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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여고 바로 이웃해 안국동 36번지에 덕성여고가 있다.
이 학교 본관 서쪽에는 감고당과 온고당이 있었다.
감고당(感古堂)은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이곳은 숙종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장희빈의 모략을 받아 궁궐을 쫓겨나
6년 동안이나 여기에 갇혀 살다가 환궁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 창호(窓戶)와 사벽(四壁)을 바르지 아니시며
너른 동산과 집의 풀을 매지 아니하매
길같이 무성하여 인적이 고요하니리매
망량과 허다 잡풀이 날 곧 저물면 사람 다니듯 하니
궁인들이 무서워 움직이지 못하더니
궁인들이 무서워 움직이지 못하더니
하루는 난데없는 큰 개 하나이 들어오니
모양이 심히 추한지라.
궁인이 쫓으되 또 들어오고 가지 아니하거늘 후 가라사대,
그 개 출처 없이 들어와 쫓으되 가지 아니하니 괴이한지라.
버려두라 하시니 궁인이 밥을 먹여 주었더니
십여일 후에 새끼 셋을 낳으니 가장 크고 모진지라.
그 뒤는 날이 저물어 망량의 불과 리매의 자취 개 넷이 소리하여 짖으니
잡귀 급히 달아나 종적을 감추고 인하여 리매망량이 없어 궁중이 편안한지라."
인현왕후는 감고당에 있을 때 무료하고 적적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의 스스로 고적한 과정을 글로 지어 남겨놓은 것이다.
숙종은 차차 장희빈의 간악함을 알게된다.
인현왕후는 복위(復位) 8년째 되는 해인 숙종 27년 8월 14일에
35세를 일기로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명성황후 민씨가 이곳에서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8년간 살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으로 본시는 여주(驪州) 출생이나
1866년 3월에 고종황제에게 출가하기까지 감고당에 있었다.
전기 민치록의 따님이 고종황후로 책봉됨에 이르러
숙종왕비 민씨의 옛일을 생각하여 '감고당'이라 하라는 말씀이 있어
풍우에 쇠락한 집을 민씨 일문에서 돈을 모아 새로 고쳐 지은 집이
지금 덕성여대의 음악교실 '감고당'인 것이다
감고당은 여흥민씨 민적의 후손들이 살던 종가집이었다.
영조가 감고당 편액을 내렸다.
1917년에 작성된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에는
감고당과 온고당의 소재지는 안국동 26번지(1,243평)로
소유주는 명성황후 집안의 종손으로 당시 관훈동에 살고 있던 민정식(閔庭植)이다.
1927년 작성된 목록에는 소유권이 민씨 일가에서 창덕궁으로 바뀌었으나
그 연유는 확실하지 않다.
1927년 이후 1945년 사이 감고당은 창덕궁에서 마포상인 임호상으로 변경되었다.
1945년~1953년 사이에는 덕성학원이 임호상으로부터 감고당을 포함한 부지 일대를 구입하였다.
감고당의 원 위치는 현재 덕성여자고등학교내 테니스코트 일대로 전한다.
안국동에 있던 옛 감고당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에는 건물 2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 가운데 좌측 ㄱ자형 평면건물은 감고당,
오른쪽 ㄷ자형 평면건물은 온고당으로 당호를 구분하고 있으나
그 유래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감고당이 안국동에서 쌍문동으로 옮겨 지은 것은 1966년의 일이다.
이전 공사 후 건물은 덕성학원 이사장 공관으로 사용하다가
후에는 그의 후손이 거처하였고 이후 서울시 교육청에서 사들였으나
교육청의 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감고당은 멸실될 위기에 처했었다.
조선후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유서 깊고
복잡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감고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지만,
이제 명성황후 생가와 인접한 여주 능현리에
이전 복원되어 영원히 여주땅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덕성학원의 창립자는 여성 계몽운동가 차마리사다.
미국에 유학하여 도산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던 차마리사는
1917년 귀국하여 배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차마리사는 1920년 여성 교육을 위하여 조선여자교육회(朝鮮女子敎育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4월 19일 예배당을 빌어 여자 야학회(女子夜學會)를 열었다.
이 야간학교가 덕성학원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1934년에는 근화학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1935년에는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근화(槿花)'가 '무궁화'를 뜻한다고 하여
학교 이름을 바꾸라고 강요한다.
결국 1938년 10월에 '덕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안동교회 바로 맞은 편에 조선어학회사건 발생지임을 알리는 표시석이 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들에게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해 검거·투옥한 사건이다.
