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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韓明澮
한명회(한명회. 1415~1487) .. 본관은 청주(淸州), 호(號)는 압구정(狎鷗亭) 또는 사우당(四友堂), 시호(諡號)는 충성(忠誠)이다.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의 妃), 공혜왕후(恭惠王后.성종의 妃)의 아버지로 딸 두 명을 왕비로 만들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 "이라는 국호를 받고 돌아 온 한상질(韓尙質)이다.
한명회에게는 아들 한명과 딸 넷이 있었다. 아들은 병약하고 보잘 것 없어 일찍 죽고, 첫째 딸은 世宗의 사위인 윤사로의 며느리,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며느리, 셋째 딸은 睿宗의 왕비, 넷째 딸은 成宗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왕비가 된 두 딸은 일찍 요절한다. 장순왕후는 아들을 낳은 후 일주일도 안 되어.. 成宗의 비(妃)인 공혜왕후는 왕비가 된지 5년이 못 되어 19살의 나이에 죽는다.
한명회는 젊어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번번히 낙방하다가, 1452년(문종 2) 나이 40세가 되어 음보(蔭補..과거를 거치지 않고 공신의 자제 등에 벼슬을 주는 제도)로 경덕궁직(敬德宮職)을 얻었다.경덕궁(敬德宮)은 개성에 있던 이성계가 살던 집이다. 한명회는 이 집의 문지기로 시작한다.
친구인 교리(校理) 권람(權擥)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무리에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명을 추천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政亂)때 수양대군을 도와 단종을 쫒아 내고 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왔다.
수양대군이 즉위한 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고,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가담하여 도승지에 오른다.
그 후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에는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하였는데,그는 문치보다는 병권에 재능을 보였으며, 오지인 북방으로 파견나가는 일에 망설임 없었고, 북방을 견고히 하는 일에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세조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으며 우의정, 영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잠깐 불러나기도 하였다. 1467년 (세조14),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반역하였다고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고, 세조가 죽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翼戴功臣) 1등에 오른다.
한명회와 불편한 관계이었던 큰사위 예종(睿宗)이 갑자기 죽고 막내사위인 成宗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아 보는 원상(院相)이 되며, 이 때에도 兵權에 관심이 많아 병조판서를 겸하였고, 한명회의 권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죽자 한명회의 권력도 추락하기 시작한다. 성종 5년에 영의정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며,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狎鷗亭)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이 삭탈되었다.
압구정
그 후 압구정에 머무르며 은거하다가 73세의 나이로 죽는다.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甲子史禍)때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의 사사(賜死)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체는 토막 내어 졌으며, 목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렸다, 후에 중종반정으로 신원(伸寃)된다.
칠삭둥이 한명회
한명회의 수결(手決)
한명회가 태어 날 때에는 그의 가문은 몰락해 있었고, 그는 칠삭둥이 즉 일곱달 만에 태어 났다. 기록에 의하면 " 일곱달 만에 태어나, 처음에는 완전한 四肢를 갖추지 못하여 내다 버리라 하였으나, 늙은 여종이 떨어진 헌 옷에 싸 두었는데 몇 달이 지나서야 완전한 사람의 형체를 갖추었다.
또한 등과 배에는 천태(天台)와 북두칠성처럼 생긴 검정 사마귀가 촘촘히 박혀 있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
한명회와 신숙주
한명회의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며느리가 되었다. 신숙주는 한명회와의 관계를 결발동유독서(結髮同遊讀書)라고 하였다. 즉, 더벅머리 어린 시절부터 함께 뛰어 놀고 함께 책을 읽었다는 의미이다. 두 사람은 평생의 동지이자, 사돈으로 인연을 이어 간다. 단종의 사사(賜死)에도 두 사람이 앞장 서서 주장한다.
신숙주
한명회와 수양대군(世祖)
수양대군은 여의주(如意珠)없는 용(龍)이었고, 한명회는 여의주(如意珠)이었다. 이 한 줄로 두 사람간의 관계는 명쾌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世祖의 전신 화상이다. 즉위 4년 , 1458년에 제작되었으며,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있다.
한명회와 권람(權擥)
한명회는 早失父母하여 가세가 빈한하였지만, 명문의 후예답게 한명회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하기 시작한것은 유방선(柳方善)의 제자로 들어가고 부터이다. 비록 과거에는 몇 차례 떨어지고, 음보(蔭補)로 이성계가 살던 집의 문지기로 시작하지만....
