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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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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신부의 친필 서한 >
제1신 존경하올 레그레조아 신부 좌하 ------ 마닐라에서 1842년 2월 28일 |
공경하올 신부님, 조선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어, 이 기회에 붓을 들어 몇 자 글월을 올립니다.
신부님께서 저희들을 떠나보내신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읍니다. 그런데 2월 15일경에 매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저를 조선으로 가도록 경리부에 계신 리브와 신부님이 배정하셨읍니다. 이 길이 비록 험난할 줄 압니다만은 천주께서 저희들을 보호하시어 무사하게 해 주실 줄 바라고 있읍니다.
저희들은 프랑스 왕 루이 필립이 중국에 파견하는 사절 쟝시니(D. Jensigny)를 수송해 갈 프랑스 군함을 타고 있읍니다.마카오를 떠난 후에 천주님의 보호로 벌써 마닐라에 무사히 입항하였고 여기서 필요한 여행 준비를 해 가지고 2월 말일경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신부님, 내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이 곳 제위 신부님들도 모두 안녕하시고 신자들도 무사히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신부님과 작별한 후로 오늘까지 불어 공부는 중지했으며, 다른 사정은 경리부에 계신 신부님이 편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이만 생략하겠읍니다.최도마는 지금 혼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저를 위하여 기구해 주실 것을 바라며, 저도 신부님을 위하여 기구할 것을 약속합니다.내내 평안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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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불초한 신자 김해 김 상서 |
제3신 리브와 신부 좌하 ---------- 1842년 9월 |
공경하올 신부님,
저희들이 주산에 있을 때 신부님께 제가 상서하였사옵니다. 마침내 저희들은 주산에서 출범하여 영국 배 20척과 함께 양자강에 다다랐읍니다. 이 곳에 머물면서 출발할 날을 기다리며 세실 함장이 약속한 대로 애리곤 호로 조선에 갈 것을 늘 바라고 있었으나, 현재 주위 상황이 대단히 변하여 조선으로 항해하는 것은 거의 절망적입니다.
왜냐하면 세실 함장은 마닐라로 향하여 출발하였고, 저희는 지금 양자강 기슭에 있는 어떤 외교인의 집으로 행장을 가지고 와 있기 때문입니다.사실 저희는 오래지 않아 에리곤 호로 출발하려 하였읍니다.
세실 함장은 아직도 자기는 조선으로 갈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만일 조선으로의 항해 중 역풍이 불어닥칠 경우에는 항로를 바꾸어 마닐라로 향할 것이라고 언명하였읍니다.
이렇게 애매한 약속에도 매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 호에 머물 작정입니다. 이런 상정에서는 천주님의 안배와 산동 주교님의 결정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읍니다. 그리하여 브뤼니에르 신부님이 상해에 계시는 주교님께 파견하였던 반 요안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읍니다만, 반 요안이 돌아오지 않기에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도마와 함께 저희가 지금 머물고 있는 집으로 가시고, 저희는 에리곤 호로 출발할 작정을 하였읍니다.
그런데 막 출발하려는데 반 요안이 상해에서 교우들의 배를 가지고 돌아왔읍니다.매스트르 신부님은 즉시 의향을 바꾸어, 위에 말한 외교인 황 세홍 씨 집으로 저와 함께 가시고 세실 함장은 마닐라로 출발하였읍니다.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도마는 반 요안을 동반하여 9월 11일에 교우들의 배를 타고 영국 군함으로 가셨는데 거기서 변장을 하고 상해 주교께 가려는 것이었읍니다.지금 저희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모두 잃고 외교인 황 세홍 씨 집에 머물면서 달리 길을 모색하여 조선으로 향해 출발할 기회를 고대하고 있읍니다.
딴 말씀입니다마는(신부님도 아마 아실 것입니다마는) 영국군은 여기서 강 오른편 연안에 있는 몇몇 도시와 상해를 함락시키고 남경으로 진격하다가, 도중에 성곽과 천연적 지형으로 방어된 도시를 또 점령하였는데 이 곳은 진강부라고 불립니다. 이 곳 왼편에 있는 제국 운하 근처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금으로 된 섬이라는 金山이 있읍니다.
