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국불교계 중심지 남가주지역의
사원연합회 12대 회장으로 피선된 만성스님
2009년부터 2년간 11대 남가주사원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만성스님이 12대 회장에 다시 추대되었다. 샌디에이고 한국선원 주지이기도 한 만성스님은 이로써 앞으로 2년 더 샌디에이고와 LA를 오가며 남가주한국불교계 발전을 위한 고단한 일을 맡게 되었다.
만성스님은 1941년에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으니 세속 나이로는 올해로 70이지만 10년 정도는 젊어 보여 60대 초반처럼 보인다. 만성스님은 1958년 17세때 고향 바로 옆 고을인 경남 고성 문수암으로 출가를 했다. 미주에서 활동하는 스님으로 1950년대에 출가한 스님은 1955년에 출가한 메릴랜드 한국사 고성(정덕)스님 등 한 두명이다. 그러므로 만성스님은 미주의 구참 스님인 셈이다. 어릴 적에 출가한 만성스님은 출가 당시부터 기도를 많이 한 습이 있어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한다. 새벽 5시 새벽 예불부터 사시예불, 저녁 예불을 시작하면 2시간씩 하루 6시간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만성스님은 특히 천수다라니 기도를 많이 한다.
스님 출가 당시문수암 주지는 혜명스님이었다. 만성스님은 혜명스님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였다. 이 혜명스님은 청담스님의 첫 번째 상좌였는데 2년 전에 입적했다. 그러므로 만성스님은 청담스님의 손상자인 것이다. 혜명스님 밑에서 2년간 행자생활을 하고 1960년에 청담스님으로부터 정관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 이름으로 1963년 해인 강원에서 수학하였고 또 수행과 포교를 하였다. 1969년에는 경남대 종교학과를 졸업하였고 1972년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9년 쌍계사 말사인 장의사 주지직을 맡다가 1978년 육군보병학교 군승장교로 임관되었다.
1958년부터 불가와 인연을 맺은 만성스님 승려생활은 크게 3단계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출가한 1958년부터 군승으로 입관하기 전까지 약 20년 동안이다. 이 기간 동안 만성(정관)스님은 청담스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도선사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였고 이른바 정화시기에는 집안 어른인 청담스님이 이끄는 정화운동의 최일선에서 열심히 싸운 스님이다. 이 시기에 월정사 정화때도 앞장을 선 스님이고 스님들의 대법원 난입 사건 때 만성스님도 이 일에 관련되어 10일간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만성스님의 스님으로서 두 번째 활동무대는 군대에서 군승장교로 활동한 것이다. 1978년 군승장교 임관은 그 전의 스님생활과는 전혀 다른 무대였는데 여기에서 12년을 활동하였다.
군승장교로 정관스님이 한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78년 군승장교 임관 (소령)
1980년 경기도 포천 6군단 불이사 주지(3년간)
1982년 경기도 양평군 득도사 주지겸 군종참모 (중령)
1984년 경기도 삼군 사령부 선봉사 주지.
1987년 광주 무각사 보병학교 주지 겸 군종참모
1988년 2군 사령부 무열사 주지.
1990년 중령으로 전역
정관스님은 군승으로 있을 때 불이사를 창건하였고 막사를 개조하여 6개의 조그만 법당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신병교육대에서 서울 도선사의 지원을 받아 불교신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군종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의 업적이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1990년부터 도선사에서 운영하는 혜명보육원 원장으로 7년간 재임하였고 2002년에는 경남 통영군에 있는 법화종 사찰 안녕사 주지로 수행과 포교를 하면서 법화종 스님이 되었다.
만성스님의 승려생활중 세 번째는 단계는 미국에서의 포교활동이다. 만성스님은 2005년 4월에 LA로 활동 장소를 옮기면서 법명을 정관에서 만성으로 바꿨다. 미국에 온 것이 60대 중반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나이면 은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나이에 미국에 온 것은 스승인 혜명스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혜명스님에 의하면 “한국의 명산에 있는 천년 고찰들은 풍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명당이다. 명당에 사찰이 들어서면 1,000년, 2000년이 간다. 이런 명당에 서 있는 통도사, 해인사 같은 절들은 처음에 개원 할 때는 조그마한 절이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한국의 침체된 불교가 중흥하려면 한국인들이 선진사회라고 생각하는 미국에서 불교가 번창하여 미국에서 한국으로 수입되어야 한다고 혜명스님은 자주 말씀했다.”는 것이다. 이런 은사 스님의 말을 가슴에 새긴 만성스님은 미국의 명당자리를 찾아 절을 창건하고자 미국에 온 것이다.
LA에 도착한 만성스님은 일아스님이 창건한 성불사 주지로 미국에서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성불사에서 10개월 있다가 관음사, 달마사를 거쳐 2007년 4월에 샌디에이고에 한국선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선원은 샌디에이고 신자들이 시작한 선원인데 주지 스님이 없었다. 한국선원의 주지로 간 만성스님은 남가주 지역의 여러 스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을 가졌다.
한국선원에서 활동을 시작한 만성스님은 2009년 제 11대 남가주산원연합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남가주사원연합회에서 조계종단 소속이 아닌 스님이 회장으로 피선 된 것은 전에 원효종 소속 정산스님에 이어 두 번째다. 11대 회장 2년 임기 동안 만성스님은 승가화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내실을 기하기 위해 부처님 오신 날 행사외의 모든 행사를 축소하였다고 한다. 11대에 이어 다시 12대 회장을 맡게 된 만성스님은 “스님들과 신도들의 협조로 11대 회장 임기를 잘 마쳤다. 우리 불가에서는 무엇보다도 화합을 중요시한다. 화합이 바탕이 되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 남가주불교계가 침체된 느낌이다. 그래서 활력을 불어 넣는 젊은 불교를 하고 싶은데 예산 때문에 할 수 없어 안타깝다. 하지만 불교계의 중지를 모아 불교계 발전을 위한 길을 모색하겠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침체에 빠진 미주 한국불교계 중심지역인 남가주지역의 한국불교계가 다시 부흥할 수 있도록 만성스님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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