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必然속의 自由
全南 順天 松廣寺는 한반도의 최남단에 자리한 조용한 巨刹이다. 六.二五의 참변으로 큰 법당이 불타고 자랑스럽던 藏書閣의 그 많은 책들이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으나 주위에 감도는 아늑한 분위기는 여전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고려 神宗 三년(1200)에 普照國師가 이 절로 온 후 임금도 벼슬아치도 선비도 백성도 모두 찾아와 佛道를 닦았고, 그후 十六국사가 뒤를 이어 나온 곳이다.
오늘날 세상이 비록 시끄러우나 송광사만은 일체의 시비를 초월하고 살림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보조국사의 후예들이 남의 도움 없이 법당을 새로 짓고 스승의 정신을 그대고 계승해 가고 있다.
보조국사의 俗姓은 鄭, 法名은 知訥이고 만년에는 牧牛子라는 號를 즐겨 사용하였다. 목우자라는 호는 불교의 수도생활을 소 먹이는 것, 즉 牧牛에 비유한 것이다. 일체의 거짓이 다 사라져 없는 고요함?寂?과 일체의 참?眞?이 다 살아나 또렷함?惺?이 한 자리에서 가능한 모습이 인간의 本來面目이라고 본 그는 이러한 참모습을 농부들의 소먹이는 것에서 발견하였다. 조급히 서두르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는 일도 없이 어디까지나 여유 있는 모습, 원대한 꿈을 가지되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 꿈을 살리는 건실한 정신, 일체의 대립이 止揚되면서 양자가 함께 살려져 있는 세계가 그의 ?목우자?라는 호에서 무한히 피어난다.
목우자는 고려 毅宗 12년(1158) 황해도 서흥군에서 당시 國學의 學正으로 있던 鄭光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목우자는 부모들의 걱정거리였다고 한다. 부모된 도리로서 정성을 다하여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으므로 정광우는 드디어 불전에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저 병만 나으면 자기 자식으로 키우지 않아도 좋으니 부처님께 바칠 결심이었다. 그후 지극한 정성의 감응인지 아이의 병은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았다. 이리하여 목우자는 나이 겨우 여덟 살에 부모가 정해 준대로 曹溪宗의 雲孫宗暉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죽어 없는 셈치고 불전에 바친 이 아이가 바로 한국 고유의 독창적인 禪風을 일으켜서 당시 길을 잃고 방황하던 後學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타락한 고려 불교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후일의 보조국사였던 것이다.
남들 같으면 한창 어리광을 피우며 부모의 귀염을 받고 지낼 어린 나이에 부모 슬하를 떠나 수도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出家 자체가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도록 결정지어진 운명적인 것이었으니, 처음부터 수도정신이 확립되어 있었을 리도 없었다.
목우자가 절에 들어가서 처음 배운 것은 주위에서 듣고 본 것이 고작이었다. 목우자가 출가하여 四년째 되던 해에 鄭仲夫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사회는 살육의 수라장이 되고 집권자의 위세는 도도하였다.
왕권의 보호하에 있던 당시의 승려들은 수도에는 뜻이 없고 정권의 추이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였다. 집권한 고관대작들과 상종하고 왕궁에 출입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는 형편이었으니 승려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되어 있었다. 정변이나 반란에 직접 간접으로 승려들이 끼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천품이 총명한 목우자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불교가 국교인 이 나라에서 사회적 현실을 떠나 승려만이 홀로 초연할 수는 없으나 승려들이 과연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정치를 문제 삼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에서건 영향력을 미쳐 싸움 없는 사회를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승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먼저 승려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오르는 것이 첩경이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세속을 떠난 승려로서 세속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쉽게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목우자에게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자기 힘만으로는 풀 길 없는 이 거창한 의심을 깨끗이 풀어 줄 수 있는 스승이 아쉬웠다. 자기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일러주는 사람은 누구나 반가왔다. 아무에게나 배우자······.
목우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특정한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람의 관계로 고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제각기 자기가 옳다고들 한다. 이러한 버릇은 나아가서 나의 스승과 나의 제자만이 옳다고 하게 됨으로써 파벌을 이루게 되고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올바른 것은 무엇이나 나의 스승이요, 나는 또한 누구의 제자도 될 수 있다.
목우자는 끝까지 자유롭게 배웠다. 당시 불교계는 많은 종파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文字를 중요시하는 敎宗과 문자를 넘어서자는 禪宗의 대립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었다. 목우자는 이러한 종파에 구애됨이 없이 닥치는 대로 모두 배웠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말만이 옳은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만이 옳은 것처럼 느껴지던 것이 이 말도 저 말도 모두 옳은 면이 있고, 동시에 양자는 다 일면적인 虛點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목우자는 무한히 기뻤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옳은 것에 곧잘 도취한다. 도취는 그것이 곧 속박임을 모른다.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 얽매이면 저편의 잘못만이 보이고 옳은 면은 보이지 않는다. 저편의 옳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곧 나의 잘못된 면임을 모르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일방적임에 그치기 때문이다.
목우자는 한쪽만을 알고 만족할 수는 없었다. 목우자가 후일 禪과 敎의 합일점을 찾아 한국 불교에 새로운 면을 개척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그의 배움의 자세에 말미암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목우자는 부지런히 공부한 보람으로 十五세 되던 병종 十二년(1182)에 僧科에 합격하였다. 승과란 불교계에 지도적 인물을 뽑는 당시의 고시제도이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목우자가 불교계에 있어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은 활짝 열린 셈이었다.
그러나 목우자에게는 이에 만족하고 출세의 세계로 뛰어들 수 없는 또 하나의 욕망이 싹터 있었다. 수도자로서 목우자의 꿈은 보다 더 근본적인 데에 있었다. 불타의 가르침이 俗界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데에 있으므로 중생이 사는 세상을 떠나 홀로 고요한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불제자의 본분이 아님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지금 지도자로서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해서 세상이 곧 조용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이 시끄러운 원인은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데에 있다기 보다는 지도자가 나올 수 없도록 세상이 굳어져 버린 사실에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게 보는 것과 생각하고 행동하는 투는 모두 굳어져 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딱딱해진 세상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올래야 나올 수 없다고 믿어졌다. 목우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것은 막연히 객관화된 세상에 있는 병이 아니고 목우자 자신 속에 내재한 병이었다.
어제 옳게 보였던 것은 오늘도 여전히 옳게만 보이고 어제 그르게 보였던 것은 오늘도 여전히 그르게만 보일 뿐,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에 그어져 있는 斷絶은 없어지지 않는다. 善과 惡을 함께 초월하여 包括코자 하는 자기로서는 美도 되고 醜도 되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고, 자기 자신이 그러한 完全者가되고 싶었다. 일체의 대립을 지양한 세계만이 목우자의 관심을 끌었을 뿐 대립 속에 뛰어들어 추악한 싸움을 벌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므로 목우자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대립하는 양자끼리의 추악한 싸움터에 불과하였고 한시라도 보고 있을 수 없는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목우자는 승과에 합격한 바로 그해에 세속도 僧團도 다 버리고 참의 세계를 찾아 당시의 서울 開城을 등지고 頭陀行脚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목우자에 있어서 여덟 살 때의 出家가 他意에 의한 운명적인 것이었다면 모든 거짓을 박차고 서울을 떠난 것은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또 한번의 출가라고 말할 수 있다.
*출전: 한국전기전집. ‘한국의 인간상’ 제3권 종교가/사회봉사자편 - 1965년 4월 20일. 서울. 신구문화사.
첫댓글 보조스님은 독창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고려불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셨다는데 왜 지혜종도라고 하셨는지???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