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상향 불국토 부탄 4
탕구사원의 전경
(1997년 8월호)
김형근( 편집인)
우리가 히말리리야 산맥의 숨겨진 나라 부탄에 와 이틀밤을 지냈다. 나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호텔밖으로 나가 보았다. 새벽에 막 깨어난 부탄의 수도 팀푸는 평화롭고 엷은 물기를 머금은 모습이 한국의 어느 조용한 산골 도시 같았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부탄의 유서깊은 사찰들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부탄의 북서부인 팀푸와 파로만을 둘러보았는데 남부의 붐탕과 동부의 푸나케아를 다녀올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 겨울동안은 왕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승려들이 푸나카에서 수행하며 여름이면 다시 팀푸로 돌아온다고 한다. 푸나카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가보고 싶었으나 지금은 스님들이 기도중이라 스님들을 뵐 수가 없을 것이라는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일정에서 제외하였다.
쵸 템
우리는 부탄 외무부 특별 커미셔너인 왕척씨가 추천한대로 체리사원과 탕구사원을 방문하였다. 이 사찰들은 팀푸에서 차로 산길을 따라 평균시속 25-30마일 속도로 1시간쯤 걸리는 곳의 산 봉우리에 있었다. 이날은 가랑비가 약간씩 뿌리고 있었는데 왕의 어머니인 대비마마가 사는 궁궐을 지나자 갑자기 군인들의 훈련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군인들은 대략 500~600명 정도쯤 되어 보였다. 이들은 왕족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라고 한다.
체리사원입구-체리사원 스님들이 탕구사원으로 가기 전 필자와 함께
체리사원 입구에 도달하니 ‘쵸템’들이 눈에 띄었다. 쵸템은 부탄의 마을이나 사원근처등 부탄의 어느곳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이 안에는 진흙이 있을 뿐인데 부탄사람들은 마음이 내키면 쵸템을 빙빙돌면서 기도를 한다고 했다. 전남 보성의 대원사 현장스님에 의하면 일본 고야산과 중국 북경에 있는 용화궁, 중국 오대산 등에도 이와 똑 같은 탑들을 볼 수 있는데 밀교와 진언종 계통에서는 돌아가신 큰스님들의 묘탑으로 산용하기도 하며 중국에서는 벽이 하얗기 때문에 백탑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탕구사원 입구에서 주지스님을 기다리는 스님들
푸나카에서 돌아오는 탕구사원 주지스님
체리사원 밑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약 1시간에 걸쳐 산으로 올라가니 체리 사원에 도달하였다. 올라가는 도중에 스님들을 만났는데 쌀을 볶은 것 등 먹을 것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스님들이 반은 되었다. 우리 일행이 막 도달하여 사원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사원에서 스님들이 말을 끌고 나왔다. 오늘 이웃절인 탕구의 주지스님이 푸나카에서 돌아오는데 환영식에 참석하러 간다고 하였다.
체리의 정식 영어 명칭은 ‘Karchung Meditation Institute Center’인데 부탄에서는 최초로 지어진 명상센터이다. 1696년 티벳에서 온 ‘샴드룽 냐왕 남갈’이라는 라마께서 이 체리의 석굴에서 3년 45일간 명상, 기도한 뒤에 부탄과 이 사찰을 동시에 세웠다고 한다. 그 이래로 부탄의 종정은 이 사원에서 임명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중국역사에서 보면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를 물리치고 한족으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황각사(皇覺寺)의 법해(法海)라는 법명으로 오랫동안 승려생활을 한 분인데 부탄도 스님이 세운 나라인 것이다.
이 절에 계시는 스님의 친절한 안내로 여러 법당들을 참배하고 히말라야산 구름이 발 아래로 보이는 법당으로 안내되었다. 법당 벽의 한면은 지하석굴 입구인데 이 지하석국은 ‘샵드롱 라마’가 기도하던 바로 그 동굴이라고 하였다. 이 동굴을 한 벽으로 하여 이 법당을 지은 것이다. ‘샵드롱 라마’가 이곳에서 명상을 하는 동안 모든 마군을 항복시켜 마군들이 이 동굴을 라마께 바쳤다. ‘샵드롱 라마’는 세수 58세로 입적하였는데 그의 유물, 책 등은 이 절에 보관되어있고 그의 유해는 푸나카의 사원에 보존되어 있다. 이 동굴로 통하는 입구는 제단처럼 되어있고, 석굴의 지하실에는 부탄과 부탄불교를 수호하는 불보살님들이 계시는데 이 지하석굴에는 왕과 국사(우리나라 종정), 현재 우리는 안내하는 법당을 지키는 스님 세명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고 한다. 왕실에서 이 절에 올때에도 (정기적으로 1년 중 부탄력으로 셋째달 8, 9, 10일에 3일간 샵드룽라마의 제사를 지내러 온다.) 가족들은 아래ㅉ고의 요사채에 머물고 왕만 혼자 이 법당에서 기거하며 기도한다. 이곳은 매우 신성시 되는 곳으로 취재하러 온 사람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한다. 불단은 물론이고 법당에서 일체의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는데 필자가 이 뜻깊은 법당에서 108배를 하는 장면만은 촬영이 허가 되었다. 우리를 안내한 스님도 자신도 3년, 7년 등의 기간을 두고 동굴에서 수행하였다고 하는데 다행이도 이 스님이 영어를 잘하여 사원과 부탄불교역사에 대하여 설명을 잘해주었다. 체리사원 주위에 암사들이 있었는데 한결같이 절벽에 세워져 있었다. 이 사원에는 60분의 스님이 상주하는데 주지스님 ‘젯순 텐진 돈드럽’을 비롯한 15명은 암자나 동굴에서 기도정진중이라고 한다. 암자에 들어가서 기도중일때는 일체의 바깥출입과 면회가 금지된다고 한다.
