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교방송국 강당 - ‘중국 관정 대선사 초청대법회’
나는 그 뒤 큰스님의 정법을 전하는데 앞장서지는 못했지만 염불 CD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어느 날 순천 상적암 성렬 스님이 관정 스님을 친견하고 싶다고 찾아와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이왕이면 크게 법회를 열어 여러 사람에게 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함께 뵙자는데 마음이 모아졌다. 그 스님의 활동력은 대단했다. 3월 2일로 날짜를 확정하고 장소도 당시 불교 관계 강당으로 가장 크고 잘 알려진 불교방송국 강당으로 계약을 마쳤다. 물론 우리 절에 통역으로 왔던 강거사에게 부탁하여 관정 스님의 허락도 받았다. 이어서 먼저 조계종에 개최를 의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냥 석문사 이름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전국 곳곳에 플래카드를 걸고, 전국의 사찰에 통지문을 보내고, 불교관계 신문에 보도 자료를 보내고, 광고도 냈다.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진행되었고, 이에 대한 반응도 아주 좋아 법회를 틀림없이 성공적일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이 모든 일은 순천 상적암의 성렬 스님이 모두 맡아 빈틈없이 준비해 주셨다.
그런데 법회 1주일을 남겨놓고 갑자기 통역을 맡은 강거사가 관정 스님이 한국 비자가 나오지 않아 한국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고 전해왔다. 정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정말 하늘이 노랬다. 이 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분과 상의했지만 한국 안에서 해결할 문제도 아니고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니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부처님께 도와달라고 빌고 또 빌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 그 택시 기사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가 힘써 보겠다고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기사에게 신신당부 부탁을 했다. 그런데 3일 만에 북경에서 350만원을 부치라고 연락이 왔다고 했다.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일에 돈을 쓰는 것인지 따지지도 않고 350만원을 부쳤고, 결국 법회 하루 전날 관정 스님이 한국에 오셔서 무사히 법회를 마칠 수 있었다. 한 달 이상 모시려고 여러 분이 노력해도 되지 않은 일이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처님 가피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마땅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3월 1일, 일을 추진해 준 최영철 기사의 차를 타고 공항에 가서 큰스님을 모시고 신도집으로 가서 내일 행사를 위해서 우선 편안히 쉬시도록 했다. 다음 날 불교방송국 강당에서 열린 초청법회는 정말 성공적이었다. 당시 상황을 불교 신문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2일 불교방송국 3층 대법당에서 열린 ‘중국 관정 대선사 초청법회’에 600여명이 넘는 스님과 불자들이 참석한 것은 최근의 정토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특히 이날 막 선방에서 나온 수좌들을 포함한 30여명의 스님들이 문답을 통해 높은 관심을 보인 것처럼, 정토선은 단순한 염불이 아닌 선과 염불을 함께 닦는 선정쌍수의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눈길을 모으는 것이다.
방송국 법회가 끝나고 평창동 상락선 보살 댁에 가서 하루를 묵으시고(여기서 등공 스님을 처음 알았다) 다음날 철원 부연사(주지: 정안 스님)에서 법회를 하고 우리 절로 내려오셨다.
3) 도인 가운데 가장 높은 도인
한국의 스님들을 모셔보면 너무 까다롭다. 그런데 관정 스님은 까다롭지 않고, 마치 안 계신 것처럼 조용하시다. 화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고, 먹는 것도 있는 그대로다. 한 번도 좋은 옷 입으신 것을 보지 못했고, 잡수시는 것도 오신채 일체 드시지 않고 나물, 버섯, 된장국이면 늘 만족하신다. 그 가운데 특히 버섯을 좋아하셨다.
그 때 관정 스님은 시력이 좋지 않아 고생하셨다. 그래서 잘 아는 청주의 지 박사님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그런데 진찰하고 사진을 찍어보더니 자기는 치료를 할 수가 없다고 하며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면서 아주대학 안과에 예약을 해주었다. 다음 날 혜민이 아빠 차를 타고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 병원을 가서 정밀검사를 하였다.
“눈의 신경이 완전히 상해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이미 눈이 노랗게 되어 희망이 없다고 해서 크게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 병원 갔을 때 공양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모시려고 했는데 식당에 가시지 않겠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죽집에 가서 간단히 야채죽을 시켜 드렸더니 맛있게 잡수셨다.
이야기 하면서 보면 마치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시고, 열 번이라도 물어보는 것은 다 자상하시게 대답해 주신다. 한국의 큰 스님들이 뭘 물어보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선사들의 어록을 들이대고, 그것도 모르냐고 윽박지르는 모습과는 너무 달라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다.
관정 스님은 확실히 도력이 높으시다. 우리 절에서 천도재를 지냈을 때의 일이다. 통역을 맡은 강거사가 천도재 지내고 난 떡을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런데 관정 큰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자꾸 웃으시면서 물으셨다.
“떡이 그렇게 맛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나는 떡을 좋아합니다.”
“오늘 천도한 분이 어떤 분이신지 아느냐?”
물론 범인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다. 그러자 관정 스님이 웃음을 참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셨다. 오늘 천도재를 지낸 망자를 보니 중풍에 걸려 입이 삐뚤어졌기 때문에 음식을 입에 넣으면 한쪽으로 음식이 흘러내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거사가 떡 먹는 폼이 꼭 그 망자 같아서 웃었다고 하셨다. 소스라치게 놀란 강거사가 바로 밖에 나가 가족들에게 망자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었더니 “중풍이 걸려 먹을 때는 음식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고 정확하게 증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관정 스님이 천도재 할 때는 이처럼 정확하게 영혼을 불러내서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 절에서 천도재 할 때는 음식을 작게 마련하고, 될 수 있으면 그 음식을 먹지 않거나 조금만 먹는다.
관정 스님이 예지력도 대단했다. 나의 친구 여동생에게 아들이 두 명 있었다. 두 아들을 보신 관정 스님이한 아들에게 “너는 앞으로 꼭 교수가 된다.”고 하셨는데, 실제 일본 동경예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다른 아들 하나는 “장사를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모두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 뒤 2003년인가 2004년인가 한 번 더 법회에 모신 뒤 2007년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직접 중국에 가지는 못했지만 관정 큰스님이 좋아하시던 극락보전에 사진을 모시고 마음속으로 제사를 모셨다. 극락보전에 모신 사진은 관정 스님이 처음 오신 1997년에 명성방직 회장님 아들이 찍은 사진으로, 사진 뒤에 관정 스님이 내시는 빛이 환하게 찍혀 있는 특별한 사진이다.
비록 관정 큰스님은 먼저 극락으로 가셨지만 내 몸속에는 자성염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아무 생각이 없다. 모든 것을 놓았다. 행복하고 좋다.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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