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눈을 떴다. 어제(23일) 바그다드 시내에는 하루 종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낮에 한 시간쯤 들어왔다고는 하나 그 때 우리는 알 타쉬 캠프에 가 있을 때이니 아주 안 들어온 거나 다름이 없다. 노트북에 한 시간만큼 쓸 수 있는 게 충전되어 있었지만 그건 사진 옮기는 일을 하다 보니 금세 다 닳았다.
혹시 새벽에라도 전기가 들어올까 하여 들어오지 않는 콘센트에 전원을 잇고 옆에 누었다. 카세트도 꼽아 놓고 볼륨을 올려놓은 뒤 눈을 붙였다. 전기가 들어오면 그 소리가 깨워주겠지.
그런데 눈을 떠보니 아침. 밤새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냉장고도 이제는 냉장고가 아니다. 찬물을 좀 마셨으면. 아무튼 그 덕에 바그다드에 오고 처음으로 긴 잠을 잤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기분도 좋다. 다른 팀원들 일어나기 전에 여유 있게 샤워도 하고 며칠 미룬 빨래도 했다.
(지금 바그다드 전체에 불이 안 들어오고 있다고, 살람의 집에는 물도 안 나온다고 살람이 전해 주었다. 어제 미군에 대항하는 이라크 잔류군(혹은 무기를 든 민간인)들이 발전소를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앞으로 열이틀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큰일이다.)
<알타쉬 캠프>
어제 우리는 ‘알타쉬 캠프’에 다녀왔다. 사막 가운데에 놓인 마을. 그곳은 이란이 고향인 쿠르드족 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사연이 아주 깊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23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버려진 채, 그리고 고립된 채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이 있던 때부터. 그 동안 이 지역에는 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 달에 통틀어 두어 시간. 23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이들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으로부터도 아무런 관심이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이란 정권으로부터도 어떤 도움을 얻지 못했다. 물이나 전기 사정은 형편없었으며 치안 또한 엉망이었다. 이들은 강도나 도적의 약탈에 무방비 상태였다. 그렇게 지내온 23년의 세월, 그이들의 삶은 외부로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
이들은 나름의 자치 조직을 꾸리며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자 했다. 유엔이나 정부를 향해 그 어떤 대책을 마련해 주기를 바랐다. 최소한의 삶의 조건 - 물이나 전기, 치안이 보장되는 곳, 그러한 곳에 새로운 정착지를 얻기를 바랐다. 그런 가운데 이들이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고향 나라인 이란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꿈이었다. 이란의 정부는 이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라크를 떠나 이란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더러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났으니 그것은 말 그대로 무작정이었다. 그 길에 죽을 수도, 길을 잃을 수도, 체포되어 어딘가로 끌려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들을 향한 이라크 인들의 적대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직 고향 나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것만이 꿈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이란’을 자신들의 파라다이스라 했다. 그만큼 이들의 삶은 처참했다.
이들이 알타쉬 캠프에 살게 된 까닭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전쟁 난민으로 발이 묶인 경우이고 또 하나는 이란에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 망명을 떠나온 경우이다.
우리 팀은 알타쉬 캠프를 알게 된 것은 전쟁 직후부터 전후 활동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문제는 우리가 약이나 물, 생필품 따위를 들고 들어가 구호활동을 벌이는 것으로는 실질적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우리가 그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건 다른 곳에서 해왔듯 어떤 물자를 지원하거나 그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지내는 것보다 그곳의 상황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거였다. 무엇보다 이 마을의 상황을 외부로 알리는 게 중요했다. 어떠한 식으로는 그곳의 상황을 알려 국제 사회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여론을 모으는 일, 그렇게 해서 보다 힘 있는 기구들이 구실을 갖도록 하는 것이 그 지역의 문제를 푸는데 관건이 될 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미 그 마을의 문제는 우리가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상황이었고, 정치적으로나 민족적인 갈등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우리처럼 작은 팀이 무언가를 하기에는 더욱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우리 팀은 그 지역을 구호 활동의 직접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능한 한 그 지역의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려내는 것, 그것을 우리의 몫으로 삼는 선에서 멈추었다. 실제로도 전쟁 뒤 몇 군데의 외국 엔지오들이나 개인이 그곳을 방문했지만 그이들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다거나 무책임한 기대를 던져준 채 등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그 지역 사람들에게 절망이나 좌절, 불신을 더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량과 한계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했다. 이 땅에서 해야 할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냉정해야 했다. 알 타쉬 캠프의 상황은 너무나 안 되었지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 줄 수 있는지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 판단 위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면서 우리가 실질적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또 다른 곳(이를 테면 현재 우리 팀이 활동하고 있는 뉴 바그다드 지역의 다섯 개 빈민 마을)을 찾았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보고 듣게 되는 모든 문제에 우리가 다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디 이 땅에서 가슴이 아프도록 안타까운 현실이나 상황이 그것뿐일까? 괜히 오지랖만 넓히며 기대만 잔뜩 안긴 채 들쑤셔 놓다가 아무 하는 일 없이 옮겨간다면 오히려 더욱 큰 상처만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 팀은 그렇게 정리를 하고 뉴 바그다드를 비롯 몇 군데의 거점 마을에서 구체적인 활동을 계획하고 진행했다.