영국군이 남경에 도착하여 그 곳을 점령하고자 도시 북편에 있는 산에 군사들을 상륙시켰읍니다.그런데 중국 관리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 영국군에게 강화를 청하러 사자를 보내 왔읍니다.그래서 영국군은 저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강화조약을 체격하고, 8월 29일에 조언을 마쳤는데, 이 강화조약에 파견된 고관들의 성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황제폐하의 외숙부 견씨,대청 제국의 전권 대사 이리포 씨,달단인 장군 디씨,강남 도독 유강 씨. 그후 황체가 강화 조약과 그 조건을 승락한다는 내용의 칙서를 내렸는데, 강화조약의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중국은 영국에게 배상금 2천 1백만 원을 지불할 것. 2.중국 6개 항에서 영국과의 통상을 승인할 것. 3.영국은 북경 황제 폐하에게 대사를 파견할 것.
세실 함장은 남경으로 가기를 원하여 작은 중국 배 한척을 장만하였는데, 낡고 고약한 냄새가 나므로 부중용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런데 사방에서 바닷물이 스며드는 것을 보고, 더 견고한 배를 구하려고 뒤프레 씨와 저를 상해까지 보냈읍니다. 관리들의 도움을 얻어, 상해 부근에 상륙하여 상당히 큰 배를 장만하였으며, 군사들의 배를 젓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두세 번 부딪혀 그 이튿날은 군사를 더 많이 보내 와서 배를 끌어 왔습니다. 이 배를 가져온 다음에 세실 함장은 자기 부관 뒤프레 씨와 감독 필스 씨와 지리학자로는 저를, 그리고 사공 약 20명을 대동하고 16일 동안 항해한 후 강화조약이 조인되던 날 남경에 도착하여 조인식에 참여하고 전기 네 고관들과 회견하였습니다.
그 이튿날은 남경탑과 교외를 관광하였는데, 성내 시가지에 들어가는 것은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영국 사람들에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영국군이 위에 말한 진강부를 점령하는데에 군사 150명을 상실하였다 하며, 전 시가는 황폐하기 짝이 없고 악취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도시의 대고관은 영국군이 승리한 것을 보고 제 집으로 돌아가 처자를 모아 놓고 함께 불에 타 죽었다고 합니다. 매스트르 신부님도 편지하실 테니까 저는 많이 아뢰지 않겠사오며, 신부님께서 항상 저를 위하여 기구해 주심을 빌고, 아울러 내내 안녕히 계시기를 빌면서 이만 그치는 바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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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무익한 종 안드레아 김해 김 상서
추신: 매스트르 신부님을 통해서 저희가 불어를 공부하는 것을 금하셨다는 소식을 확실히 받았읍니다. 불어 공부에 관해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공부를 계속하여야 할지, 또는 포기해야 좋을지를 경리 신부님께 문의해 보라고 매스트르 신부님으로부터 저에게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편지에 쓰신 대로 불어 공부에 대해서 포기하든지 또는 계속하여야 할지, 이 점을 문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옵니다. 왜냐하면 현 상황이 공부에 대한 계속을 허용치 않으며, 제가 이미 느끼는 바와 같이 전연 포기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
제4신 레그레조아 신부 좌하 ------- 요동에서 1842년 12월 9일 |
공경하올 신부님!
마닐라에 있을 때 신부님께 한번 상서하였으나, 신부님께서 염려하실까 봐 다시 글월을 올립니다.
마침내 저희들은 마닐라를 출발하여 순풍으로 대만섬까지 다다랐으나, 이 곳부터는 작은 풍파와 역풍을 당하였습니다. 이 섬은(신부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길이가 6백리로서 초목과 산림이 울창하고 경치가 매우 좋을 뿐 아니라, 토지도 비옥한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백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매우 높은 산도 있습니다. 이 섬 주민들은 특유한 방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 생선을 팔려고 온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으나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다시 이 섬을 떠나 얼마 아니 가서 주산에 도착하였는데, 이 주산은 산악이 많고 황폐한 많은 작은 도서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시가를 유람하고 또 얼마전에 오셨던 라자리스트 회 신부들을 뵈오려고 주산 시내에 몇번 들어갔사온데, 중국인들이 '검은 악마'라고 부르는 인도인밖에는 신기한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산에서 약 2개월간을 체류하다가 영국인들이 남경을 탐험하기 위하여 출발하기에 그들을 따라 4일 동안 양자강의 선객이 되었습니다.
