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솔 문학회의 20주년 기념 집 발간을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을 회상하니 감개무량합니다. 푸른솔 문학회가 발족할 때 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자원이 없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고 의욕만 가지고 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지도교수님의 야망과 정열적인 희생정신과 적극적인 노력으로 점차 전회원이 단합하여 문학회가 견고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수님의 지도하에 회원들이 힘을 합해 제1회 푸른솔 문학지를 출판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문학회는 마침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회원들도 점차 늘어서 체계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지요.
지금 생각하니 20년 동안 문학회가 너무나 많은 것이 변화되고 성장했습니다. 1회와 3회의 회장을 맡은 사람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모든 업무를 성의를 다하여 봉사하는 임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0년간 문학회를 분신같이 여기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전회장들과 임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사랑과 배려로 제자양성에 힘쓰시는 지도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사는 하와이에서도 늘 문학회를 위해 응원하겠습니다. 앞으로 푸른솔 문학회가 세계적인 문학회로 도약할 것을 기대합니다.
푸른솔문인협회 20년을 회고하며
김정자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 창작 교실이 처음 개강할 때 소녀 시절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고자 충북대학교를 찾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김홍은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이듬해쯤 1998년 5월에 김홍은 교수님께서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2대 원장님으로 취임하시고 원우회라는 학과마다 회장단이 만들어졌을 때 수필 창작 교실 대표로 참여하여 2대 원우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해 처음으로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원우회 축제의 밤이 열리게 되었을 때 학과마다 장기자랑도 열렸다. 캄캄한 한밤중 넓은 운동장에 캠프파이어를 할 때 우리 수필창작반은 시 낭송과 수필낭독으로 그 밤의 분위기를 고조로 올렸던 수백 명의 원우회원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이 충북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평생교육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대학마다 평생교육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개강한 학과 중 수필 창작 교실이 단연 최고의 인기 과목이 되었고 김 교수님의 유명세가 알려지기 시작한 황금기가 되었지 싶다. 회고하건대 그때 수필 창작 교실에 모여든 학생들은 주로 사오십 대 젊은이들이었다.그때 적 그렇게 젊은 여성들이 지금 칠십 대가 되었으니 할머니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교수님도 그때는 패기 왕성한 젊은 시절이셨다. 무정한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버드나무와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덕면 병암리에서 도로 확장 공사(2001년)로 잘려나갈 위기에 놓인 버드나무를 살리기 위한 활동이 계기가 됐다. 김홍은 교수는 당시 도로 확장공사로 500년 된 버드나무 5그루가 잘려 나갈 처지에 놓인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이원종 지사 시절, 충북도청 산림과가 도민들 앞에 내세운 슬로건인 산림문화 정신으로 ‘손자 숲 가꾸기’이었다. 김 교수님은 “손자 숲은 가꾸고 500년 된 할아버지 나무는 베어도 되느냐”고 주장을 내세우며 충북도청을 찾아가서 관계 공무원을 설득했다. 푸른솔문학회원과 충북대평생교육원 수필 창작 교실 수강생, 충북대 임학과 학생 1,200여 명이 도청 홈페이지에 도민의 소리를 올렸고, 신문에는 “이원종 지사님께 드리는 글”까지 게재하였다. 끝내는 이를 성사시켜냈다. 도로의 노선이 버드나무를 비켜 가도록 변경케 함으로써 수령 500년 된 버드나무를 살려낸 일명 병암리 버드나무 살리기 운동으로 푸른솔문학회 역사에 기록되었다.
두 번째 잊지 못할 뜻깊은 봉사활동으로 농촌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고구마 팔아주기가 전개되었다. 지금 기억으로 고 김학영 회원은 자가용을 이용하여 고구마 수백 짝을 나르며 청주시내 아는 사람들에게 팔아주는 데 앞장서서 봉사하였다. 교수님께서 한마디 말씀만 떨어지면 무엇보다 제일의 목표로 삼고 밤늦도록 고구마를 팔아 농촌을 돕겠다며 한마음 한뜻으로 허우적대던 때가 나의 한창 젊었을 때인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그때 나이 이순이 다 되었을 때이니 청춘도 아니었다. 지금은 80을 바라보니 그때가 청춘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1997년부터 수필 창작 교실에 입학하여 삼 년 동안 함께한 문우들은 열정적이었고 한 사람 두 사람 등단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2000년도 3, 4월 한국수필에 봄이 오는 소리 외 1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푸른솔문학회의 초대 정태익 회장님 당시 박미향이란민화 작가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박미향 부회장은 개인 사정으로 6개월 만에 문학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부회장에 내가 선출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1999. 9. 9 창단하여 2000년 3. 9일 부회장으로 취임하였을 때 중앙 문예 진흥기금에 대한 정보를 듣고 막연하게 신청했다. 선정되리라는 생각은 1%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낱같은 기대가 실제로 당선 소식이 왔을 때는 꿈만 같았다. 그 시절만 해도 250만 원은 큰돈이었기에 꿈도 꾸지 않았다. 2001년 중앙 문예 진흥기금 250만 원을 지원받아 푸른솔문학회에서 제1회 도민 백일장을 개최하는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김홍은 교수님의 얼굴도 상기되었고 정태익 회장님을 비롯한 푸른솔문학 회원들은 기뻐했다. 그 당시에는 충북도청에서의 문예 진흥 지원금 제도가 전혀 없었을 때의 시절이었다.
창단한 지 2년 만에 중앙에서 지원금을 받아 충북 도민 백일장을 시행하는 날은 날씨도 청명한 충북대학 잔디밭에서 글 쓰는 도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푸른솔문학회 회원들도 오래된 문학회에서 시작 도 못한 행사를 우리 문학회가 ‘충북도민백일장’ 행사를 하게 되어 푸른솔문학회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되었던 표정들이 지금도 보이는 것 같다.