전쟁이 끝난 뒤 바그다드에는 무수한 언론인이나 엔지오, 구호단체들이 들어왔고,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전쟁 직후에는 한동안 바그다드에 들어온 한국의 여러 단체들이 숙소를 이웃해 지냈다. 물론 저마다 나름의 자기 계획으로 활동하였지만 자연히 현지에서 보고 겪는 정보 따위를 함께 나누었다. 그 때 정토회에서 온 이상환 씨가 있었는데 그이가 우리 팀에서 이야기해 준 알 타쉬 캠프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이는 혼자 알타쉬 캠프를 여러 차례 더 방문하여 마을 방역을 하면서 자연스레 마을 사람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나중에 듣기로 정토회에서는 이라크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고 했으니 그 일은 정토회의 사업이었다기 보다는 그이가 개인으로 추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이가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지난 23년 동안 외부인이 마을에 와서 잠을 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전에 유엔 에이치씨알(UN HCR - 난민 문제를 관할하는 유엔 기구)에도 몇 차례나 찾아가 단 하루만이라도 우리 마을에 들어와 지내면서 이곳 현실을 보아달라고 했지만 유엔은 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 단 반나절만이라도, 아니 단 한두 시간 만이라도 이 마을에 직접 와서 둘러봐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 워낙 이 마을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정치적, 민족적 문제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바그다드에 다시 들어와 팀에 합류했을 때 이상환 씨가 우리 팀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그 마을의 사람들의 가장 절실한 바람은 고향 나라로 돌아가는 것, 그곳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 아직 제대로 된 정부가 서기 전인 지금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이번에 못 돌아가면 영영 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1000 가구 가까운 집이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900 가구 가운데 여러 가지 위험은 둘째 치고라도 아무런 자구책을 가질 수 없는 가정이 100가구 정도 된다는 것이다. 이 캠프를 떠나 고향으로 떠나기 위해 드는 경비는 최소 25불에서 많게는 100불정도. 국경에서 잡힌다거나 어떠한 위험 상황을 만났을 때 지불해야 하는 경비가 그것이라 했다. 이상환 씨의 제안은 우리가 힘을 모아 그 100가구만이라도 이주에 필요한 최소 경비를 보태어주자는 거였다.
<알 타쉬 캠프에 다녀와서>
내가 바그다드에 다시 들어와 팀에 합류하던 첫 날에도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있었다. 그 때는 이미 지원을 하는 쪽으로 얘기가 되어 있었고,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감이 전혀 없었다. 물론 지난 번 팀장이 한국에 나왔을 때 잠깐 듣기는 했지만 그 때야 몇 마디로 간추려진 짧은 이야기였으니 사실 처음 듣는 거나 다름없었다.
알 타쉬 캠프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나는 며칠 째 몸살이 낫고 있지 않아 자동차 안에서라도 더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길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뜨거웠다. 더워서 창을 열며 찜통에서 나오는 것 같은 열기가 얼굴로 들이닥쳤다.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 했는데 그게 안 된다. 몸에 열이 나서, 더워서, 숨이 막히는 바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몇 시간을 갔을까? 억지로 눈을 붙여 자다 깨다 하는 사이 자동차는 아주 덜컹이는 길로 들어섰고, 그곳부터는 나무도 풀도 보이지 않는 사막. 멀리 움집처럼 지어 놓은 사람들의 마을이 보였다.
