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계에 널리 자랑하여 민족적 역량을 과시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금속활자가 아닌가 합니다.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지는 고금상정예문(상정고금예문)은 1234년에 제작된 책으로 서양의 구텐베르크 보다 200여년이 넘게 앞서고,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도 구텐베르크의 그것보다 88년이 빠릅니다.
해서 과거 우리나라 사학이 일제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에 의해 침체되었던 시절에, 이를 극복하고 민족적인 주체성을 드높이고자 금속활자라는 소재는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한국의 역사교육을 비롯한 대중적인 여러면, 학술면에 있어서 무한한 민족적 자존심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면에 가리어 우리는 한국의 금속활자의 이면과, 그에 대한 고찰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기회가 있을때마다 '부끄러운 歷史'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려, 과거 우리가 찬란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감춰진 부끄러운 면을 들춰내어, 우리의 자존심에 가린 허위적인 면을 여러분과 함께 반성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이런 것들을 다시 한번 평가해보고자 합니다.
금속활자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쓰지 않겠습니다. 강명관 씨가 쓰신 《조선의 뒷골목 풍경》이라는 책의 서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세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므로 구태여 제가 글을 다시 쓰는 필요가 없이, 이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제가 여러분께 하고자 하는 말을 표현할까 합니다. 덧붙여 6차 국사교과서 상권 관련부분도 소개합니다. 7차를 소개할 수도 있지만 제가 7차를 현재 소지하고 있지 못하고, 두 권의 내용은 사실상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봐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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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뒷골목 풍경》서문 中...
.. 먼저 금속활자로 물꼬를 터보자. 뜬금없이 웬 금속활자인가 하고 의아할 텐데, 사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의 예로 들겠다는 말이다. 금속활자가 세계에 자랑할 민족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 우리 의식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누가 부인하겠는가. 매스컴에서는 행여 그 각인이 마모될까 끊임없이 덧새겨준다. 금속활자는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신성한 표징이 되었다.
나는 이 표징을 오랜 세월 믿어왔다. 그런데 최근 그 표징에 약간의 의문을 표하게 되었다. 문득 세계 최초라는 점 외에 고려의 금속활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뭇 놀랐다. 따지고 보면 미심쩍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금속활자가 세계적 문화유산이라고 자랑하는 근거는 단 하나다. 실물이 남아있는 《직지심경(直指心經)》(1377)을 증거로 삼더라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보다 88년을 앞서 발명되었다는 사실이다(1455년 인쇄된 구텐베르크 42행 라틴어 성경을 기준으로 삼았다). 한국 금속활자의 중요성은 구텐베르크 활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 활자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금속은 마모되지 않는다. 마모되지 않는 활자에 부가된 가동성(可動性), 이것으로 인해 책의 대량인쇄, 곧 지식의 무한 복제가 가능해짐으로써 소수에 의한 지식 독점이 해체되고 지식의 보편화가 시작된 것이다. 영국 BBC 방송국에서 지난 밀레니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역사 인물 1백 명을 선정했을 때 구텐베르크가 1위를 차지한 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 한국의 금속활자는 어떠한가.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고금상정예문(告今詳定禮文)》은 불과 28부를 찍었을 뿐이다. 세종 때에 만들어진 금속활자 인쇄물은 보통 수십 부, 많이 찍으면 2~3백 부였다. 대량인쇄가 필요한 경우, 금속활자 인쇄가 아닌 목판인쇄를 선택하였다. 조선조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 활자와는 달리 애시당초 대량인쇄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조의 금속활자 인쇄는 속도가 빠르지도 않았다. 세종 때 한번 개량되었다고는 하지만, 조판·인쇄는 여전히 수작업에 의지하였다. 활자판에 먹을 칠하고 그 위에 종이를 얹어 솜망치로 두드린 뒤 한 장씩 떼어내는 방식은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에 반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포도주 압착기를 사용한 반기계식이었다. 어느 쪽이 인쇄 속도가 빠르며, 대량인쇄에 유리한가는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금속활자는 13세기 초 발명된 이후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민간의 주된 인쇄수단이 되지 못했다. 방대한 연구를 통해 현재 조선시대 만들어진 금속활자의 조수가 거의 대부분 밝혀졌는데, 그 중 민간에서 상업용 인쇄를 위해 금속활자를 제작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의 금속활자는 지식의 대중적·보편적 확산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물론 어떤 변화도 초래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한다. 변화가 있었다면 있었다. 세종조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사대부 계급의 지적 수준을 높여 중세적 질서의 완성에 기여했다.