제1회 충북도민백일장 대상에 홍성란 이란 젊은 여인이 뽑혔다. 그녀는 그때를 계기로 충북대학교 수필 창작반에 입학하여 함께 수업하기 시작하여서 푸른솔문학회 4기 회원으로 입회한 후 푸른솔문학회 사무국장까지 역임하는 열정적인 회원이 되었다. 홍성란 외 김여정 류귀현 양수남 회원도 4기인 걸 보면 이때부터 푸른솔 문학회가 최고의 활성화가 되었지 싶다.
1999. 9. 9 열일곱 명이 창단할 때 푸른솔문학회란 명칭을 선택할 때 김홍은 교수님께서 칠판에다 회원들이 거명하였던 명칭들을 거의 10개 정도 적어놓고 다수결로 정한 것이 ‘푸른솔문학회’란 명칭이 큰 차이로 뽑히게 되어 만장일치로 그 명칭을 쓰기로 결정하고 2000. 5. 10 일에 ‘푸른솔 문학’이란 제호로 창간호를 출판하게 되었을 때는 회원이 33명으로 늘어났고 거구장 문화공간에서 청주 시내 유명 문학 인사들을 초청하여 아주 멋지게 자축연을 열기도 하였다.
* 수필창작교실 수강생으로의 회고담 ?
* 원우회 밤 수필반 대표로 박미향이 살풀이 춤을 ?? 잔디밭 무대에 나가 회원들이 작품낭송을 ??
* 푸른솔창립 과 회장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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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문학회 20년 회고담
김 선중
1998년 IMF 사태를 겪고 이듬 해 1999년 봄이 왔다. 금 모으기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절 큰 프로젝트가 취소되고 직원들이 건축사사무소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에서 알고 지내던 CHOI가 충북대 평생교육원 수필반을 수강하자고 제안하였다. CHOI와 잘 아는 B건축사도 같이 수필반에 발을 들여 놓았다. 수필이란 자기 경험과 삶을 담담히 써내려가는 것이라는 선입관은 첫 날 지도교수의 수필이란 곧 문학이라는 일갈에 깨져버렸다. 작가가 되지 않고 대충 글을 쓰려면 시작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톡특한 성격의 교수님으로 다가왔다. 대학시절 방학이 되면 고향 집에서 밤을 새우며 닥치는 대로 읽었던 세계 한국문학전집 수필집 시집 등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마음을 다져 먹었다. 처음 쓴 글이 청주 처음 올 때의 프라다나스 길을 지나던 감상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지난 경험을 적는 일부터 시작한 수필이 학기 말에 가서야 문학적 표현과 감상을 어떻게 조리 있게 전개 하는 것이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체득하였다. 그 해 겨울 “제야의 종소리”라는 제목의 수필을 발표하니 많은 발전을 하였다고 격려해주시던 문우님들과 교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1999년의 봄 사무실을 접고 서울의 중견 회사의 중역으로 근무하게 되어 자연히 청주를 떠나 서울생활을 시작하였다. 주말부부로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청주로 내려오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수필반을 못나갔으나 그때 문우들의 등단식이 계속 열리는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나가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어느 날 푸른솔문학회가 창단되어 창간호를 발간하니 글을 내라는 소식이 욌다.창단식 하는 날은 근무 하는 날이라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창간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몇 년 후 청주로 내려와 건축사사무소를 개설하고 수필반에 나간 것이 2002년이었다. 옛날의 문우들이 몇몇 남아 있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새 얼굴들과 목요일 오후에 평생교육원 수필반에서 수업을 받았다. 평생교육원 조그만 별관은 숲속에 둘러싸여 있어 독립된 자연친화적인 교실이었다.교내 도로에서 조금 내려가면 푸라다나스나무 밤나무들이 우리를 반겼다. 바람이 불면 잡초도 몸을 뒤척이며 대화하였다. 문우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벤취에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벤치에 나뭇잎이 쌓였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같이 흩어진 문우들의 미소와 음성이 그립다.
푸른솔문학회 동인지를 내면서 제목을 “청솔바람소리”라고 하자고 육정숙 작가가 임원회의에서 제안하였고,내가 다음카페에 푸른속문학회를 만들자고 제안하며 임계남이 카페지기를 한 것이 그 시절이었다. 임계남에 이어 2대 카페지기를 내가 하였다. 그 해 푸른솔 문학회 사무국장을 맡고서 활동을 하던 중 마산에 대형프로젝트를 수주하였다. 현장에 상주하다보니 푸른솔문학회 목요일 모임을 참가할 수 없어 바로 사무국장을 정상옥 작가에게 인계하였다. 그 후 머나먼 고향같이 내 한 구석에 푸른솔문학회가 자리 잡았다.
2004년 겨울 “별빛 내리는 다리”로 김홍은 교수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시상이 떠오를 때면 가끔 붓을 든다.
푸른솔문학회 창단 이십 년이 다가오면서 옛날 수필반 교실을 방문하였다. 벤취는 그 자리에 있으나 낡았고 푸라다나스나무 그늘 밤나무 향기는 여전하였다. 벤취에 앉아보니 엣 문우들이 수업 시작 전에 오는 길목에 앉아 서로 인사를 나누던 장면이 보이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린다.옛 일을 회상하며 감회가 깊었다. 20년의 연륜이 나무에 나이테로 새겨졌으리라.
고민: 詩는 식제함.
그 시절
* 푸른솔문학 20년사는, 당시 사무국장으로서의 회고담이 필요합니다.
* 수업이 끝나면 사무국장이 회원들에게 인생은 베풀며 사는 삶임을 은연중에 많이 담아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 수안보에서 수강생들의 첫 나들이 때, 문학이 정이 뭐길래, 서울에서 퇴근후 300리 길을 마다않고 달려온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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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축 작품을 하나로 묶을 것
사무국장 임명을 받고
부서지듯 쏱아져 내리는 아침 햇살이 참으로 아름다운 봄 날입니다.
