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과 부르스 커밍스의 진실 투쟁이 있었다.
교수신문에 소개된 내용을 게재한다. 진실 투쟁의 수준을 가늠해보자.
자칭 최고 권위자라면서 그 수준은 어떤지에 대해 토론하자.
독자의 현명한 판단과 신랄한 토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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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만으로 한국전쟁의 설명이 가능할까?
브루스 커밍스에게 띄우는 편지. 신복룡
출처: <교수신문>,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0906
『한국전쟁의 기원 1, 2-Ⅰ·Ⅱ』 를 읽고
브루스 커밍스 지음 |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1,954쪽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 시카고대 역사학과의 석좌교수다.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전쟁의 기원 1, 2-Ⅰ·Ⅱ』, 『미국 패권의 역사』, 『김정일 코드』 등을 집필했다.
---신복룡은 전 건국대 석좌교수. 건국대에서 「동학사상(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건국대 중앙도서관장·대학원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한국분단사 연구: 1943∼1953』(한울, 2001, 한국정치학회 저술상 수상),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선인, 2006),
『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 한국정치학회 인재 윤천주 상 수상), 『해방정국의 풍경』(지식산업사, 2017),
『전봉준 평전』(들녁,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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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가 독자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귀하처럼 한쪽 자료만 보고 쓴 경우이다.
아무리 명저라도 3판이 나오기 전에는 자신의 글을 장담할 수 없다.
1985년에 미국연방문서고(NARA)에 도착하여 한국전쟁의 문서를 찾으니 한 미국인 학자가 한국전쟁에 관해
근자에 노작이 나왔으니 읽어보라고 권고하면서, 필자가 브루스 커밍스인데 트루먼 상(?)과 역사학회 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귀하의 책을 읽지 않았다. 일차 사료를 읽기에 앞서 개설서를 먼저 읽으면 사고가 미리 굳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역사학자의 첫 번째 미덕은 무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리튼 스트레이치(영국의 전기 작가·비평가)의
충실한 제자이다.
귀하가 쓴 글의 핵심은 “누가 전쟁을 일으켰나?”를 묻고 있는 2-II권의 18장인데, 귀하는 미국의 유도설을 암시하는 사실을
수없이 은유(隱喩)하면서도 본질적 답변을 흐리는 문장의 기교를 구사했다.
남한이 전쟁을 결심한 상태에서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북한이 선제 타격했다고 귀하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지만,
남한이 북침을 결심했다면 그 중요한 시점에 전군의 휴가를 허락했겠는가?
귀하는 “38도 전역에 걸쳐 남한이 총공격을 감행했다는 증거는 없다.”(2-II권, 300쪽)면서 “인민군 5사단은 양양에서 진로를
남쪽으로 돌려 내려오다가 남한군을 만났다.”(2-II권, 310쪽)는 대목에서 나는 귀하의 교지(狡智)를 느낀다. 왜 “동부전선의
인민군이 남침하다가 남한군을 공격했다”라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남쪽으로 돌렸다가 만났다”와 “남침했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이 점에서 귀하는 정직하지 않았다.
책으로 본 농지 개혁과 현장 경험의 차이
한국을 정치적으로 폭발시킨 것은 토지 문제였다(1권 2장, 27쪽)는 귀하의 논리는 토지 모순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귀하는 한국의 소작농이 토지를 갈망했다고 기록했지만, 당시 한국의 소작농들은 “농사지을 수 없는 자작농보다, 농사지을 수
있는 소작농으로 남기를 바랐다.” 이는 내가 아버지의 뒤에 숨어서 바지를 잡고 지주들에게 모욕을 겪으며 하소연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책으로 본 귀하의 농지 개혁과 현장에 있었던 나의 견해는 다르다. 귀하는 독자이며, 나는 증인이다.
귀하의 가장 큰 결함은 NARA의 문서만으로 한국전쟁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헤로도토스나 토인비가 물었던 것처럼,
“당신은 거기에 가 보았는가?” 윌리엄 리하이 제독의 회고록 『나는 거기에 있었다』(I Was There, 1950)라든가, 딘 러스크
전 미국 국무장관의 회고록 『내가 겪어 보니』(As I Saw It, 1990)와 같은 현장감이 귀하의 글에는 없다. 귀하는 1986년의
<템스 텔레비전>(런던) 인터뷰에서, “미군이 대동강 교량을 폭파하지 않은 것은 강물이 넘쳐 서울이 침수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가 평양 출신 이정식 펜실베니아대 교수(정치학과)로부터 무안을 겪은 적이 있다고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증언했다.
6월 24일에 백인엽의 17연대는 왜 옹진반도에 있었는가? 귀하는 “17연대가 북진의 요로인 해주를 공격했다.”(2-II권, 289쪽)고
주장하면서, 이를 강조하고자 개전 전에 17연대의 2개 중대가 월북했다(2-II권, 281쪽)고 기록한 것도 사실과 다르다. 월북한
무리는 18연대라는 귀하의 기록과 이를 17연대로 수정한 번역자도 틀렸다. 월북한 대대는 멀리 춘천의 6사단 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홍천의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었지 17연대가 아니다.
