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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한옥마을의 역사
을사조약(1905년)이후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 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 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 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 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 전주한옥마을 현황
위치 :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교동일원
면적 : 296,330㎡
인구현황 : 인구 2,202(남1,097/여1,105) / 세대수 995
건물현황 : 708동(한옥 543, 비 한옥 165)
☆ 전라북도 도청 소재지 전주
역사를 보면 전주(全州)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때는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으로, 완산주를 전주로 개명하면서 지금까지 불리어 지고 있다. 1253년의 역사를 간직한 천년(千年)도시가 바로 전주이다. 900년 견훤이 세운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전주는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조선왕조 발상지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전 지역과 제주도까지 관할했던 전라도의 실질적인 수도로, 행정중심지로 큰 역할을 담당한 도시이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이 6개소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주는 도읍지의 요건을 갖춘 완벽한 도시 면모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주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판소리의 본고장으로, 전통생활양식의 근간인 한옥·한식·한지 등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담고 있는 도시이다. 주변의 드넓은 평야와 바다가 연결되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춘 전주는 일찌감치 풍요의 고장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러한 풍요와 여유로움은 전통문화를 꽃피우고, 섬세한 멋과 맛의 고장으로 천년 세월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 천년고도 전주, 전주에도 4대문이 있었다.
1907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廢城令)에 의해 4대문 중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면서 현재 유일하게 풍남문만 일부가 남았지만, 분명 전주에도 4대문이 있었다. 동문은 완동문(完東門), 남문은 풍남문(南門), 서문은 패서문(沛西門), 북문은 공북문(供北門)이다. 현재 동문은 책방거리와 동부시장의 중간쯤(동문사거리)이며, 이곳에서 경기전(慶基殿)을 안쪽으로 끼고 성곽을 축조, 현존하는 풍남문에서 남문을 이루었다. 다시 남문시장 도로를 따라 성곽이 이어져 현 다가동 파출소 앞에서 서문을 일으키고, 시네마 극장 앞 도로를 따라 성곽이 세워졌고 현 오거리(북문승강장)옆에서 북문을 일으킨 뒤 동문에 연결되는 형태가 전주성이다.(최창조·「한국의 풍수사상」)
☆ 전주의 멋
“세월이 가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의 꽃심을 지닌 땅!”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전주의 도시적 상징을 ‘꽃심’으로 이야기 한다. 꽃심은 ‘언제나 새로움과의 만남’이라는 진보적·중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왕조를 새롭게 출발시킨 힘이 바로 최명희씨가 바라보는 꽃심의 정체인 것이다. 한국 근대문화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가 이곳 전주를 중심으로 발전해왔으며, 판소리의 발전은 다양한 문화적 발전을 가져왔다. 판소리가 대중화되면서 판소리 사설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본이 전주에서 만들어졌고, 그를 통해 전통한지의 명맥이 이어져왔던 곳이 이곳 전주이다. 삶의 여유와 풍류가 판소리의 멋과 해학을 낳고, 한지의 서화를 부르며, 도시의 상징이 되어 천년을 이어온 전주, 천년 자존심으로 전주는 천년 미래가 열어가고 있다.
☆ 전주의 맛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식이다.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이미 여행의 즐거움은 찾기 어렵기 때문, 음식관광의 대표도시, 전주에 오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수두룩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주의 맛 ‘전주비빔밥’을 비롯해 애주가들의 속 풀이를 책임지고 있는 ‘콩나물국밥’, 보아서 때깔 나고 먹어서 맛깔스런 ‘전주 한정식’이 전라도 음식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그뿐인가! 전주 사람의 생활상이 담긴 ‘전주백반’과 ‘전주막걸리’는 타 지역과 차별화된 전주 여행상품으로 가격대비 만족도 또한 최고라 할 수 있다.