이 강 중간에는 숭명이라 하는 상당히 큰 섬이 있는데, 갈대와 초목이 빽빽하고 주민도 많으며, 섬 이름과 같은 도시가 있었습니다. 섬 사이로 흐르는 강물로 해서 일반적으로 이 섬의 논밭은 비옥하고 신선하여 매력적입니다.
강 오른쪽에 두 도시가 있는데 하나는 보산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오송구라고 하는데, 후자는 양자강 어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도시는 영국군의 습격으로 인하여 매우 황폐하였고 주민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피란하고 없었습니다.
오송구 방면에서 두 강(운하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지요)이 양자강으로 흘러내리는데 작은 것은 운조방이라고 하고 큰 것은 황포강이라 하며, 황포강은 해안에서 40리 떨어져 있는 상해를 통과하더이다. 상해는 영국에게 개항된 항구 중 하나입니다.
7월 하순에 영국군이 남경 점령차 출발한 지 약 15일 후에, 중국 제 2류 도시 진강부에 도달하여 단시일에 함락시키고 요새에 군사를 배치하였는데, 이 격전에서의 전사자는 영국군이 백여 명이었고, 달단군이 3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달단군의 장군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자기 집에 돌아와서 온집안에 불을 놓고 처자와 더불어 타 죽었다고 합니다.
그간 저흰 오송구에서 출발할 날을 고대하며 퍽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세실 씨가 남경에 가 보기를 바라서 중국 배 한 척을 차입하였는데, 에리곤 호가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곤란하였던가 봅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두 명의 장교와 사공들을 데리고 출발하는데, 저는 통역관으로 따라갔으며, 매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 호에 그대로 남아 계셨읍니다. 출발한 지 약6일 만에 진강부에 도달하여, 하루 동안 도보로 시가지를 구경하였는데, 전쟁과 강도의 습격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는 사방에서 악취가 코를 찔렀습니다. 시가는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달단인의 거류지였고 하나는 중국인의 시가인데, 이것은 양자강 오른쪽에 건설되어 있고, 맞은편에서는 중국인들이 운량호라고 부르는 제국 운하가 흐르며, 수로를 조절하기 위한 주요한 수문이 아홉개나 있다고 합니다.
진강부와 제국 운하 중간에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유명한 섬이 있는데, 그를 금산, 즉 금으로 된 섬이라고 불러 초목이 울창하고 아름다우며, 두 황제의 고분과 황제 직할의 절(전쟁 전에는 이 절에 3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함)과 고대로부터 저명한 제국 도서관이 있답니다.
다시 거기를 떠나 남경에 도착하였는데, 시가는 전과 같고, 영국인과 중국인들이 강화조약을 맺고 있던 중이온데,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눈앞에 당도한 영국군의 병력과 위협에 중국인들은 대경실색하여 강화를 청하였던가 봅니다. 황제는 이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고관 대작 네 명을 임명하여 8월 29일에 회의를 마치고 조약문에 조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들은 이 조약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고 단정하고 있답니다. 남경시에는(신부님도 아마 아시겠지만)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탑이 있으며, 장교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가기에 저도 그들을 뒤따라 탑과 전 시가를 구경하였읍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남경의 인구는 백만이라고 하는데, 아주 평옪며 두 운하로 구분되어 있고, 도시는 크고 넓지만 아름답지 못하며, 시가 북족에 산이 있는데, 그곳에 영국군이 야영하고 있었습니다.
탑은 寶印寺라고 하는 절 가운데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오며, 여러가지로 채색을 하고 혹은 도금한 돌로 되어 있고, 돌 위에는 제신들의 상을 조각하였으며, 외부는 각색 기와로 입혀져 있었습니다.
