있음
4) 신흠묘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231
신흠(申欽, 1566-162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인수(宋麟壽)의 딸이다. 어릴 때 송인수와 이제민(李濟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5년 진사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이조좌랑, 이듬해 이조정랑,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자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형조참의 이조참의 예조참의 병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 ․병조참판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 ․도승지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 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 해 우의정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여 전주로 피란하였으며,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명나라 외교문서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 등과 함께 한문학(漢文學)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와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5) 신익희 선생 생가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에 있으며, 경기도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해공이 낳고 성장한 집이다. 원래 약200년 된 한옥건축이었으나 1865년 을축년 홍수로 인해 가옥 일부가 파손돼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1892.6.9~1956.5.5) 본관이 평산(平山)이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평의회장·회장 등을 역임,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수가 되었다. 18년 최린(崔麟)·송진우(宋鎭禹)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 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그 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 비서장·외무총장 대리·문교부장 등을 역임, 내무부장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였다.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근하고, 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위원장, 자유신문사(自由新聞社) 사장, 국민대학(國民大學) 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대의원에 피선, 47년 의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에 피선,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韓民黨)의 김성수(金性洙)의 제의를 받아들여 49년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民主黨)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섰다. 호남(익산)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수유리동 북한산 자락인 아카데미하우스 입구에 있다. 생가는 몇 해전에 화재로 반소(半燒)되어 복원되었으며, 마을 앞의 안산이 압(壓)을 하여 곱지만 않다.
6) 허난설현 묘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중부고속도 변에 있다. 본래 묘는 현재 묘역에서 약500m 오른쪽에 있었으나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1985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허난설현은 조선 명종18년(1563)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의 딸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이기도 하다. 강릉에서 태어났다. 빼어난 용모와 천재적 시재를 발휘 여신동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안동김씨(구안동) 김성립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친정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는 화까지 겹치자 거기에서 오는 고뇌를 섬세한 필치로 시를 썼다. 여성 특유의 애상적인 감상을 노래하여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27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했던가! 묘 앞 시비 중에는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는데, 어려서 죽은 두 아들을 그린 내용이다. 두 자녀의 무덤도 허난설현의 묘 앞에 있다.
팔도풍수지리사랑회 고문을 역임하신 김상호 박사님 집안에서 이 묘를 관리하고 있다. 김 박사님 말씀에 의하면 무덤을 이장할 때 뼈는 남아있지 않아 광중에 있던 흙만 한 움큼 퍼다가 땅에 묻고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7) 맹사성 선생 묘
광주 직동 맹산 중턱에 있다. 즉 분당 불국산에서 성남 검단산으로 가는 산맥이 갈마터널을 지나기 전에 동쪽으로 뻗은 곳에 위치한다. 생전 선생의 인품대로 묘역이 다소 협소한 편이다.
선생은 고려 공민왕9년(1360) 온양 설화산 아래 맹씨행단에서 맹희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촌 권근 문하에서 학문하였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 대사헌, 예조, 이조, 호조, 공조 판서를 지냈고, 68세에 좌의정에 올랐다. 당대의 명재상 황희와 더불어 조선초기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항상 간소한 차림과 단출한 외출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시문에 능하고 음율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였으며, 스스로 악기를 제작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72세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8) 신립 장군 묘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에 있다. 신립장군은 조선 명종1년(1546) 생원인 신화국의 아들로 태어나 선조1년(1567)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진하여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곧 참패하여 김여물과 함께 물이 투신 자결하였다.
9)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음택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 삼성공원묘원 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형이 집행된 것은 광주항쟁이 절정기에 이르던 80년 5월 24일이다.
그의 시신은 한남정맥(漢南正脈)이 일군 문형산(文衡山)하의 삼성공원묘원에 묻혀있다. 문형산에서 내려오는 용맥에서 횡맥(橫脈)의 생지(生地)에 신좌을향(辛坐乙向), 좌선수(左旋水), 을파(乙破)로 조성된 그의 묘소는 89년 2월 재야인사들로 구성된 송죽회원 들에 의하여 추모비와 비석이 세워졌다.
2m높이의 추모비에는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화강암의 상석에는 `내 목숨 하나 바쳐 독재의 아성 무너뜨렸네…' 라는 그의 옥중 시를 새겨놓았다.
그는 10. 26을 ‘7년 여의 준비 끝에 이룬 혁명’ 이라 말하고, 박 대통령을 시해한 행위에 대해서는 ‘유신독재를 청산하기 위한 거사’ 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재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아직 국민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리는 보혁갈등처럼 혼란스럽기만 한, 이 명제는 뒷날 역사의 평가에 맡겨질 것으로 보인다.
횡맥으로 들어오는 후부(厚富)한 내맥(來脈)에 조성된, 묘지에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국세와 함께, 천마사(天馬砂), 일자토성체(一字土星體), 고사(鼓砂) 등등, 백자천손(百子千孫)처럼 이어지는 사격(砂格)이 일품이다. 또, 청룡에 비하여 백호가 더 생동적이다.
10) 노적봉하 유산록 선정지
남한산성 입구
노적봉하(露積峰下)에 일대가혈(一大佳穴)이 맺혔으니 바로 남한산성입구 노방(路傍)이다. 노적봉에서 건해(乾亥)로 200m 낙평(落坪)하여 결혈하였으니 과거 심룡(尋龍), 심혈자(尋穴者)가 있었더라도 발견하기는 극히 곤란(困難)하였을 것이다. 손방(巽方)과 신방(辛方)에 탁립고용(卓立高聳)한 사격이 수려하니 가히 문무재사(文武才士)가 배출하는 터다. 수세를 살피니 양수(兩水) 합하여 갑방(甲方)으로 돌아나가고, 사위산(四圍山)이 고호(高護)하여 허(虛)함이 없으니 불입풍격(不入風格)으로 결국(結局)하여, 가히 부귀쌍전(富貴雙全), 금금지지(錦錦之地)이다...............(중략) , 차혈(此穴), 혹자(或者)있어 금년(今年)이나, 작년(昨年)인가 묘(墓)를 썼으니 다행(多幸)한 일로, 경사(慶事)로다. 이상은 장익호 선사가 1975년 4월 20일 남한산성 일대 결록지 답사를 하다가 우연히 이 터를 발견하고 《유산록》에 기록한 내용으로,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일이다.