보일듯 말듯 망울져있던 바이올렛 꽃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어느새 활짝 피었네요.
언제나, 어디서나 보고있어도 그리웁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듯
정겨운 푸른솔 문학회 문우 여러분!
겨울 동안 건강 유지 잘하시며 편안들 하셨는지요.
지난번 총회때 결의되었던 신.임원진중에서 김 선중 사무국장님께서 개인 업무상
불가피한 사정으로 역활수행에 시간이 부족하여 사무국장 업무를 대신하게된
정 상옥 인사드립니다.
푸른솔 문학회는 지금까지 전임 회장님들을 중심으로 임원진 여러분의 지혜와 회원님들의 협조아래 날로 발전되었고, 문단에서 큰 역활을 하는 일원이 되었음을
회원 한사람으로써 큰 자부심을 느끼고 살고있습니다.
단단한 초석을 바탕으로 이제 새로 취임하신
장 석노 회장님을 중심이 되어 회원 여러분의 관심과 협조를 자양분으로 삼아 푸른솔의 장엄함을 보여주는 한해가되길 빌고 또 기도해 봅니다.
문학의 길을 함께 가는 인연과 인연들이 모여 세운 푸른솔 문학회는 어느 한사람 개인의 것도 아니지만 또 엄밀히 따지다 보면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저 정상옥은 사무국장이란 직책을 갖고 푸른솔 문학회의 보다 큰 발전을 위해 조금도 게으르지 않는 노력을 할것을 회원님들께 약속드리면서 또 회원님들의 따뜻한 협조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모태이고 고향이며 친정이되는 푸른솔 문학회는 회원님들의 정서적인 쉼터이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지친 삶을 푸근하게 포용해 줄수있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김 선중 회원님께서는 하시는 일이 번창하시어 빨리 푸른솔 문학회에 기둥이되어 활동해 주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바쁜 와중에서도 항상 염려와 협조를 아끼지 않고 도와주시는 김 선중님께 회원님들께서 감사 인사를 드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회원님들께서 푸른솔 발전을 위한 의견이라면 사무국장인 제게 어떤 질책도, 격려도, 조언도 너무너무 감사히 받겠사오니 자주 자주 만남의 자리도 만들고 많은 대화도 나누어 푸른 솔바람 향에 흠뻑 취하는 삶이 되도록 기원합니다.
장석노 회장님의 불같은 열정과 김홍은 교수님의 진취적 지혜, 회원님들의 문학의 열의가 함께 맞잡으면 얼마든지 청청한 소나무로 위상을 높일수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힘을 주십시요.
그리고 다함께 어께를 맞대고 회원 서로를 사랑하자구요.
무엇보다도 뿌리인 푸른솔을 잊지말아요.
우리는 당당한 문학인 입니다.
봄을 맞으며 더욱 행복해지시고 아름다운 작품 많이 남기는 나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무국장 정 상옥 드림
회 상
정 상 옥
어느덧 이십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새천년을 한 해 앞둔 초 가을날 이었나보다. 그때도 오늘처럼 여름날 끈적이던 상흔들을 청솔바람에 씻으려는 심사인지 매미는 구슬프게 울부짖었었다.
구월 아흐렛날, 충북대 평생교육원 뜨락에서 김홍은 교수님을 중심으로 푸른 솔 문학회라는 주춧돌 하나가 놓여졌다. 그때 김홍은 교수님의 지도아래 나도 문학이란 새 문을 열고 문학인의 첫걸음을 떼어 놓았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깨우치지도 못한 문외한인 나는 같은 정서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그저 좋기만 했다. 또한 세상사에 적당히 물들어 존재감을 잃었던 여인네가 꿈으로만 알던 작가란 또 다른 삶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신성한 순례길 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수필 한편을 써서 문학교실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바닥에 뭉개져 있던 자존감이 우뚝우뚝 살아나는 것은 그야말로 희열이었다.푸른 솔 문학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문우들과 어우러져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꿈과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감성들과의 조우는 그야말로 내겐 행복한 충격이었다. 흩어졌던 삶의 편린들을 한 조각씩 맞추어가며 엉킨 감성의 실타래에서 추억을 끌어올리는 작업은 밤을 새는 줄 몰랐다. 그렇게 몇 년을 잃어버린 자존을 찾아 솔바람처럼 살았다.
과한 욕심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새로운 삶을 맞이하며 꺾일 줄 모르고 우후죽순처럼 커가는 기세가 열정인줄만 알았다. 문학회가 설립 되고나자 몇 해 동안 지도교수님을 중심으로 임원진과 문우들은 문집발간과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하며 푸른 솔의 기상을 높여가려 동분서주 뛰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선지자가 가는 길을 모두 절대적으로 따르는 건 아닌가보다. 외부손님까지 초대하여 준비한 큰 문학행사에 안하무인인 한 회원의 몰상식한 방해 행동은 문학회원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또 어느 해였던가. 한해를 추수하듯 회원들의 작품을 모은 문집이 발간되어 평생교육원 교실로 배달 되던 날이다. 모두들 본인들의 글이 활자화되어 책으로 묶인 것을 감격해하며 들떠있을 때 책 한 더미가 김홍원 회장님 앞으로 내동댕이쳐졌다. J회원의 작품이 어찌된 이유인지 누락되어있었고 그 불찰로 김홍원회장님과 사무국장인 나와 편집임원들은 J회원의 벼락같은 호통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임원진 모두의 석고대죄로 그 회원의 마음은 누그러졌지만 내동댕이쳐진 그 책에 실린 푸른 솔 회원 얼굴이 내동댕이쳐진 것 같아 더 괴로웠다.고고한 학처럼 선비 같던 김홍원 회장님의 핏기가신 하얀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문학회가 설립되어 여물지 못한 시기라서인지 지도교수님과 회원 간의 잡다한 이유로 벌어지는 분쟁도 많았다. 사무국장이란 직책으로 서로 간에 융화를 위해 냉철한 판단력이 서질 않았고 양쪽이 다 버겁기만 했다. 무엇을 위한 문학이고, 누굴 위한 문학인지 나 자신에게 반문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회의감이 들었다.그즈음 문학공부의 울타리가 돼주시던 지도교수님의 따끔한 조언조차 따갑게 들려왔고 자존심의 폐부를 찔러댔다. 글보다는 사람이 먼저라고, 작품과 작가의 인격이 같아야한다며 기세에 가해지는 일침은 청청한 솔잎보다 더 따갑고 아프기만 했다.