유방선은 世宗이 자문을 구할 정도로 학문이 높았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在野의 대석학이었다. 유방선은 내 문하에서 크게 될 인물은 한명회, 권람 그리고 서거정(徐居正)이라고 예언하였다.
한명회와 권람의 관계를 망형우(忘形友)의 관계라고 한다. 망형우(忘形友)란 문자 그대로 용모나 지위 등을 문제 삼지 않고 오직 참 마음으로 사귀는 벗이란 의미이다. 이러한 우정 뿐만 아니라 두사람은 혈연관계이기도 하였다. 권람의 여동생이 한명회의 동생의 부인이었다. 권람은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개성만은 뚜렷하였다. "권람은 文章이요, 한명회는 經倫이다. "라는 말은 남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한 것이었다. 그들의 삶 또한 그렇게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한명회와 김시습(金時習)
조선 500년 세월 .. 천재는 많았을 것이다. 정도전, 신숙주,김시습, 한명회, 조광조, 이퇴계,이율곡, 추사 김정희 등등...이 중에서 김시습, 한명회 그리고 신숙주는 동 시대를 함께 살아 간 천재들이었다. 생육신으로 더 잘 알려진 김시습..그는 5세 신동으로 최고의 천재라 함에 부족함이 없다.
동 시대를 살면서도 서로의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천재들..한명회와 김시습이다. 김시습은 5세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世宗은 그를 인정하고 총애한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단종폐위에 임하여 약관 21세의 나이에 학문과 벼슬을 모두 버리고 초야에 묻혀 평생을 방랑자로 살아 간다.
매월당 김시습
김시습은 천재이면서 담대하기도 하였다. 능지처참을 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에서 수습하기 하였으며, 사육신을 고자질한 김질의 장인이며 당대의 세도가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광화문 네거리에서 " 네 이놈! 이제 그만 해처먹어라."고 소리친다.
반면 한명회는 흔히 칠삭둥이로 불리우며 모략과 권모술수로 그의 천재성이 폄하되어 왔으나, 빈 손으로 수양대군에게 머리를 빌려 주어 天下를 손바닥에 쥐락펴락했던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 두 걸출한 천재의 삶이 그들의 인생관, 사생관에 의하여 이렇게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이었어야 하는지 ...시대를 디자인하고 경략하였으나 왕비로 보낸 두 딸을 자신보다 먼저 보내야 했고( 두 딸 모두20세 전후에 요절함), 자신도 무덤이 파헤쳐져서 두번 죽음을 당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치욕을 겪어야 했던 한명회...
일생을 거쳐 승려가 되었다가 다시 환속하고..등등을 반복하며 자유인(自由人)이 아닌 절망자(絶亡者)의 삶을 선택하였던 김시습...
김시습은 다음과 같이 한명회의 삶을 비꼬았다.
한명회의 청춘부사직,백수와강호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를 김시습을 이렇게 비틀었다. 청춘위사직, 백수오강호(靑春危社稷, 白首汚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고, 늙어서는 강물을 더럽힌다....
한명회 다시 보기
우리 역사에서 한명회만큼 오해를 받는 인물도 없는 듯하다. 그는 흔히 "세조의 장량(張良)"으로 불린다. "필부(匹夫)와도 같았던 수양대군에게 人才와 정보를 제공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뛰어난 모사꾼이라는 것이다. 4 차례에 걸쳐 일등공신에 책봉되었고,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 되어 "영화를 한 몸에 누린 사특한 권신(權臣)"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까지 그에게 덧붙여 졌다.
이채로운 한명회의 末年
놀라운 것은 그의 이채로운 말년이다. 한갓 개성의 궁궐지기였던 그가 세 임금을 모시며 영의정 등 고관 요직을 지냈지만, 탈가(脫駕 .. 권좌에서 내려 옴)할 때를 놓쳐 패몰하거나 죽음을 당한 대부분의 세도가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73세의 나이로 그가 죽을 때 成宗은 음식을 들지 않고 슬퍼하였다. 까다로눈 사관(史官)들도 그를 함부로 폄훼하지 않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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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는 남의 말을 잘 듣고 또한 잘 하였다. 세종은 정승의 핵심 요건으로 "공적(功積)"과 함께 "건백(建白 .. 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世宗은 .. 공적으로 보면 최윤덕(崔允德)이 영의정 감이지만, 말하는 것이 서툴러 우의정에 임명한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한명회는 정승의 요건을 갖추었다.
