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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썼구나 상희야, 고맙다 그리고 미안해(양태연) 최종수정0925.hwp
애썼구나 상희야, 고맙다 그리고 미안해
양태연
상희야! 너를 불러보면서 떠오르는 모습을 연상해 보려고 해도 어릴 때의 해맑은 모습은 아니구나. 아픈 엄마 곁에서 자야한다며 서울에 집을 얻지 않고 매일 같이 새벽이면 대전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고 저녁에는 무척 피곤한 모습으로 집으로 오던 생활이 오송으로 이사를 오면서도 이어져서 어느 덧 5년은 넘은 것 같구나.
아빠는 매일 새벽 대전역이나 오송역까지 너를 데려다 주고, 저녁에는 늦게 데려오는 차안에서 나마 너와 잠시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단다. 몹시 피곤해 하는 너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위로의 말을 많이 해주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후회가 되기도 한단다.
엄마 치료 때문에 청주 성모 꽃마을에 머물러 있기 위해 우리가 오송으로 이사를 온 것도 어느덧 2년이 되어가는구나. 성모 꽃마을에서 보냈던 지난 1년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 치유받기 위해 모인 많은 분들과의 좋은 인연, 간절한 기도와 산책을 통해 몸을 회복하기 위해 보냈던 많은 시간들, 오송집은 잠시 쉬는 곳이고 매일 새벽과 밤 늦게 달리던 고속도로, 상희와 아빠가 나타나는 모습만 보면 안심하는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 짓던 엄마의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구나.
엄마가 너무 힘들어 할 때는 회사를 휴직을 하기도 하고, 주말이면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엄마 곁에서 병간호를 했던 네가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웃음을 잃어버리고 지금도 오송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 출퇴근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단다.
요즈음은 부쩍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아주 지친 모습으로 밤늦게 집에 들어와 혼자 방안에서 좋지 않은 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구나. 오늘 미사가 끝나고 같이 엄마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옆 좌석에서 두 손을 모으고 무척 지친 몸을 의자에 의지한 채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마음이 편치 않았단다.
전보다 더 많이 야원 모습으로 엄지 손가락을 비롯해 여러개의 손톱을 물어 뜯어 살이 보이고 피가 마른 흔적으로 보면서 요즈음 정말 상희가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힘들어 하는구나 하고 느꼈지. 엄마를 대신해 상희가 마음속을 터놓고 의논하고 얘기를 들어주고 조언해 주고 맛있는 식사라도 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단다.
그래도 엄마가 있을 때는 오랜 동안 낯설고 힘든 병간호를 하면서도 가끔은 엄마와 웃고 이야기하고 놀기도 하고 드라이브도 다니고 보문산 사정공원으로 산책도 많이 가곤 했는데.... 여름에 사정공원 정자에다 모기장을 치고 밤 늦게 까지 바람 쐬던 일들, 공주 갑사 가는 길에 있는 찜질방에 다니던 일들이 생생하네.
내일이면 벌써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구나. 작년 추석날 우리는 엄마와 긴 이별을 해야 했지. 7년간의 오랜 투병 생활에 너무 쇠약해진 엄마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30년간의 결혼 생활이 영화처럼 지나간단다. 작년 12월인가 4부작 TV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보고는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에 가슴속으로 많이 울었단다. 물론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그렇게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한건 아니지만…….
상희야! 요즈음 정말 힘들지? 건강도 회복하지 못한 채 아직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신적으로 견디기가 많이 힘들 텐데 이 아빠가 큰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게 너무 미안하구나. 평소에 너에 대한 아빠의 진심이 잘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좀 속상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는데 이 글을 통해 어느 정도 전달되었으면 좋겠고 빨리 옛날 어릴 때처럼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벌써 상희도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구나. 아빠가 다정다감하게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평소 상희에게 속마음을 내놓고 이야기를 해 보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흘러서 아쉬웠는데 이글을 통해 너에게 대한 아빠의 마음을 전하고 싶단다.
