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은 아버지 Fred 와 어머니 Julia 사이에서 태어났다(1940/10/9 리버풀 Woolton 출신 본명 Jhon Winton Lonnon). 아버지 프레드는 선원 이였는데 그는 결국 어린 레논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서 과중한 일과 자녀교육이라는 두 가지 일을 하게된 줄리아는 결국 존을 이모인 미미에게 맡겨, 존은 이모인 미미에게서 길러진다. 좋은 이모 미미는 존을 매우 엄격하게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공부보다는 그림이나 글짓기에 관심이 많았던 레논은 훗날 자신의 앨범 (Wall And Bridges)을 미리 그려놓는 실력을 발휘한다.
존이 음악에 심취하게 된 데에는 물론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하겠다. 당시 런던에는 클리프 리처드라는 맥빠지는 보컬리스트(?)-존이 보기에는 아마도 그랬나보다-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는데 허연 피부에 가냘픈 클리프 리처드에 비해 과격한 록큰롤을 불러댔던 엘비스에 존은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리라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퀴리멘이라는 밴드 명은 그가 다니던 학교 Quarry Bank Grammar 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영국사운드의 근간이 되었던 스키풀(Skiffle)을 따르기보다는 빌 헤일리나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는 이 밴드는 영국에서는 매우 이른 시기에 출발한 록큰롤 밴드로 기록된다.
57년 7월 6일 존은 폴을 만난다. 그것은 친구인 이반 본에 의해 교외의 울튼 축제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존은 폴의 연주를 보고 단번에 그가 맘에 들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팀을 이끌어 나가던 존과 폴 그리고 조지(조지는 57년 연말 만나게 되었으나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스페어신세를 지다가 58년 2월 정식 멤버가 된다) 는 그러나 해를 넘기며 생겨난 사건으로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뿐이 레논의 어머니 줄리아의 죽음이었다. 58년 7월 15일 자동차 사고였다.
존은 다니던 학교를 떠나 Liverpool College Of Art로 학교를 옮기게 되며 그 이유로 더욱 음악에 열중하게 된다. 밴드는 드러머를 열심히 찾았으나 존의 날카로운 성격에 부딪쳐 들락날락하던 무렵 베이스 스튜 서트클리프(Stuart Sutcliff)가 먼저 Bass 주자로 가입하게 된다. 스튜어트는 재능있는 화가이기도 했으며 멋쟁이였으나 베이스 실력은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59년 이들 퀴리멘은 그간 이름을 Rainbow, Moondag 등의 이름을 바꾼 후 실버 비틀즈로 이름을 바꾸었고 60년에 접어 들면서는 Johnny Gantle 이라는 가수의 보조밴드로 첫 스코틀랜드 순회공연을 가졌다. 이 당시 드러머는 Thoms Moore 였고 이들 실버 비틀즈 멤버들의 이름도 조니 실버, 폴 로망, 스튜드 스튜지, 칼 해리슨 등 가명으로 바꾸었다. 그 해 8월 드러머는 다시 Pate Best로 바뀌었는데 피트는 리버풀 Casbah 클럽의 주인인 베스트 여사의 아들이었다. 이 든든한 후원자 덕분에 이들 실버 비틀즈는 캐스바 클럽에서 오프닝 연주 그룹으로 출연하다가 얼마 후 고정적인 출연 계약을 맺게 된다. 당시 그들의 하룻밤에 15쉘링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본격적인 활동과 학교생활을 병행할 수 없었던 멤버는 이시기 모두 학교를 그만둔다.
피트의 가입이후 또 하나의 사건이 생기는데 특히 비틀즈에게 있어 중대한 디딤돌이 되는 연주여행을 떠나가게 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함부르크 공연이다.
1960/8/7-10/16
우선 이들에게 첫 함부르크 무대로 책정된 것은 Bruno Koschmider's Indra 클럽이었다. 이곳에서 비틀즈는 요란하고 난폭한 무대 연주로 팬들에게는 꼭 그들만큼의 열렬한 환호를,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곤란한 말썽을 몰아왔다. 그 한 예로 존과 피트가 이들이 묶어왔던 침침하고 낡은 숙소의 벽보에 불을 지르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후에 존은 여기에 덧붙여 자기들은 어느 술 취한 영국선원을 '발길질로 차 버렸다고'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이 벽보 방화사건으로 인해 존과 피트는 조지가 서독의 바가 클럽에서 규정하는 최하연령인 18세가 안되는 나이라고 해서 서독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리하여 이들은 리버풀로 돌아오게 되었다. 함부르크 공연을 마친 비틀즈는 많은 것은 배워왔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말이다. 함부르크 무대에서 8시간을 논스톱으로 공연했던 비틀즈에게 창작력과 활력을 듬뿍 일구어주었고 이들의 목소리 역시 과할 만큼 단련으로 인해 거친 에너지가 충만한 열정과 순수함으로 힘을 지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을 기다리는 펜들도 하나 둘씩 생겨났다. 이들은 무대를 넓혀 Litherland Town Hall의 고급무대에서도 등장했다. 그리고 다시 함부르크 공연을 할 당시 이들에게 변화가 생겨난다. 후일 비틀즈 룩이라고도 불리우는 독특한 머리스타일이 바로 그것이다. '버섯모양(Mushroom)커트'로 불려진 이 머리 모양은 당시 이들의 친구였던 여류 미용가 Astrid Kichherr의 영향 때문 이였다고 한다. 또한 존이 다니던 예술학교에서는 이와 비슷한 머리모양이 온통 유행했는데 그 이름은 '줄리어스 시이저'였다.