그의 타고난 친화력과 간명 적절한 말솜씨는 정적(政敵)인 조번(趙磻)까지도 설득하여 모든 사실을 털어놓게 하였다. 그는 길게 말하는 법이 없다. 수양대군도 말의 大義와 일의 실상에 대한 그의 간결한 설명을 듣고는 곧 오래된 친구처럼 그를 대하였다.
둘째 ,정확한 판단력과 기획력이다. 그는 조번(趙磻) 등에게 들은 정보로 상대측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정적들의 거사 직전에 치밀한 선제 공격으로 괴멸했다. "계유정란" 때 그가 상,중,하의 계책을 만들고 수양대군에게 각각의 계책을 제시하여 김종서(金宗瑞) 등의 방어망을 무너뜨린 것은 유명하다.
그는 김종서 등을 제거한 데서 그치지 않고 수양대군을 왕위에까지 오르도록 비변을 가지고 설득하였다. 마치 장량(張良)이 함양땅을 차지한 후 눌러 앉으려는 漢高祖를 설득해 "졸부"가 아니라 "천하의 패자"가 되도록 만든 것처럼..
셋째, 나라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이다. 그는 권력을 얻는데 뛰어난 "마상(馬上)의 정치가"일 뿐 아니라, 탁월한 "좌상(座上)의 행정가"이었다. 그는 병조판서로서 새로운 방어전략을 세우는가 하면, 모두가 가기를 꺼리는 북방지역에 몸소 나아가 여진족으로부터 변방을 지켰다.
왕명을 받아 三南地方의 작황을 직접 조사하여 농사를 망친 백성들에게 부당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세조는 "한명회의 일처리가 이와 같으니 여러 사람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그를 칭찬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단순한 모사꾼이 아니라 탁월한 정승이었다. 李栗谷의 표현대로 하자면 " 나라만을 근심하고 자신을 돌아 보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사직을 편안케 하는데 정성을 다한 충신"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실제 성종은 그에게 충성(忠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위기와 처신
그런 한명회에게도 몇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그 중 최대의 위기는 "이시애의 난(이시애의 난)"이었다. 회령절제사 이시애(李施愛)가 반역을 모의하면서 신숙주, 한명회 등에게 통서(通書)했다는 자백이 나온 것이었다.
世祖로서는 그 자백을 받아들여 최고의 功臣들을 제거할 수도, 그렇다고 뭇사람의 입에 구실감이 된 이 문제를 덮어 둘 수도 없었다. 끈질긴 言官들의 탄핵 국면 속에서 世祖가 내린 결론은 중용이었다. 먼저 한명회의 사퇴 의사를 받아들여 삭탈관직한 후 유폐하는 조치를 내렸다. "원근의 의혹을 불러 일으킨 罪"를 처벌한 것이다. 그 다음 世祖는 그들을 다시 복귀시켜 정국을 안정시켰다.
언관들의 말을 수용하되 국가의 일도 폐하지 않게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명회의 자진사퇴이다. 세조의 부담을 덜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는 그런 태도로 인하여 그의 말년은 편안하였다.
조선의 역사에서 한명회만큼 오해를 받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한명회는 칠삭둥이로 태어 났으나,역경을 극복하고 조선시대 최고의 재상 반열에 올랐다. 그는 세 명의 王을 모시며 영의정 등 고관요직을 지냈으며, 73세의 나이로 그가 죽을 때 成宗은 음식을 들지 않고 슬퍼했다고 한다.
까다로운 史官들도 그를 함부로 폄하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경영하였고, 나라를 경영하였다. 처세와 책략의 달인이요, 난세의 영웅이라고 불리우는 한명회....
한명회 ... 타고난 친화력의 달변가
조선초기에 권모술수에 능하고, 드디어 모든 책략을 다하여 수양대군의 즉위에 성공한다. 世祖는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고 까지 불렀다.
한명회는 말년에 한강 남쪽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라는 오언절구(五言絶句)를 남겼다. 젊어서는 사직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되면 강가에 누워 세상을 관조한다... 라는 의미.
그러나 한명회는 과거에 조차 급제하지 못하고, 개성에서 궁궐지기를 하다가 계유정난으로 손에 피를 묻히고, 수양대군을 등극시켰기 때문에 역사의 찬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명회 ... 정확한 판단력과 치밀한 기획력의 소유자.