창립 초기부터 우리말인 한글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려 하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해 〈큰사전〉의 편찬을 시도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 108명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들을 강제해산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회원들은 사전출판을 서둘러 1942년 4월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제는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함흥학생사건을 꾸몄다.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태극기를 그리며
'우리나라 국기'라고 속삭이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취조받게 되었다.
취조 결과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이 관련되었음을 알았다.
같은 해 9월 5일 정태진이 검거되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짓자백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 1일 이중화·장지영·최현배·이극로·한징·이윤재·이희승·
정인승·김윤경·권승욱·이석린 등 핵심인물 11명이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된다.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고문을 당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33명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했다.
이들 중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유예되었으며
기소자는 예심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윤재가 1943년 12월 8일에,
1944년 2월 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이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는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
김양수·김도연·이인 각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 등의 판결을 내렸다.
실형을 받은 이들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풀려났으며,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당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조선어학회사건' 표시석 부근 화동 138번지에서 동아일보가 탄생한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북으로 거슬러 정독도서관 조금 못 미쳐 오른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옛 중앙학교 교사를 월세 120원에 빌려 임시사옥으로 썼다.
원래 조선조 후기 학부대신 이용태(李容泰)의 사저 터였다.
1908년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이 땅을 구입해 한옥으로 개축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이듬해 1월 3개의 한국인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이 중 하나가 동아일보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김성수를 비롯한 박영효, 김홍조, 장덕준 등을 중심으로
타블로이드판 4면체제로 발간되었다.
당초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1일 창간하려 하였으나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느라 한달이 늦어졌다.
창간 당시 구독료는 3전(지금의 약 900원)이었으며,
사옥은 서울 종로구 화동 138번지 한옥건물이었다.
설립자 김성수와 초대사장 박영효를 비롯한 창간 주도 인사들은
‘민족주의(民族主義)’, ‘민주주의(民主主義)’, ‘문화주의(文化主義)’를
사시(社是)로 내걸었으며 이 3대 정신은
오늘날까지 동아일보의 핵심가치로 내려오고 있다.<동아일보사사에서>
〔연 혁〕
1920년 4월 1일 김성수(金性洙)를 대표로 한 78명의 발기인에 의하여 창간되었다. 체재는 평판 4면제(平版四面制)였다. 당시의 진용을 보면 사장에 박영효(朴泳孝), 편집감독에 유근(柳瑾)·양기탁(梁起鐸), 주간에 장덕수(張德秀), 편집국장에 이상협(李相協) 등이 활약하였다.
창간 당시부터 민족대변지라는 자각으로 출발한 이 신문은, 그 창간사에서 ‘① 조선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自任)하노라. ②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③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라는 3개 주지(主旨)를 밝혔는데, 이는 지금까지 사시(社是)로 지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신문은 창간 당시부터 격렬한 항일필봉을 휘둘러서 일제의 주요 탄압대상이 되었다.
창간 2주 만인 4월 15일자 기사 ‘평양에서 만세소요’가 문제되어 발매반포 금지를 당한 것을 비롯, 네 차례의 무기정간 처분과 수많은 발매반포 금지·압수·삭제 등 총독부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네 번에 걸친 무기정간 처분 가운데 첫번째는 일본 왕실의 상징인 3종신기(三種神器)를 비판하였다 해서 1920년 9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두번째는 국제농민조합본부에서 보내온 3·1운동 6주년 기념축사를 번역, 게재했다 해서 1926년 3월부터 4월까지, 세번째는 한민족의 항쟁을 고무한 미국 언론인의 서한을 실었다 해서 1930년 4월부터 9월까지, 네번째는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서 일장기(日章旗)를 삭제한 사진을 게재했다 해서 1936년 8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정간을 당하였다.
제1차 무기정간중인 1920년 11월에는 만주 혼춘(琿春)에 특파된 기자 장덕준(張德俊)이 일본군의 한교(韓僑) 대량학살사건을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게 희생되어 우리 나라 신문사상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었다.
1924년에 들어서서 친일단체의 간부들이 이 신문의 사설에 불만을 품고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취체역 김성수를 음식점으로 유인하여 권총협박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사회문제로 확대되어 언론집회압박 탄핵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그 동안 이 신문의 면수는 창간 때 4면이던 것이 1925년 8월부터 6면, 1929년 9월부터 8면, 1934년 9월부터 10면, 1936년 1월부터 12면으로 점차 증면되었다. 6면제 때 우리 나라 최초의 조석간제를 단행하였으나 곧 석간으로 복귀하였다가, 1932년 11월부터 조석간제를 확립하여 고정시켰다.