낭득허명을 깨우쳐 주시는 은사님의 회초리였음을 여린 여심은 짐작이야 했을까. 자괴란 골짜기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급기야 푸른 소나무 울타리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아무리 험한 가시밭길 같은 세월이었다 해도 지난날을 회상하는 건 인지상정인가보다.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며 뛰쳐나간 문학의 고향 언저리를 어느 순간 나는 다시 와 있곤 했다.
한 치의 오만도 용납하지 않고 청솔 잎 다발로 자존심에 여지없는 일침을 가하시던 교수님을 북풍한설보다 더 냉정하게 돌아섰던 내가 때론 억세고 따가운 지적마저 그리워하는 무지렁이가 되어 이십년 전의푸른 소나무 앞에 또다시 서 본다.
생채기라 생각하고 아프기만 했던 일침들을 지금 또 쏘시려나. 이제는 적당하게 방패로 막을 줄도 알고 세월의 때로 다져진 호탕한 너스레로 비켜 갈 줄 아는 요령인지 혜안인지도 생겼다고 맞받아 친다면 교수님께선 더 크게 호령하실까.
황무지 같은 지식만 갖고 홀로선 문학세상에서 어쭙잖은 수필 한편 싹을 틔울 때마다 매섭다고 돌아섰던 교수님의 지적을 떠올린다.그리고 결국 그분의 가르침은 내 글밭의 자양분이었음을 고백한다.
수필작가라는 또 다른 이름이 새겨진 내 삶속에서는 은사님의 가르침이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됐음을 이십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감사드리는 덜 여문 인성이 마냥 부끄럽다.
푸른 소나무는 북풍한설에도 청청하다,
푸른 솔 문학회 또한 이십 주년이 스무 번 돌아온다 해도 문학인들이 꿈꾸는 지성의 뜨락으로 굳건하리라. 푸른 솔 문학회 울타리 안에서 주춧돌이 되신 나의 은사님, 김홍은 교수님 또한 늘 청청하시리.
두 분의 회장님을 기억하며/ 정명숙
--6대 김예식 회장님--
2006년, 1월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선배 문우님께서 만나자고 전화를 하셨다. 평소 존경하는 최형렬 선생님이시다.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가야하니 터미널 부근에서 봤으면 하신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일이어서 확실하게 사양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분을 만났다.
정기총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선임되었으니 맡아줬으면 하신다. 문학회 회원이 된지 일 년 만에 중책을 맡을 수는 없었다.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극구 사양하는 나에게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쟁쟁하다.
“어른이 시키는 일을 그렇게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요”
“예, 알겠습니다.”
김예식 회장님을 비롯하여 부회장에 이재부 선생님. 총무 모임득 선생님. 재무에 김용례 선생님으로 임원진이 구성되어 있었다. 회장님은 보은 부군수를 역임하시고 충주에서 향토사학자로 활동하고 계신, 나에게는 아주 어려운 분이셨다.
2월 월례회 준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문서로 작성된 공문도 없거니와 그 당시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총무인 모임득 선생님이 공문 작성을 하고 회원들에게 보낼 때는 총무와 재무가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우편작업을 했다. 세 사람의 관계가 돈독해지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이다.
회장님은 푸른솔문학회에 많은 애정을 갖고 계셨다. 청솔바람소리 표지에 들어갈 소나무 사진을 구하기 위해 보은군수실을 방문해 황금소나무 사진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소나무 사진을 구해 오시기도 했다. 미평고등학교에서 개최되는 백일장보조금을 도에서 백만 원 밖에 받지 못하자 청주시 부시장 실을 방문해 예산을 요구하기도 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청소년들에게 점심 한 끼라도 먹이고 싶다고 하셨지만 답변이 시원치 않자 속상해 하셨다. 내가 회장님께 건의해 온 김에 시 의장을 만나 부탁해 보자고 했더니 선뜩 나서신다.
우리의 사정얘기를 들은 의장은 얼마나 드리면 되느냐고 묻는다. 회장님께서 백만 원만 있으면 된다고 하자 문화관광과장을 불러 예비비에서 지출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나의 행사에 두 군데서 행사보조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 행사는 치르지 못했다. 정산이 문제가 되었다. 회장님은 예전 공무원으로 근무하실 때의 주먹구구식 정산만 생각하셨고 나의 행정적인 무지가 초래한 결과였다.
2006년도에는 변종호. 이재부. 전영순. 모임득. 김영애. 조경진 회원이 거구장에서 등단식을 했다. 최형렬 선생님의 시집 「지워지지 않는 추억⌟출판기념회에 청주관광호텔에서 있었고 김여정 선생님의 수필집 「송학병풍을 펼치며 ⌟출간기념회가 로얄관관호텔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12월에는 사무국장의 섭외로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장석노. 김혜경. 최형렬. 경노현. 조경진. 홍성란. 오춘자 선생님이 출연해 시낭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겨울로 접어들면서 회장님의 병세가 깊어져 충주의 한 병원에 입원하셨다. 이재부 부회장과 임원중에 유일하게 차가 있는 김용례 재무와 함께 문병을 갔을 때 회장님은 푸른솔 문학회 걱정만 하고 계셔서 몹시 마음이 아팠었다.