계유정란(癸酉政亂)은 권력 쟁탈전이었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王의 동생으로서 나약한 단종을 밀어 내고 권력을 차지하려 했고,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은 문약(文弱)한 문종과 단종을 등에 업고 신권(臣權)을 강화하면서 권력을 농단하였다.
가진 자들의 싸움에서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위하여 목숨을걸고 싸워 승리한다. 사가(史家)들은 계유정난이 단종의 폐위로 이어지자 권력의 정통성 때문에 한명회와 세조를 비판하지만, 민중으로 대변되는 백성들과는 무관한 싸움이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이 안평대군을 사사(賜死)하고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오히려 그들을 두둔한 것은 역설적으로 김종서,황보인 등의 노회한 권신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다는 反證이 되는것이다.
한명회 ... 단순 모사꾼이 아닌 탁월한 정승의 면모
권력을 찬탈한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死六臣 등 많은 반대파들로부터 도전을 받았으나 한명회의 책략으로 이를 극복하여 정권을 안정시킨다. 한명회는 두 딸을 수양대군의 아들과 손자에게 시집을 보내 권력을 더욱 탄탄하게 하고, 그 권력을 기반으로 세종(世祖)와 성종(成宗)代를 태평성대로 이끌었다.
책략의 달인, 권모술수의 대가 , 노회한 정치가 등 그에 대한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그러나 세조에게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충신이었고, 한명회 자신은 불우한 역경을 딛고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영의정까지 올라, 그의 가문이 누대에 걸쳐 부귀와 명성을 누리게 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가 주도한 계유정란(癸酉政亂), 단종의 폐위를 떼어 놓고 보면 그는 빈손으로 가문을 일으킨 처세와 책략의 달인이요, 난세의 영웅이었다.
지석 誌石
한명회의 묘에 묻혀 있던 지석(誌石) 24개가 도굴된지 9년만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지석(誌石)이란 고인(故人)의 인적사항이나 一代記를 돌에 기록한 것으로 시신과 함께 매장하였던 유물이다.
따라서 이 지석에는 한명회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한명회가 권람,신숙주 등과 합심하여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도록 돕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석에 새겨진 내용 중, " 국가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느냐? "라는 권람의 질문에 한명회는 " 나라의 기운이 이미 기울었으니 난(亂)을 일으킬 재주있는 자를 얻지 않는다면 어찌 세상을 구하겠는가..
진양대군이 활달 영무하여 가히 더불어 큰 일을 일으킬만 하니 조용히 건의하여 그 뜻을 살펴 보는 것이 어떠한가 ? "라고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 "亂을 일으킬 재주있는 자" 또는 진양대군은 모두 수양대군을 지칭하고 있다.
지석의 내용 중 계유정난을 설명한 부분에는 " 다른 마음을 갖는자는 마땅히 베어 없앨 것이다. 무리들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모두 公을 따를 것이다. 세조께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원흉을 제거하고 그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평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誌石에는 단종의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사육신을 처단했던 일은 고스란히 빠져 있다. 한명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후대에 변화하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인 것이다.
한명회의 사위이었던 成宗 때 만들어진 비석(碑石)에는 단종의 복위운동을 좌절시킨 일이 가장 큰 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연산군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번의 誌石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한명회는 연산군의 생모이었던 폐비윤씨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계유정난 (癸酉政亂)과 살생부 (殺生簿)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病弱)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중 남지(南智)는 병으로 사퇴하고 그 후임 정분이 대신한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김종서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직후에 수양대군은 "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 "고 하며 사후에 상주(上奏)하였다.
곧 이어 단종의 命이라고 속여 중신들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입궐하던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 이양(李穰) 등을 궐문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趙遂良)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安平大君이 황보인,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이렇게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의정부 영사와 이조,병조판서 그리고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겸직하였고, 좌의정에 정인지(鄭麟趾), 우의정에 한확(韓確)을 임명하였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 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癸酉年)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癸酉政亂)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고 하여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이계전,권람,홍달손,최항, 한명회 등 37명은 정난공신(靖亂功臣)이 되었다.
한명회의 유언(遺言)
한명회의 죽음이 임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成宗은 신하를 보내어 유언(遺言)을 듣고 오라고 명한다.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시근종태(始勤終怠)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나, 원신종여시(願愼終如始)....시작은 부지런하고, 끝에는 게을러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오나, 부디 처음과 같이(如始) 끝까지 신중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