자동차에서 내리니 우리를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이 반겼고, 이들과 보다 가까운 정토회의 이상환 씨가 서로를 소개해주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이들은 주로 이 마을의 문제를 어떻게든 스스로 풀고자 하는 뜻있는 청년들이었다. 정부 또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 마을의 문제를 앞장서 호소하기도 하고, 밤마다 짝을 지어 마을 순찰을 돈다고 했다. 그 밖에도 어떤 정부나 기관도 해결해 주지 않는 마을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청년들이었다. 이 청년들은 대부분 마을의 자치 학교의 교사이기도 했다. 알 타쉬에는 공립학교가 있었지만 후세인 정권은 이란계 쿠르드인은 교사를 할 수 없도록 자격을 제한했다. 말하자면 그 지역 출신은 교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 지역 사람들에 대한 또다른 통제 정책이었다. 해서 마을 청년들이 자치 학교를 운영했다. 우리 마을의 문제를 풀려면 어쨌건 국제 사회에 호소해야 하고 외국의 단체나 사람들을 만나 우리의 문제를 알려야 하니 아이들에게 영어와 페르시아어 정도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들은 얘기는 그 뿐이지만 청년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단지 언어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마을의 현실을 일깨워주려 할 테고 그와 관련한 이란과 이라크의 역사나 그 밖에 그이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가치들을 나누고 싶은 것이겠지.
자동차에서 내려 마을 청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둘레로 아이들이 모여섰다. 예쁘다. 어디에서 만난 아이들이야 그렇지 않았겠냐만 이 아이들 눈빛은 유난히 더욱 반짝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 뒤로 멀리 사막이 뻗어 있어 그랬을까? 집과 집, 골목과 골목, 그 담벼락들이 아니라 탁 트인 하늘과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욱 반짝여 보였을까? 아이들은 꼬질꼬질에다가 머리는 감지 않아서 쭉쭉 뻗은 모습이었다. 몸집이 유난히 작았다. 아니, 처음에는 다른 곳에서 만나는 아이들보다 몸집이 참 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오래 보고 있을수록 그건 몸집이 작은 게 아니라 그곳에서는 바깥에 나와 뛰어노는 아이들 나이 대가 다른 곳보다 한참이나 아래라는 걸 걸 알 수 있었다. 서너 살 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들도 그 뜨거운 땅바닥을 맨발로 걸어 다녔다. 아, 그리고 서너 살 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그 애들 눈빛이 다른 곳에서는 예닐곱은 되었을 아이들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아주 어려 보이는 그 애들도 형 누나를 따라 뛰어다녔고, 형 누나들처럼 웃으며 좋아했다. 대부분 아이들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는데, 그래서 더 예뻤는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마을 청년들, 그리고 아이들과 첫 인사를 하고 나서 한 청년의 집으로 들어갔다. 꼭 우리의 옛 시골집 같은 모양이었다. 조그만 대문, 그 안에는 손바닥만한 마당, 안채라 할만한 방과 마루가 있고 그 곁에 부엌이 딸려 있다. 그리고 그 안채의 마당 맞은편에 변소가 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꼭 그만한 헛간이 있다.
방에는 이렇다 할 살림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 살림이라고는 겨우 이불 몇 채. 모래흙을 개어 지은 듯한 벽에 등을 기대고 둘러앉았다. 등을 기대고 둘러앉아도 열 명 남짓 앉으니 꽉 들어찼다. 상환 씨 말이 그래도 이 집이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축에 끼는 집이라 했다.
방안에 앉아 마을 청년들이 이 마을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들려주었고, 마을 사람들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내가 이 글 앞에 정리해 본 것이 대충 이 자리에서 들은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나로서는 또다시 내 처지라는 게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역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거였다. 돈을 조금 가지고 가 있는 이방인. 나는 그이들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그렇다면 정치적 까닭으로 이곳에 와 있는 사람들은 이란으로 갈 수 없을 텐데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혹시 지금까지 이란으로 떠나간 사람들하고는 연락이 되는지, 과연 이란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이곳에서 생각한 것만큼 만족스러운 삶을 찾게 되었는지, 이 마을 사람들의 생업은 무엇인지, 전쟁 전에는 무엇으로 먹고 살았으며 전쟁이 끝난 지금은 또 어떤지…….