병환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시는 김예식 회장님을 대신해 이재부 부회장께서 회장직을 대행하시자마자 문학회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셨던 장성호회원께서 지병으로 별세하셨다.그리고 한 달이 되지 않아 회장님께서 별세하셨다. 푸른솔문학회의 큰 별들이 졌다. 교수님과 회원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 년 동안 옆에서 회장님의 지시를 받고 문학회 일을 하던 나로서는 참으로 막막하기도 했다.
7대 이재부 회장님
2007년 3월 22일 임시총회가 열렸다. 전임 회장님의 잔여임기를 이재부 부회장님이 승계했다. 새로운 회장님과 지도교수님과는 아주 각별한 관계였다. 문학회의 큰 그림은 두 분이 의논해서 그려놓으시면 사무국장은 따라가면 되었다.모르는 것은 가르쳐주고 이끌어 주셨다. 지도교수의 정년퇴임 날 사은의 시간을 마련한 것도 회장님의 생각이었다.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일들을 세심하게 챙기셨다. 그해 청솔바람소리 동인지를 두 번 출간했다. 8집 출간기념식은 7월 19일 도민과 함께하는 작품 낭송회와 함께 미동산 수목원 숲속도서관에서 푸른솔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11월 22일에는 송강정철 선생 사당에서 처음으로 가사작품 낭송회를 개최하여 푸른솔문학회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전임 회장님의 잔여임기 1년을 마치는 동안 이재부 회장께서는 열정적인 활동으로 많은 족적을 남기셨다.
2008년 1월 정기총회에서 개인사정으로 사퇴한 모임득 총무를 제외한 임원진 모두가 연임이 되었다. 비어 있던 부회장에는 변종호 선생님이 선출되었다. 회장님의 덕으로 회원들과의 관계도 무척 화기애애하고 돈독해졌다. 수필창작교실의 수강생들과 회원들과의 유대관계도 좋았다. 회장님께서 창작교실을 떠나지 않으니 중간역할을 제대로 해주셨다.무엇보다 사제지간의 예의를 중요시 하니 지도교수와의 마찰도 없었다. 은사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감사함을 늘 말씀하셨다.
버드나무 축제, 돌아보니
홍성란
창립 20주년, 어느 새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이어 회원님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문학회와 나의 만남에도 어느 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저 책을 좋아해서 찾아 간 곳이 2000년 여름 충북대 평생교육원 수필 반이었고 2001년 푸른솔문학회 주최(회장 김정자)로 제1회 도민 백일장 의 계기로 문학회 회원이 되었던 게 십년을 훌쩍 넘었으니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그 짧지 않은 시간을 돌아보니 부족함 투성이다. 2010년 2월 생각지도 않은 문학회(회장 류기학) 푸른솔문학회 사무국장 임명을 받고 일을 보게 되었다. 누구든 단체 일을 본다는 건 두렵고 조심스럽고 무거운 일이다. 그 때 문학회에서는 송강 문학제가 있었고 잠시 중단되었던 도민 백일장이 다시 이어지게 될 시점이다. 더구나 그 해 제 1회 버드나무 축제 개최는 깜냥이 안 되는 나로서는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다.그래서일까 지금도 버드나무 축제하면 초창기 일이 기억에 짙게 남아있다.
제1회 버드나무 축제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두 분이 있다. 김홍은 교수님과 이미화 회원이다. 이유가 있다. 버드나무 축제가 탄생하는 데 처음 구상하시고 계획과 방향을 세워주신 분이 교수님이다. 그리고 이에 적극적으로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분은 이미화 회원이었다.정말 애를 많이 쓰셨다. 초창기, 어떻게 낯선 주민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다가감에 이 두 분의 인내와 수고가 없었다면 어쩌면 이 축제는 태어나지 못할 수 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어떻든 버드나무 축제는 상생문학을 기조로 세워진 결국 사람과 사람의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축제가 되기까지 제일 어려웠던 점도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초창기이니 더욱 그러하였다. 일단 사람을 만나야 대화가 이뤄지고 소통의 기회도 갖게 될 일이었다. 2010년 여름이다. 교수님, 류기학 회장, 이미화, 사무국장등이 처음 문의 장자 골을 찾았던 날이 생각난다. 살기 바쁜 세상에 무슨 문학이며 혹여 당신들에게 피해나 있지 않나하는 의심의 눈빛이었으니 주민과의 만남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고 이어주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 주신 분이 교수님과 이미화 회원이다.
말이 쉽지 두 분이 동향(同鄕)이라고 무조건 만남이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인식의 변화를 꾀한다는 게 한두 번에 될 일인가. 수차례 동네방문이 이어지고 현 주민뿐 아니라 친척 동향인 선후배 기관장 이장 부녀회장 시장번영회장등 사돈의 팔촌까지 누구라도 문의와 연이 닿아 있는 분이면 언제고 찾아가서 만났다. 아니 만나야했다. 그뿐이 아니다 두 분은 뒤에서 더 많은 만남에 애를 쓰셨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지역민들과 조금씩 낯이 익어갔다. 멀뚱했던 주민들도 얼핏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문학회와의 만남이 당신들의 생활에 피해가 없다는 걸 인식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2010.9.8일 제1회 버드나무 축제는 이런 과정을 거쳐 교수님과 이미화 회원의 적극적 지원 아래 문의 장자 골 300년 된 버드나무 앞에서 축제가 열렸다. 이날 축제의 특색은 버드나무와 지역의 발전을 위한 기원제로 시작되었다. 문학회를 알린 첫 행사였던 셈이다. 지금의 여러 행사와 달리 일단 문의라는 곳에 푸른 솔 문학회를 알린 상징적 행사라고 본다.