오래전 잃은 나를 찾아 나서는 전주한옥마을 골목길, 하늘을 품고 땅을 안은 전주한옥마을, 그곳에는 처마 낮은 골목길이 있다. 도시 재개발 사업 등으로 곧은 대로가 펼쳐지면서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다닐 좁은 골목길은 도심의 풍경에서 잊혀지고 있지만 전주 한옥마을에는 정감 있는 이름이 붙여진 좁은 골목길이 삶의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김혜미자 한지공예관, 한지체험관을 들러 요리 조리 다니다 보면 황손의 집 <승광재>와 <설예원>을 거치게 되고 그곳을 지나면 한지공예 공방촌 <지담>에 이릅니다. 앞뜰 뒤란을 기웃거리다 그만 열려진 뒷문으로 뜰 넓은 집에 턱하니 내려앉았다고 놀라지 마세요. 그곳이 한옥생활 체험관이랍니다. 휘돌아 나와 돌고 돌다보면 아세헌, 풍남헌, 동락원, 동학혁명기념관 등이 있고 다시 되짚어 ‘최명희문학관’과 교동아트센터를 거쳐 물길 따라 공예품전시관과 명품관 등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동쪽으로 가면 ‘오목대’, 남쪽으로 가면 향교와 전통문화센터 까지 다녀올 수 있지요.길 아닌 곳이 없어 어디든 뚫려있고 열려있어 막힘없이 통하는 길, 그것이 바로 전주 한옥마을 골목투어의 매력이랍니다. 골목을 돌아 나왔을 때 만나는 물길에 또 다른 후련함을 선사합니다. 물길만 따라 걸어도 지루한 줄 모르지요. 골목은 골목대로 연하여 막힘이 없고, 물길이 마음 트이니 전주한옥에서는 매인 게 없을 듯싶습니다.
그대여, 나는 오늘 한지의 고장 전주에서 옥색 한지를 샀습니다. 고운 옥색의 종이 위에 물길 트이고 바람 트여 아름다운 이곳의 사연을 적어볼까 하여서이지요. 고향의 골목이 사라진 지금, 전주 한옥마을에 삶이 속살거리는 골목이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숨통 트이는 일이지요. 싱그러운 밤, 전주부채 하나 손에 쥐고 골목 어귀에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 어진박물관
2010년 11월 6일에 개관한 어진박물관은 전주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서 경기전과 태조어진을 중심으로 다양하고 격조 높은 전시를 통해 찬란한 조선왕실 문화유산의 보존·관리 및 선양의 중심지이다.
․ 어진실
-태조어진(보물 제931호)과 새로 모사한 6분의 어진(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전시
-경기전 정전의 침실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 장엄하게 연출
․ 역사실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이래 현재까지의 경기전과 태조어진의 역사 이야기를 담았음
-전란을 피해 태조어진을 지켜온 내용과 경기전의 운영과 관리조직, 각종 제례, 경기전 건축 등을 유물을 통해 살펴 봄
․ 가마실
-1872년 태조어진을 봉안할 대의 행렬과 당시 사용했던 각종 가마에 대한 내용을 담았음
-어진의 이안이나 봉안에 사용했던 가마인 신연을 비롯해 채여, 가교 등 전시
․ 기획전시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특별전 개최 중
-조선왕릉 특별전은 517년 27대에 걸친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임
-1872년의 태조어진 봉안행렬을 각종 문헌자료와 고증을 통해 닥종이 인형으로 제작ㆍ전시
☆ 풍남문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전주시
■ 지정번호 : 보물 제 308호
■ 지정일자 : 1959. 12. 18 지정
전주를 상징하는 전주 풍남문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 건축양태는 조선 후기의 문루 형식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형태로 지목되고 있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으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조 영조 43년(1767)에 당시 성내를 휩쓴 정해년 대화로 불타버려 영조 44년(1768) 전라관찰사 홍낙인이 중건했지만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 모습으로 수축하여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렀다.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廢城令)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 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1978년 문루 보수과정에서 옹성의 기단이 풍남문 홍예문으로부터 12m 지점에서 발굴됨에 따라 이 기단대로 연장 97.5m의 여담 쌓기와 치석 6,856개로서 옹성 1,933㎡를 축조하여 복원하였다. 전주 풍남문의 누대를 겸한 석문은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내밀게 구형을 쌓고, 이 석축 중앙에 통로를 뚫고 통로 내외 면에 무지개 끝 석물을 쌓아 윗면에 문루를 설치한 것이다. 이 누대는 너비는 동서 23.6m, 남북 10.6m이며 높이는 17.2m에 이른다. 문루의 서편에는 종각이 있고 좌편에는 포루가 있었다. 문루는 2층의 팔각지붕인데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위층의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 1980년 종각과 포루, 전주 풍남문 바깥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전주 풍남문은 전주사람들에게는 전주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전주 풍남문에는 풍남문이라는 고유의 이름 외에 "명견루(冥見樓)"라는 별호가 있다. 전주 풍남문을 중심으로 전주한옥마을과 남부시장이 연결된다.
☆ 경기전(慶基殿)
태조 이성계의 본향 전주에는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모시는 경기전(慶基殿)이 한옥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로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역사를 지켜낸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는 곳입니다.
+ 위치 :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86
+ 유물 : 사적 제339호 경기전, 보물 제931호 태조어진, 보물 제1578호 정전
+ 운영 : 하절기 09:00 ~ 18:00 / 동절기 09:00 ~ 17:00
+ 경기전 안내소 : 281-2891 / 경기전 앞 주차장은 유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경기전 입구에 들어서기 전, 사자의 돌상이 보이는데요, 이것이 바로 하마비(下馬碑)입니다.