이 터는 제 3공화국 때, 농림부 장관과 76년에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김영준의 선당(先堂)을 용사(用事)한 것으로, 지금은 2004년 타계한 김영준씨의음택과상하장(上下葬)으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좌향은 간좌곤향(艮坐坤向)에 좌선수(左旋水) 갑파(甲破)로 문고소수(文庫消水), 합법입향(合法立向)이다. 결인처(結咽處) 위, 과룡(過龍)에는 한때 세상을 풍미했을 것으로 보이는 고분(古墳) 2기가 위 아래에서 형체를 들이미는데, 초학자들에게는 과룡을 연구하기에 좋은 대상지로 보인다. 왕도형(王道亨)은『羅經透解』에서「庸醫之誤, 不過一人. 庸師之誤, 必覆全家」“어리석은 의사의 실수는 그 피해가 한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나, 어리석은 지사의 실수는 가문(家門) 전체에게 미친다” 는 것을 되뇌게 하는 고총이다.
11) 광주부원군 이극증 음택
광주시 송산동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경위(景撝)이고, 호는 삼봉(三峯)이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서 출생했으며, 이집(李集)의 증손이고, 이지직(李之直)의 손자이며, 충희공(忠僖公)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종묘서녹사(宗廟署錄事)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군기시직장에 임명되었다. 1461년 이조정랑, 1463년 성균관직강 겸의정부검상을 거쳐 사인이 되었고,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익대공신 2등에 책록되면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470년(성종 1) 이조판서에 올라 국가경비의 식례인『식례횡간(式例橫看)』을 찬정(撰定)하였다. 이듬해 좌리공신 3등에 녹훈되었으며, 호조판서와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82년(성종 13) 우참찬으로 정조사에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병조판서, 지경연사, 형조판서, 좌참찬을 지냈다. 1484년 동지성균관사에 제수되어 문묘(文廟) 중수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4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으로 숭정대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조선 세조에서 예종을 거쳐 성종 대의 기간 동안‘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 불리던 한 사람으로, 조정 회의에 무려 8명의‘극(克)’자가 들어가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 형제들이 참석한 연유이다.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장, 차관을 광주이씨 형제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었는데, 큰형인 이극배(李克培)는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이극감(李克堪)은 형조판서, 본인 이극증(李克增)은 병조판서, 넷째인 이극돈(李克墩)은 병조와 호조판서, 다섯째인 이극균(李克均)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여기까지가 ‘오극(五克)’이고, 나머지 삼극(三克)은 사촌형제들이었는데, 사촌형제인 이극규(李克圭)는 이조참판, 이극기(李克基)는 공조참판, 이극견(李克堅)은 좌통례를 지내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곳에 이장하기 전 묘소는 성남시 야탑동에 있었으며, 1985년에 세워진 신도비의 비문은 김도련(金都鍊)이 지었다. 좌향은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우선수 을진파(乙辰破), 자생향(自生向)으로 88향법으로 용사되었다.
12) 칠사산하 비봉포란형, 유산록 결록지
광주시 송산동
광주 동(東) 오리(五里)에 꾀꼬리봉하에 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을 찾아보기로 하자, 용인 부아산(負兒山)에서 북으로 낙맥하여...........(중략) 소조산에 오르니 횡개대장(橫開大帳)하여 개국(開局)하고, 수조(數條)로 산맥이 흘러갔다. 기중(其中)에서 산맥을 찾아보니 탐랑성하(貪狼星下) 대평유혈(大平乳穴)이 되었으니 신술(辛戌)로 작혈(作穴)하였더라, 강 건너 무갑산(武甲山)이 천리래도(天里來到)하여 안(案)이 되었고, 혈전(穴前)에 난(卵)이 있고, 내 건너에는 면궁(眠弓) 일안(一案)이 되어 삼중안(三中案)이 되었는데, 수세(水勢)는 곤신방(坤申方)과 손사방(巽巳方)에서 물이 와서 곤방(坤方)으로 귀고(歸庫)한다. 삼팔장위요(三八將圍繞)하고, 귀사(貴砂) 중중(重重)하니 참말로 보기 드문 가혈대지(佳穴大地)로다. 혹자(或者)있어 혈후(穴後)에 2~3 기(基) 묘를 썼으나 수화염정(水火廉貞) 못 이기어 당대(當代) 패절(敗絶)하였으리라, 여차여혈(如此如穴) 적선적덕(積善積德) 아니하고, 어찌 얻을수 있겠는가, 차혈(此穴)을 얻게되면 인장묘발(寅葬卯發)하여 부귀수(富貴壽) 겸비(兼備)하여 구대재상(九代宰相)이 날 것이며, 천추만대(千秋萬代) 영화(榮華) 누릴 것이다.
이상이《결록지》내용이다.
꾀꼬리봉은 지금의 칠사산(七寺山)이다. 혈처에 오르면 경안천 너머로 면궁안(眠弓案)과 무갑산이 혈을 영접(迎接)하고, 혈전의 알 봉이 아름다운 자태로 너울거린다. 아직까지는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은 미혈(美穴) 생지로 남아 주인을 기다리지만, 적덕을 쌓은 자 혈을 얻는다면 인장묘발 속발지지(速發之地)하는 대명당(大明堂)임에 손색이 없다.