탑의 모양은 8각이고, 작은 종이 150개에 금구슬이 두개 있고, 그외에 주목할 만한 12개의 등이 달려 있는데, 이 등의 힘으로 위로는 천을 비추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 속과 그들의 선악 행위를 분간한다고 중국인들은 망령되게 믿고 있습니다.
탑의 맨 꼭대기에는 중량이 900근이나 되는 솥 두개와 천반이라고 하는 즉 하늘의 접시라고 하는 450근의 접시가 있고 가장자리에 여러 둥근 고리가 달려 있으며, 그 무게가 3천 6백 근에 달한다 하며, 탑이 광채로 세상을 비춘다고들 믿고 있습니다.
그외에 탑을 다섯 가지 보석으로 꾸몄는데, 그것들은 각각 밤을 비추는 야명주, 비를 쫓는 비수주, 화재를 막는 비화주, 폭풍우를 막는 비풍주, 먼지로부터 탑을 보호개 주는 비진주 등으로 불립니다.
그외에 또 중국인의 聖典이 보관되어 있는데, 秘書인 [藏經], 기도서인 [아미타불경], 敬佛 권유서인 [濟人佛經]이라는 것들입니다. 이 절과 탑의 기초는 대략 2천년 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맨 처음에 탑의 이름을 고이왕이라고 불렀다가, 제우 황제가 즉위 제 3년에 퇴폐된 절을 보수하여 견초사, 즉 첫째 절이라고 명명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순고라고 하는 자가 절을 쇠붙이로 무너뜨린 것을 진조의 견운 황제가 재건하여 창건사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러나 제 스무 번째 왕조인 원에 이르러서(중국에는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청조까지 22의 왕조가 있었음) 화재에 타 버린 채, 제 21 왕조인 명의 융래 황제가 재건할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합니다
. 그러다가 19년 동안에(그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다시 건축되었는데 탑에만 거의 4백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하며, 그후 규징 황제 때에 다시 탑의 3분의 1이 벼락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얼마 전에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관광을 끝마치고 오송구로 돌아오는 도중에서, 저희가 고대하던 파보리트 호를 만나, 그 배로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그의 두 동행인 도마와 반 요안이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았고, 기쁨과 슬픔을 일시에 느꼈습니다. 모두 모였으니까 즐겁기는 하나 저희의 사정이 더욱 곤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슬펐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가 에리곤 호에 도착하여, 신부님들이 브뤼니에르 신부님을 상해 교우들에게로 안내도 하고, 베롤 주교님에게로 가는 짐에 대한 타협을 짓기 위해서 상해로 보냈던 반씨를 대단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씨를 하루 종일 기다렸어도 허사였고 속히 돌아오지도 않을 것 같았읍니다. 그러는 중에 세실 씨는 오래쟎아 출범할 것을 언명하니, 신부님들은 부득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도마가 행장을 맡아 가지고 상륙해서 반씨를 기다리게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말은 쉽지마는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주님의 자비하신 안배로 다행히 해변에 거주하며 저희와 오래 전부터 친밀히 교제하였던 황 세홍이라는 외교인이 에리곤 호 출항 전날 저녁때 저희한테 왔읍니다. 그리하여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도마는(그의 동의를 얻어) 행장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떠났습니다.
매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예정한 대로 에리곤 호로 저희의 전교 지방에 들어가기를 바랐으나, 세실 씨는 배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가 예정하였던 여행기간이 단시일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갈 항로에 대하여는 확신이 없어 매스트르 신부님이 질문하는 데에도 조건부로 대답하였읍니다.