구텐베르크와 한국의 금속활자는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달랐다. 무엇보다 구텐베르크와 한국의 금속활자는 각각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를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길이 달랐다. 알파벳 자모를 쓰는 구텐베르크 활자는 극단적으로 말해 1면을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의 활자만 있으면 책 한 권을 인쇄할 수 있었으나, 한국의 금속활자는 한 번 주조할 때 적어도 10만자, 보통 20~30만 자를 주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가에서만 금속활자를 제작·사용했던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표음문자인 한글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한글 창제와 금속활자의 상용화는 모두 세종조에 이루어졌으나, 기묘하게도 세종은 한글 금속활자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한글활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문서적의 언해(諺解)에 필요한 소수에 불과했다. 애초 국문서적 인쇄를 위한 대량의 한글활자는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 위정자들은 대중을 위한 지식의 보급이란 문제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다. 금속활자는 한자(漢字)활자였고, 오로지 소수를 위한 책만을 찍었으니, 지식의 보편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금속활자의 최초성에만 주목했지, 어떤 현실적인 압력이 금속활자를 탄생시켰는지, 금속활자가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했는지, 궁극적으로 금속활자가 사회변화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로지 세계에 자랑할 위대한 민족의 업적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사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금속활자의 의미를 규명해야 할 것인데, 세계 최초란 허울 아래 서양의 금속할자와 견주어 가당치도 않은 자랑만 늘어놓고 있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 편의상 저자의 허락이 수반되지는 않았으므로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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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6차 국정 국사교과서》 금속활자 부분(상권)
p156 ~ 157 과학과 기술학
....(전략) 기술학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인쇄술의 발달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개경과 서경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많은 책들을 수집, 보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이 책을 인쇄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대장경 간행에서 보듯이 목판 인쇄술은 전기부터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책을 소량으로 인쇄할 경우 목판보다는 활판 인쇄가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활판 인쇄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중기 이후에는 금속 활자가 발명되어 활판 인쇄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고종 때에는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는데(1234), 이는 서양에서 금속 활자가 사용된 것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상정고금예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그 대신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되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후략)...
p211 과학 기술
...(전략) 국가적인 편찬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활자와 인쇄 기술 문화가 발달하였다. 고려 시대의 금속 활자 인쇄술은 이 시기에 더욱 발전되어, 이른바 계미자(태종), 갑인자(세종)등의 정교한 활자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편찬 사업은 제지술을 향상시켰으며, 출판 문화의 발달은 교육을 포함한 문화 수준을 한층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후략)...
첫댓글 매우 참신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歷史 - 고려의 금속활자>는 지나친 지적이라고 봅니다. 장인계층의 우수성에서 비롯된 매우 이른 시기의 발명품이 적절히 활용되기에는 시대상황이 유럽보다 이르다보니 일부 지식계층에 국한된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죠.
우리 민족이 이렇게 우수하므로 남을 지배해야 한다는 국수주의만 경계한다면, 민족 자긍심 앙양은 보편적인 것으로 오늘날 약소민족으로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서 자존심을 잃고 눈치 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금속활자의 발명이 간과할 수 없는 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민족주의가 국수주의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지나친 겸손보다는 최소한의 자존심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도 참신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쭐댈 필요는 없겠죠. 우수한 발명을 한 민족이 이를 적절히 활용할 환경을 만들지 못했으니...부끄럽기 보다는 아쉽다는 것이겠죠...
부끄러운 역사로 지칭한 이유에 대해서 제가 아래에 답글을 달아놓았습니다. 이 글을 보신 분은 되도록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혼돈님과 오랫벗님이 지적 비판하는 부분이 바로 '박정희식 국사의 문제점'이라 봅니다. 아마도 그러한 유형과 형태로 많은 부분들이 상존하고 있겠지요. 또한 그러한류의 민족(주의) 국사는 변형되어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상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 매우 참신한 지적입니다. 혼돈님 한건 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