13) 무갑산하 신익희조지(祖地), 유산록 선정지
초월읍 무갑리
장익호 선사의《유산록》내용이다.
『경기도 광주 무갑산하(武甲山下) 과모혈(戈矛穴)에 해당하는, 고(故)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선생 조지(祖地)를 찾아보기로 하자. 필자는 1970년 1월 무갑산(武甲山)을 탐방하였다.
무갑산은 차령산맥이 안성과 이천사이에서 일지(一枝)는 용인 부아산(負兒山)으로, 일지는 이천을 거쳐 광주 앵자산(鶯子山)으로 행룡하여 무갑산을 이루었으니 탁립운소(卓立雲宵)하여 파군대성(破軍大星)을 형성하였다.
평지에 낙맥(落脈)하여 과모대혈(戈矛大穴)을 결실하였으니 차혈(此穴)인즉 고 해공(海公)선생의 조지(祖地)이다.
신씨(申氏) 문중(門中)에 충청도(忠淸道) 장호원(長湖院)에 사두혈(蛇頭穴)과 와우형(臥牛形)이 있으나 차혈(此穴)에 비하면 소혈(小穴)이다.
그러나 가탄(可歎)할 사항(事項)을 발견하였으니 혈후 뇌처(腦處)를 대파(大破)한 것이다. 어떤 자의 작희(作戱)인지? 우연한 소행인지? 알 바가 없으나 대파한 시기는 밑바닥에서 소나무가 장성하였는데, 16~17년 전의 소행이었으니 해공선생이 작고한 그 시기인 것이다. 이것이 어찌된 연고인고?』라 하면서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하였는데, 장 선사가 답사한 싯점이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이므로 이곳 묘소의 도두(到頭)가 훼손된 것은 어언 54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이곳 터의 주인공은 해공의 직계조상인 신순의 무덤으로 1794년(정조 18)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훼손된 뇌처(腦處)와 결인처(結咽處)는 아직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당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과연 해공선생의 대권(大權)을 무산할 목적으로 경쟁자, 또는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사주(使嗾)인지, 또는 가문 등의 원한관계인지는 몰라도 산을 잘 아는 지사, 또는 풍수전문가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확실하다고 보여진다.
입수일절(入首一節) 손룡(巽龍)에, 을좌신향(乙坐辛向), 우선수(右旋水) 경유파(庚酉破)로 살인소황천(殺人小黃泉)이 되어 아쉬움이 남는 무덤이다. 형기적(形氣的)으로는 보기 드문 용세(龍勢)와 나무랄 데 없는 혈형(穴形)을 이루었지만 정작 이기(理氣)의 용(用)을 등한시한 터의 표본이다.
시흥시
1)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 안성이씨(安城李氏) 이숙번 묘
시흥시 산현동 산 71 금이∼화정 간 도로변에 있다.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21세에 춘장시 병과에 7등으로 급제하여 26세에 지안 산군사로 있으면서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사병을 출동시켜 세자 방석(芳碩)을 비롯하여 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ㆍ심효생(沈孝生) 등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 功臣) 2등에 책록된 뒤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고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방원의 최 측근이 되어 정종이 제2대 왕위에 오르자 방원에게 "공(公)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 다."라고 말하였다.
1400년(정종 2) 박포(朴苞) 등이 방간의 편에 서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 좌명공신 1등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지중추부사가 되고, 지의정부사, 참찬의정부사를 거쳐 1406년 중군총제가 되었으며, 다음해 판의 용순금 사사에 올랐다.
1413년 병조판서, 다음해 찬성에 오르고 1415년(태종 15) 안성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용호(龍虎)가 혈(穴)보다 약하여 바람을 막아주지 못한다. 도로가 나면서 청룡과 백호, 순전(脣氈) 등이 잘려나갔다. 이러한 혈은 독불장군이 되어 무엇보다 자손들은 화합에 힘써야 큰 인물로 성장한다. 파구는 축파(丑破)로 향상왕위충파(向上旺位 破)가 되었다.
2) 파평윤씨 윤강 선생 일가 묘역
윤강 선생이 6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지만 아들 둘이 영의정을 하여 증영의정이 되었다. 여러 기의 묘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진혈은 어느 곳인지 찾아보자.
3) 경사와 시부에 능한 정인지 선생의 아들 정숭조(鄭崇祖) 묘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효숙(孝淑), 호는 삼성재(三省齋),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판한성부사 이휴(李携)의 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훌륭한 가풍을 이어받아 주위로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17세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 에 제수되었다. 이어 주부ㆍ부전첨ㆍ공조좌랑ㆍ종부시소윤을 거쳐 24세에 절충장군 겸 지사 간원사에 올랐고, 26세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뒤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2년 뒤에 공조참 판을 지내고, 30세에 좌리공신 4등으로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33세가 되던 해(1474)에 형조참판, 36세에 한성부 관륜으로 있으면서 도총관을 겸하였고, 이어 지의금부사를 거쳐 47세에 하남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 판윤에 임명 되었고, 그 뒤 경상도 관찰사ㆍ경상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51세에 정조사(正朝使)가 되 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사섬시 제조가 되어 다시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59세 때(1500) 승정대부에 올랐으나 사직하자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62세 되던 해(1503) 2 월 23일에 타계하자 왕이 부의(賻儀)를 내려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다.