발행부수에 있어서도 1928년 총독부 경무국 조사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4만 968부, ≪매일신문≫ 2만 3,946부, ≪조선일보≫ 1만 8,320부, ≪중외일보≫ 1만 5,460부로 ≪동아일보≫가 단연 타지(他紙)를 압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동아일보≫ 제호 배면의 무궁화도안 삭제령 등 총독부의 신문에 대한 압박은 더욱 강화되고, 1940년에 들어서서 폐간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10일 ≪조선일보≫와 함께 총독부의 강압에 못 이겨 폐간의 비운을 맞았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이 신문은 강제 폐간당한 지 5년 4개월 만인 12월 1일 중간(重刊)되었다.
체재는 타블로이드판 2면제로 발행되었다. 광복 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신문계에 전통 있는 이 신문의 출현은 방황하는 민중에 큰 기대를 안겨 주었고, 특히 우익민족진영에 큰 힘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그 해 10월에 배대판(倍大版)을 내기 시작한 이 신문은 6·25전쟁을 맞아 6월 27일 마지막 호외를 내고 휴간에 들어갔다. 9·28수복으로 10월 4일 복간, 타블로이드 2면을 간행하다가 1951년 1·4후퇴로 다시 휴간하고, 1월 10일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복간하였다.
지방신문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타블로이드 2면을 겨우 발행하다가 1952년 2월에야 부산 토성동에 임시사옥을 짓고 배대판 2면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피란 수도 부산에서부터 반독재의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의 미움을 받고 있던 이 신문은, 1955년 3월 15일자 신문에 대통령에 관한 기사 표제에 오식(誤植)이 있었다는 이유로 다섯번째의 무기정간처분을 받고 1개월 만에 해제되었다.
4·19혁명 이후 사회혼란의 와중에서 이 신문은 1960년 12월, 기사에 불만을 품은 박태선 장로(朴泰善長老)교도 1,000여 명의 습격을 받는 불상사를 겪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언론의 제약이 심해져서 이 신문은 몇 차례의 필화사건을 겪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주 36면 석간으로 발행되다가 1970년 3월부터 주 48면으로 증면되었다. 1974년 12월 하순부터는 ‘광고탄압’이라는 한국신문사상 전무후무한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듬해 2월, 8명의 임원을 퇴임시키고 일부 기구를 축소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많은 일반 독자들이 광고란을 구입하여 소규모이지만 재정적인 지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탄압은 1975년 7월에야 풀렸다.
1980년 11월 자매방송국인 동아방송(DBS)이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 통합됨에 따라 폐국되었으며, 이듬해 1월부터 주 72면의 증면발행을 단행하였다.
1984년 4월 2일 새 활자(자체 면적 31%확대)를 채택하였으며, 기본 체제도 17단에서 15단으로 개선하였다. 1992년 7월에는 최첨단 인쇄시스템을 가동하였고, 1993년 4월 1일부터 조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1998년 현재 주 260면(24∼48면)을 발행하고 있으며, 자매지로는 ≪소년동아일보≫·≪주간동아≫·≪新東亞≫·≪여성동아≫·≪Let’s≫·≪과학동아≫·≪東亞年鑑≫ 등이 있다.
동아일보 창간 비화
문화정치의 실상
1919년 8월 총독 부임을 위해 남대문역에 내린 사이토 마사코는 마차로 옮겨 타자마자 무시무시한 폭발음을 들었다. 그것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국내로 숨어 들어온 강우규가 던진 영국제 폭탄이었다. 기자와 관리들 십수 명이 다쳤지만 다행히 화를 모면한 사이토는 전임자 데라우치의 무단정치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폭탄을 던진 이는 65세의 흰옷 입은 노인이었다.
사이토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녹록치 않은 문화 국가임을 알고 있었다. 동양에서 절대 강국이었던 중국을 제외한다면 조선은 수천 년 동안 동양의 일등 국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조선의 사신은 중국에서 언제나 다른 나라 사신보다 상석에 앉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조선의 쇠퇴기는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50년에 불과했다.
