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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위하여 택하심 | 1-5 1 ①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②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③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 지어다 |
얼굴을비취소서 | 6-8 6 ④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7 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⑥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
4편,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대적하지 말라
요절 : 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편도 다윗의 시입니다. 중심점은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데 있습니다. “여호와의 택하신 자”란 1차적으로는 다윗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다윗을 예표로 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택하셨다고 말씀하면서,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표를 보시면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대적하지 말라”를 중심으로, ①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 말하면서, ②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려는 것은 “허사요, 궤휼이다”, ③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라” 하면서, ④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합니다. ⑤ 그리고 “곤난”으로 시작한 4편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과, ⑥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한, 평강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첫째 단원(1-5) 자기를 위하여 택하심
둘째 단원(6-8) 주의 얼굴을 들어 비취소서
첫째 단원(1-5) 자기를 위하여 자를 택하심
첫째 단원의 중심점은 “자기를 위하여 택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가 1차적으로는 다윗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자신을 위하여 택하신” 분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건설은 다윗을 택하심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1상) 합니다.
㉠ 다윗은 하나님을, “내 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데 특이한 호칭입니다.
㉮ 이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공의(公義)로운 판단을 구하는 뜻도 되지만,
㉯ 이어지는, “긍휼히 여기사”와 결부시켜보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롬 4:5) 하나님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 이점이 “곤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에 나타납니다. 다윗은 지금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당하여 도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하는 곤난이 죄에 대한 징벌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징벌을 통해서 다윗이 깨달은 바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계시하시려는 바가 무엇인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32:1) 한, 대속을 통한 칭의(稱義)교리인 것입니다. 오직 여기에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②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2) 하는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나의 영광”이란, 1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여 기름 부어 왕위에 오르게 하신 “왕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에 도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人生)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하고, “인생들아” 하고 지칭한다면 이는 이미 다윗을 뛰어 넘는 묘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삼상 16;1)해 놓으셨다고 말씀하시는데, 궁극적으로 예선해 놓으신 “한 왕”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사 11;1) 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③ 이런 맥락에서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3상) 한 말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전망(展望)하는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 물론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것은 다윗왕국이 아니라, “메시아왕국”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고 묻는 이삭의 말에 아브라함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7-8) 한 대답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신약성경에서는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 하고 그리스도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합니다.
㉡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증거에는 공통점(共通點)이 있는데, “자기를 위하여” 라는 말입니다.
㉮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셨다”(3),
㉯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계획에는 “자기를 위하여” 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가 걸려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다윗은 23:3절에서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自己)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합니다.
㉢ 그래서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셀라)”(4) 하는 것입니다. 누구들에게 하는 말인가?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2) 한, “인생(人生)들”, 즉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경계인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한다”는 말은,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대적”(2:2)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2편에서는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虛事)를 경영하는고”(1) 했고, 4편에서는 “허사(虛事)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2) 하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 지어다”(5)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경배하며 섬기라는 뜻인데 이점을 2편에서는,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2:12) 합니다.
둘째 단원(6-8) 주의 얼굴을 들어 비취소서
둘째 단원은 기도로 되어 있는데 중심점은, “주의 얼굴을 들어 비취소서” 하는 간구에 있습니다.
④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6) 합니다. 이는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첫째로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는 것은 구원자를 찾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2:38절에서는,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선을 보일 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도,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하고 말했습니다.
㉡ 둘째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하는 의미입니다. 구속사에 있어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하는 말은, 본질적인 간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사 59:2) 하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신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점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휘장으로 막으라 하심에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 이런 맥락에서 시편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셀라)”(67:1) 하고, 얼굴을 비춰달라는 간구가 31;16, 80:3, 7, 19, 119:135절 등 여러 번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제사장들에게,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민 6:25) 하고, 축복하라 명하셨습니다. 이 간구가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셨을 때에,
㉮ 휘장이 찢어지고,
㉯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하심으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빛은 모든 인생들을 위한 것이기에 “나”가 아닌, “우리에게 비취소서” 하는 것입니다.
⑤ 그런데 7절은 복음의 빛에 비췸을 받은 각인이 누리게 될 축복을 말씀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 하고, 인칭(人稱)이 “우리에서, 나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 다윗은 “곤난 중”(1)에 처해있다 하면서,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욕되게 하겠느냐”(2) 하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하고, 기뻐할 수가 있단 말인가? 문맥적으로 보면,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한 것과 결부되어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구원의 복”을 받았기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 하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다시 강조합니다만 불신자들은, “곡식, 포도주의 풍성”으로 인하여 기뻐하지만 구원의 복을 받은 자들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⑥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8상) 합니다.
㉠ 3:5절에서는 “내가 누어 자고 깨었으니” 한 “아침”에 한 노래인데 4편에서는,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하는, 저녁 침상에 들기 전에 한 노래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마음에 임한 평강”을 나타냅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을 보면 3편에서는,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하여도”(6) 하고 말하고 4편에서는,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2) 하는 박해를 당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처럼 “평강”을 누릴 수가 있단 말인가?
㉡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8하) 한,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 1-4편이 어떻게 끝을 맺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1:6),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2:12),
㉰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3:8),
㉱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8하)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대적하지 말라”입니다.
적용 : 형제의 “마음에 두신 기쁨도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한” 기쁨입니까? 이런 맥락에서 현대교회가 시급히 회복해야할 요점은 축복이 아니라 “복음이요, 기쁨”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면서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묵상
㉠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의 구속사적 의미에 대해서,
㉡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의 평강에 대해서,
㉢ 구원 얻은 자가 누릴 기쁨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