말대로 말에서 내리는 곳이라는 뜻인데요,
“至此皆下馬 雜人無得入(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
이라 새겨진 비문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경기전 출입을 금한다는 뜻입니다.
맹수의 왕, 암수 사자 한 쌍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비문을 받들고, 경기전을 지키고 있습니다. 경기전을 돌다보면 태조어진이 보관되어 있는 어진박물관이 보여요. 보물 제931호인 태조어진은 경주, 평양 등지에 함께 봉안되어 있던 어진이 소실되자 유일하게 현존하게 된 어진입니다.
현재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기존의 낡은 어진을 불태워 묻고 서울 영희전에 있던 태조어진을 이모(移模)한 것입니다.
연락처 : 063-231-0090
☆ 전동성당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 20..
■ 시 대 : 1914년
■ 규 모 :동(동) 7,131㎡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전동성당은 소박하고 아담하다. 전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건립됐다.
1907년부터 1914년에 걸쳐 세워진 전동성당은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이다. 처형지인 풍남문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성당 주춧돌을 세웠다고 한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순교지를 알리는 머릿돌과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 유중철·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곡선미를 최대로 살린 로마네스크 및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동양에서 제일가는 성당건물 중의 하나이다.
☆ 오목대(梧木臺) 이목대(李木臺)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산 ..
■ 시 대 : 조선시대
■ 규 모 : 23,267㎡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에서 태조로(太祖路)를 따라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오목대(梧木臺)이며, 오목대와 연결되어 있는 구름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이목대(李木臺)가 나온다.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발호하던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道)의 무리를 정벌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때 전주의 이곳에서 야연(野宴)을 베풀었다는 곳이다. 여기에서 이성계는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
즉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비쳤다. 그러자 이를 모를 리 없는 종사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 현재 만경대에는 그 시가 새겨져 있다. 오목대와 이목대에는 고종의 친필로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 최명희문학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67-5063-284-0570http://www.jjhee.com
아무리 생애가 멀리 멀리 흘러갈지라도 자기 존재의 근원지를 떠올릴 때면 까닭도 없이 핏줄이 저린다. 작가 최명희(1947-1998). 고단한 삶의 여울, 징검다리 둥지와 같았던 전주의 집들은 지금 깡그리 사라졌지만, ‘최명희문학관’은 생가(生家) 가까운 자리에서 작가가 살아온 기억의 마디마디를 역력히 담고 있다.
문학관은 세상을 떠난 작가가 이 세상에 다시 살러 온 집이기 때문이다. 최명희문학관은 진달래와 철쭉이 차례로 피던 2006년 봄, 그가 나고 자란 전주한옥마을에 세워졌다. 작가가 그토록 귀히 여겼던 경기전과 전동성당,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곳이다. 아늑한 마당과 소담스런 공원이 있는 문학관은 주 전시관인 ‘독락재(獨樂齋)’와 강연장·기획전시장인 ‘비시동락지실(非時同樂之室)’로 이뤄졌다. “독락”이란 당호는 홀로 자신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경지에서 이룩한 문학의 높은 정신을 기리는 의미다. “비시동락”은 말 그대로 따로 때를 정하지 않고 노소동락(老少同樂), 교학상전(敎學相傳)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최명희와 전주, 문학과 전주, 문화와 전주가 만나는 자리들로 이곳은 늘 부산하다. 작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전주의 문학관은, ‘내 마음의 전주에 그 옛날의 고향 하나를 오밀조밀 정답게 복원해 보고 싶어 했던’ 작가의 세세한 삶의 흔적과 치열했던 문학 혼을 엿볼 수 있으며, 고향에 대한 애정까지 확인할 수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작가의 원고와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편지들을 비롯해 『혼불』이나 생전의 인터뷰·문학강연 등에서 추려낸 말들로 이뤄진 동영상과 각종 패널을 만날 수 있다. 한 줄 한 줄 눈이 따르면 곧 마음이 동한다. 최명희는 아름다운 조각품을 볼 때,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 아파했고,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동백꽃만큼 그 둥치에 낀 이끼의 생명력을 소중히 여겼다. 문학관 운영은 이러한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시민과 함께 연구하고 학습하며 감동을 주고받는 도시형·시민밀착형 문학관, 사당처럼 적막한 곳이 아니라 문학 강연·토론회·세미나·문학기행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서 뜀박질하는 문학 생산의 거점이며, 단순히 한 개인의 기념관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문학관, 민족혼이 춤추는 문학관으로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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