점점 프로다워진 비틀즈는 60년4월 토니 셔리던(Tony Sheriden)과 함께 폴리돌에서 첫 레코딩 작업을 하게 된다. 수록 곡은 모두 7곡인데 다음과 같다. My Bonnie, The Saint, Ain't She Sweet, Cry For A Shadow, If You Love Me Baby, Why, Nobody's Child 그러나 비틀즈 자신의 노래는 두 곡 뿐이었고 이때 제작된 Tell Me If You Can은 레코딩되었으나 미발표.
1961/4-7
두 번째 함부르크 공연에서 이들은 그들의 절친한 친구인 스튜어트는 그룹을 떠난다. 스튜어트는 함부르크에서 Astrid Kaiserkeller 와 그림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멤버들은 상의를 했고 그의 떠남을 받아들이기로 한다.(6월의 일이다) 그의 결심을 받아들인 비틀즈는 폴이 베이스를 맡게 된다. 스튜가 떠난 이후 함부르크에서 장기계약을 맺은 비틀즈는 78회전 레코드를 4장 만들게 된다. 수록 곡은 Viva, Summertime, September Song 등이다.
리버풀로 돌아온 4명의 악동들은 예의 시끌 법석한 음악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이며 소란스런 연주를 계속해 나간다.
한편 비틀즈가 세 번째 함부르크 공연을 가지기전에 한 남자가 Porth End Music Store라는 이름의 레코드점에 들어가 가게 주인인 브라이언(Brian Epstein)에게 비틀즈가 지난번 토니 셔리던의 배경연주를 해준 My Bonnie를 찾았다. 이에 리버풀 출신의 그룹이 사람을 모은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진 브라이언은 직접 그 인물을 보기 위해 캐스바 클럽에 가게 된다. (61/11/9)의 일이다.
어두컴컴한 공연장안에서 안간힘을 써가며 록큰롤을 불러대던 이들을 본 브라이언은 단번에 이들이 맘에 든다. 그리고 그들과 계약하고 존은 그 계약을 받아들인다. 이후 브라이언은 그의 짧은 인생은 비틀즈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사업가 브라이언의 활약은 이때부터 눈부시다. 62/1/1 이들을 브라이언의 활약으로 데카레코드에 오디션에 임하게 된다.
담당자는 Dick Rowe 였다. 그는 기타를 두 대나 들고 있는 이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실적이 좋지 않은 이유로 낙담한 브라이언은 이 세션 테이프를 런던 이곳 저곳에 뿌려댔다. 이때 녹음은 실버 비틀즈라는 이름이라는 타이틀로 발표되었다. 이레코드는 1970년 말에 Dacca Tapes라는 타이틀의 해적음반으로 15곡이 수록된 LP로 나왔던 것인데 그중 3곡(폴이 녹음을 허락하지 않은 Hello Little Girl, Love Of The Loved, Like Dreamers Do 등이었다.
비틀즈는 다시 함부르크로 떠난다. 이번에는 새로 개장된 스타클럽이었다. 이 당시 클럽의 주인의 말에 의하면 비틀즈는 이곳에서 일하며 돈이 없는 날에는 콘 프레이그만을 먹어댔고 월급날에나 스테이크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이 클럽에서는 술취한 선원들이 툭하면 곤봉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기 일쑤여서 덕분에 비틀즈는 앞으로 그들이 대 스타가 된 후 겪을 펜들의 난동에 미리 훈련기간을 겪은 셈이다.
62/4/13-6/3
함부르크의 일정을 마친 비틀즈는 6월6일 런던의 세인트 존스우드의 애비 로드 3번지의 스튜디오에서 팔로폰(Parlophone)의 프로듀서이며 편곡담당자인 조지 마틴(George Martin)에게 오디션을 받는다. 이때 비틀즈는 Love Me Do, Ask Me Why 등을 불렀다. 냉정한 조지 마틴은 크게 감동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긍정적으로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16일 피트가 비틀즈에서 해고당한다. 그러므로 피트의 연주의 마지막은 애비로드 세션이 된다. 무대에서 무뚝뚝했던 피트는 당시 소녀 팬이 가장 많았다. 그의 해고에는 수많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조지 마틴이 피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둘째는 멤버들간의 불화-이때부터 비틀즈의 불화는 불을 지폈는가?-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 하나는 Rory Storms & The Hurricanes시절 함부르크에서 비틀즈를 만나 그들의 78회전에 레코딩에 참여한 링고를 기용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어찌됐던 8월31일 링고는 턱수염을 깎고 정식 멤버가 된다.
62/9/4 일 : Love Me Do 와 P. S I Love You의 레코딩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레코딩이 마음에 들지 않은 9월11일 다시 레코딩이 진행되는 데 링고의 드럼실력이 의심스러웠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링고대신 Andy White를 드럼에 맡긴 후 레코딩을 시작했다. 링고는 탬버린을 흔들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17회를 거듭한 끝에 링고의 것이 선택되었다. 엔디의 것은 앤솔로우지에 들어있다. 10월 5일 발매된 싱글 러브 미 두는 차트 20위안에 진입한다. 그것은 물론 대부분 리버풀이나 서랭커셔지방의 펜이 사준 것이었다.