즉 자기가 조선을 향하여 항행하기는 하겠으나, 만일 항행 중에 어디서든지 역풍을 만나면 단연 마닐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매스트르 신부님은 마닐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근심되어 어떻게 할지를 확정치 못하던 중, 마침내 시일이 당도하여 세실이 출범하려 할 때에 마침 반씨가 돌아와, 당시 상해에 체류하시던 산동 교구 지방의 베시 주교께 모든 사정을 아뢰었다고 하기에 그 말을 듣고 신부님은 더 확실한 편을 취하기로 하고, 저와 함께 황 세홍 씨 집으로 갔습니다.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도마를 데리고 그 근처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군함을 타고 변장하여 베시 주교님께로 급히 가셨습니다. 저희는 그 외교인 집에 5일간을 묵은 다음에 같은 군함에 숙박을 청하였더니, 그 군함은 저희를 매우 환대하였으며 하루를 지난 후 주교님으로부터 환대를 받았고 저희는 주교님의 알선으ㅡ로 어떤 교우의 배를 타고 약 15일간을 거쳐 저희가 향하여 가던 태장하에 입항하였는데, 이 항행 중에 역풍으로 두세 번이나 출범하였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 외에는 별 역경은 없었습니다.
반 요안은 일을 주선하려고 교우들한테 찾아가더니 자기는 거기 머물고 杜요셉이라는 회장을 저희한테 보내 왔읍니다. 신부님은 밤에 이 항구에 상륙하기로 작정하셨으나, 주위 환경이 허락지 않아 낮에 회장을 따라 상륙하였고, 물건은 다른 길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떤 외교인들이 신부님들을 보고 구라파 사람이라고 단정하기에 안내자는 저희가 세관에 가까이 가면 여러가지 시끄러운 질문을 받을 까 걱정하여, 강변에 내려 사정이 어떻게 될 것인지 살펴보라고 하였읍니다. 그곳은 세관이 바라보이는 곳이었고, 또 물이 얼마 전에 빠졌던 관계로 대단히 질퍽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마를 데리고 일을 처리하러 세관으로 즉시 갔고, 저희 다섯 명, 즉 매스트르 신부님, 브뤼니에르 신부님, 두 사공과 저는 그 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저희가 질퍽하고 길도 없는 강변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한편에서는 영국인 신부라고 고함을 치며 저희 있는 데로 달려왔읍니다.
저희는 그들이 여관업자인 것을 모르고 경관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실 경관도 몇 명 있기는 하였지만 장소 관계로 떨어져 있던 사공들을 보고, 신부님들 옆으로 가까이 가라고 제가 지시했지마는 그들은 무서워 안색이 변했고 고개도 쳐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와서 저희를 붙잡으며 여러가지로 힐문할 때 신부님들은 저희가 들고 있던 책 때문에 매우 염려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걸어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붙잡고 힐문을 하기에 제가 매우 큰 소리로 당신네들은 안녕 질서를 위하여 있는 정부의 관리임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인민을 능욕한다고 꾸짖었더니,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저희를 버려 두고 떠나갔습니다.
저희가 힐문을 당하는 동안에 杜회장과 도마는 저희가 체포되는 줄로 생각하고 매우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상륙 후 수레를 타고 요셉의 집에 다았으나, 슬프게도 두씨 가족 외에 다른 교우들은 모두 신부님들을 맞이하기를 꺼렸습니다.
이 일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베롤 주교님께서 그들 중에 머무시려는 것도 원하지 않았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반씨와 도마는 개주 부근에 있는 교우촌으로 가고, 매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어떤 과부의 집에 유숙하며 조선으로 출발할 날과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선에 대하여는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하였으며 베롤 주교께서 변문으로 파견하셨던 연락인은 외교인 상인들한테서 탐문한 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보고도 없다고 합니다.
그 연락인이 저 상인들에게 물어 보니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고 합니다. 외국인들이 조선인 3백명과 함께 잡혀 다 같이 사형을 받았고, 왕의 통역관 유 아오스딩은 이 불행한 사건의 주모자로 인정되어 참수된 후, 그의 시체는 여섯 갈래로 찢겨 새들의 밥이 되었고, 그의 전 가족은 몰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외국인들과 조선인들이 학살되었느냐고 연락인이 다시 물으니까 대답하기를 그 외국인들은 3국어, 즉 조선/중국/서양말과 글에 정통한 자들로서, 사학으로 조선 사람들을 부패시켰기 때문에 학살되었고 조선인들은 사학을 받아들여 그 서양인들을 추종하였기에 그런 환을 당하였다고 말하더랍니다.