선생은 대학자이며 훈신인 정인지의 아들로서 40여 년간을 봉직하는 동안 왕의 총애가 남달랐다. 관직에 물러나 집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악기를 만지며, 독서를 낙(樂)으로 삼았다. 특히 경사(經史)와 시부(詩賦)를 즐겨 읽었으며 강론함에 있어서 말이 물 흐르듯 하였다.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묘는 시흥시 광석동 4(축실)에 있다. 묘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지점에 1985년 10월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이 신도비의 비문은 연산군 9년(1503)에 대제학 김안국이 지은 묘지 문을 후손 정순목(鄭淳穆)ㆍ정봉채(鄭鳳采)ㆍ정갑채(鄭甲采)가 번역하고, 후손 정숙현(鄭淑鉉, 수암면장)의 글씨로, 후손 정재설(鄭在卨)ㆍ정중현(鄭仲鉉, 전 종로경찰서 서장)ㆍ정형묵(鄭 亨默)ㆍ정현채(鄭玄采)가 세운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시장(諡狀)은 용양위 부사직 남태제 (南泰齊)가 지었고, 묘지문은 대제학 김안국(金安國)이 지었다. 또 1995년에는 선생의 아호 명을 취한 재실 삼성재(三省齋)를 신도비 오른쪽에 건립하였다.
4) 연화부수형 강희맹(姜希孟/1424~1483) 묘
묘와 신도비는 시흥시 하상동 산 2번지(연꽃마을)에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진주(晋州). 자 경순(景醇). 호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세종의 이질(姨姪)이고, 화가 강희안(姜希顔)의 동생이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예조판서·형조판서를 지냈다. 68년(예종 1) 남이(南怡)의 옥사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책봉되었다. 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고, 지춘추관사로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어 돈령부판사·우찬성 등을 거쳐 82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맡은 일은 완벽하게 처리하면서도 겸손하여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관인적 취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사회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던 민요나 설화에도 남다른 식견으로 관인문학(官人文學)의 틀을 스스로 깨뜨려 버리는 면도 있었다.
이런 예는 당시 농정의 실상과 농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에 잘 나타나 있다. 문집으로는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와 할아버지와 아버지 및 형 희안의 시를 모아 편찬한 《진산세고(晉山世稿)》가 있다.
5) 세 번 영의정 지낸 청풍김씨 김치인 선생 묘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우의정 김구 (金構)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이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빛난 정기를 받았으며, 태어나서는 수려하고 명석하였다. 장인 인 이관명(李觀命, 좌의정)이 이르기를 "체구는 비록 약하나 골격이 준수하므로 나의 여러 사위 중에서 수명과 벼슬을 그대가 가장 융숭 하겠도다."고 하여 뒷날 큰 인물 될 것을 예언하였다.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3세에 춘당대시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전적을 거쳐 사 간원 정언을 역임하고 문경어사(聞慶御使)로 문경현감의 탐욕을 복명하였다. 이어 지평ㆍ문 학을 지내고, 35세에 호남어사가 되었다. 2년 뒤에 승지에 오른 후 대사간ㆍ비변사 부제조, 대사정, 부제학, 이조참판, 개성유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47세가 되던 해(1762)에 이조판 서를 시작으로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내고 50세에 우의정에 올라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 提 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판중추부사ㆍ영중추부사 를 거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선생은 혁혁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영특하였으며, 순탄하게 벼 슬길에 나아가 영의정까지 이르렀다. 오로지 명성과 명예로써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세 상의 여러 일을 겪으면서도 덕(德) 하나로써 일관하였다. 당시 선생의 할아버지(김구)ㆍ아버 지(김재로)와 함께 3대가 정승에 오른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김구는 경국제세(經國齊世)하 였고, 김재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았으며, 선생은 청아(淸雅)함을 지녔다."고 하였다. 시호 는 헌숙(憲肅)이며, 편서에 『명의록』과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가 있다.
6) 광해군의 장인 류자신(柳自新, 1451-1612년) 묘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지언(止彦),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공조판서 류잠(柳潛)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증 호조참판 정승렴(鄭承簾)의 딸이다. 광해군의 장인이며, 이담(李湛)의 문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정 신중하였고, 자라서는 더욱 자신을 단속함에 엄격하였으며, 남을 대할 때는 항상 온화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고요하여 오직 도서로써 벗을 삼아 특히 경사 (經史)에 유념하여 늙도록 책을 가까이 하였다.
딸이 왕비가 된 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에 근신하고 권문세가로 행사하는 일이 없었다. 만년에는 남쪽 연못 한 귀퉁이에 영은정(詠恩亭)을 짓고 감군은사칠결(感君恩詞七?)을 지어 술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시종(侍從)으로 하여금 이를 읊게 하였다.
묘와 신도비는 시흥시 능곡동 산 32 능골 성인봉(聖人峯, 또는 관무봉) 아래에 있는데 2000년 1월 31일에 향 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7) 박동량(朴東亮)묘
시흥시 군자동 산22-21 君子峰下
박동량(1569-1635)의 본은 반남(潘南)이고, 자(字)는 자룡(子龍)이며, 호(號)는 오창(梧窓), 봉주(鳳州),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이며 어머니는 임구령(林九齡)의 딸이다. 선생은 두어 세에 책을 읽기 시작하여 곧 글 뜻을 깨달았으며, 1589년(21세)가 되던 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시에 병과로 13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에 등용되었다. 이어 추천에 의해 검열에 제수되었으며, 계속해서 검열, 대교, 봉교 등을 지냈다. 1592년에 호조좌랑을 역임하였고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하였다.
그 뒤 연안부사. 경기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등으로 재직 중에는 임진왜란 이후 민생회 복에 힘썼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 간 수묘(守墓) 하고 43세에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선생은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 류영경(柳永慶), 서성(徐筬), 신흠(申欽), 허성 (許筬),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칠신(儒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에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사건(誣獄事件)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 있던 선생이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 뒤로 자주 탄핵을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 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하여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 이어 부안(扶安)을 거쳐 충원(忠原)으로 옮겨지고 64세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선생은 서호(西湖)위에 집을 사서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그 뒤 아들 박미(朴彌)와 박의(朴?)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선생의 묘는 주산(主山)인 탐랑성(貪狼星) 군자봉(君子峰) 동쪽 능선 상에 있으며, 묘 아래는 아들 박미(朴彌, 금양위)의 묘가 있다.