먼저 질문에 대해 들은 답을 이야기하면 정치적 까닭에 망명해온 이들은 물론 이란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는 애초 이란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착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물도, 전기도, 치안도 아무 것도 제대로 된 것 없는 황폐한 이 땅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 나라인 이란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 우리는 또 한 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와 혜란이가 닷새 전 이라크로 들어올 때 국경 가까이에 모여 있는 어느 천막촌을 보았다. 그 때만 해도 그저 스쳐보면서 이게 뭘까 싶었는데 그게 바로 국경에서 붙잡힌 이 마을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 했다. 요르단을 통해 이란으로 가고자 했던 사람들, 그이들이 국경에서 붙잡혀 또다시 난민이 된 것이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천막촌에 들어간 사람들이 이란으로 보내어줄 것을, 또는 새로운 정착지라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하며 단식을 했다는데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껏 이란으로 먼저 떠난 사람들, 전쟁 전에 떠난 사람들하고는 어느 정도 연락이 되었는데 요즈음 떠나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은 거의 모른다고 했다. 예전에 떠나간 사람들의 소식에 따르면 일단 이곳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무척 고생을 하지만 그래도 이란으로 가면 친척과 연락이 닿거나 하여 도움을 얻고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 말 끝에 한 마디 더한 것은, 아무리 가진 것이 없고 살기 어렵다 해도 지금 이곳에 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느냐며……. 전쟁 전 이곳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주로 했던 일은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라마티라는 도시에 나가 종업원, 심부름꾼으로 돈을 버는 거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지금은 치안이 더욱 나빠졌기 때문에 그 일조차 하지 못한다.
마을 청년들에게 이것저것을 물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건 어제 살람을 만나 이라크의 미래는 어떨 것 같은지,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나 걱정스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포탄의 파편을 맞아 발이 갈라진 할아버지에게, 한 쪽 손을 쓰지 못하게 된 그이의 아들에게 당시 상황을 묻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나는 왜 그러한 것을 더 알고 싶어 하며 그이들에게 자세히 묻는가, 그것들을 알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때로는 대답하기 곤란해 하는 그이들 얼굴에 나는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당장 하소연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이들에게 들은 절실함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전해줄 수는 있겠지만, 겨우 그렇게라도 한 쪽의 내가 나를 타이르지만, 여전히 다른 쪽의 더 큰 나는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무언가를 아는 것, 특히 그것이 사람의 문제일 때는, 특히 그것이 힘겹고 아프고 상처 입은 사람의 문제라면 그것을 알아가는 것은 인터뷰를 하거나 취재를 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거다. 누군가의 상처를 들추는 식으로, 그이가 말하기 곤란한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식으로는 아닌 거라고. 적어도 내가 그이의 처지나 아픔을 조금이라도 함께 하려는 노력을 했을 때, 그건 다름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일일 텐데, 그러한 과정으로 겪고, 보고, 느끼며 내가 그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처지나 아픔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그이들이 들려주는 얘기, 그리고 내가 물어 들은 얘기로 그이들의 처지나 아픔, 절실함을 들었다. 그래서 알았다. 하지만 나는 단지 알았을 뿐이다. 나는 그이들의 아픔을 알게 되었지만 그이들의 아픔을 나눌 수까지는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괴롭게 느끼는 것, 이런 식으로 이라크 인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에 힘들어하는 가장 큰 까닭이다. 아, 이제 더 많은 이라크 인들을 만나고 다니기 보다는 어느 한 마을에서라도 그이들과 함께 살았으면…….