11월 이들은 People And Places라는 프로그램에 첫 출연한다. 이곳 저곳 연주여행으로 피곤했던 그들은 그런 와중에서도 새로운 음반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조지 마틴이 추천한 How Do You Do It을 거절하고 존과 폴의 곡 Please Please Me를 녹음한다. 몇 번의 공연을 본 것으로 마틴은 비틀즈가 무슨 곡이든 좋은 곡을 녹음하면 히트할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How Do You Do It를 권했으나 존과 폴은 자신들의 곡을 수록하고 싶어 조지를 설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싱글 Please Please Me가 발표되게 된다.
비틀즈는 계속해서 투어와 앨범작업을 계속하게 되는데 Helen Shapiro의 오프닝으로 영국공연을 하던 중 Please Please Me가 차트 1위를 차지한다. (이후로 발표되는 모든 싱글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한다.)
4월에는 다시 Form Me To You가 발매되고 6주간 연속 1위를 차지한다. 같은 달 역사적인 그들의 데뷔앨범 Please Please Me 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초기 비틀즈의 록큰롤 스타일이 무엇인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앨범으로 선진적인 미국의 록큰롤을 영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마하였는데가 보여주는 앨범이기도 한다. 이 앨범의 녹음시간은 불과 16시간이라고 하니 이들이 얼마나 이 당시 정열적인 활력으로 노래를 불러댔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록큰롤의 고전이 되 I Saw Her Standing There를 비롯해 조지 해리슨 특유의 가냘프고 내면적인 애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Do You Want To Know A Secret 활기찬 존의 음성이 빛을 발하는 Islet Brothers의 Twist and Shout(원래 이 곡은 연습 삼아 그들이 녹음했던 곡이었다.) 또한 이 곡은 후에 미국 공연시 오프닝 곡으로 사용되었다. 앨범이 발표되면서 이들의 인기는 이미 영국에서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버킹검궁에서도 이들의 공연을 원했다. 이들은 투어와 앨범 작업을 계속해 나가면서도 샘솟는 듯한 작곡능력을 바탕으로 She Loves You 등의 싱글을 발매하고 연달아 히트하게 된다. 특히 싱글 She Love You는 그들의 특이한 후렴구가 등장하는 곡으로 평론가들은 그것을 그리 반기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펜들은 환호성과 함께 합창하게 된다.
11월 29일 대망의 싱글 I Want To Hold Your Hand가 발표된다. 후일 미국진출의 교두보를 열게 될 이 싱글은 비틀즈가 얼마나 펜들이 기억하기 좋고 상업성도 함께 만족시킬 팝 싱글을 작곡해내는 재주가 능한가 평론가들에게 각인 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곡은 미국의 록큰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들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 곡이 가장 큰 의미는 무엇보다 역시 미국시장진출이었다 영국가수에게 굳게 문을 잠기었던 미국의 문이 이 리버풀 청년들에 무릎을 꿇게 되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I Want To Hold Your Hand 는 12월 차트 1위를 차지하게됨에 따라 비틀즈가 공연을 가지게 되는 공연 장에서는 광적인 비틀메니아가 비틀즈 멤버를 무대에서 끓어 내리거나, 사고로 다치지 않을 걱정하게 되었고 또한 비틀즈가 신은 신과 똑같은 상품을 만들어내어 최초로 비틀즈를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11월 이들은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가 발매되었다. 화려하고 촌스런 자켓들이 난무하던 당시 흑백자켓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전작을 능가하는 이 앨범은 초창기 비틀즈의 앨범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비틀즈는 작곡가로 조지 마틴은 프로듀서로 각자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준 이 앨범은 이제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조지의 첫 작품 Don't Bother Me를 필두로 생생하고 활기차면서도 섬세한 구성이 돋보이는 It Won't Be Long 을 위시해 존의 아주 빠른 기타반주를 배경으로 깐 All My Loving ,
우리 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초창기 비틀즈의 발라드 곡 Till There Was You와 이들의 음악적 뿌리를 보여주는 척 베리의 고전 Roll Over Beethoven과 스모키 로빈슨의 고전인 You Really Get A Hold On Me 후에 많은 사람을 통해 리메이크되는 Money등 세련된 14곡의 록큰롤이 실려있다. 이때부터 비틀즈는 슈퍼스타가 된다. 조지는 스페인 청바지 선전에 나가 몸매를 뽐내고 비틀즈 접시, 가방 온갖 잡다한 비틀즈의 상품이 만들어지고 비틀메니아가 벌떼처럼 항상 그들에게 몰려다녔다. 이 인기가 얼마나 갈 것 갔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존은 '5년쯤'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63년이 되었다. 2월 7일 이날은 All My Loving 와 P. S I Love You가 든 싱글이 미국에서 발매됨으로써 록큰롤 역사에 새로운 장이 다시 쓰여지게 되었다.