8) 무공단좌형(武公端坐形)의 명당 진주하씨(晋州河氏) 하연 정승 묘
시흥시 신천동 산 12 소래산 아래에 있는데, 무공단좌형(武公端坐形)의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래산은 한남정맥의 줄기로 그 기세가 강하여 인천(인주)의 진산으로 그 아래 있는 하연 묘는 명혈 중에 명혈이라 할 수 있다. 대단한 용세와 국세는 풍수 초보자라 할지라도 감탄을 낼만하다.
선생은 부윤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며, 진주 이구산(李丘山) 아래 여사촌(餘沙村, 현 진양군 단성면 남사리)에서 출생했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21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식년시에 병과에 4등으로 급제하여 봉상시 녹사에 제수되었다. 이어 직예문춘추관 수찬관ㆍ집의ㆍ동부대언(同副代言) 등을 지냈다. 이때 선생이 간관(諫官)으로서의 의연한 자세로 일을 처리하자 태종이 손수 손을 잡고 치하했다.
70세에 좌찬성이 되어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곧 우의정ㆍ좌의정이 되었고, 74세에 영 의정에 올랐다. 2년 뒤(1451)에 문종이 대자암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2년 뒤(1453) 8월 15일에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간 문안에 사알(私謁, 사사로운 일로 윗사람을 뵘)을 들이지 않았으며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 (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양평군
1) 김자지묘 (酉坐戌向 左旋龍에 右旋水로 太極配合)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김자지(金自知, 1367~1435)선생은 고려 말과 조선초기의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원명(元明), 호는 일계(逸溪),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으로 밀직제학(密直提學) 도(濤)의 장자(長子)이다.
1385년<고려 우왕(禑王) 11> 문과에 급제한 뒤 1408년(태종 8)에 형조참의(刑曹參議)와 태종17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20년(세종 2) 대사헌(大司憲)에 올랐고, 그 뒤 원주목사(原州牧使), 평안도 관찰사에 이어 1428년(세종10) 형조판서(刑曹判書),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를 역임했다. 특히 대사헌(大司憲)재직 시에는 당대의 방자(放恣)한 세도공신(勢道功臣)을 탄핵하고자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려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선생은 학문에 뛰어나 음양(陰陽), 복서(卜筮),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음률(音律) 등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준재이고 박학한 학자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선생의 묘(墓)는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와 쌍분(雙墳)으로 조성되었다.
2)유관묘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산 157
유관(柳寬, 1346~1433)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자 청백리로 자(字)는 하정(夏亭)이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며, 조선 건국 후 여러 크고 작은 공을 세운 공신이다. 이 후 관직을 두루 거쳐 1409년(태종 9)에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이듬해『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24년(세종 6)에 우의정에 올라『고려사』를 교정하였다.
묘는 부인과 쌍묘(雙墓)로 조성되었으며, 봉분은 동그란 둘레석을 둘렀다. 중앙에 묘비 가 세워져 있으며 상석과 향로석은 두 봉분 앞에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소 아래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신석우가 글을 짓고 김홍집이 글씨를 썼다.
3)심충겸(沈忠謙)묘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아오곡마을) 亥坐巳向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강(鋼)의 아들이며, 서인의 영수인 의겸(義謙)의 아우이다. 또한 명종(明宗)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다.
157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일찍이 그의 형인 의겸에 의해 이조정랑이 되지 못한 동인 김효원(金孝元)이 이조의 중요한 정랑자리가 척신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반대를 제기함으로써 그 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서당쟁이 더욱 심해졌다.
1582년에 춘천부사 1588년에 여주목사·호조참의·병조참지, 1590년에 대사간·형조참의, 이듬해 형조참판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판 겸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가 되어 선조를 호종하였고, 세자 호위의 명을 받아 왜적방비에 힘썼다.
1593년에 호조와 병조의 참판으로 군량미 조달에 공헌하였고, 이듬해 병조판서에 특진되었다.
1604년에 좌찬성·대제학에 추증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청림군(靑林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실록에 의하면 김충겸은 매양 조정의 의논이 불화함을 개탄하여 사우들과 교유함에 있어 색목(色目, 당파)으로 사귀지 않았으며, 조정의 화평을 이룬다는 마음에서 자기의 손자 이름을 심정화(沈廷和)라고 지어 뜻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묘역은 금성체(金星體)의 주산에서 내려온 내룡이 대와(大窩)로 일군 혈장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혈장이 넓게 퍼져 산만하다. 묘소의 위치가 정혈처(定穴處)보다 약간 아래로 용사되어 실기(失氣)되었다.
4) 우의정 정지연(鄭芝衍)의 묘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영의정 광필(光弼)의 증손(曾孫)이며, 봉상시정(奉常恃正) 유인(惟仁)의 아들이다. 본관은 동래(東來)이며, 자는 연지(衍之), 호는 남봉(南峰)이다.
이황(李滉)·서경덕(徐敬德)·성제원(成悌元)의 문하생이다. 중종 22년(1527)∼선조16년(1583) 문신으로, 명종4년(1549)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1566년 선조가 세자로 있을 때, 이황의 추천을 받아 왕손사부(王孫師傅)가 되어 하성군(河成君) 균(鈞)을 보도(輔導)하였다.
선조2년(1569) 의금부도사로 재직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조좌랑·사헌부지평·홍문관부교리·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홍문관직제학등을 지내면서 청론(淸論)을 벌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1574년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을 거쳐 1581년 우의정에 올랐다. 1583년 병이 깊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병중에 있으면서도 글로 국사를 논의하다 죽었다. 죽기 전 직책을 대신할 인물을 추천하라 하자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하였고 또 유소(遺疏)로 이이를 추천하였는데 특히 이이의 장단점을 골고루 이야기한 뒤 기질을 잘 파악하여 등용한다면 나라에 커다란 보탬이 될 거라 하였다.