어느 정도 방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난 뒤, 지역을 둘러보자며 바깥으로 나섰다. 변소에 가려고 마당 저 쪽을 가보니 여인들이 커다란 물탱크 아래에서 닭을 다듬고 있다.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하려고 닭을 잡은 모양이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눈에도 대여섯 마리는 되어 보였다. 미안했다. 저거면 이 사람들 몇 달은 먹을 텐데, 가뜩이나 지금은 마을 바깥으로 나가기가 힘들어 다른 먹을거리는 쉽게 구하지도 못할 텐데. 아주머니들이 닭을 다듬을 때 물을 받는 물탱크는 커다란 드럼통 같은 거였다. 아랫부분에 수도꼭지가 달려 있어 그것을 열어 졸졸졸 물을 받는. 나도 손을 씻으려 그 물을 틀었는데 꼭 목욕할 때 쓰는 물처럼 뜨거웠다. 50도를 훨씬 넘는 더위에, 달구어지는 드럼통, 그 안에 재워 놓은 물이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한 달에 하루, 그것도 두어 시간밖에 물이 나오지 않으니 받아 놓을 수 있는 한 가득 받아 그런 식으로 쓴다.
자동차를 타고 먼저 간 곳은 초등학교. 가는 길 또한 나무 하나 풀 하나 없는 사막이었다. 듬성듬성 모래흙을 개어 지은 흙집이 보였다. 조금 전 우리가 나온 집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이라는 말처럼 다른 집들은 겨우 방이나 들인 모양이었다. 그런 집들 사이로 지붕을 내리고 벽을 헌 집들이 보이곤 했다. 이미 고향 나라 혹은 다른 정착지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 살던 보금자리. 그렇게 빈 집만 보이는 게 아니라 지붕 위로 올라가 집을 헐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차에 살림을 가득 싣고 떠나는 사람들도 보였다.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 떠나고 있는 사람들.
우리가 내린 초등학교는 수업을 모두 마친 뒤였다.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길게 네모진 건물 셋만이 디귿 모양으로 서 있었다. 창 너머로 교실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도 공부를 했을 텐데 먼지가 자옥한 책상, 교실 바닥. 칠판에는 내가 못 알아보는 아랍 글자가 써 있기도 했다. 아이 녀석들, 이 더위에 이 꽉 막힌 책상에 앉아 있으려면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할까, 고작 그런 생각이나 했다. 어느 반 교실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걸려 있었다.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싶었는데 문이 걸려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나와 마을의 바깥쪽으로 갔다. 마을 사람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데리고 간 곳이다. 황량한 사막 가운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죽은 사람들의 자리. 한 가지 놀란 것은 어른들의 무덤과 아이의 것이 달랐는데 아이의 무덤이 꽤 많다는 거였다. 이제 그곳 알타쉬의 사람들이 새로운 정차지를 얻거나 모두 떠나가게 되고나면 이 무덤들만 남아있게 되겠지.
집으로 돌아오기 전 한 군데 더 들른 곳은 어느 호숫가. 호수라고 하기에는 끝이 보이지 않아 마치 바다 같았다. 멀리에서 볼 때에는 깨끗해 보여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마을 청년 말이 그리 깨끗하지 않으니 들어가지 말라 한다. 이상한 건 호숫가인데도 여전히 나무 하나 풀 하나가 없었다. 너무 뜨거워서 그런 것일까.
마을을 둘러보는 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잠깐씩 내려 돌아보는 것일 뿐인데도 나는 몹시 지쳤다. 자동차의 안이나 밖이나 할 것 없이 뜨거운 열기가 참기 힘든데다가 내 몸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런데다 워낙 내가 그렇게 관광하듯 둘러보는 것에 흥미가 없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보고 싶어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어디 즈음에 차가 멈추니 내려선 것뿐이었다.