이렇게 문의에 푸른 솔 깃발을 올리게 된 버드나무 축제는 그간 지금의 둥지인 향교에 자리 잡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 흔적으로 제2회 버드나무 축제는 문의 농협에서, 3회부터 2019현재까지 문의 향교에 자리 잡기 까지 과정에 있다. 특히 향교로의 이동은 어려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향교를 사용함에 따른 절차와 조건이 까다롭고 무거웠다. 뿌리 내리는 일이 얼마나 녹녹치 않은 일인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면서 지금까지 향교관리 대부분을 교수님께서 맡아 하시니 이 부분은 문학회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지역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내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된 것도 사실이다. 농협2층에서의 무료 수필 강좌(이미화 엄금순 고승희 최종희 김도환 김영수 등)에도 수강생이 늘어나면서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이 청남문학회도 결성하였고 교수님의 청소년 백일장이 구상되었다. 그러다 향교로 자리를 옮기고 명륜 대학도 개설하여 지역민들과의 교류가 증가한 점이다. 특히 교수님이 관사에 숙식하시면서 분위기도 익어갔고 서서히 안착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회원들의 발길도 잦아졌고 지역민들이나 유림회 등의 방문도 이어졌다. 푸른 솔 간판도 세우고 도서관도 만들어지고 향교경작지에 고구마 마늘등을 경작하였다.
행사내용면에서도 점차 변화가 있어 청소년 백일장과 호드기 불기대회 동화구연대회는 주민과의 거리를 좁히는 직접적인 소통의 장이 되었다고 본다. 물론 준비과정에서 어려움도 있었다. 백일장은 장소와 날자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문의초등학교와 분교로만 시작된 범위가 중학교 까지 범위가 넓혀짐에 따라 학교마다 행사가 다르니 전체가 모여 할 수 있는 날짜를 맞추기 어려워 부득이 찾아가는 백일장으로 방식을 변경하였다.
임원 몇 분이(임미옥 엄금순 이미화 사무국장) 각각의 학교로 출장해서 백일장이 치러지고 끝나면 원고를 가지고 다시 향교로 와서 그날 심사를 하였다. 그러다보니 어정쩡한 시간에 심사를 하게 되니 심사위원위임부탁도 편치 않았다. 이렇게 주최 측의 불편함이 있는 반면 참가 학생들은 먼 거리를 오지 않고도 자신의 학교에서 안정된 글짓기를 할 수 있었던 점도 있다. 그러다 번거로운 운영방식은 2016년에 수정이 가해졌다.
호드기 불기 대회도 준비단계에 수고로움이 따른다. 호드기를 채취하는 적합한 시기와 보관하는 문제다. 그러다보니 적정한 시기에 채취해야 하는 수고가 따른다. 직접 하지 못하면서도 행사 날까지 신경이 갔었다. 그럼에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잊지 않고 이미화 회원이 호드기를 준비 했다.지금도 그렇겠지만 따듯한 마음은 호드기를 부는 사람에게도 전해지는 듯 보인다. 잊혀 져 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소박함 정을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쳤다. 아니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발전 된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드는 생각이 있다. 모든 일에 어려움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도 제일 인상 깊은 얼굴들은 백일장이나 호드기 불기대회에 참가했던 학생들이다.당시 초‧중등학생이었던 참가자들은 의젓한 청년이 되었을 게다. 그들은 그 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지금 생각이 나지 않더라도 훗날 자신의 고향에서 치러진 그날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백일장을 계기로, 호드기를 불어봄으로써 메마른 현대에서도 바르고 고운 인성을 지닐 수 있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을 지도, 유명한 작가로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보면 버드나무 축제는 그런 미래를 위한 씨를 뿌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 문학회 회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지원하고 참여해서 그걸 해 왔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지난날을 돌아본다는 것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의 시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도 비록 서투르고 부족함 투성이었지만 지난 시간들이 그 나름의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문학회 창립부터 2019 오늘에 이를 수 있도록 미래 지향적 방향제시와 절대적 지원, 조언을 해 주시는 김홍은 교수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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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장으로 마을 분들과 함께 협의하고 행사 진행하던 어려웠던일.
* 농협 2층에서 매주 수업하든 과정
*사무국장으로 4년간 일해오던 일 - 버드나무 축제는 이때 체계가 잡협다고 생각됨.
살아 숨 쉬는 향교 만들기 사업
장용대
송강 정철의 작품 낭송회를 하면서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고운 목소리로 옛 시를 읊을 때면 마치 송강 선생과 대청댐 물이 잔잔한 비경의 정자에 둘러앉아 풍류를 즐기는 듯하였다
푸른솔 사무국장을 문학의 취지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얼결에 2013년에 맡아하다 보니 회원들 간 모임을 갖고, 푸른솔문학 간행물이 청솔바람소리, 계간지, 동인지 등 발간 작업이 매년 반복되었다. 문학 활동으로 봄이 되면서 부터 청소년 백일장, 아동 동화구연대회, 도민백일장, 버드나무 축제, 반딧불 문학의 밤, 송강 정철 선생의 작품 낭송회를 비롯하여 세미나개최, 신인문학상 시상 등 눈 코 뜰 새 없이 문학 행사가 연속되었다
푸른솔 문학의 중심에 선 김홍은 교수님은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교실을 통하여 후학 양성에도 열성이지만 푸른솔문인협회 푸른솔문학작가회를 이끌고 있으며 특히 문학행사를 다양하게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바라고 있다. 문학회 사무실을 문의 향교 별당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교수님은 겸손하게 문의 향교 지킴이로 자처하면서 일부 향교 관리업무와 유림회원들과의 친분을 돈독히 하며 문화재를 사랑하고 성현들의 훌륭한 발자취를 이어 가고 있었다.