막상 이글을 쓰려고 하니 어디에서 시작할지 잘 모르겠는데 우선 너의 어릴 적 생각이 자꾸 떠오르네. 엄마 아빠가 대전 연구단지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해서 그런지 지금도 거기는 마치 고향처럼 너무 익숙한 거리가 되어 버렸지. 어은동 한빛아파트 앞에 놓인 갑천을 산책하기도 하고 카이스트 안에서 엄마 아빠 셋이서 드라이브 하기도 하고 뒷길을 따라 충남대학교 농대쪽 산길을 돌아 상희가 다니던 어은 초등학교에 가서 운동장을 뛰기도 하던 거 생각나니? 너는 유난히 달리기를 잘 해 운동회 때는 항상 1등을 하고 했었지.
먼저 엄마가 언젠가 아빠에게 미국에서 온 애디 오빠와 상희 싸울 때 왜 상희만 혼내느냐고 하던 게 생각이 나서 기회가 되면 상희한테 얘기해 주려고 했었단다.
어느 날인가 미국에 사는 애디 오빠가 한국에 와서 우리 집에 며칠 머물때였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애디 오빠와 상희가 싸우는 것을 보고 아빠가 상희한테 애디 오빠에게 사과하라고 하면서 상희를 혼낸 적이 있었지?
어린 상희는 애디오빠도 잘못 했는데 아빠는 나만 혼낸다고 울면서 엄마한테 얘기해서 엄마가 많이 화를 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단다. 그때 아빠가 다시 나중에 상희를 불러서 상황을 설명했어야 했는데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지를 못했어.
아빠는 어릴 적부터 동네 친구들과 싸움을 많이 했지. 내가 잘못 할 때도 있었고 친구들이 잘못 할 때도 있었지. 그런데 할머니는 항상 무조건 아빠가 잘못했다고 친구 부모님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그러셨단다. 억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나중에 깨달은 것인데 그렇게 하니까 어른들 간의 싸움으로 커지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었단다.
애디 오빠가 멀리 미국에서 이모 집을 찾아 왔는데 만약 오빠가 상희랑 싸워서 아빠한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면 이유야 어찌됐든 미국 이모 마음이 어떻겠니? 미국 이모랑 엄마랑 큰 말다툼이라도 날 것 같아서 그랬던 거란다.
워낙 외갓집 식구들이 아이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 않니? 오래전에 뉴질랜드에서 온 상협이가 외갓집 와서 너무 시끄럽고 심하게 뛰어 다니길래 잘못하면 다칠 것 같아서 아빠가 상협이한테 엄한 표정으로 그러지 말라고 한마디 했는데 뉴질랜드 이모가 아이한테 왜 그러냐고 아빠한테 얼굴을 붉히더구나. 아빠는 깜짝 놀랐지. 더 얘기하다가는 서로 관계가 너무 어색할 것 같아서 아빠가 미안하다고 그랬지.
그래서 상희만을 야단치게 된 건데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그때 상희를 조용히 불러서 달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 어린 상희가 오랫동안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후회가 된단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먼저 생각이 나 꺼내게 되는 구나.
또 한빛아파트에서 버드네 아파트로 이사 갈 때도 상희를 마음 아프게 한 적이 있지. 학교 친구들과 한창 어울리고 학교를 다니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 아빠는 상희하고 진지하게 상의도 하지 않고 전혀 낯선 동네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해 버렸지. 언젠가 상희가 자기에게는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이사를 간 것을 이야기 한 적이 있지?
매일 같이 엄마 아빠는 연구소로 출근하고, 상희는 할머니와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놀이방과 놀이터, 유치원 그리고 그때 사귀었던 친구들과 노는 게 상희에게는 너무 소중했을 텐데.. 친구들과 헤어지는 슬픈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 미안했단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 밤새 줄을 섰던 기억들,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너를 딸처럼 보살펴 주었던 덕우 아줌마, 서울에서 대전까지 내려와 놀이방을 하면서 너에게 많은 시간을 같이 해주었던 놀이방 선생님의 고마움을 아빠가 너무 쉽게 잊었던 것 같아.