4명의 젊은이들은 미국으로 날아가는 날!!!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 그러나 이미 미국에서도 대스타였다. 공항에는 펜들의 아우성은 대단했던 것이다. 2월 9일 당시 최고의 인기프로였던 Ed Sullivan 쇼에 출연하게됐다. 대그룹의 탄생, 영구 팝 뮤직의 미국정복, 새로운 60년대의 청년문화의 시발점등 이 쇼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매우 크고 복잡한 것이다.
몇 일에 걸러 총 3회를 가진 이 쇼의 첫회는 CBS 스튜디오에서 녹화되어 7천3백만의 시청자를 2회에는 Dreavulle Hotel에서 열려 7천 5백만의 시청자를 각각 텔레비젼화면으로 끓어들였고, 3회는 2월말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방영했다. 미국시청자들은 이 새로운 영웅들이 보여준 신선함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기억을 남기게되었다. 여기에 다시 싱글 Can't Buy Me Love 가 등장하면서 비틀즈는 엘라 피치제럴드와 카운트 베이시스 같은 재즈계의 거성들까지 자신들의 곡을 부르게 해 팝계에 갑자기 나타난 인기인자리에서 벗어나 현대의 빼어난 작곡가로서의 위치로 성큼 옮겨갔다.
다음은 3월 31일 미국의 빌보드 챠트순위이다.
1위 Can't Buy My Love
2위 Twist And Shout
3위 She Loves You
4위 I Want To Hold Your Hand
5위 Please Please Me를 랭크 시키고 그 외에서 16위 44위 49위 78위 84위 88위가 모두 비틀즈의 곡이었다.
사실 비틀즈의 빌보드 차트기록은 대단한 것이었다. 비틀즈가 그래미에서 받았던 수모를 펜들에게 평가받았던 것이닌까? 뭐 그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 당시 그래미는 주로 재즈 보컬리스트나 올디스 가수들에게만 편파적으로 상을 주곤 했다. 록큰롤은 대세였으나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비틀즈의 앨범은 미국에서 각각 Meet The Beatles, The Beatles second Album, A Hard Day's Night로 영국과는 약간 다르게 나왔다. 이세장의 앨범은 1년 52주 동안 무려 32주 동안 1위를 고수했다.
역사적인 에디 설리번 공연을 뒤로하고 비틀즈는 금의환향한다. 영국의 자존심을 세운 비틀즈는 이제는 가수가 아니라 영웅이었으며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전과를 역사에 기록한 그들은 후에 받게되는 MBE훈장보다 더 위대한 명예를 영원히 록의 역사에 기록하게 된 셈이다.
3월부터 준비했던 영화 A Hard Day's Night 가 7월 발표됐다. 이 영화 사운드트랙은 비틀즈의 영화사운드 트랙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들의 영화 사운드트랙으로 훗날에도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된다.(그러나 실제로 비틀즈는 이 영화 사운드트랙이 못마땅하여 필름을 회수하기에 이르고 그것들을 소각해버린다. 비틀즈가 아니면 아무도 못할 일이었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한 것으로 스타가 된 비틀즈의 멤버가 너무 많은 스케줄에 쫓기어 다니는 해프닝을 그린 코미디 영화였다. 그들의 신선함에 열광했던 펜들은 서둘러 극장을 찾아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조지 해리슨은 페티 보이드(Patti Boyed)라는 모델과 만나게 되고 후일 결혼하게된다. 원작은 John Burke 감독은 Richard Lester였다. 음악을 물론 조지 마틴이 담당한다.
비틀즈를 한층 더 인기를 얻게 만든 이 영화는 오늘날의 영화 펜에게도 향수 어린 추억의 영화다.
8월부터 비틀즈는 미국과 캐나다 공연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비틀메니아는 거의 광적으로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쓰던 어떤 물건도 보배스런 그 무엇으로 간주되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공연장은 으레 눈물바다가 되었다. 멤버들은 지치기는 했지만 즐겁게 공연에 임했다. 게다가 그들이 이미 함부르크에서 충분한 투어 경험을 한바 있으니 말이다. 그 즈음 밥 딜런이 비틀즈에게 찾아왔다. 밤이 세는 줄도 모르고 잼을 즐겼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시기 밥은 비틀즈 멤버들에게 마리화나를 권했다고 한다.
11월 초창기 비틀즈의 앨범 중 아름다운 자켓으로 알려진 Beatles For Sale을 내놓았다. 척 베리의 고전 Rock Roll Music, 리틀 리처드의 록큰롤 Kansas City,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버디 홀리의 Words Of Love 등이 수록되어있는 이 앨범은 초창기 미국 록큰롤을 그들만의 스타일로 리메이크 해, 내놓은 음반이며, 그들을 사랑하는 펜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보답하는 답례의 의미를 가지는 앨범이다.
Till There Was You를 생각하게 만드는 I Follow The Sun은 그들의 후기 밸러드의 전범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만하다.
65년이 되었다.