다 둘러보고 돌아오니 아까 그 청년의 집에는 음식 준비가 다 되었다. 전날 살람의 집에서 먹은 것하고 비슷한 차림. 닭을 튀긴 것에 밥과 토마토, 오이 샐러드. 그것을 호브즈라는 얇고 넓은 밀가루 빵에 쌈을 싸듯 먹는 거였다. 아마 이쪽에서 귀한 손님을 맞을 때 가장 널리 차려내는 음식이 그것인가 보았다. 하나 더, 전날에는 못 보던 음식이 있었는데 뻘건 국물에 건더기가 있는 것이 꼭 김치찌개인 것도 같고, 무슨 육개장 국물인 것도 같았다. 와아 하면서 팀원들이 떠먹는데 다들 맛있다고 좋아했다. 국물 위로 닭고기가 보이는 게 꼭 닭볶음 같았다. 나도 한 숟갈 떠먹었다. 엑. 한 번 떠먹고는 그만 말았다. 이상하게 나는 외국 음식이면 통 입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음식들 보다는 참고 먹을만 했다. 외국 음식에 워낙 까다로운 내가 그 정도였으니 다른 팀원들이 맛있다며 먹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차이’(이쪽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차를 마시는데 그 이름을 ‘차이’라고 했다. 홍차 같은 것)를 마셨고, 대충 치운 뒤 방에서 쉬었다. 보통 이 나라에서는 점심을 먹은 뒤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에는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쉬는데, 우리가 밥을 다 먹고 났을 때가 벌써 네 시. 네 시 삼십 분까지 잠깐 눈을 붙이거나 편하게 쉬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을 갖기로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노는 시간. 사실 나는 참 부담스러웠다. 물론 나는 팀에서 아이들을 만나 함께 어울릴 놀이나 활동들을 맡아 하기로 했다. 내가 바란 일이다. 그래서 나름으로 한국에서 많은 준비를 해왔다. 그런데 처음에 들어와 팀의 일정은 내가 한국에서 그린 활동하고 크게 차이가 있었다. 빠듯하게 여러 지역을 방문하며 다녀야 했고, 그 어떤 지역민이나 아이들과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만남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이 날 알타쉬 지역을 방문할 때에는 그냥 가서 마을을 둘러보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만 하고 오지 말고 그곳 아이들과 함께 어울릴만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갔으면 한다고 했다. 자연히 그것을 준비하는 일은 내 몫으로 돌아왔다. 막막했다. 처음 만나게 될 아이들과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함께 만날 아이들이 몇 명 정도 되는데요? / 다 하면 아마 육천 명쯤 될 거예요. / 육천 명?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을 모두 모은 자리에서 함께 어울릴 놀이를 준비하라는 건지……) 아니요. 우리가 가서 어울리게 될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아이들하고 모여서 놀 실내 공간 같은 건 있어요? / 아니요. 그 아이들이 다 들어갈만한 데는 없고, 마을 가운데에 원형 극장 같은 게 있기는 한데…….
참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육천 명 운운 하는 것도 그랬고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 그것도 단 한 번 만나고 말 아이들과 함께 할만한 프로그램을 준비하라는 것 또한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못할 일이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일을 준비하거나 기획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팀에서 그것이 맡겨졌을 때는 단지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하는 부담만 무겁게 느꼈다.
물론 나는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아이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내고 싶어 나름껏 준비를 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 날 팀에서 요구하듯 두어 시간 만나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한 판 벌리는 이벤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만나게 될 아이들, 그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색종이를 접거나 또는 짝을 지어 하는 놀이, 제기 차기, 팽이 돌리기 같은 거였다. 그것이 아니면 그림책 슬라이드나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함께 보는 것. 내가 생각한 것은,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날마다 아이들을 만나며 일상적인 놀이와 활동을 하나하나 해가는 거였다. 그렇게 조금씩 관계를 지어 가는 것, 그 안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아이들과 우리 사이에 끈끈한 정을 나누어 가는 것. 그런 가운데 할 수 있다면 아이들과 글도 써 보고, 그림도 그렸으면 했다. 글로 또는 그림으로 아이들이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내가 그리던, 내가 바라던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다짜고짜 어느 낯선 마을에 가서 아이들, 그것도 몇천 명이나 된다는 아이들과 놀만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으면 한다는 말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결국 떠나는 날 아침까지 나는 내게 맡겨진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애만 태우다 차에 오르면서 축구공 세 개와 애니메이션 테이프 몇 개를 함께 실었다. 싣고 가면서도 이걸 가져가서 도무지 무얼 할 수 있을까 걱정을 놓지 못한 채.
결국 아이들과 놀아주는 프로그램을 갖자는 일은 좋지 않게 말하면 시간을 때우는 일 정도였다. 네 시까지 점심을 먹고, 잠깐 쉰 뒤에 네시 삼십 분까지 무엇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것. 알타쉬에 가서도 나는 지역 사정을 잘 모르니 아이들이 얼마나 모이겠느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도 듣는 대답은 이 지역 아이들이 육천 명쯤 되는데 모이자고 하면 대부분 모여들 거라는 말 뿐이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기 전에 지역을 둘러보고 나니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 것 같았다. 한 번 둘러보려 해도 자동차를 타고 한참을 다녀야 할 만큼 넓은 지역이니 말이다. 알타쉬는 한 데에 모여 있는 마을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여러 개 마을을 통틀어 말하는 지역인 거였다. 그러니 이 지역의 아이들을 다 모이게 하는 것은 가능해보이지도 않았고, 굳이 그렇게 할 까닭도 없었다.