그래도 너는 거의 내색을 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은 채 새로운 초등학교에 잘 적응해 주었지. 그래서 더 상희의 여린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단다. 나중에 네가 울면서 그 얘기를 할 때 서야 상희가 그때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새로 지은 아파트라 학원도 거의 없고 오로지 독서실 하나만 버드네 초등학교 건너편에 있던 거 기억나지?
상희는 항상 독서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였고 아빠는 12시 넘어서야 너를 독서실에서 데려오곤 했지. 이제 생각해 보면 너무 엄마 아빠만 생각하고 학원도 거의 없는 낯선 곳으로 이사를 와 너를 배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구나.
엄마는 다른 노는 아이들과 휩쓸려 어울리지 않도록 독서실 원장에게 상희를 성인 독서방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부탁했었지. 성인방에서 어른들과 같이 조용히 열심히 공부만 하던 너를 독서실 원장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했었단다.
항상 너는 엄마 아빠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누구도 하기 쉽지 않은 것을 거의 내색도 하지 않고 묵묵히 해냈던 너에게 정말로 고맙고 기특하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구나. 어쩌면 상희가 아무런 불평 없이 잘 해냈기 때문에 아빠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버드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개교한 낯선 태평중학교에 다니면서 방송반 활동도 하고 열심히 공부하던 예쁜 너를 많은 선생님들이 좋아하셨지.
어느 날 집 앞에 새로 생긴 영어어학원을 찾아 영어를 배우러 갔을 때 원장 선생님이 상희는 다른 학생들과의 같이 수업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너에게 민족사관고등학교 학생들의 생활을 담은 카세트테이프라고 하면서 건네주었던 건 너에게는 인생의 큰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아빠는 생각 해.
카세트테이프를 반복해서 보고 난 후 너는 그 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변변한 학원도 없고 이제야 개교한 중학교에서 네가 우리나라 최고의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싶다고 할 때 엄마 아빠는 그런 생각만으로도 기특하다고 생각했지.
물론 엄마 아빠는 너에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기가 어려워 가정교육도 쉽지 않은데 치열한 입시 공부만을 시키고 학원을 보내야 하는 일반 고등학교보다는 정말 교육다운 교육을 시킬 수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단다.
그 고등학교에 응시할 자격을 얻기 위해 상희가 토플시험 공부를 했던 기억을 아빠는 잊을 수가 없단다. 정말 네가 혼자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지. 아마 누구도 쉽게 그런 어려운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
중학생인 상희가 대학생들이나 보는 어려운 토플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과 대구를 갔던 기억이 새롭단다. 시험 감독관이 주민등록증도 없는 아이가 토플시험을 보는 게 신기하다고 하면서 계속 너를 지켜 보았다는 소리도 네가 한 적이 있지. 대구에서 토플 시험을 볼 때 아빠가 복도에서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느라 왔다 갔다 하면서 어린 네가 언제 나오는지 교실을 기웃거리던 기억이 나는구나.
특히 민사고 시험공부 때문에 방송반을 그만두려했을 때 이유를 모르던 과학 선생님이 너를 많이 야단치고 혼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엄마는 무척 화를 냈었지. 학교 선생님들은 상희가 학교장 추천서를 받기 위해 담임선생님에게 이야기했을 때에서야 상희가 그 고등학교 시험을 본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했지.
그때는 엄마나 아빠도 그 학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실감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 학교에 합격을 하고도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건지도 잘 몰랐단다. 학교 선생님들도 설마 설마 했지만 너는 우리나라 최고의 그 고등학교를 합격해서 학교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친척들을 놀라게 했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떠들썩했고 플랜카드가 학교 건물에 붙기도 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단다. 아빠는 신기해서 플랜카드 붙은 학교 건물 주위를 며칠 동안 여러 번 둘러 보기도 하고 상희랑 같이 학교 안을 돌아 보기도 했었지.