향교 밭에 회원들과 농사를 지어 이웃에 나누어 주기도하고, 특히 노송 몇 그루가 있는 뒷동산을 꽂동산으로 만들어 산책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워 꽃나무 과일나무 등 수백 그루를 심어놓아, 봄꽃이 만발하면서 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설래이게 하고 있다. 앞으로도 문화재를 활용한 도서관, 향교 유물관, 성현의 말씀 공원, 약용식물원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이야기하기도 하셨다.
전통문화 살리기 살아 숨 쉬는 향교 만들기 공모사업에 김홍은 교수님이 아이디어를 연구 연구계획서를 만들 듯 작성하여 전임회장(이재부, 류기학)과 당시의 회장, 사무국장이 3회에거쳐 협의하였다. 이 계획서를 보완하여 청주 시청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아직 전국적으로 문학 분야는 생소하여 채택 될 가능성이 없다며 시에서 난색을 표명했다. 설상가상으로 향교 측에서 그런 일은 해본 적이 없고 할 사람도 없다는 반대 의견에 부딪쳤다.시에서 전교의 확인을 받아오라하였다.
향교 유생들은 원로 분들이 많아, 새로운 일이라 향교 운영에 전혀 지장이 없는데 왜 일을 벌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아 우선 내부적인 의견 조율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화 총무와 같이 농장에 나가 일하시는 전교를 만나러 갔다. 원로들이 반대하는데 자신이 나설 수 없다고 하며, 일이 잘못되어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겠느냐고 다짐을 받은 다음, 하고자 하는 열의를 보아 합의문에 서명 한다고 하였다.
김홍은 교수님은 신청서의 반려에도 체념하지 않고 관련 부서를 찾아가 사업계획을 집요하게 설득하였다. 최종적으로 시 담당부서와 사무국의 협의 하에 일부 내용을 조정하여 아이디어를 중앙부서에 제출하여 천여만 원을 지원해 준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시 문학회 활동은 순수한 회원들의 회비와 김홍은 교수님의 사재( 사비), 뜻있는 분들의 찬조금으로 운영하여왔는데 자체 기금만으로는 사업운영에 한계가 있었다. 정부에서의 지원금은 긴 가뭄 끝에 비 오듯 많은 도움이 되어 더욱 행사를 알차게 운영할 수 있었으며 성현의 덕을 기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전통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인문 정신문화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며선비들의 지혜와 삶을 체험하는 살아 숨쉬는 문화 사랑방을 운영 하여,(하는 활동에 ??)지역민과 회원들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참여하게 되었다.
회 고 담
趙 順 姬
오늘이 있기까지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학창시절 미팅에서 성함을 알게 된 후, 20년 후에 우리는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인연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변하기 마련이다.
2016년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회장직을 수락하고 허둥대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현기증이 난다. 멀기만 하던 문의 향교도 이제는 정이 들어서 대성전 뜰 앞에 파란 잔디밭을 생각하면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 가을이 되면 빨갛게 달린 감나무도 수많은 행사를 지켜보고 푸른솔문인협회가 수고했다고 너울너울 가지를 흔들며 호응해 주는 것 같다.
임원진이 처음 놋그릇을 닦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손이 시리고 아파도 뜨거운 열의로 서로 격려하며 웃으며 일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는 박사로 국장으로 대접받던 임원들이 지도교수님도 처음 사모님과 밤을 지새우며 놋그릇을 닦으셨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도 칠순을 넘은 나도 손마디가 부어 통증 때문에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죽을 힘을 다하며 임원들 앞에서 꾀를 부릴 수 없었다.
처음으로 지도교수님 도움으로 제출한 문화재청이 지원하고 충청북도와 청주시에서 후원하는 기금을 받기로 하였다.(전임 회장이 2016년도에 제출한 서류가 통과되어 지원을 받게 되었고, 행사는 현 회장이 하게 되었다. ?? 2017년도 행사를 위한 신청을 문화재청에 할때다.??) 그 과정에(지원금으로) 문의향교에서 버드나무 축제와 송강정철 작품낭송 회를 하기 때문에 전교님 도장을 받아야했다. 임미옥 사무국장과 직접 전교님이 운영하는 주유소로 찾아갔으나 무슨 일인지 도장을 못 찍겠다고 하여 돌아오고 말았다. 법을 잘 아는 작가 회 회장 강대식회원이 시청담당자하고 문제를 잘 해결하여 유림회 총무님이 문의에서 도장을 직접 가지고와 시내에서 만나 서류를 갖출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2017년 큰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유림회원들과 서로 상부상조하여 석전제 봉축행사가 있을 때는 푸른솔임원들과 회원들도 참석하여 친목을 다졌다. 석전제가 끝나고 유림 어르신을 모시고, 참석하신 주민여러분, 그리고 우리문학회 회원들이, 다도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다. 옛 우리의 차를 중심으로 전통의상을 입으신 유림회원들과 한복을 입은 회원들의 조화로움에서 향교가 우리문화의 산실이고 소중히 해야 할 문화 재산으로 더욱 아껴야 하지 않을까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손찬국선생님의 다도 예절교육과 여러 종류의 차에 대한 전문지식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역사의 얼이 서린 양성산 기슭에 자리한 문의 향교에서 제9회 버드나무 문화행사 (제7회 청소년 백일장, 제6회 아동 동화구연대회, 제7회 호드기 불기대회)를 푸른솔 문인협회에서 개최 하였다. 문화행사를 열어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느껴보도록 호드기 불기대회를 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추억거리를 주기위해 장원한 학생에게는 어사화의 모자와 관복을 입혀 꽃가마를 만들어 태우고 축하를 받게 하였다. 각 분야별로 우승자에게는 상장과 상금도 주었다. 모든 행사가 마칠 때 쯤 참석한 주민과 학생, 문학회 회원 모두에게 행운권을 추첨하여 TV 1대. 선풍기 10대. 전자제품등 푸짐한 경품을 200여명에게 선물로 주었다.