네 시가 되어 삼십 분 정도 쉬자고 한 뒤 팀원들이 아이들과 놀이는 어떻게 할 거냐 물었다. “아이들 따로 불러 모을 것 없이 이 마을 아이들하고 같이 놀면 되겠네요. 글쎄 뭘 할까 잘 모르겠는데 이 정도 아이들 수면 두 편으로 갈라 꼬리잡기 같은 놀이는 할 수 있겠어요. 마침 내가 가면 가져온 것도 있으니까 그것 하나씩 얼굴에 쓰고 아이들더러 그 뒤로 붙어 서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가져온 비디오는 어디 텔레비전 있는 집에 가서 같이 봐요. 이 정도 아이들이면 한 집에서 보는데 무리 없을 것 같은데…….”
마을 청년에게 부탁하여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미리 비디오를 연결하고 바로 볼 수 있는 준비를 했다. 그런데 청년 얘기가 삼십 분 뒤면 전기가 나갈 거라고 했다. 그러면 비디오를 먼저 보아야겠네. 대충 준비를 하니 네 시 삼십 분쯤 되었고, 부르지 않아도 우리 앞으로 모여든 아이들을 데리고 비디오를 볼 집으로 갔다. 몇 아이는 까불었고, 몇 아이는 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손짓하면 달아나기를 몇 번, 그렇게 수줍어했다. 아이들과 함께 본 것은 레이몬드 브릭스의 <<곰>>. 그런데 비디오가 시작해도 조금 늦은 아이들이 들어오느라 조금 산만해서 아이들이 첫 부분을 잘 보지 못해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할까봐 조금 걱정이었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보면 좋겠는데, 좋아했으면 참 좋겠는데. 아이들하고 말이 통했으면 사이사이에 ‘어머, 동물원에 잡혀오게 되었나 봐.’, ‘아까 그 곰이 저 애 곰 인형을 갖다 주러 왔나봐.’, ‘저거 곰이 똥 싼 건가 보다’ 하면서 흥분도 살리고 살짝 이해를 돕는 말도 해 주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래서 잠깐씩 눈을 돌려 아이들 얼굴을 살피는데 그래도 아이들 모두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모았다. 그게 재미있어 그런 건지, 그저 그런 화면을 보는 게 신기해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은 안심이었다.
비디오 한 편이 다 끝날 때 쯤, 저 쪽에 있던 팀원이 삼십 분 뒤에는 떠날 거니까 그 시간에 맞추어 달라고 해서 그러면 어떻게 할까 하다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우리 이런 거 하나 더 볼래, 아니면 바깥에 나가 놀래? 아이들 대답, out! 왠지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보게 한 건 아닌가 싶어 잠깐 무안하기도 했지만, 당연한 대답이라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바깥에서 뛰어 노는 게 제일이지. 아무런 만남도 없던 아이들, 게다가 비디오를 보는 문화가 전혀 낯선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틀어주기만 했으니 그게 좋았을 리 없다. 늘 해오던 것처럼 맨발로 뛰어 놀아야지.
아이들과 바깥에 나가 아까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처럼 꼬리잡기를 했다. 나는 돼지 가면을 쓰고, 동화가 귀여운 인형 가면을 쓴 뒤 두 편으로 갈라 허리를 잡고 섰다. 가면 쓴 걸 보고 아이들이 좋아했다. 놀이 방법은 영어를 아는 마을 청년이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이들은 깔깔깔깔 좋아했다. 어쩌다가 앞 사람 허리를 놓쳐 꼬리가 잘려도 우루루 우루루 뛰어다니며 좋아했다.
시간이 다 되어 알타쉬를 떠났다.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렇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루나 이틀 그렇게 방문하는 것, 현지인들을 만나거나 아이들을 만나는 일 또한 그렇게 스치듯 만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 몸에는 열이 더 많이 올랐다. 몸부터 어서 나아야 할 텐데.