너를 혼냈던 그 선생님은 상희가 졸업식 할 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던 것 기억나지? 어린 학생에게 사과한다는 게 쉽지 않는데 그 선생님도 훌륭한 분이었던 것 같아.
아직도 상희가 고등학교 시험 보러 갈 때의 생각은 잊을 수가 없단다. 시험보기 전날 우리는 강원도 횡성 학교 근처의 어떤 낯선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지. 9월 어느 날 그날따라 유달리 별이 밤하늘을 수놓는 날 밤, 밤하늘의 별을 유달리 좋아해서 항상 꿈이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던 너희 엄마는 그날따라 너무나 밝게 빛나던 별들을 보고 창문 밖으로 손을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려 수많은 별들을 가슴에 안는 것처럼 하고는 다시 상희에게 다가와 너에게 모든 별을 주겠다고 하면서 안아주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단다. 너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해맑게 웃으면서 잠이 들었고 엄마와 아빠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뜬눈으로 지새웠지.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처음 가보는 학교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지. 학교 정문에 세워놓은 이순신 장군과 정약용선생의 동상, 웅장한 학교 건물, 기숙사 그리고 넓은 운동장등을 보면서 일반 학교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지. 특히 학교 안으로 들어갈 때 길 옆으로 노벨상을 받으면 동상으로 세워두려고 만든 돌탑들을 지나는 동안 이 학교는 설립 이념과 교육 목표가 어떨까 몹시 궁금해 하면서 정말 이 학교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많은 학생과 부모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운동장 뒤편에 모여서 웅성거리며 서로 시험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하고 뛰기도 하는 모습들이 눈에 선하단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고 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체육관으로 갈 때 나는 너의 여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별 생각 없이 “이제 너도 빨리 들어가”라고 얘기 한적 있지.
상희가 좀 더 있다가 들어가면 안 되냐고 하면서 애처로운 눈으로 엄마를 쳐다볼 때 나는 정말 상희의 여린 마음을 읽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단다.
지금도 아빠는 그때는 일을 잊지 않고 있단다. 시험이 끝날 때 쯤 너를 찾으러 체육관 입구로 갔을 때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정말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 것을 아빠는 미안했단다.
국어 시험에서 장문의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시로 쓰라는 문제도 나왔다는 것을 듣고 아빠는 과연 시험이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지. 문득 시험 보기 며칠 전에 너는 지인에게 소개받은 학원선생을 찾아가서 2일간 하루 2시간씩인가 논술 작성하는 방법을 배웠던 기억이 난단다. 지금 생각해도 그 정도 학원 다니고 가능했는지 궁금하단다.
네가 합격을 했다는 소식을 학교 사이트를 통해 확인했을 때 너무 기쁘기도 했지만 며칠 동안 엄마와 아빠는 크게 실감하지 못했었지. 다른 사람들이 축하한다고 사방에서 전화가 올 때서야 비로소 상희가 큰일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단다.
학교에 입학 후부터는 기숙사 생활 때문에 한 달에 한번 밖에 집으로 오지 못하는 학교 규칙과 엄마의 너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표현으로 거의 모든 대화를 독점해버린 상황에서, 아빠는 상희의 학교생활 대부분을 엄마에게서야 들을 만큼 상희와의 대화 시간은 많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빠는 상희가 혼자인데다가 늦게 태어나서 좀 더 강한 아이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더 무뚝뚝하고 다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언제나 스스로 결정하는 습관과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앞서는 바람에 좀 더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상희가 더욱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바쁘다는 핑계로 할머니에게 너를 맡기고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많이 후회가 돼. 넌 거의 선행학습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입학을 하여 한동안 학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큰 불평불만 없이 잘 적응해 주었지. 물론 거의 엄마하고만 얘기해서 많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한번은 상희는 엄마 아빠에게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민사고에 보내준 것 같다”고 얘기 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의 치열한 학교생활이 너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도 아빠는 그렇게 깊이 이해하지 못했단다.