새해 링고 스타는 Maureen Cox와 결혼해서 존 이후 두 번째로 기혼 멤버가 되었다. 스키풀 즉 머지 비트의 괴도를 달리고 있던 영국의 록은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록큰롤 스타의 사고로 멈칫한다. 게다가 모드 족의 등장은 음악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 런던의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블루스에 심취한 젊은이들이 비틀즈를 꿈꾸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65년 4월 비틀즈의 새로운 싱글 Ticket To Ride가 발표된다. 비틀즈의 보다 성숙한 사운드가 대두 되다고 해서 이 앨범을 출발로 중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즈음 비틀즈에게 왕실의 훈장이 수여된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MBE(Member Of British Empire)훈장을 받는 것과 동시에 비틀즈는 다시금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 세계대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받았던 왕실의 훈장을 시끌법썩한 록큰롤밴드가 받는다는 걸 많은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버킹검궁으로 몰려가 자신들이 받은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소릴 질러댔다. 물론 이 사실은 멤버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훈장을 줘야 한다고 비틀즈를 추천한 사람은 해럴드 월슨수상이였는데 노동당 출신이었던 그는 훈장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당을 탈퇴하라'는 노동당 지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65/6/12 말도 많고 탓도 많았던 훈장수상이 결정된다.
7/29 일 비틀즈의 또 다른 영화 Help가 왕실주최로 시사회를 갖게 된다. 비틀즈의 두 번째 영화이자 사운드트랙이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은 미국 라디오 방송사상 최고의 리퀘스트를 받았다는 Yesterday가 수록되어있는 앨범이지만 앨범자체로는 그리 크게 평가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비틀즈라는 이름만으로 앨범의 싱글 커트곡은 무리 없이 차트에 오르고, 수록곡 You're Gonna Lose That Girl은 넘버원을 기록한다.
8월 비틀즈는 다시 미국 순회공연을 갖게 된다. 같은 달 15에 있었던 Shea Stadium에서 있었던 공연은 당시 수익으로는 천문학적이었던 30만 4천 달러의 수익을 남기고 공연관중은 무려 5만 5천명을 기록한다. 본 공연은 비틀즈의 공연 사상 최고의 공연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브레이언 엡스타인은 인터뷰를 통해 비틀즈는 엘비스보다 더 대단해 질 거라고 큰소리 쳤다. 같은 해 27일 비틀즈는 비버리힐즈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방문해서 세션을 즐겼다고 한다. 두 사람이 서로의 곡을 신나게 불러 재꼈다니 정말 이런 테이프라도 있으면 돈방석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9월 런던의 어떤 잡지에는 이런 여론조사를 발표한다. '영국인 중 100중 99명은 비틀즈를 알아 볼 수 있다'
10/26 드디어 MBE 훈장을 버킹엄궁에서 수여 받는다.
12월에는 Rubber Soul이 발매되었다. 비틀즈의 역사가 다시금 바뀌게 되는 이 앨범은 그들이 밥 딜런과 친분을 맺기 시작하면서, 가지게 되는 사회적인 관심과 의식 인도 등의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가지면서 진짜 밴드다운 밴드가 되기 시작한다. 또한 그들이 공연을 통해 보여줬던 신선한 이미지와 작별하는 앨범이기도하다. 앨범의 이름 러버 소울은 리듬&블루스의 변형된 이름 소울에서 따온 것을 폴이 직접 골랐다고 한다. 아내 신시아와 사랑을 그렸던 Norwegian Wood에는 조지 해리슨의 시타 솜씨가 빛을 발하고, 조지 마틴의 오르간 솜씨를 감상할 수 있는 트랙 In My Life 이듬해 오랜만에 그래미에서 최우수 작곡상을 거머쥐게 해준 Michelle등 어느 곡하나 빠트릴 수 없는 이 앨범은 그러나 싱글발표는 하지 않았던 앨범이다.
12월 3일부터 비틀즈는 자신들도 예기치 못한 마지막 영국공연을 Moody Blues와 함께 가지게 된다. 12월 8일 존은 런던의 신문 이브닝 스탠더드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매력 있는 12명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다시 66년이 되었다. 조지 해리슨은 드디어 페티 보이드와 결혼을 하게된다.(1/16) 3월초에는 예스터데이가 싱글로 발표되고(2위 까지 올랐다) 나오는 레코드마다 히트기록을 깨고 모든 콘서트는 초만원을 기록한 비틀즈의 유명세는 66/3/4일 하나의 사건으로 시련을 맞게 된다. "Are More Popular Then Jesus Now" 라는 이 한마디는 비틀즈가 이루어 놓은 많은 것들을 다시금 원점으로 돌려놓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비틀즈의 유명세만큼이나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전세계에서 비틀즈 앨범 불매운동과 화형식을 거행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한다. (이브닝 스탠드지의 모린 클립스와의 인터뷰에서 8월부터 시작된 순회공연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존은 시카고에서 해명 기자회견을 한다(8/12) 아마도 이 사건을 계기로 그들의 실질적인 공연의지가 꺾였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5/1에는 NME지의 인기투표에서 1위에 꼽히는 비틀즈가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연주장면을 보여주게 된다.