강우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사이토는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는 대신 병력을 3배로 증강했다. 그는 무단정치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문화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본격적인 조선인 유화정책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일선융화(日鮮融和)라는 명분을 내걸고 총독부 관리의 문관 등용,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차별 철폐, 지방으로의 분임· 분권, 재래 문화 및 관습 존중,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한국인 인재 등용과 문호 개방 등의 시정방침을 제시했다. 그는 관리와 교원의 제복과 착검을 폐지하고, 태형을 없앴으며, 일본인으로 한정되었던 보통학교 교장에 한국인을 등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는 동아 · 조선 · 시대 등 세 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 그는 조선인 사상 전담 특별고등계 형사(일명 특고)를 두 배로 증원했고 파출소를 면 단위 마을마다 설치했다. 그는 언론·출판의 검열을 대폭 강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언론인들을 해임 투옥했다. 그는 모든 한국 지식인을 친일파와 배일파로 분류했으며 이들에 대한 감시 거리를 거의 맨투맨으로 밀착시켰다. 그는 민족동화교육의 일환으로 한국어 대신 일본어 사용을 장려했다. 그는 학교 교육에서 일본의 역사와 지리 교과목을 대폭 늘리게 했고, 한국 교육자를 국어(일어) 상용자와 국어 비상용자로 구분했다.
이렇게 되니, 당대에 활동할 수 있었던 언론인과 교육자는 모름지기 문화정치의 분식 요건(粉飾要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토가 부임 이후 가장 먼저 한 것은 교육 지침을 만들어 전국에 시달한 일이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신교육 칙어
먼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잃게 하고, 조선인의 조상과 선인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쳐 내어 가르침으로써 조선 청소년들이 부조(父祖)를 멸시하도록 만들고, 결과로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여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 후,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교육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사이토는 중추원 부속 기구인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총독부 산하로 복속시키고 이름을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꾸었다. 그는 조선사편찬위원회에 직접 참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위원장에 정무총감 사타오카를 임명하고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 미우라 같은 일인 관학자와 이완용, 권중현 등의 친일 인사를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쓰에마시나, 이마니시 같은 우익 학자를 위원으로, 이병도· 신석호 등의 한국인 학자를 실무 연구진으로 기용했다.
두드러진 활약 보인 이병도
특히 이완용의 숙질이기도 한 이병도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졌다. 1914년 와세다에 입학한 이병도는 처음 서양사를 전공하려 했으나, 당시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의 <일한고사단>이라는 책을 읽고 강의를 들은 뒤 한국사로 진로를 바꿨다고 했다.
어느 날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 학생 몇은 요시다에게 질문했다.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짧은 시일에는 안 된다. 그러나 50년이면 충분하다.”
이병도는 평생 자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요시다 박사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조선사편수회는 먼저 조선인에 대한 역사 강습회를 개설했다. 그리고 1년 후 강의록을 책으로 만들어 <조선사강좌>를 간행했다. 이 책에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외세의 침략과 영향을 과장해서 서술함으로써 한국사의 출발과 과정이 외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주지시켰다.
다시 말해 한국사는 자율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고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른바 ‘한국사 타율성론’을 도출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한국은 발전할 수 없다는 ‘한국사 정체론’을 부각시켰다. 한국 역사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은 두 말할 여지도 없이 ‘한국 독립 불능론’을 위한 위장의 논리였다.
동아일보 창간 비화
와세다대학 영문과와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문학과를 몇 개월씩만 다니다 성적과 학비 문제가 겹쳐 그만 둔 진학문(秦學文)은 국내에 들어와 할 일을 찾던 중 최남선의 추천으로 매일신보에 입사했다. 얼마 후 경성일보에서 그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그는 곧장 수락하고 직장을 옮겼다.
매일신보도 그렇지만 경성일보도 총독부가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어용 언론이었다. 그는 경성일보 사장 아베의 신임을 얻게 된다. 아베는 진학문을 쓸모 있는 한국 언론인으로 점찍은 것이었다. 그는 진학문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시켜 언론계 경력을 쌓게 만든다. 진학문은 아사히신문 경성지국에서 근무하면서 총독부와 산하 각급 기관을 출입하며 식민지 통치 세력과 친분 관계를 맺는다. 1910년대 당시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들은 차라리 백수로 지낼지언정 일제의 어용 신문에 지식을 팔아 생계를 해결하는 일은 모욕이라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식민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한국인에게 언론·출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개량주의 민족 세력을 육성하여 총독부의 감시권 내에 두면서 그들을 골수 민족 세력과 분열· 대립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가 한국인이 사주가 되는 신문사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의 의도를 간파한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언론인과 언론 지향 기업인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위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아주 자신 있게 일을 추진했다.