다만 가끔 강원도 횡성을 엄마랑 같이 차를 몰고 가는 시간들이 이제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지. 그리고 면회를 가면 예쁜 한복을 입고 반기면서 기숙사를 보여주고 친구를 소개해주던 기억이 생생하구나. 엘리베이터에 적혀 있는 학교 이념과 상희를 태우고 학교 근처를 드라이브 하던 생각이 가끔 나기도 하고 강원도로 가는 영동 고속도로를 가노라면 산 근처에 웅장하게 서 있는 학교를 보면서 뿌듯하기도 했었지.
어느 날인가 상희가 몸살이 심하게 걸려서 일요일에 학교 버스를 타고 복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학교 버스를 놓쳐 버린 적이 있지. 아빠가 학교에 전화를 해서 선생님에게 상희가 지금 몹시 아파서 그러니 월요일 아침에 상희를 학교로 보내주면 안되냐고 물었더니 아파도 학교에 와서 있을게 좋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아픈 너를 태우고 중부고속도로를 달릴 때 였지.
너와 엄마는 같이 뒷좌석에 타고 서청주 근처 고속도로를 달리 때 옆에 달려가던 차가 문을 열고 손가락으로 우리 차 뒤를 가리키면서 뭐라고 소리치며 지나가길래 처음에는 욕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차를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두고 뒤를 살펴보니 뒷바퀴가 펑크가 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는데……. 아픈 너를 빨리 학교까지 데려다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달리다 보니 바퀴가 약간 기울어진 것을 모르고 달렸던 거지.
보험회사를 불러서 뒷 트렁크에 있던 보조 바퀴로 갈아 끼우고 우리는 다시 학교로 달려갔지. 밤 늦게나 학교에 도착해서 아픈 너를 기숙사로 보내고 오는 길에 엄마 아빠는 많이 속상하고 걱정이 되었단다. 그 후 전혀 운전을 하지 못하던 엄마가 너를 위해 아빠 혼자 대전에서 학교까지 차를 몰고 가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니? 참으로 엄마의 너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는 생각을 했단다.
어김없이 새벽 6시에는 일어나 체육관에 가서 검도를 해야 하고 공부하느라 늦잠이라도 자서 지각을 하게 되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법정에 가서 재판을 받고 벌점을 받았다고 하던 너의 학교생활이 정말 생생하구나. 그때 찍었던 사진들이 어디에 있는지 이사하면서 없어진 것 같아 이번에 이사하면서 다시 찾아봐야겠어.
입학을 할 때 국내반으로 들어간 너는 학교에서는 국내 입시를 위한 별도의 준비과정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걱정하며 불안해했었지. 국내반에서 국제반으로 옮기기는 정말 어렵다고 하면서 대학은 외국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듣고 아빠는 정말 많은 고민을 했었단다.
많은 아이들이 너무 어릴 때 유학을 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거나 방황하면서 아이와 부모 모두가 힘들어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았던 아빠는 상희도 이러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었지. 하지만 민족사관고등학교를 2학년 1학기까지 다녔으면 이미 자신의 가치관이나 정체성, 그리고 국가관 등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유학을 고민하기 시작하게 된 거지.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우리는 우연히 영국 유학을 소개했던 분의 도움으로 영국 고등학교를 살펴보기 위해 영국에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영국은 고등학교가 2년 과정이라 졸업할 때면 지금 같이 다니던 민사고 아이들과 같은 시기에 대학을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소개한 분과 함께 유명한 몇 개의 사립 고등학교를 방문했던 기억이 난단다. 그 학교들은 민사고와 학교 분위기도 비슷하고 대부분이 영국인 학생뿐이어서 그럴 거면 그냥 민사고를 그냥 다니는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오려 했었지.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국학생이 전혀 없고 세계 각국에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영국의 웨일즈에 있는 국제고등학교에 가서 학장님과 상희가 영어 인터뷰하고 바로 합격을 알려 주면서 9월 학기에 입학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결정이었던 것 같아.