6/10 에는 하모니가 들을 만한 Paperback Writer발표된다. 6월 7월에는 지역 순회공연을 그리고 8월에는 1년만에 다시금 미국공연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공연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6개월만에 다시금 앨범 Revolver이 발표됐다. 이 앨범을 통해 비틀즈는 순수한 스튜디오 밴드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Edward Heath, Harold Wilson와 같은 경제입안자를 비꼰 Taxman이라던지 힌두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한 Love You To에서는 타블로나 시타 연주가 새롭게 삽입되기도 한다. 당시 타블로나 시타는 조지가 직접 Ravishankar에게 직접 사사 받은 것이다. 이런 새로운 사상의 유입이야말로 비틀즈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존은 She Said She Said를 통해 피터 폰다와의 추억을 환각적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실제 비틀즈가 당시 LSD를 복용했다는 것은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폴이 작곡에 개안하게 됐다고 후일 밝힌 Eleanor Rigby와 아름다운 곡 Here There And Everywhere이나 소울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곡 Got To Get You into My Life도 앨범에 수록되어있다 . 화려한 앨범자켓도 볼거리였으며 앨범은 9주동안 차트 넘버원 고수한다.
9월 들어 존은 How I Won The War에 출연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깎았다. 그리고 조지는 아내 페티와 함께 봄베이에 방문해 인도 문화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12월에는 다시 앨범 SGT Pepper's를 위한 연주 작업에 들어간다. 리벌버의 성공 탓이었는지 앨범자켓은 더 화려해졌으며(자켓을 만드는데 무려 4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부터 에드가 엘런 포우까지 그들이 뛰어넘고자 했던 현실을 보여주는 예술이었다. 9달 동안 4트랙 테이프 기기에 녹음되어 들어간 다양한 청각적 메시지는 전세계의 젊은이의 반향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난 비틀즈는 6/25일 싱글 All You Need Is Love를 Our Love라는 프로그램에서 위성을 통해 전세계로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1억 5천만 명이 봤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장면에서 비틀즈의 이상이 히피와 그들에게 공감하는 전세계의 젊은이를 사로잡았으며 평화의 송가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8월 8일 조지는 샌프란스코 히피들의 거주자인 하이트 애쉬버리 지방에 나타나 히피들과 노래한다.
위대한 아티스트로 다시 대성공을 거둔 비틀즈에게 다시 찾아온 시련은 그 강도에서 이전의 예수사건(?)더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다 . 피학대 음란증 동성 연애자(Masochistic Homosexual)이였으며 비틀즈의 멤버 특히 존을 성적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 브레이언이 마약과용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정확한 사망원인은 LSD과용이었다.
성공한 매니저의 죽음은 일단 두 가지 측면에서 받아들여진다. 일단 비틀즈와 관련한 갖가지 예측들이 있다. 비틀즈를 키운(그는 비틀즈를 만든 것과 같은 노고를 인정받았다)그는 비틀즈가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는데 두려움을 느꼈고 계약을 파기할까 전전긍긍한 나머지 자살을 하려고 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스트레스니 마약에 손을 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닐까?. 또 한가지는 고독과 초조함 때문이라는 설인데 66년 브라이언은 비틀즈가 순회공연을 중단하며 스튜디오에서 틀어박히자 막상 할 일이 없어 졌고 그로 인해 무료함과 외로움에 한층 더 시달리게 되는데 그 시기 에니멀즈의 리더였던 에릭 버든을 만나게된다. 동성연애자인 브라이언은 당연히 그에게 접근을 하게 되는데 보기 좋게 퇴짜를 맞는다. 이때 브라이언은 너무나 괴로워서 마약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Walls에서 요가를 즐기던 비틀즈의 멤버들은 브라이언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의 비틀즈의 공로가 누구보다도 브라이언의 덕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통해 브라이언의 죽음을 들은 폴은 그 자리에서 울부짖었다니 그 충격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하루아침에 사령관을 잃고 오합지졸이 된 셈이다. 후일 존은 이렇게 그 당시를 회고한다.
"우리는 그 시기 정말 좌절했다. 우리는 그로 인해 깨질 것을 느꼈다. 이 사건은 우리를 허물어트렸다"라고 말이다.
브라이언이 죽음으로써 비틀즈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사실 브라이언은 팀내의 흔히 생기는 안력이나 마찰을 잘 해결해 왔으며 그로 인해 멤버들은 개인보다는 비틀즈 전체를 위해 뭉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 이시기 존의 실의는 매우 컸던 모양이다. 팀을 리드했던 존의 주춤할 무렵 폴은 주도권을 잡고 새로운 앨범 Magical Mystory Tour를 완성한다. 크리스마스를 즈음해서 만들어진 이 텔레비젼 영화는 놀랍게도 70%라는 시청률을 기록하지만 그것은 비틀즈라는 이름을 달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시기부터 비틀즈의 단결을 뻐그러지고 신뢰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비틀즈의 해산 이야기를 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이제 브라이언이 죽음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해체의 중요한 단서하나를 잡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서는 바로 폴이 추진을 계획하던 애플의 등장이 또 하나의 단서이다.
68년이 되었다. 뜨거운 태양과 함께 샌프란스코를 자극하던 사이키델릭과 몬토레이 페스티벌등 대통령선거 등등 수많은 사건들이 교차한 그 해 비틀즈는 애플리라는 레코드 설립을 발표한다.
1월중 조지는 Wander Wall이라는 영화음악 담당자로 봄베이로 다시 가고 존과 폴은 미아 패로우와 포크 가수 도노반 등과 마하리쉬 요기의 애시람(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런데 마하리쉬 가 갑자기 미아 패로우에게 이성적으로 접근하게 되면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마는데 그때의 감정은 화이트 앨범에서 Sexy Sadie라는 곡에서 표현한다.