묘는 부인과 합장 묘로서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 그리고 문인석, 망두석이 각각 배치되어있다.
5) 영의정 강맹경(姜孟卿)의 묘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참판승추부사 강회백의 손자이며, 지창령현사(知昌寧懸事) 우덕(友德)의 아들이다. 또한 시흥에서 답사한바 있는 강희맹과는 사촌지간이다.
1426년(세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29년 중시문과에 급제, 지송정원사·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1453년(단종 1)에는 이조참판으로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고, 뒤이어 예문관제학, 의정부우참판을 역임하였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하는 일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정되었고,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6년(세조 2) 좌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1458년 좌의정에서 영의정으로 올랐다.
묘역에 있는 신도비의 비문은 신숙주(申叔舟)가 찬하고 강희안(姜希顔)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써 1462년(세조 8)에 건립한 것이다. 그의 묘소 바로 위에는 부모인 강우덕(姜友德)과 재령이씨(載寧李氏)의 합장 묘가 있다.
6) 조욱(趙昱)의 묘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7 괘등혈(掛燈穴) 艮坐坤向 丙破
판관(判官, 종 5품) 조수함의 아들이다. 세심당(洗心堂), 조욱(1498∼1557)은 조선전기(朝鮮前期)의 문신(文臣)겸 학자로, 결혼 이후에 쓰던 이름(字)은 경양(景陽), 그리고 허물없이 부르던 이름(號)은 용문(龍門)·세심당·우암(愚庵)·보진제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의 문하생으로 1516년(중종 11) 생원(生員)·진사(進士)·양시(兩試)에 합격하였다.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 훈구파(勳舊派)들이 일으킨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신진사류(新進士類)이던 조광조. 정암(靜庵)과 그 문인들이 추출될 때 겨우 화(禍)를 면했으며, 종 9품인 준원전참봉(濬源殿參奉)과 영능참봉(英陵參奉)을 지냈다.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자 용문산(龍門山)으로 은거(隱居)하여 학문에 정진하여 용문선생(龍門先生)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이 마을 지명이 퇴촌(退村)이란 유래도 선생이 이곳에 복거(卜居)하여 생겨났다.
명종(明宗)때 성수침(成守琛)·조식(曺植)등과 함께 어진 선비로 뽑혀 내섬사주부(內贍寺主簿)가 되었고,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때는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왜구(倭寇)를 선방(善防)하여 읍민(邑民)들을 수습·교화(敎化)했다.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능하였고,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김안국(金安國)등 당대 명사들과도 교유(交遊)했다. 사후(死後)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운계서원(雲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저서로 용문집(龍門集)이 있다.
묘역이 높고, 물은 청룡자락을 비집고 흐르는 산수동거(山水同去)가 되어 바람이 들락거리는 통로가 되면서 풍살(風殺)을 받는다.
7)윤승길(尹承吉)의 묘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막골)
將軍對坐形 丑坐未向 午破. 內破는 坤破
윤승길[1540년(중종 35)∼1616년(광해군 8)]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는 자일(子一), 호는 남악(南岳)이며, 사헌부감찰 홍언(弘彦)의 아들이다. 1561년(명종 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사헌부장령 등 여러 중요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구성부사로 있으면서 군량미조달과 군인모집 등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전란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장정을 뽑아 기효신법으로 훈련을 시켜 명나라 지휘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600년(선조 33)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으며, 그 해, 선생의 딸과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이 혼인(婚姻)을 하여 선조와는 사돈지간이다.
한성부우윤을 지내면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직하였고,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끝으로 모든 관직을 마무리한다. 1616년(광해군8)에 한양(漢陽) 낙선방(樂善坊, 현 중구 묵정동)에서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예관(禮官)과 조관(朝官)을 내려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뒤에 해선군(海善君)에 봉해졌고,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묘역은 중출맥(中出脈)으로 결작하였고, 명당의 국세가 완벽한 관쇄(關鎖)를 이룬다. 또 조산(朝山)인 주읍산의 웅장한 부봉사(富峰砂)가 장관을 연출한다
가평군
1) 고려의 장군 이방실(李芳實) 묘소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진동에 있다.
이방실(李芳實)장군은 서기 고려 충렬왕 24년(1298)년 함안 생동산 기슭에서 고려 총랑(摠郞)을 지내던 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말기 무신으로 본관은 함안(咸安).
충목왕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호종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에 이어 호군에 올랐다. 1354년(공민왕 3) 선성(宣城)에서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의 모반을 진압하였고, 59년 모거경(毛居敬) 등이 4만의 홍건적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자 안우(安祐)·이음(李蔭)·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격퇴, 추성협보공신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다시 홍건적이 70여 척의 배로 서해도(西海道)에 침입하자 풍주(豊州)에서 물리치고 옥대를 하사받았다. 61년 20여 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도지휘사로서 안우·김득배(金得培) 등과 함께 개주(价州;价川)·연주(延州;寧邊) 등지에서 요격하였으나 참패, 개경(開京;開城)이 함락되었다. 이듬해 정세운(鄭世雲)·최영(崔瑩) 등과 개경을 수복하고 적을 섬멸하였으나 안우·김득배 등과 함께 김용(金鏞)에게 살해되었다.
2) 천하 명당으로 멸족의 화를 당한 유몽인(柳夢寅)묘소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진동 능골에 있다.
본관은 고흥(高興), 시호는 의정(義貞),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 간제(艮齋) 묵호자(黙好子)이다.