<토루>
토루는 우리가 2월 말 처음 이라크에 들어올 때부터 함께 다닌 일본인 친구다. 나이가 스물다섯 쯤 되었나? 아직 대학생. 혼자 이라크에 가려고 암만에 왔다가 5인 이상에게만 내주는 관광 비자를 얻기 위해 우리 팀에 끼어 함께 다닌 친구이다. 그렇게 첫 입국 때에 함께 다닌 뒤 3월, 4월 숙소를 따로 하면서도 늘 연락을 하고 지냈다. 그러던 녀석이 저희 일본인 몇 사람과 함께 팀을 이루어 발런티어로 바그다드에 들어와 있었고, 나와 혜란이가 왔다는 소식에 우리 숙소를 찾아왔다. 매우 장난기도 있고 붙임성도 있는 친구이다.
반가워서 인사를 나누고 툭툭 치며 장난을 주고받다 저녁을 함께 먹는데 녀석이 방사능 이야기를 했다. 이라크 우유는 먹어서는 안 된다, 이라크 물도 먹어서는 안 된다, 이라크 과일은 먹지 말아라. 우리는 처음에 별로 귀담아 듣지 않고 얘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나 하면 웃었다. 토루는 삐치기도 잘 하는데, 우리가 제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웃으니까 밥을 먹지 않겠다면서 그릇을 내려놓았다. 정말 크게 삐친 모양. 그래서 왜 그러냐며 이야기를 듣는데 토루가 하는 말, 지금 토루는 친구들과 함께 바그다드에서 방사능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는데 오늘 다녀온 공장에서도 방사능 수치가 기준치의 열 배가 넘게 나왔다는 것이다. 지금 방사능 물질이 묻어 있는 것을 강물에 함부로 씻고 있는데(그 주체가 미군인지, 아니면 방사능의 위험을 잘 모르는 이라크 민간인인지에 대한 궁금함이 나중에 들었는데 그것은 물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잘 모르고 있는 이라크 사람들이겠지) 그렇게 흘러나가는 방사능에 대한 대책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네 팀이 그것을 조사하기에는 너무 무력하다는 거였다. 방사능을 조사하려면 감염을 막을 수 있는 옷이나 장비가 필요한데 그것을 구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루는 이 사실을 어떻게든 미군이나 유엔 또는 국제 사회로 어서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토루는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도 예를 들며 말했는데 아무래도 자국에서 방사능으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을 보고 겪었으니 누구보다 더욱 민감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이 글을 쓰고 있는 29일)까지 토루가 한 이야기에 대해 더 나온 이야기는 없다. 토루의 말이 신빙성이 없어 보여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가 무감각해서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먹고 시장에서 사온 과일과 채소를 먹는다. 그건 토루도 마찬가지다. 어제 저녁도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갔으니.
<하이달>
이 날 저녁에 우리 숙소에 찾아온 또 하나의 손님은 하이달. 하이달! 하이달이 왔다는 소리에 방에서 뛰쳐나갔다. 정말 착하고 순하게 생긴 얼굴, 꼭 여자처럼 나긋한 말씨. 하이달은 아이 올웨이스 리멤버 유 하면서 양 쪽 뺨을 번갈아 대는 이라크식 인사를 건넸다.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말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 하이달 옷자락을 잡아끌어 방으로 데려 갔다. 내가 보여 줄 게 있어, 네가 뽑아달라는 사진, 그 사진을 가지고 왔어. 가방에서 사진 꾸러미를 찾는데 왜 이렇게 안 보이는 건지. 전기까지 나가서 깜깜해 보이지가 않았다. 미안, 하이달. 잠깐만. 서두르니 더 못찾겠다. 겨우 사진을 찾았는데 집에서는 볼 수가 없어 바깥으로 나갔다. 하이달의 차로 갔다. 이거야, 이거. 응, 이거는 너희 집에 갔을 때.
정말 반가웠다. 하이달이 당장 내일 자기네 집으로 초대하겠다 하는데 약속을 하지 못했다. 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하이달과 카심, 파디, 핫산, 세이프, 그리고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의 아이들. 전쟁 중 만났던 그이들을 만나 그이들과 지내고 싶다. 아,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