2/24 후일 말썽을 불러일으키는 애플의 설립을 발표한다. 존은 이 자리에서 "애플은 영화, 레코드, 일레트로닉스 등의 공동체로 비틀즈가 원할 때 원하는 자를 공급하고 재능있는 젊은이에게는 평등하게 기회를 주기 위한 회사"라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5/4일 그러한 취지에 맞는 첫 번째 가수로 마리 홉킨이 애플을 통해 데뷔한다.
이런 저런 일에 휘말렸던 비틀즈는 이시기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게 되었으며, 이시기 마돈나가 누구냐는 화제를 불러일으킨 Lady Madonna를 발표하고 그 해 8월 오랫동안 사귀었던 폴의 애인 Jane Asher와 폴은 파경을 맞는다. 폴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그는 And I Love Her, I'm Looking Through You 등을 그녀를 위해 만들었다)와 헤어지게 된 것은 새로운 연인 린다 에스트만(Linda Eastman)때문이었다. 한 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활동적인 캐리어우먼으로 매우 생동감 넘치는 사진 작업을 많이 해왔는데 주로 도어즈, 러브 같은 로스앤젤리스 밴드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녀와 폴은 물론 사진 작업을 하다가 눈이 맞았다. 물론 팬들은 그들의 새로운 애정관계를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껏 잘 이루어진 것을 보면 정말 그들은 천생연분인 듯.
같은 해 10월 존은 오노 요코를 만난다. 런던 Indica 화랑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사과에 못을 박으시오'라는 작품에 공통된 의견을 얘기하다가 친분을 맺게 되는데 '상상으로 못을 박으면 안 되냐는 레논의 질문 때문에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존은 이전의 부인 신시아와 결별하게 된다.
근 11달만에 비틀즈의 The Beatles가 발표된다.
시종 오노 요코가 존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해서 볼쌍 사나웠다는 뒷 얘기(그러나 요코는 자신이 그때 존과 있었음으로 화이트앨범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만약 그녀가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존은 녹음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가 있는 이 앨범은 브라이언의 죽음과 애플의 설립 그리고 연인들과의 이별등 지지부진한 그들의 볼쌍 사나웠던 뒷얘기들을 생각해보아도 정말 아름다운 앨범이었다. 폴의 탁월한 작곡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일련의 곡 Back In The USSR, Martha My Dear, Blackbird 존이 우상타파와 정치색을 노골적으로 Glass Onion, Sexy Sadie, Revolution 그의 죽음을 예견케 한 Happiness Is A Warm Gun 조지가 에릭 클립톤의 도움으로 완성한 명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등 한곡 한곡 개개인의 개성을 들어낸 명반이었다.
이 앨범은 흔히 비틀즈의 앨범 중 최고작으로 평가 받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 앨범의 단점은 역시 비틀즈의 화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브라이언의 죽음으로써 비틀즈의 화합이 얼마나 깨졌는가 보여주는 것이다. 앨범은 싱글 컷트없이 연말부터 연초까지 차트 1위를 고수하지만 그러나 앨범에 쏟아지는 찬사를 뒤로 하고 비틀즈의 고성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애플 사업단의 수입금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런 와중에 멤버 모두가 함께 한 비틀즈의 모습을 보기는 점점 더 어려워만 갔다.
저물어가 68년 11월 29일 존과 요코의 첫 작품 Two Virgins 이 공개된다. 나체로 카메라 앞에선 두 사람은 표정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이 앨범은 그 악의 파격과 함께 제시된 앨범의 자켓의 선정성 여부 때문에 논란이 끊이지 않고 또한 판매금지의 불운을 겪지만 곧 적당한 모자이크를 쒸어 판매된다. 어찌됐든 말문이 막혀버리는 이 앨범 요코의 종잡을 수 없는 피아노와 효과음들로 얼룩져 사람들을 당황케하기 충분했는데 존과 요코의 첫 작품이라는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12월 앨범 Yellow Submarine이 발표된다. 앨범 전면에 실린 6곡은 이미 싱글로 발표되거나 했던 비틀즈의 곡이며 뒤에는 조지 마틴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이 음반은 비틀즈를 만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동명의 영화 배경음악이었다. 타이틀 곡은 영화를 좋아하는 링고 스타의 Revolver 수록곡이다.
69년 비틀즈는 마지막 앨범이 되는 Let It Be 녹음을 시작한다. 그들의 역사의 묘비명이 되는 이 앨범은 Twickenham 스튜디오에서 시작되며 1월 30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감행된 애플 사옥 옥상에서의 라이브 연주 끝 곡은 Get Back은 경찰들의 저지를 받아가면서까지 녹음되었다. 초창기의 비틀즈의 록큰롤을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깬 Get Back은 역시 차트 1위를 차지한다.
