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독립운동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전승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지를 거사를 일으켰다.
호는 매헌, 본관은 파평으로 충청남도 예산 출신이다.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자퇴하였다. 그 후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야학을 세우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을 전개했고, 교재로 <농민독본>을 직접 지었다.
1930년 3월에 망명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채포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다시 만주로 탈출했다. 1931년에 상하이로 가서 직공 생활과 야채 장사를 하면서 노동 조합을 조직하였고, 영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해 겨울에,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를 찾아가 독립 거사를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일본 국왕의 생일인 1932년 4월 29일에 홍커우 공원에서 거행하는 전승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맡게 되었다. 1932년 4월 26일에는 한인애국단에 정식 가입하였다.
4월 29일에 윤봉길은 폭탄이 장치된 도시락과 물통을 가지고 상엄한 경비를 뚫고 축하식장에 미리 들어갔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자 단상 정면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라 대장, 상하이 거류 민단 겸 행정 위원장인 가와바타 데이지를 즉사시키고, 제3함대 사령과 노무라 기치사브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시게미스 마모루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오사카로 압송되어, 6월 21일 군법 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9일에 총살당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계기로 침체에 빠졌던 독립운동은 사기를 얻었고,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다. 유해는 1946년에 옮겨져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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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당
윤봉길 의사의 부친 윤황공이 1911년 봄(윤의사 4세)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던 집으로 1930년 봄 망명길에 오르기 전까지 민족운동을 하시던 독립운동의 터전이다.
사적지로 지정되던 1972년 8월까지 윤의사의 유족이 이 집에서 살았고 1974년에 국가에서 중수하였다.
광현당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서 4세까지 살던 집이다. 이곳은 사방으로 냇물이 흐르고 있으므로 도중도(島中島 - 한반도 가운데 섬이란 뜻)란 이름을 붙였다.
폭탄
의거에 사용되었던 물통형 폭탄과 자결용으로 준비했던 도시락형 모형 폭탄
물통형 폭탄은 알루미늄제 물통속에 폭탄을 넣고, 가죽끈을 붙여 어깨에 걸메도록 되어 있다. 물통 입구 부분에 신관을 위치하게 하고 발화용의 삼끈을 부착시켰다. 도시락형 폭탄은 알루미늄제 상자에 폭탄을 넣고 보자기로 싸서 신관 부분에 작은 구멍을 뚫어 여기에서 발화용의 끈을 내놓았다.
길이 5치 4푼, 폭이 3치 4푼, 두께 1치 5푼이며 무게는 3.5kg이다.
체포되는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후 현장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연행되는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사. 윤의사의 의거로 일본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일본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백범일지)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나에게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쓸 수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하고 묻는 내말에 윤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회중시계는 1932년 4월 29일 김구주석과 최후로 작별할 때 정표로 서로 바꾸어 가진 것인데 윤의사 순국 후에 일본정부에서 인장과 함께 보내온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