백인엽의 생전에 나는 그의 6촌(?) 동생과 가까운 사이여서 그가 왜 6월 24일에 해주에 있었는지를 알고자 면담을 요청했지만,
“그것은 가슴에 담고 간다”라는 답변만 들었다. 그날 백인엽은 “남하하는 가족을 해주에서 마중하고자 북쪽으로 올라갔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그 동생은 나에게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면서.
“이승만은 38선 넘어 진격에 성공하면 일단 철수하여 북한을 남한 깊숙이 유인하여 미국이 개입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살길이라고 알았다.(2-II권, 315쪽) 그 무렵 남한의 지도자들은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노망에 걸려 있었다.”(insane or senile, 2-II권,
322쪽)고 귀하는 주장하지만, 그건 소설이다. 그 무렵 그들은 지금의 귀하보다 더 젊었다. 그러면서 “북한이 진실로 남침을
시도했다면 땅이 얼어붙은 겨울에 했을 것이다.”(2-II권, 342쪽)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북한의 식량 사정과 방한복의 실정을
모르고 한 말이다. 북한은 남한의 보리 추수로 양곡을 확보하려 했고, 겨울 장비가 없어 낙엽 지기 전에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나는 귀하가 한국의 학자들에게 훈계하듯 말하는 것이 싫다. 귀하는 남한의 자유화에 편승한 청년 좌파들이 귀하의 글을 충분히
간파하지 못한 채 쏟아내는 찬사에 감격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내가 음모론자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1권, 17쪽)고
귀하는 장담하지만, 한국에서도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사학과), 김명섭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
협동과정),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사회과학부)의 연구 수준은 이미 귀하의 논리를 뛰어넘었다. 내가
보기에 귀하의 한국사 지식은 무역업에 종사하며 한국현대사 마니아가 된 아마추어 이정환 씨(캐나다)의 수준에도 많이 떨어진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피해가는 것이 좋다.
소련의 자료와 중국의 당안을 읽었는가?
그뿐만 아니라 해제된 소련의 자료와 중국의 당안(檔案)을 읽지 않은 귀하의 글은 이미 흘러간 시대의 고서일 뿐이다. 두 나라의
문서가 공개되었을 때 귀하는 수정판을 썼거나 아니면 이 책을 절판했어야 한다. 전쟁사가 독자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귀하처럼 한쪽 자료만 보고 쓴 경우이다.
아무리 명저라도 3판이 나오기 전에는 자신의 글을 장담할 수 없다. 진주만을 공격한 후지다 미쓰오(淵田美津雄)의 회고록
『미드웨이』(2001)와 그 반론을 쓴 조나단 파셜의 『미드웨이 해전』(Shattered Sword, 2005)이 얼마나 다른가를 귀하는 살펴
보지 않았다.
귀하는 나의 저서 『한국분단사연구 : 1943-1953』(2001)를 “터무니없는(absurd) 글”이라고 평가했지만, 젊잖은 학자들은
서평에서 그런 용어를 쓰지 않는다. 귀하가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증진했다지만 귀하의 추종자처럼 열광할 정도는 아니다.
귀하는 NARA에 먼저 들어가 공부한 선구자일지는 몰라도 석학은 아니다. 귀하가 출입증을 압수당하고 밖으로 돌 때, 나는
거기에서 공부하고 있었다.(I Was There.)
“귀하는 한국의 젊은 학생들을 오도했으며, 좌우파로 원수처럼 갈라지게 만든 유산을 남겨 우리는 아직도 귀하가 남긴 유산으로
아파하고 있다”라는 나의 비판에 대한 불쾌감에서, “그렇다면 나의 책이 어떻게 세 번에 걸쳐 유명 저술상을 받을 수 있었고,
1987년에 명문 대학의 교수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나에게 물었고, 1권의 한국어판 서문(15쪽)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묻건대, “귀하의 말처럼 내 책이 그렇게 터무니도 없었다면 어떻게 한국정치학회상을 두 번 받았으며,
한국의 6대 사립대학에서 석좌교수 발령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귀하는 책의 부제를 “폭포의 굉음”(Roaring of Cataract)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백내장으로 본 침침한 그림”(Railing of
Cataract)이다. 귀하는 나의 글에 대하여 어디가 오류라는 지적도 없이, “온갖 얘기를 썼지만 처량한 글이며, 애를 썼지만,
읽을 거리가 없다.”(All in all, it is a pity -- so much works, so little insight.)라고 했으나, 내가 귀하의 서평을 끝내면서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온갖 얘기를 썼지만 책에 알맹이가 없고, 분량은 많지만 커밍스의 글은 교활하다.”(All in all, it has no fruits -- So much work of
Cumings, so cunning.) 귀하의 오만함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