2월 3일 경영난- 그것은 비틀즈의 무지로부터 온 것-을 이유로 애플의 경영권을 Allen Klein 이라는 전문 경영인에게 넘기게 된다. 그리고 4일 역시 전문 경영법률가 Eastman & Eastman팀이 일반 고문으로 위임되어 애플의 일에 참여한다. 이로써 애플의 경영은 두 쪽이 나는 셈인데, 이 일로 인한 의견차이로 멤버들간에 다툼이 일어난다. 처음 비틀즈는 엘런에게 경영권을 넘기려 했는데 폴 메카트니는 자신의 부인 린다의 집안인 이스트만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애플은 점점 더 비틀즈의 의도와 달라지고 그로 인해 각 멤버의 의견차이는 더욱 심화되어 지게 되는 것이다. 2월 배드핑거(Badfiger)가 애플을 통해 데뷔한다. 애플을 통해 비틀즈 말고는 가장 성공한 배드핑거는 가장 비틀즈다운 색채가 강한 이기에 비틀즈의 아류로 평가되는데 주로 앨범에 폴이 참여하고 영화사운드 트랙인 The Magic Christian에는 역시 영화광인 링고가 출연하다.
3/21 폴이 린다와 결혼하게 됐다. 폴과 제인의 파경에 대한 메스컴과 팬들의 비난 탓일까 아님 비틀즈의 우울한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그들의 결혼식은 조촐했으며 슈베르트 이후 최고의 작곡가로 평가받았던 폭은 턱시도도 있지 않은 채 였고 린다 역시 웨딩드레스조차 갖추지 않았다.
3/13 조지와 그의 아내 페티는 마약 소지 혐의로 Esher에서 체포되어 5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 받는다 20일 존은 아내 요코와 결혼하다. Rock Of Gibraltar에서 열어진 이들의 결혼은 비틀즈의 해산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탓인지 요코는 마녀의 이미지를 가지고 평생 살게 됐다. 결혼과 함께 힐튼 호텔 객실 침대에서 행해진 유명한 평화시위는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가 일치되어있는 모습을 보여준 예로 추억된다.
5월 존과 요코의 두 번째 앨범 Unfinished Music No 21 Life With The Lions가 발매되었다. 전작보다는 진전을 보여주는 이 앨범은 Cambridge 1969라는 대 곡을 담고 있다. 유명재즈 뮤지션들과 이미 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전신을 보여주는 이 앨범은 후일 진보적인 존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도 된다.
9월 발매된 앨범 Abby Road 는 역시 비틀즈의 최고의 앨범으로 기록된다. 비틀즈의 마지막 녹음이기도 한 이 앨범은 필 스펙터의 참여와 컨셉트 형식, 백워드 메스킹 등 모든면에서 그들의 위상에 하나도 손색이 없는 최후의 앨범이다. 그러나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비틀즈의 해산설이 나돌게된다. 폴은 업친데 겹친격으로 사망설이 터지고 (그것은 앨범 자켓중 폴이 맨발로 나온 것이 이태리 장례풍습이라는 얘기 때문이다)
역시 같은 9월 존은 요코와 에릭 클립톤 클라우스 부버맨 등과 함께 토론토에서 공연을 갖고 앨범도 제작하는데 이때부터 존은 비틀즈의 활동을 거의 포기하다 시피하고 솔로로써 열심이었다.
1970년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던 해
존은 전시회를 가졌다. 외설물의 전시라는 이유로 런던은 떠들썩했다. 그리고 4월 10일 폴은 인터뷰를 통해 비틀즈를 탈퇴할 것은 선언했고, 비틀즈는 해체되고 만다.
각 신문은 이 역사적인 종말을 대서특필했고, 그 사실을 접한 팬들 중 6명이 아쉬움의 표시로 자살을 한다. 17일 폴의 첫 솔로 앨범 Macartney가 발표됐다. 조용하고 담담한 앨범이었다. 이번엔 린다에게 The Loverly Linda를 헌사했다.
5월 8일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Let It Be가 발표됐다. 15개월이라는 긴 제작 기간을 거쳐나온 이 앨범의 타이틀은 원래는 Get Back이였으나 Let It Be로 발표되었으며 타이틀 곡은 폴의 철학이 담긴 솔로 곡이었다.
75년 비틀즈가 법률적인 문제를 매듭짓는데 까지 많은 반목과 유대를 가지게 되고 80년 존 레논의 총에 맞아 숨짐으로써 끊임없이 논의되었던 재결합사실이 불가능해지면서 비틀즈는 역사 속의 그룹으로만 생각되어져 왔다.
폴은 꾸준한 음반활동을 통해 인기를 모았고, 존은 요코와 결합해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 냈으며, 조지는 방글라데시 기아 공연을 비롯한 평화의 전도사로 링고는 영화와 음악을 오가며 자신의 꿈을 펼쳤다.
95년 그러니까 비틀즈가 실질적으로 해체된지 25년만에 비틀즈의 새로운 공식 음반이 발매됐다. 1000시간이 넘는 비틀즈의 미공개된 EMI 녹음기록 중 선별되어 수록된 앤솔로우지 이 앨범에는 존 레논 생전의 목소리에 남은 비틀즈 멤버들이 반주와 화음을 넣은 신곡이 수록되어있다. 비틀즈의 다큐멘터리가 새롭게 제작되고 브릿팝이라는 영국의 신진 밴드들은 비틀즈의 음악 심지어는 그들의 모습까지 흉내를 내고 있다.
아마도 비틀즈의 다른 모습을 보기는 당분간은 어려운 일일 듯하다. 엘비스 프리슬리와의 잼이나 밥 딜런과의 잼이 발매된다면 모를까? 그러나 비틀즈는 살아있는 그룹이다. 그들의 음악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한 영원히 살아 있는 그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