오래된 성을 학교로 개조한 그 학교는 정말 넓고 학교 앞의 넓은 바다는 정말 멋진 광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밝고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학생들, 기숙사 벌레 때문에 상희가 잠을 설친다고 하던 얘기가 기억에 남는단다. 아빠는 결정은 하였지만 너를 혼자 영국으로 보내 생활하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려 몇 번이고 너에게 가고 싶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돌아와서 민사고의 교감선생님과 상희의 유학에 대해 면담할 때 상희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였더니 처음에는 학교생활을 적응하지 못해서 유학을 가는 걸로 생각한 교감선생님은 그냥 학교생활을 즐기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구나. 내가 그 학교의 배경과 학습 내용을 설명하니 그 학교는 민사고 보다 더 도전적인 학교라고 하면서 기뻐해 주시던 모습이 생각이 난단다.
전 세계 각국의 최고의 학생들이 모여든 그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희가 한국을 대표하여 전교학생들이 모인 축제에서 민사고 다닐 때 가지고 있던 가야금으로 아리랑을 연주하였다고 전화로 얘기해 주고, 중국 애들과 한국 영토에 대해 논쟁을 했다고 얘기해 주었던 거 기억이 생생하단다.
상희야! 네가 그렇게 대단한 아이야. 혼자 너를 그 먼 학교에 보내고 나서도 너무나 먼 나라여서 졸업할 때까지 2~3번인가 밖에 가보지 못했지. 바쁘기도 하였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상희가 알고는 자주 안와도 된다고 했지. 상희가 겉으로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얼마나 엄마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 했을까 깊이 헤아리지 못했던 거 같아.
지금도 방학이 끝나고 인천공항에서 상희가 혼자 가방을 들고 출국장 안으로 들어 갈 때는 아빠 혼자 가슴이 아파 눈물을 훔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단다. 컴컴한 공항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너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정말 아빠가 상희한테 미안한 마음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여린 너를 너무 가슴 아프게 한 것 같구나.
아마도 경제적인 문제만 없었으면 좀 더 자주 가보던지 아니면 엄마랑 같이 보내주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후회가 많이 된단다. 상희가 너무 알아서 잘하니까 그만큼 믿어서 그랬던 거 같아. 방학 때 한국에 와서도 너는 엄마와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크게 내색을 내지 않고 용돈을 쓰라고 주어도 너는 오히려 남겨 오곤 했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상희가 중국, 영국, 미국, 나이지리아, 일본 등 70여개의 각국의 친구들과 사귀기도 하고, 방학 때는 독일, 프랑스, 중국 등으로 혼자 다니기도 하고 하면서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곤 했지.
가끔 너를 돌봐 주겠다고 하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심적 고통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상희가 너무 외롭고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단다.
어느 날인가 국제고등학교 다닐 때 중국 학생들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 활동하러 간다고 하면서 중국의 시골에 갔다가 온 몸에 벌레에 물려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었지. 다음 해에 그곳에 엄청난 지진이 나서 도시가 폐허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단다. 정말 큰일 날 뻔 했었다고 엄마한테 몇 번을 말했던 기억이 난단다.
상희가 미국 대학을 가기 위해 SAT 시험공부를 할 때나 자기 소개서등을 쓸 때도 아빠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단다. 각 대학마다 응시 원서를 제출할 때도 대학에 직접 전화 통화를 해서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걸 보고 너무 놀랍고 대견했단다.
상희가 처음 들어가기를 원하던 대학에 합격 통지서를 받지 못해 미안하다고 울면서 엄마와 아빠한테 얘기를 할 때는 가슴이 뭉클했단다. 아빠는 마땅히 위로도 못해주고 엄마만 괜찮다고 다독거려 주었지. 그러나 너는 미국 중부 최고의 명문대학을 당당히 합격하고 경제학과 심리학을 복수로 전공하면서 최우수등상을 받고 졸업하지 않았니?
같은 민사고 동기들을 미국대학에서 만나고 그 얘들보다 1년을 먼저 졸업을 하였으니 아빠가 얼마나 뿌듯했겠니? 공학이 아닌 경제학이나 심리학은 정말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 거의 수업을 들을 수가 없을 만큼 어려운 분야라는 걸 아빠는 안단다.