부탄 현재 국왕은 4대인데 비하여 국사는 70대이고 체리사원의 주지스님은 68대 국사를 지낸 분이라고 한다.
이 스님에 의하면 불교는 크게 마하야나, 히나야나, 버즈라야나 로 구분하는데 체리사원은 버즈라야나로 수행을 하는데 기본적인 수행이 되어있는 지혜있는 사람에게는 이 방법이 깨달음을 이루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했다. 최상승 또는 금강승이라고 번역되는 이 수행법은 현생에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성의 대원사 현장스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신라때 혜통스님이 중국의 선무외(善無畏)스님으로부터 법을 받아왔다. 선무외스님은 인도 烏 茶國의 왕이었으나 출가한 분으로 중국에 순수밀교를 전한 최초의 사람이다. 티벳에서는 1,000년 이상 밀교를 발전시켰으나 중국에서는 법난을 당하면서 약해졌고 일본은 고야산에 이런 종단이 있으며 대만에서는 동밀은 일본밀교, 장밀은 계종을 비롯한 각종단에 이 수행법이 흡수되었으나 최근에 총지종이 이 수행법을 계승하면서 창종되었다.
우리는 친절하게 안내해준 스님들에게 가지고 간 선물중에서 북인도와 티벳의 풍경으로 서울 구룡사에서 만든 탁상용 달력을 주었더니 아주 좋아하였다.
탕구사원은 체리사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다른 산의 봉우리에 있었으므로 체리에서 내려와 다시 1시간 가량 산길을 올라가야 했다.
우리가 방문하는 날은 이 사원의 주지스님이 장관급의 지위로 승진하여 푸나카에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날이었다. 부탄은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한국의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정도의 방장스님급이면 국가에서 장관급의 대우를 해준다고 한다. 탕구사원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진흙길인데 중턱부터는 길 양옆에 울긋불긋한 천과 꽃잎으로 장식하고 길 위에는 솔잎으로 땅을 덮고 그 위에 동백꽃 같이 생긴(에토미토라는 부탄의 국화) 붉은 꽃을 뿌려 놓았다. 그리고 절 가까이에 와서는 솔잎 양탄자 위에 스님들이 흰 가루로 법륜, 별문양 등을 그려 장식했다. 다른 것은 다 제처두고라도 이 긴 길을 손길로 단장한 이 정성이 부탄의 신심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탕구사원모습
절 안에 들어서니 스님들은 주지스님 승진 환영준비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탕구사원 스님들 뿐만 아니라 이 근처 사원의 많은 스님들이 왔다고 한다. 사원의 벽들은 탱화로 꾸며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신도들이 8~9명 앉아 있었고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신도들 맞은편에 앉았더니 스님들이 직접 주스, 법륜, 별 모양으로 튀겨낸 밀가루 튀김과자 쌀볶음 차, 부탄고유음식 등을 대접해 주었는데 그 태도에는 정성이 가득했다. 부탄의 스님들은 우리가 절이나 합장을 하면 스님들도 수줍지만 우호적으로 합장이나 절을 했는데 부탄스님들의 소박한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반 이상의 스님들이 험한 부탄의 산길을 아직도 맨발로 다니고 있다.) 나에게 가장 기뻤던 일은 많은 수의 스님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주지스님을 환영하느라 지붕위에 기다랗고 짧은 나팔들과 여러가지 악기들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이 악기들은 사진에서만 보았던 것으로 한국에는 물론 없는 것이다.
주지스님이 사원으로 올라오는 행렬 또한 장관이었다. 이미 많은 주민들이 환영나와 있었는데 말을 탄 라마가 파란 모자를 쓰고 주장자를 들고 맨앞에 오면 나머지 수십명의 일행은 걸어서 뒤를 따랐다. 이중 몇 명은 비디오촬영기와 핸드폰을 지니고 있었다. 환영인파는 꽃가마를 태운 연기를 계속 피워서 그 환영의 분위기를 더했고 절의 지붕에서는 스님들이 계속 음악을 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