그는 민원식에게 시사신문을, 송병준에게 조선일보를 허가했다. 그러자 주위의 우려가 다소 가라앉았다. 민원식과 송병준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모르게 제3의 신문 창간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만은 극비리에 진행했다. 동아일보만은 관제 신문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효과가 극대화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는 경성일보 사장 아베를 만나 극비 신문 창간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겼다.
아베는 진학문을 불러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진 기자, 관제가 아닌 민간 신문을 한 번 만들어 보지 그래. 그것도 민족 세력이 주체가 되는 신문 말일세.”
“총독부에서 허가해 줄 리가 없지요.”
“아, 그런가?”
아베는 더 이상 신문 창간 얘기를 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사무실로 돌아온 진학문은 점심도 먹지 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베 말대로 민족주의 색채를 띠는 신문을 만든다면 그것은 성공을 담보해 놓은 거나 진배없었다. 왜냐 하면 유일한 민족 신문이라면 독자를 확보하기가 너무도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총독부의 인가였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아베가 자신을 불러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일을 놓은 채 다시 깊은 생각에 빠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작년에 총독부 내무장관 우사미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 그는 정말 실없이 투정이나 부린다는 듯이 우사미에게 말했었다.
“장관 각하, 관제 신문은 많이 허가해 주시는데 민간 신문은 안 내 주실 겁니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농담으로 해 본 말이었다. 그랬는데 우사미는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한참이나 머뭇머뭇 하더니,“한데 뭉쳐서 출연해 보지 그래”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모를 일이었다. 민간 신문 하나 정도는 표내지 않고 만들겠다는 의도를 총독부가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서로 모르는 것처럼 하면서 추진해야 될 일이었다.
그는 즉각 아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제가 민족 신문 하나를 창간하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이 사람아!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서 내는 신문이 무슨 민족 신문인가?”
“그렇군요.”
“알았으면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지 말고 인가 신청서를 내 보는 게 어떨까?”
송수화기를 놓은 진학문은 희열에 휩싸여 들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하기가 어려워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얼마 후 민간지 창립 허가를 예상보다 손쉽게 얻어낸 진학문은 최두선을 통해 자금주로 김성수를 소개받았다.
마침내 1920년 4월 민족지를 표방하는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동아일보는 창간사에서 ‘문화주의’와 ‘연맹주의’를 표방했다. 그런데 당시 총독부는 ‘문화정치’와 ‘세계주의’를 구호처럼 내세우고 있었다. 진학문은 동아일보의 정경부장 겸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을 맡게 된다.
그런 그가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퇴사하면서 러시아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대학에서 전공했던 러시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도저히 못 버리겠어.”
그러나 러시아에 가겠다던 그는 상해에 가서 조소앙, 홍명희, 안창호 등을 만났다. 그는 이광수를 따로 여러 번 만났다. 그리고는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동휘를 만났다. 그가 도저히 열정을 못 버리겠다던 러시아 문학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여정이었다.
국내로 들어온 그는 총독 사이토와 10여 차례 면담하고 기밀비를 받았으며 총독부 경무총장을 비롯한 고위 관부들과 계속 접촉했다. 얼마 후 이광수가 상해를 버리고 국내에 돌아와 세간의 예상과 달리 간단한 조사만 받은 후 풀려나게 된다.
한편 기미독립선언으로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1년도 안 돼 가석방된 최남선은 주간지 <동명>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어떻게 자금 조달을 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진학문이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에게 자금을 부탁했는데 빨리 나오지 않아 그것을 사이토에게 독촉성으로 건의했다는 기록은 일본의 총독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총독부는 최남선을 도와주면서 진학문과 이광수의 생활비까지 마련하려 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었다.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한 고위 관리가 사이토 총독에게 올린 제안서에 있었다.
소생의 생각으로는 최남선의 잡지가 발행되면 내지의 건전한 출판물을 적당히 쉽게 조선 어로 번역해서 소책자로 만들어 팔 수 있습니다. 그러면 출판업이 활성화되고 그 결과 조선 사상계가 건전해질 것이며 아울러 진학문과 이광수의 생활비 조달도 할 수 있습니다. 동경 유학생들의 공기를 살피건대, 최남선은 어지간히 낡은 인물이라고 배척되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최남선도 이런 분위기에 맞설 수 있도록 해 줘야 합니다. 그가 유생과 학생 사이에 끼어서 그들끼리 논전을 일으키게 하면 조선 사상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묻혀진 역사와 사건들,그리고 영혼으로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을 그림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창조적으로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