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나의 어머니와 정신대(挺身隊)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구연식
나의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서울 영등포에 있는 조선 경성방직주식회사에 근무하시다가 광복 이듬해에 아버지와 결혼하시어 슬하에 7남매를 두시고 32명의 손주를 보시고 망백(望百)으로 별세하셨다.
외조모님은 막내 외숙을 낳으시고 별세하시어 외가의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신교육은 포기하고 가정에서 외조부님과 큰 외숙님 아래서 사자소학과 논어, 맹자 등 한학과 붓글씨를 익히셨다. 그 당시에는 시골의 부녀자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기에 소녀시절부터 동네 편지를 써주고 읽어주셨다. 지필묵이 귀하던 시절에 어머니는 밥상 위에다 젓가락으로 물을 찍어 글자를 쓰셨다며, 우리가 학업을 게을리하면 훈계의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 10대 중반 1919년에 민족기업으로 설립되고 민족 정서를 경영자원으로 운영했으나 식민지 권력과의 유착의 씁쓸한 뒷맛이 있는 1930년대부터 가동하기 시작한 영등포에 있는 조선 경성방직에 여공으로 입사하셨다. 그야말로 동네 처녀들이 서울로 서울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단다. 방직 기술자로부터 기기 운용 방법을 교육받고 기계를 직접 다루며 근무했다. 어머니는 한글과 한자를 읽고 쓰기가 가능하셔서 조장 근무를 맡아보셨으며 동료들의 시골에서 부쳐온 편지 읽어주고 답장을 써주셨다고 한다.
공장 경비실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여공들의 부모님들의 면회가 끊이지 않았는데 처음 객지로 보낸 딸내미들이 걱정되어 얼굴을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더러는 혼기가 찬 딸내미 혼사를 위해 데려가는 일도 있었다고 하셨다. 그 무렵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점령국가에서 소위 정신대를 차출하여 여자들을 전장에 투입했다.
조선에서 정신대 차출 기준은 미혼인 처녀들이 징집 제1순위였다. 여기에 어머니도 차출 대상이 되었다. 시골에 계신 큰외숙은 이 소식에 놀라 가까스로 노자를 마련하시어 부랴부랴 상경하시어 어머니를 겨우 설득하시어 귀향시켰다. 외가댁에서는 여기저기 중매를 놓아 조건 없이 한시가 급하게 결혼을 서둘러 아버지와 혼례를 치러 정신대 차출을 모면하셨다.
결혼 후 들음 들음으로 알게 된 한동네와 앞 동네에서 경성방직 동기가 있음을 확인하고 틈만 있으면 서로들 오가면서 그 어려운 시절에 정신대 차출을 모면하고 결혼하여 백년해로함을 위로하면서 집안 간의 대소사에 남다른 마음으로 참여하고 친자매처럼 지내셨다.
어머니와 나는 20살 차이다. 어머니는 아담하시고 야무진 체격이셔서 연세보다 젊게 보이시고, 나는 체격이 크고 거칠어서 나이보다 많게 보이지만, 나와 어머니의 나이 차이를 상대적으로 훨씬 적게 보며 모르는 사람은 어머니를 새엄마로 보거나 누나와 동생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절을 좋아하셔서 나는 틈만 있으면 어머니와 절을 자주 찾았다. 언제인가 어머니를 모시고 어느 절에 올라가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어느 아낙들이 ‘나이 차이가 많아 보인다'며 부부로 착각하여 수군거렸다. 나는 재빨리 ‘어머니, 빨리 가요.’ 하면서 응수했더니 그 아낙들은 미안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후다닥 앞서갔다. 저만치 가더니 힐끗 뒤돌아보면서 재차 확인하는 것이었다.
생전에 정신대 할머니들의 고달픈 삶의 모습이나 전쟁터에 끌려가는 모습을 화면으로 보시면 ‘아이고 세상에나 저런 천벌을 받을 놈들’ 하시면서 한숨을, 일본인들의 만행에는 주먹을 불끈 쥐시고 방바닥을 치셨다.
올해는 임시정부 탄생 100주 년이고, 광복 74주년이며, 일본이 우리와의 무역 관계에서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등 어느 때보다 한·일간의 정신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가 버무려져 외교문제가 악화일로에 있다.
가끔 언론에 보도되는 평화의 소녀상을 많이도 보았는데, 모두 다 표정들은 달라도 눈빛은 한결같이 살아있어 돌아가신 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책임자의 진정 어린 사과 없이는 부릅뜬 눈을 감을 수 없다는 한서린 눈동자로 보였다. 영국과 일본은 섬나라로써 바다의 공포감이 위태로웠는지 양국은 똑같이 자기들 섬나라보다 몇 배나 넓고 안전한 대륙의 침략을 서슴지 않았으나, 영국은 유럽의 귀족과 신사답게 청교도 정신을 내세워 대륙의 침략을 진정으로 사과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은 제아무리 국제적 공조로 압력을 가해도 끝내 항복은커녕 가미카제 특공대를 조직 자살특공대로 끝까지 저항하다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결국 항복했던 인종이기에 정신대 할머니와 강제징용의 할아버지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게 하는 것은 원자폭탄 이상의 국민적 단결로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시절에도 국가와 개인은 용케도 버텨내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한 우리 민족의 저력이다. 이번에도 새 일왕은 “과거에 깊은 반성”… 아베는 ‘반성·책임’ 없다는 상반된 의견을 밝혔다. 하루살이의 유언으로 이해하고 싶다. 이제 어머니의 기일이 한 달 남짓 남았다. 어머니! 그 옛날 경성방직 동료들, 정신대에 끌려갔던 친구분들한테 어머니가 위로해드리고 부릅뜬 눈을 고이 감으시고 영면에 드시도록 돌봐주시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우리 국민은 기어이 일본 전범들이 영전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도록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빈다.
(2019.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