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조건을 가진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룬다면 누구나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최고가 아니더라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결코 최고의 조건에 한없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닮아가며 최고를 위해 노력하는 결혼생활도 선망의 대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시 북구 두암동 두암주공아파트, 10평 남짓한 아파트 공간은 아빠 김종근(49)씨와 엄마 유미라(41), 그리고 딸 김사랑(8) 가족의 보금자리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족의 보금자리를 얼핏 보면 그저 평범한 가정이겠거니 하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부부의 행동과 말투가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남편 김 씨는 직장생활을 하던 1988년도 26살 들어 불의의 교통사고로 4개월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장기기증을 권유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김 씨는 113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으며 일주일 만에 어머니를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반신이 말을 듣지 않았고 말도 어눌해졌다.
군대까지 다녀온 김 씨는 정상인으로 살다 사고로 닥친 장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이 장애인이라고 하면 “난 다쳐서 그런다”고 대답했고 지금도 사고 후유증으로 여기고 있다.
부인 유 씨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앓았다. 뇌성마비로 무릎으로 기어 다녔고 10살이 넘어서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이런 장애를 가진 부부가 이토록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부부의 정식(?)적인 만남은 지난 2003년 한 교회의 안병갑 목사의 소개였다. 안 목사는 김 씨에게 “실로암에 좋은 처자가 있으니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권유로 만남이 시작됐다.
주위 사람들은 안 목사의 소개가 남녀가 서로 만나게 된 계기였구나 생각했지만 두 사람의 연은 이미 2년 전부터 시작됐다.
김 씨는 원래 북구 각화동에 위치한 남자재활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남구에 있는 재활원인 실로암 캠프를 모임을 핑계로 자주 찾았다.
지금의 부인인 유미라 씨가 실로암 캠프에서 생활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부터다. 그때가 2001년이었다.
김 씨는 매주 정기적으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해 유 씨에게 “한번 사귀어보자”라고 다가섰지만 유 씨의 반응은 늘 싸늘했다.
그러기를 1년, 김 씨는 2002년 1월 유 씨를 다시 만나 “올해 10월 3일 결혼식을 올리자”고 프러포즈를 했고 유 씨는 “미쳤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차차 마음이 수그러져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됐다. 부부는 안 목사의 소개가 있기 전에 이미 사랑을 싹틔우고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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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결실인 딸 사랑이 | 그렇게 그들은 2003년 10월에 결혼에 골인했고 1년 후 딸 사랑이를 갖게 됐다. 하지만 아이에게 까지 장애가 갈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당시 임신 5개월째 병원에서는 부모가 다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아이도 장애가 있는지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권했다.
하지만 김 씨 부부는 “나는 장애인이 태어나도 감당하겠다”며 “우리는 하나님의 든든한 빽이 있다”라고 검사를 거부했다. 부부의 믿음이었을까 임신 10개월 만에 2.8kg의 정상아를 자연 분만했다.
이렇게 부부의 믿음 속에 태어난 사랑이도 “이 세상에서 아빠와 엄마를 제일 좋아한다”며 함께 지내기를 좋아한다.
김 씨 부부는 ‘다시 태어나면 누구랑 결혼하겠는가’란 질문에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지금 남편·아내와 결혼하겠다”고 답했다.
김 씨 부부는 말한다 “몸이 조금 느려 불편할 뿐이지 마음까지 느리고 불편한 것은 아니다”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큰 소리로 밝게 웃었다. /박재범 기자 < 저작권자 © 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