그 밖의 신부님들이 고발된 것은 일부러 그들의 얼굴을 탐지하려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체하고 그들한테 영세하였던 거짓 교우들 때문이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실이 불확실한 중에 매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12월 20일을 기하여 조선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락인들과 다른 여러 사람들은 이 계획이 무모하고 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단언하며, 조선과의 연락은 천주께서 큰 영적을 행하시지 않는 한에는 불가능한 일이라하며, 저희의 의향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편의를 위함이 아니고 다만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계획하는 저희로서는 조선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이상에야 무슨 위험인들 마다하겠습니까? 더구나 매스트르 신부님의 출발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신부님은 위험이 없지 않을 것으로 보고, 저에게까지 곤란이 더할까 하여 저와 동행하시기를 주저하고 계십니다.
그 위험이야 신부님께서도 물론 잘 알고 계십니다. 그밖에 주위 환경과 저의 무능하고 약함이 증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주님의 자비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은혜로 위험 중에 무사할 줄 바라고 있습니다.
필요한 행장은 벌써 다 준비되었고 의복과 신발은 할 수 있는 대로 수선하였습니다. 조선에 들어갈 때에는 꼭 걸인 행세를 할 작정이며 그렇게 하여야만 입국이 용이하고 악마의 사자들 편에서 저희에게 대한 주목이 덜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곳은 다 안녕하시고 저도 약하나마 순조로운 건강을 누리고 있으며 저를 위하여 천주님과 성모님 대전에 항상 기구하여 주시기를 빌고 이만 그치는 바입니다.만일 천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조선에 들어간 후에 저에게 당한 모든 사항을 다시 상서하겠습니다. 공경하올 신부님, 내내 안녕히 계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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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초 소생 조선인 김 안드레아 상서
추신: 새로운 소식을 전하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저는 매스트르 신부님 곁에서 매일같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사오며 도마는 만주에서 페레올 주교님과 같이 있습니다.
매스트르 신부님께서 구라파에서 서신을 받으시고 저로 하여금 불어 공부를 포기하도록 엄명하셨기에 저는 요즘 전혀 불어 공부를 하지 않고 있읍니다. 불어 회화는 저에게 분명히 이롭지 않사오나 에리곤 호에 오랫동안 체류하였기에 약간은 알고 있읍니다. 그러하오나 신부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불어 독서는 저에게 불필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전연 공부를 포기하는 것은 원치 않으며 힘써 배우려고 하고 있읍니다. 만일 제가 불라 사전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불어 책을 이해할 수 있었을 터인데 마카오에서 떠나올 때 리브와 신부님께서 저에게 주셨던 불어 책 가운데서 몇권은 매스트르 신부님의 분부로 버렸읍니다. 도마는 불어 책을 읽을 허락을 받았사온데 구라파에서 서신을 받은 후 그가 마카오 출발 당시 경리 신부인 리브와 신부께서 불라 사전과 나불 사전, 그리고 불어 책을 주셨읍니다. |
제5신 리브와 신부 좌하 --------1842년 2월 21일 |
저희들은 계획한 대로 에리곤 호를 타고 저희들의 전교지역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었읍니다.
(이미 신부님께 알려 드렸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아주 다른 일들이 일어난 뒤에 산동 교구 감목이며 컁한 지방의 지목이신 존경하올 프로렌티노 베시 주교님께로 인도되었읍니다.
저희들은 주교님으로부터 아주 환대를 받고 거기에서 교우의 배를 마련하여 약 보름이 걸려 저희가 목적했던 태장하 항구에 다달았읍니다. 이 항행은 순조로와 아무런 역경도 당하지 않았고 다만 북풍이 저희들의 항진을 더디게 하였읍니다.
배 안에서는 네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우이며 이들은 저희를 잘 대우해 주었고 신부님들께서는 매일 천주님께 미사를 봉헌하셨읍니다. 일을 꾸미고자 요동 교우들에게 파견되었던 반 요안은 자기 이름으로 두라고 불리는 전교회장을 보내어 왔읍니다.