푸른솔 문학공원
문의향교 뒷산에 몇 년 동안 푸른솔문학회 회원들이 심어 놓은 나무들이 잘 자라서 봄이 되면 제일먼저 꽃소식을 전한다. 특별히 유실수는 저마다 개성을 나타내려고 열매를 빨간색 푸른색 진 보라색 황금색 감색 다양한 빛깔로 익어 간다. 열매가 새빨갛게 달린 앵두나무가 둑을 가득 채우고 목마른 이들에게 달콤한 과즙으로 갈증을 해소해주려고 수확하기를 기다린다.
앵두나무와 매실나무는 함께 심었지만 다 자라고보니 열매가 많이 달렸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열매를 딸 줄은 알았으나 과일 나무에 거름을 주지 않아 매실이 부실하게 달렸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런 생각은 못하고 나무만 탓하며 상인을 원망스럽게 여겼음을 어쩌겠는가. 부지런하고 신뢰받는 농심을 갖고 사는 사람만이 열매를 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의 향교에는 우리 문학회 사무실이 있고, 향교 뒤편으로는 2ha되는 향교 산을 아름답게 꾸며 선조들의 문화인 문의 향교가 아름답고 행복한 우리고장이 되고 푸른솔문학회의 꽃동산으로 완성되도록 가꾸는데 심혈을 기우려야했다. 회장으로 취임하며 제1회 제2회로 매화와 산수유나무를 많이 심어 봄이면 매화축제를 하였다.
대청호가 바라다 보이는 향교 뒷산에 올라 3회째 매화축제를 한 후 가지치기도 하고, 비료도 주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 주었다. 회원들이 심었던 매실로 담근 화합 주를 마시고, 손수 빚은 화전을 먹으며 문향에 취해 ‘매화축제’ 사행시를 짓기도 하였다.
향교 유리림 회관에서 회원들이 모여 즉흥 4행시 짓기를 하고, 공평하게 똑같은 감성으로 김교수가 시를 읽고, 참석한 모든회원들은 이 감상의 흥을 그대로 채점 하여 수상자를 뽑는 심사위원 되었다.
차상 고영옥 매: 매화꽃 고운 잎이 바람에 나폴거리는 화: 화창한 봄날은 손꼽아 기다려온 울 님들 축: 축제가 벌어진 푸른솔 문학공원에서 제: 제대로 익은 매실주에 꽃잎 띄워 건배
차하 신현애 매: 매일 화:화합하는 마음으로 축: 축제에 참가 하여 제: 제일가는 푸른솔 문학회를 만듭시다
임기동안 봄에는 매화꽃 향기에 취하고, 초여름이면 빨간 앵두와 매실을 따던 손끝에는 봄여름 가을겨울의 계절마다 의미를 새롭게 하였다.
송강정철 문화제
송강정철 문학 제는 금년 제11회를 앞두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하고 고귀한 문화유산 작품들을 대할 때 후손으로서 자랑스러운 마음과 무궁한 긍지를 갖게 된다. 그중 송강의 시조와 가사문학은 천년의 독보라 할 수 있으리 만큼 뛰어나 있다. 선현들의 깊고 넓은 문학 토양을 배우고 본받아 그 토양을 바탕으로 다시 창조라는 찬란한 열매와 꽃을 피우도록 우리 후손들은 더욱 힘써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낭랑한 목소리로 정철선생을 기리며 작품을 낭송하고 작품전시회도 함께 시행 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지난해는 열 번의 행사의 모습들을 ‘화보집’으로 엮어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함도 회장 임기를 마치는 보람이었다. 글을 쓰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문학을 알리고 교류하면서 살아온 것은 보람이었다. 문학회 창립멤버로 20년의 문학생활을 뒤 돌아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특히 부족한 사람이 회장 임기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지도교수님과 역대회장님들 그리고 임원님들의 노고와 회원님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에 지면을 통해 감사를 드린다 있었다.
위에서 12째줄 현회장이 하게되었다. 청주시에서 1,100만원을 지원받아 제7회 버드나무행사로, 청소년 백일장, 아동동화 구연대회, 호드기불기대회 를 어느해보다 풍성하고 회원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우리 행사를 문화재청에서 지난해 와보시고 너무 잘한다고 이런 문학회는 더 지원해 주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 결과 2017년 지원금이 1,360만원으로 증액되어 지원받게 되었다.
첫댓글 정태익 초대회장님 회고록에 1대 4대라고 하신것----1대 3대로 수정 하셔야 합니다.
제2회 매화축제 사행시
1등 신찬인
매: 매화향기 그윽한 문의 향교
화: 화사한 봄기운은 뜨락에 가득하고
축: 축제에 참여한 문인들의 가슴마다
제: 제일로 담아 둔건 매화의 절개라네
2등 고영옥
매: 매화꽃 고운 잎이 바람에 나폴거리는
화: 화창한 봄날은 손꼽아 기다려온 울 님들
축: 축제가 벌어진 푸른솔 문학공원에서
제: 제대로 익은 매실주에 꽃잎 띄워 건배
3등 신현애
매: 매일
화:화합하는 마음으로
축: 축제에 참가 하여
제: 제일가는 푸른솔 문학회를 만듭시다
고맙습니다. 옮겨 갔습니다.
위에서 12째줄 현회장이 하게되었다.
청주시에서 1,100만원을 지원받아 제7회 버드나무행사로, 청소년 백일장, 아동동화 구연대회, 호드기불기대회
를 어느해보다 풍성하고 회원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우리 행사를 문화재청에서 지난해 와보시고 너무 잘한다고 이런 문학회는 더 지원해 주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 결과 2017년 지원금이 1,360만원으로 증액되어 지원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