너는 4년 만에 졸업하기도 정말 어려운 그 대학을 매년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엄마 아빠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3년 만에 조기 졸업까지 하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일이었지.
민사고 다닐 때 하던 영어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상희가 얘기할 때는 정말 상희가 노력을 많이 했구나 생각했단다. 그리고 그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교수에게 수업을 듣고 직접 찾아가서 질문하고 토론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아빠는 너무나 자랑스러워 남들과 이야기할 때는 항상 그 이야기를 하곤 했지.
졸업을 앞두고 상희가 너무 힘들어 하는 것 같아 엄마가 직접 너의 대학 기숙사에 가서 3개월 동안 같이 보냈던 시간이 아마도 상희에게는 가장 잊지 못할 시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빠는 상희 학교도 졸업할 때나 가 보았으니 상희가 아빠를 많이 원망했을 거야.
졸업식 날 식장에서 네가 상장을 받기 위해 교단에 올라 설 때 옆에 앉아 있는 한국인 학부모가 엄마 아빠를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면서 정말 축하한다고 할 때를 나는 잊지 못한단다.
또 그 학교 어드바이저가 보내준 메일 내용에 너는 영웅이라고 표현해 줄때는 아빠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단다. 그 학교의 3년 석박사 통합과정 제안도 거절하고, 세계적인 미국 투자기업에 입사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정말 상희가 힘들게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너무나 자랑스러웠단다. 아마도 그때 석박사 통합과정을 들어가서 문제없이 과정을 끝냈다면 너는 25살이면 박사학위를 받았겠지.
3개월 동안 엄마가 미국에서 아빠에게 보내 주었던 상희의 자랑스러운 일들은 지금도 메일과 사진들을 가끔 보곤 한단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러 사 진들을 찾아보고 있어.
네가 졸업식을 마치고 같이 한국으로 돌아 왔어야 했는데 너는 대학원을 가기 위해 GRE시험을 보고 오겠다고 엄마와 같이 1개월을 더 있었던 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 큰 욕심이었던 것 같구나.
귀국하던 그날부터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엄마의 7여년에 걸친 기나긴 암투병 생활은 시작되었고 상희는 모든 걸 포기하고 엄마 곁을 지켜야 했지. 빨리 잊고 싶은 일들을 아빠가 다시 생각나게 해버렸네.
가끔은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서 암수술을 받은 후 치료하기 위해 매일 새벽 출근하는 상희를 대전역으로 태워다 주고 보문산 사정공원으로 가서 엄마와 아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송학사 절까지 거의 4키로 되는 산길을 산책하던 많은 시간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
더 이상 병원은 믿지 못하겠다고 산이고 공원이고 찜질방이고 좋다고 하는 데는 다 다녀보고, 내 스스로 병을 고쳐보겠다고 다짐하고 많은 병원 의사나 줄기세포 연구하는 연구원들, 대전의 한의학 연구원, 대전대 한방병원 등을 찾아 다녔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단다.
그래도 성모 꽃마을에서의 일 년간은 엄마가 안식처를 찾은 것 같아서 그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이번 추석이면 벌써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구나. 매주 일요일이면 같이 성당에 가서 미사하고 같이 엄마 산소를 갔다가 세종 도서관을 가는 것이 1년이 되었네. 아직도 엄마가 통증을 이기기 못해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도와달라고 하던 생각이 떠오를 때는 너무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곤 한단다.
거의 5년 이상 어려운 영국과 미국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돌아와서 이제야 좀 편히 상희와 같이 즐겁게 지내면서 온 가족들이 같이 보낼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해 너무 안타깝단다.
엄마의 투병 생활로 인해 7년 이상을 엄마 곁을 지키고 서울까지 출퇴근하면서 직장을 다니느라 고생해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지금 너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안식처가 무엇보다 필요할 텐데 아빠가 해주지를 못해 너무 미안하구나.