존경하올 신부님들께서 저희들에게 분부하신 대로 신부님들을 밤중에 인도하려고 하였으나, 그 때의 현황은 이를 허용치 않았읍니다. 며칠을 보낸 뒤 외교인들의 작은 배로 짐을 운반하고 저희들은 두 요셉의 안내로 배를 내려왔으며 짐을 운반하기 위하여 저희 배에 승선하였던 두 명의 뱃사공은 미소를 짓고 계시는 신부님들을 보고 서양 사람이라고 믿었읍니다.
그후 세관으로 향하고 있는 중 두 요셉은 세관에서 바라보이는 방금 물이 빠져 대단히 진창이 된 해변가에 신부님과 같이 내리도록 제게 충고하였는데, 그들은 신부님을 모시고 도마와 같이 세관으로 직행하기를 두려워 하였읍니다.
저희들은 모두 매스트르 신부님과 브뤼니에르 신부님, 뱃사공이 둘, 그리고 저까지 다섯 명이었읍니다. 저희는 모두 진흙에 발이 빠졌고 이리저리 길을 헤매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읍니다. 잠시 길을 걷고 있을 때 세관 쪽에서 약 삼십명 가량의 사람이(이들 중에는 포졸도 있고 손님의 안내자들도 있사온데) 저희를 향해서 언성을 높이며 다가와 당황하고 있는 저희들에게 많은 것을 힐문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신부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않으시며 걸어가시고 그들은 오랫동안 저희를 괴롭힌 후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읍니다.
저희는 백가점이라 불리는 교우촌으로 길을 재촉하였고 두 요셉의 집에 들어갔읍니다. 이 촌락은 바다에서 6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교우들이 약 2백 명 가량 살고 있는 곳이었읍니다.
두 요셉의 가족을 제외하고선 이 곳 교우들은 신부님을 영접하기를 꺼리며 나아가서는 신부님을 쫓아 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하였읍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읍니다. 왜냐하면 베롤 주교님께서도 그들 곁에 머무시기를 원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인심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여 주교님과 신부님들에게 불쾌한 일들이 많다고 들었으며 만일 지면이 허락한다면 신부님께 그 사정을 알려 드리겠읍니다. 현재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도마와 같이 개주 부근에 있는 양관이라는 교우 촌락에 거처하고 계시고 매스트르 신부님께서는 저와 함께 어떤 과부의 집에 머물고 있읍니다.
조선에서 온 소식에 대하여는 신부님께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으며,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으로부터 파견된 정탐자가가 외교인들에게 엿들은 바를 알려 드릴 수밖에 없읍니다.
들리는 바로는 중국어와 서양어에 아주 능통한 조선에 있는 두 외국 사람이 종교 때문에 조선인 3백명과 함께 참수당하였다 하며 유 아오스딩은 마치 많은 범죄의 주모자처럼 취급되어 죽음을 당하고 그의 시체는 6등분되어 짐승의 밥이 되었으며, 그의 모든 가족들은 몰살되었다 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부님들은 거짓 교우로부터 밀고 당하였다 하며 그자는 신부님의 얼굴을 익히고자 모의하여 영세를 받아 교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상황하에서 저희는 공경하올 베롤 주교님과 매스트르 신부님의 분부대로 조선으로의 출발일을 12월 22일로 정하였읍니다.
