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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천은사(泉隱寺) |
<토지>에서 천은사는 최참판가의 정신적인 지주인 우관선사가 초기에 주지로 있던 사찰이다. 우관선사의 동생인 김개주가 윤씨 부인을 겁탈한 장소로 등장하고 있으며, 우관선사와 문의원 등이 만나는 장소 정도로 이야기되고 있다.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천은사 홈페이지)
연곡사(燕谷寺) |
우관선사가 천은사에서 옮겨 주지로 있게 되는 두 번째 사찰이 연곡사이다. 이 작품의 주요인물인 길상은 구례 연곡사에서 금어인 혜관에게서 그림을 배우면서 성장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주로 길상의 어렸을 적 기억과 함께 연곡사가 등장한다. 후에 별당아씨와 함께 도망한 구천이가 몸을 피하는 곳이 연곡사이며, 역시 치수가 구천이를 찾기 위해 강포수 등과 함께 연곡사에 머물기도 한다. 별당아씨가 죽은 후 팔도를 유람하다가 돌아온 김환(구천)이가 윤씨부인이 남긴 5백섬지기 땅을 바탕으로 동학잔당을 규합할 결심을 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末寺)이다. 544년(신라 진흥왕 5), 화엄사의 종주(宗主)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병화로 인하여 불탄 것을 중건하였는데, 6·25전쟁 때 다시 불탔고, 그 후 중건하였다가 1981년 구 법당을 헐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웅장한 새 법당을 세웠다.
경내에 국보 제53호인 연곡사 동부도(東浮屠), 국보 제54호인 연곡사 북부도를 비롯하여 보물 제151호인 연곡사 삼층석탑, 보물 제152호인 연곡사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 보물 제153호인 연곡사 동부도비, 보물 제154호인 연곡사 서부도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말기 수백 명의 의병이 왜군과 싸운 곳으로 당시 순절(殉節)한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순절비가 동백나무숲 아래 있다.
쌍계사(雙磎寺) |
혜관이 쌍계사의 스님으로 등장한다. 토지에서 쌍계사는 만주로 가는 행선지나 소문을 듣는 곳 등으로 그려진다. 후반부에 지리산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등장하는 도솔암은 이 쌍계사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그려지나, 명확하게 지적되어 있지 않아 허구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쌍계사(雙磎寺)는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 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섬진강 |
토지의 많은 인물들의 추억과 사랑의 장소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는 경계이자, 외지에 나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는 교통의 수단이며, 농사를 짓고 살기 위한 수원이다. 이곳에 기화는 몸을 던져 자살하고, 죽은 송관수의 뼈가루가 뿌려지며, 양현과 영광, 윤국과 숙이의 사랑이 시작되고 진행되는 곳이다. 평사리를 떠난 많은 인물들은 이 섬진강을 떠올리며 고향생각에 젖기도 한다. 만주의 송화강, 일본의 다마가와(多摩川), 진주의 남강과 더불어 인물들의 생각을 정리시키는 중요한 정서적 공간이기도 하다.
하동송림 |
동학 혁명시 양반 아전들이 동학당에 의해 처형된 곳으로 묘사된다. 최참판가에서 윤씨부인을 만나, 김환의 성장 사실을 알린 후 조용히 빠져 나온 김개주는 이곳에서 평사리의 양반과 아전들을 유독 잔인하게 살상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 외에 명절의 놀이공간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3년 8월 2일 경상남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1745년(영조 21) 당시 도호부사(都護府使) 전천상(田天詳)이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을 목적으로 섬진강변에 식재하였다. 노송의 수파는 거북의 등과 같이 갈라져서 이 송림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옛날 장군들이 입은 철갑옷을 연상하게 한다. 깨끗한 백사장을 끼고 있으며 숲의 면적은 26,000㎡에 달하고 길이는 약 2km이다.
260년 된 750여 그루의 노송이 넓은 백사장 및 파란 섬진강 물결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숲 안에는 궁도장(弓道場)이 있어서 활시윗소리가 들려오고, 쉼터인 하상정(河上亭)이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섬진강의 물결이 굽이도는 경관에는 향수가 어려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