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택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남방큰돌고래’가 나왔다.
현대시 시인선 137호로 나온 이 시집은 ‘복숭아 드레싱’ 등 50여 편의 시가 장이지 시인의 해설과 함께 실려 있다.
현택훈 시인은 2007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하여 시집 ‘지구 레코드’를 발간했고, 지용신인문학상과 4.3평화문학상을 받았다.
우선 시 몇 편을 골라 백서향과 같이 올린다.
♧ 시인의 말
집 근처 선사유적 공원에서 캔맥주를 마시곤 한다. 술을 마시고 남은 빈 캔들이 쌓여 먼 훗날 조개무지처럼 깡통무지로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여기에 있었고, 누군가를 사랑했음을 그 누가 발굴할 것인가. 사실 땅을 파면 유적지가 아닌 곳이 어디 있는가. 나무도 바람도 빗방울도 모두 유적이다. 나는 바위그늘집 같은 내 주거지에 들어가 오래된 유물에 물을 붓고 한참 손을 담가 보았다. 손등 위로 흔들리는 물이 영혼처럼 흔들렸다.
♧ 남방큰돌고래
자전거를 타는 건 바람 속을 헤엄치는 것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는 건 음악 속을 헤엄치는 것 차창에 흐르는 빗방울을 사진 찍는 건 시간 속을 헤엄치는 것
우리는 모두 바다 속을 유영하(겠)지 월정리 바닷가 고래가 될 카페 이름처럼 고래가 될, 아니 이미 고래가 된 사람들, 마을들, 슬리퍼들 너의 마음속에서 헤엄치던 날이 있었지 어린 마음은 낯선 공항의 검색대에서처럼 불안했지 이제 다시 만난 자유는 푸른빛 자전거 페달처럼 돌아가지
시간 속을 헤엄치는 건 구럼비 앞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 바람 속을 헤엄치는 건 태국 소녀의 발가락을 간질이는 것 음악 속을 헤엄치는 건 제주 바다를 한 바퀴 도는 것
♧ 경로
나비 연구하다 나비 따라 제주도에 온 생물학자 석주명은 나비보다 제주도 사투리에 빠져 <제주도 방언집>을 냈다 어쩌면 그에겐 제주도 사투리가 나비였는지도 모른다 배추흰나비, 홍점알락나비, 먹그늘나비 나비 종류처럼 말[言]에도 종류가 있어서 나비 좋아 나비 좇듯 제주도 사투리라는 나비를 연구한 것 내가 음악을 듣는 것도 당신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종류가 많아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 냉장고, 영화관 모두 당신을 따라 가는 길이다 당신 생각하다 당신 따라 공원에 온 나는 당신보다 시에 빠져 떡갈나무 벤치에 앉아 시를 쓴다 어쩌면 나에겐 이 떡갈나무 벤치가 당신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내게 다시 날아올 수 있을까
♧ 밤비행기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는 밤 어둠 속을 비행하는 일이란 속곳 가까이 손을 뻗는 일을 닮았다 닿을 수 없는 거기 망각의 계곡 밤의 둔부를 쓸며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이별의 동체는 매끈해라 운이 좋아서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고 운이 좋아서 창가에 앉아서 운이 좋아서 멀리 날아갈 수 있다 너무 운이 좋아서 아주 머얼리…… 어두운 습곡 사이를 지나느라 비행기가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시차의 담요를 끌어올리니 졸음이 밀려오는데 스튜어디스 목소리가 희붐히 들려온다 음료는 무엇으로 드시겠습니까?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그렇게 멀리 떠나면 잊을 수 있습니까? 무거운 눈꺼풀 희미하게 눈을 떠 하얀 유니폼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한다 커피 주세요 지금 잠에 빠지면 다신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아요 착륙하지 않고 더더 멀리 날아가고 싶어요 봄날의 목련 같은 하얀 유니폼 손가락이 유부초밥을 집던 나무젓가락 같다 하얀 유니폼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비행기는 일요일 아침에 해바라기 정원에 착륙할 것이다 그곳엔 낭자한 꽃잎들이 바닥에 포스트잇처럼 붙어있을 테고,
♧ 여행길 - 현택훈
터번을 쓴 남자의 이름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븐 압둘라 무함마드 븐 이브라힘 알 라와티 짧게는 이븐바투타
손가락으로 창문을 여닫는 관악기의 이름은 처마 아래 볼 빨간 아이가 호호 불면 분홍색 바람 꽃잎 골목길 가득 흩날리는 악기 짧게는 피리
눈동자를 끔뻑이는 지팡이의 이름은 그림자에 의지해 시간이 흩날려 쌓인 사막을 건너며 지워져버릴 길을 만드는 오아시스 짧게는 낙타
하얗고 큰 그리움을 올리는 배의 이름은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얇고 부드러우나 때때로 구겨지는 푸른 비단을 항해하는 여행 짧게는 돛단배
사라진 별의 반짝임을 쓰는 마음의 이름은 아잔타 석굴의 먼지벌레가 두고 온 공간에게 쓰는 편지 짧게는 시
♧ 혜초의 마음
극동 설비 옆에 혜초 여행사가 있다 날이 저물면 푸른 간판도 불을 밝힌다 가야 할 길은 언제나 펼쳐져 있다 푸른 입김의 걸음이 결빙을 푼다 배낭 속의 지도 한 장과 시집 한 권과 낡은 사진 한 장 아직 익지 않은 푸른 불빛은 서쪽을 향해 빛나고 도시의 시선들이 모여 멀리서 보면 별이 되겠다 둔황 석굴 속에서 천 년간 잠들어 있던 왕오천축국전 이 도시도 한 천 년 잠들 듯 흐를 수 있을까 가파르고 높은 희망이라는 파밀 고원 가난한 순례자에겐 이 도시가 타클라마칸 사막이어서 도처에 사구가 드리워져 슬픔도 모래 속에 파묻히곤 한다 설령(雪嶺),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겠지만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 캘커타 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푸른 사원이 펼쳐질 것인가 혜초 여행사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이 푸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구도의 길이 오늘밤 거처 없이 어루만지는 경전이기에
-----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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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
첫댓글 황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백서향이 상당히 기품있게 느껴집니다.음악이 또한 받춰주니, 시가 날개를 돋았습니다.
현택훈 선생님. 시집 발간 축하드립니다. 머리맡에 두고 매일 남방큰돌고래를 읽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