이제 겨우 정신 차릴 때 쯤 되니 이번 건강검진에서 상희가 건강이 안 좋다고 하니 너무 불안하고 가슴이 아프단다. 결과가 제발 좋게 나왔으면 좋겠어. 그리고 빨리 해맑게 웃던 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부끄럽지만 아빠가 상희의 헤아리기 어려운 깊은 마음을 시로 한번 적어 봤어.
자연이 만들어낸 온갖 모양들이
오묘하고 아름답기가 그지없구나.
내 그 끝을 들여 다 보려 애를 써보나
너무나 넓고 깊어 볼 수가 없네.
한순간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니
다름 아닌 본디 그곳이 네 마음이었구나.
아빠하고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도 없었고 또 엄마와 할머니가 상희를 많이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아빠의 사랑이 그렇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거야.
요즈음 가끔 생각해 보면 나는 상희를 엄청 사랑하고 있는데 내가 너무 무뚝뚝하고 말을 잘 하지 않아 상희가 아빠의 사랑을 까마득히 모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단다.
상희야! “슬픈 영혼은 세균보다 더 빠르게 너를 죽인다”는 말이 있지 않니? 이제는 하루 빨리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 밝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렴.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이상이 실현될 때까지 병도 걸리지 않고 늙지도 않는다.”고 하시던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상희하고 진솔한 대화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또 다시 네가 서울에 혼자 집을 얻어 생활하게 되면 자주 만나기도 쉽지 않을 텐데 몸이 정상이 아니라 많이 걱정된다. 또 많은 시간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희가 많이 지쳐 있을 너에게 아빠가 큰 그늘이 되어 주질 못한 것 같아 항상 미안한 마음이구나.
아빠가 지금까지 상희에게 공부하라고 말을 해 본적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 그 대신 상희 앞에서 항상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단다. 집안 어른들을 대할 때도 항상 마찬가지였지.
그게 진정한 가정교육이라고 아빠는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엄마가 아빠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오해를 하며 크게 화를 내고 할 때에도 언젠가 상희가 성인이 되면 아빠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단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엄마처럼 적극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오해가 풀리고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아빠 생각이 부족했던 것 같다.
아빠가 몇 주 전에 카이스트에 가서 강연할 때 들려 준 내용 중에 신뢰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단다.
조직에서 구성원들 간에 신뢰가 부족하게 되면 서로가 대화가 단절되고 건전한 토론을 회피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조직에 참여하려 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게 되지. 그리고 모든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결국에는 그 결과에 무관심하게 되어 조직력은 무너지게 된다는 내용이었단다. 조직이 강하려면 구성원들 간에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지.
집안에서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아. 요즈음 상희가 너무 말이 없고 집에서도 방안에서 혼자 있고 식사도 거의 아빠 혼자 하게 되니까 가끔 상희가 아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거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단다.
이제 마무리 해야겠다. 자꾸 읽어 보아도 뭔가 표현이 많이 부족한 것 같네. 하루빨리 건강 빨리 회복하고 상희를 평생 동안 지켜주고 사랑해 줄 좋은 사람을 빨리 만났으면 좋겠어. 그리고 좀 더 여유가 되면 아직 마치지 못한 공부를 좀 더 해서 학위과정을 끝내고 정말 상희가 하고 싶은 분야에서 즐겁고 보람된 일을 했으면 좋겠어. 아마도 하늘에 있는 엄마도 가장 바라는 걸 거야.
앞으로 아빠가 좀 더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상희도 마음의 문이 닫혀 있다면 이제부터 활짝 열고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늘 긍정의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정말 애썼구나. 고맙고 그리고 미안하구나. 사랑한다 상희야.
2018년 9월 23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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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감명깊은 글이었습니다. 아직 이별의 슬픔도 채가시지 않았을텐데 훌륭한 아빠와 딸 의 교육이 우리에게 귀감이됩니다. 민족사관학교 처음 개교하기전 그학교를 둘러보고 우리나라에서가장 좋은시설에가장좋은 교육으로 설립했다는 안내를 받았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서없는 글을 쓰려다 보니 부족한게 많아 부끄럽습니다.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