명조14년(1559) 柳 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기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고 1582년(선조 15) 24세에 진사가 되였으며,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암행어사가 되고, 1593년 문학을 역임하였다. 그는 학문의 깊이가 있었고 문장력이 뛰어났으나 성품이 경박하여 스승의 책망을 받고, 절교를 당하자 당시 이이첨등 대북파와 교류하며 중북파의 영추가 되고 스승인 성혼이 죽자 그를 모독하는 글을 지어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
선조말년 황해도 관찰사·좌승지·도승지를 역임하고, 광해군4년(1612) 예조참판에 이어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폐모론에 휘말려 이이첨과 대립하였지만 이에 적접 가담하지 않아 1623년 인조반정때는 화를 면했으나 유응시의 고변으로 기자헌·유경종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하여 체포되자 양주서산에 도피했으나 잡힌 후 김상헌등의 문초에 모반사실을 부인했으나 끝내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는데 당시에 지은 노과부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중기의 설화문학의 대가였으며 전서·해서·초서에 능통하였다. 그가 지은 어우 야담은 현재도 조선중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정조조(正祖朝)에 이르러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중되고, 홍양에 있는 운곡사와 고산에 있는 삼현영당 에 제향되어 있다
3) 영의정의 이천보(李天輔) 고택 및 묘소
가평군 상면 태봉리 반계동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시호는 문간(文簡),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菴)이다.
숙종 25년(1698)에 이주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교리·헌납·장령 등을 지낸 뒤 49년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어 이조·병조판서를 거쳐 52년 우의정에 올랐다. 같은해 좌의정에 승진하였으며 54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 뒤 영돈녕부사에 전임된 뒤 6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같은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평양 원유사건(遠遊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음독자결하였다. 시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진암집》이 있다. 월사 이정구의 5세손이다.
4) 3대 대제학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묘역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시호는 문충(文忠),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이다.
서기 1564년 10월 8일에 서울 청파동에서 출생하여 8개월만에 능히 걸었고, 또한 말과 글자를 읽었다고 한다.
6세 되던 해 봄에 문밖에 나갔다가 마침 버드나무 강아지꽃이 만개하고 피리소리가 들려오며, 취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가는 것을 보고, 시를 지었으니
扶過小橋外, 楊花爭亂飛
何處數聲笛, 吹來醒醉耳
라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다 신동이라고 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문장가 집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문장에 비범한 재질을 보였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92년 임진왜란 때는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說書)가 되었다. 한편 중국어에 능통하여 어전통역관(御前通譯官)으로 명(明)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교섭에 정부를 대표하여 활동했다. 98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명나라로 들어가 그것이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혔다. 그 뒤 대제학을 거쳐 병조판서·예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한문4대가로 꼽히며, 글씨는 왕희지체로 단아하고 중후하며 품격이 있다. 저서로 《월사집》이 있다.
공은 인조 13년인 서기 1635년 4월 29일 향년 7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장례일에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려 받고, 처음 경기도 용인에 장사 지냈다가 4년후에 가평에 이장하였다.
역장의 대표적인 곳이다. 월사(대제학) 묘소 뒤 손자 이일상(대제학) 묘소 뒤에 아들 이명한(대제학) 묘소로 배치되어 있다.
- 대제학 이명한(李明漢) 묘소 맨 윗쪽 묘소
월사 이정구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 문신·시인.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본관은 연안(延安).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급제, 승문원권지정자가 되었고, 전적을 거쳐 공조좌랑이 되었을 때, 앞서 있었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인조반정 뒤 경연시독관이 되었고,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하였으며 이식(李植)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그 뒤 각조 참의를 거쳐 대사간·부제학 등을 지냈고, 39년(인조 17) 병조참의·도승지를 거쳐 41년 한성부우윤이 되었으며, 그해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43년 이경여(李敬輿)·신익성(申翊聖) 등과 척화파라 하여 선양[瀋陽]에 잡혀갔다가 풀려났으며, 45년에는 명(明)나라와 밀통하는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청(淸)나라에 잡혀갔다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아버지 정구(廷龜), 아들 일상(一相)과 더불어 3대 대제학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의 치욕에 대한 울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白洲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
- 대제학 이일상(李一相) 묘소
월사 묘소 뒷쪽이 손자인 이일상 묘소이다.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함경(咸卿), 호는 청호(靑湖). 본관은 연안(延安). 영의정 정구(廷龜)의 손자이다. 1628년(인조 6) 문과에 급제하고 뒤에 검열·정언 등을 지냈으나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서 탄핵을 받아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사간이 되었고, 효종이 즉위하자 우승지가 되었다. 부제학·대사간·대사헌을 지냈으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54년(효종 5) 정조 겸 진하부사(正朝兼進賀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판·대사성 등을 지냈다. 56년 부제학으로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한 뒤 대제학이 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빈전도감당상으로 차출되었으며,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60년(현종 1) 실록청당상으로 《효종실록》 편찬의 책임을 맡았으나 남인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정헌대부에 가자(加資)되었으며, 공조판서·예조판서·좌우참판 등을 지냈다. 죽은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
5) 가은군(加恩君) 묘소
가평군 설악면 소재지에 위치해 있다.
가은군은 효령대군의 손자로 일찍 죽어 후사가 없던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적된 인물이다. 예절범절과 학문에 뛰어났다 한다.
연천군
1.청오 지창룡(池昌龍) 음택
대한민국 최고의 역술인이면서 초대 한국역리학회 회장과 한국역술인 협회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셨으며, 풍수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약관 34세로 동작동 국립묘지를 선정하는 등 국가의 중요한 사업(한강 종합개발 등)에 풍수가로 참여하였다. 그동안 소점한 음택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내외 묘, 이승만 전 대통령 묘, 연세대 총장 백낙준박사 묘, 삼성 이병철 회장 묘, 새한미디어 이창희 묘, 양주시의 홍진기 법무장관 묘, 전 국회의장 이재형 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부친 묘, 미얀마랑군 사태 때, 희생한 장관들 묘 등이다.
청오선생은 말년에 이곳 지정골(지씨 골)에 잠시 거처를 하면서 흩어진 가족묘지 수 십 기를 이곳 묘택 위로 조성해 놓았으며 또한 자신의 사후지지로 이 자리를 선택하였는데, 이곳 터가 명성에 맞는 자리인지 또는 지관들 치고 좋은 자리 못 들어간다는 속설에 맞는 자리인지를 살펴보는 기회이다.
이곳 형국(形局)은 우리 학회의 '박행묵님' 조상묘역과 비슷한, 천상의 옥녀(玉女)가 상제에게 진상을 바치는 옥녀봉반형(玉女奉盤形)이다.
2. 미수 허목 음택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114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학자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현감 교(喬)의 아들로 태어났고, 찬성 자(磁)의 증손이다. 증조모는 양녕대군의 증손 증파수 종암의 딸이고 조모는 강희맹(姜希孟)의 현손 강복의 딸이며,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이곳 연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영남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남인 학문의 거두로 눈썹이 아름다워 호를 미수(眉수)라 하였고, 대령노인이라고도 불렀다.
아버지가 거창현감으로 재직할 때, 남인(南人)의 거두인 정구(鄭逑)로 부터 글을 배웠다.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인조(仁祖)가 자기의 생부(生父)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증하려 하자 이것을 반대하여 과거 응시를 금지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버리고 광주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곳을 이주한 끝에 1646년 연천으로 돌아왔다. 50년(효종 1) 이후 정릉참봉․내시교관․조지서별좌․공조좌랑․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거나 곧 사직되었다. 1657년 공조정랑․사복시주부를 거쳐 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좌절되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
1674년 효종비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 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다.
1675년(숙종 1)에 산림직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비롯하여 이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山林) 중에 정승으로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관작이 삭탈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묘택 아래에는 이장할 때 출토된 큰 바위를 쪼아만든 전형적인 석관(石棺)이 진열되어 있다.
3. 강회백(姜淮伯) 음택
미수 허목 묘에서 조그만 더 들어가면 비룡상천(飛龍上天)으로 돌출한 산정(山頂)에 특이하게 조성된 묘다. 특출 나게 돌출한 구릉 꼭대기에 조성되어 초행자는 전혀 묘처럼 보이지 않으며, 산정아래에 진응수(眞應水)가 이루어 놓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산정이 좁아 상석 등은 모두 평지에 있다.
강회백은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태어나 조선 태종2년(1402)에 죽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통정(通亭)으로 미수 허목의 외조부(外祖父)이다.
그의 가문은 원래 진주의 토성 사족(土姓士族)이었으나 일찍이 상경종사(上京從仕)하여 연천 지역에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양촌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1376년(우왕 2)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성균좨주를 거쳐 밀직사의제학, 첨서사사를 역임하였으며, 1388년 창왕(昌王) 즉위 때는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을 다녀왔다.
창왕을 폐할 때 공을 인정받아 1389년 공양왕 즉위 시,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이 되었고, 세자사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조선이 창건되고, 정몽주(鄭夢周)의 편에 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하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하자 정치적 입장이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동생 회계(淮季)가 공양왕의 공주인 경화궁주(敬和宮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던 관계로 이성계 파의 눈밖에 나서 진양에 유배되었다. 공양왕이 폐위되고 동생 회계가 회빈문 밖에서 참형을 당할 때, 연좌(連坐,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특정한 범위의 가족 등이 연대책임을 지는 것)되는 고비를 넘겼다.
조선 태조가 인망이 있다 하여 상중(喪中)의 그를 계림윤에 임명하여, 1398년(태조 7)에 동북면도순문사가 되었다. 문집으로 『통정집(通亭集)』이 있으며, 허목이 그를 위해 지은 「강정당유사(姜政堂遺事)」가 있다.
4)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敬順王陵)
문성왕(文聖王)의 후손(後孫)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였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935년(경순왕 9) 10월에 군신회의를 소집,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국서(國書)를 가지고 가도록 하여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그의 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오직 충신(忠臣)과 의사(義士)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끝내는 것인데,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이랴" 통곡하면서 왕과 이별을 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경순왕은 국가를 내주면서 왕건에게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았다.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았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안양시
1) 영의정 유정현(柳廷顯)묘소
안양시 비산동 삼성아파트 단지내에 위치
려·조선의 문신. 시호는 정숙(貞肅), 자는 여명(汝明), 호는 월정(月亭), 중찬(中贊) 경(敬)의 4세손, 문화군(文化君) 구(丘)의 아들. 음보(蔭補)로 등용, 사헌 규정(司憲糾正)을 거쳐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장령(掌令)·지양근군사(知陽根郡事)·집의(執義)·우대언(右代言) 등을 역임, 공양왕 때 좌대언(左代言)으로 정몽주(鄭夢周)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 후 풀려나왔다. 1394년(태조 3)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된 뒤 병조 전서(兵曹典書)·완산 부윤(完山府尹)을 거쳐 1404년(태종 4) 전라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고, 경기좌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 및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409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형조 판서가 되었다. 그 뒤 예조 판서·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평양 부윤(平壤府尹)·농사헌·이조 판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병조 판서·찬성사(贊府事) 등을 거쳐 1416년(태종16)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승진했다. 1419년(세종 1) 쓰시마도 정벌 때 삼군 도통사(三軍都統使)로 활약, 1424년 영돈령부사 겸 판호조사(領敦寧府事兼判戶曹事)를 거쳐 1426년 다시 좌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곧 치사(致仕), 4일 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