매스트르 신부께서는 저와 같이 입국하고자 하셨으나 존경하올 베롤 주교께서 신부님께 아주 소상하게 일러 주신 바와 같이 위험이 없지 아니하므로 저에게 난관이 더 커질까 염려하여 매스트르 신부님의 동행을 금하셨읍니다. 만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면 아직도 신부님께 사뢸 말씀이 많으나 편지에 일일이 적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만 펜을 놓겠으며, 저의 존경하옵고도 사랑하올 신부님께서 당신 소자를 기구 중에 항상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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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하는 소자 안드레아 김해 김 1842년 12월 21일百家店에서 |
제6신 지극히 공경하올 레그레조아 신부 좌하 -----------1843년 1월 15일, 요동에서 |
공경하올 신부님,
계획한 대로 저는 12월 23일에 떠나 나흘 후에는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했읍니다. 변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다가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선 임금이 보내는 사신을 만났습니다. 천주님의 안배로 그 일행 중에서 김 방지거라는 사람이 제게 다가오고 있었읍니다.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읍니다. 마침내 교우냐고 물었더니 교우이며, 본명은 방지거라고 대답하기에 저도 역시 같은 대답을 했읍니다. 그래서 저는 같이 온 중국인 안내자들을 멀리서 뒤따라오게 하고 그를 따라가며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를 물었읍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 보면 신부님들은 종교 때문에 순교하셨고 교우도 2백여 명이 순교하였는데 유력한 자가 대부분이며, 저의 친우 도마의 부모도 죽었는데 부친은 곤장으로 모친은 칼을 받아 모두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 역시 많은 고난을 당하여 부친은 참수되셨고 모친은 의탁할 곳이 없는 비참한 몸으로 교우들 가운데 떠돌아다니고 있다 하며 이 밖에도 방지거가 제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 다 기록하기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공경하올 주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배신자와 포졸들의 추격을 받으시어 수원이라는 곳에 은신하셨다가 유다스가 지옥문의 포졸들을 거느리고 그 곳에 당도하니 주교께서는 쉽게 더 피신할 수 없음을 보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아가시어 포도청으로 끌려가셨다 하며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진멸시키겠다는 말을 주교님이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어 두 분의 신부를 불러 올려 다같이 한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 합니다.
오! 얼마나 이 분들은 찬한한 영광을 받은 것인가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우시다가 승리를 얻은 후 붉은 옷을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조선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 없이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 가며 신부님들을 맞이하였다가 일시에 모든 목자를 잃은 것입니다.
오! 불행하고 가증스러운 조선이여,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 두셨더라면! 그러나 모두 다 삼켜 버렸도다. 요새는 박해가 그치어 교우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나 신부님들을 잃고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탄식하며 방황한다.
합니다.근년에 교우가 되었다가 유력한 배신자가 된 김 여생이는 사형을 당하였다 하며 그 이유는 사회를 문란케 한 악한이라는 것밖에 해석할 수 없읍니다. 역사를 보아도, 이따위 인물은 사형을 받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유다스 하나는 자기 장인을 고발하였으므로 국법에 의하여 교살당하였으며 신부와 무수한 교우들을 잡아 가던 포졸 두목도 남에게 불의한 짓을 한 죄로 관직을 박탈당하여 유배된 뒤 사형을 받았다고들 합니다.
형편이 허락지 않아서 그 밖의 일을 더 오래 물어 볼 수도 없었고, 매스트르 신부님을 인도하기 위하여 변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외교인들의 의혹과 박해의 위험이 있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는 외교인 친구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과 북경으로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하며 사신들의 일행 중에 끼었다 합니다. 그는 제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간청하였읍니다. 그리고 전교 신부님의 입국에 대하여 다른 교우들과 같이 힘써 보겠다고 약속하였읍니다.
그리하여 1년 후에야 신부님을 조선으로 모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2월 전후하여 즉시 신부님을 영입할 준비를 할 마음으로 제가 곧 조선에 들어 갈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대답했읍니다.
오직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 들어갈 수는 있을 듯하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이쯤 듣고 나서 그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고 그와 하직한 후 변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읍니다. 이튿날 오전 한시쯤 일어나서 전에 준비해 두었던 조선 옷을 내어 입고 중국인 안내자들을 하직한 후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보이는 데에 닿았읍니다. 과연 무사히 통과할까 하는 걱정이 저를 설레게 하였고 특히 나무할 칼을 변문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매우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그러나 천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누구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사가 서 있어,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권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저는 그 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오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 끼여 지나가 소들에게 가리어 많은 편의를 얻게 되었으나 이것으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읍니다.
하나씩 세관장 앞으로 나아가(어두우므로 불을 켜 놓고) 성명을 고하라 하며 조사를 하고 있었고, 그뿐 아니라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은 높은 곳에 서서, 혹시 누가 달아나는가 하여 두루 살피고 있었읍니다. 이 때 저는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몰랐읍니다.
한편에서는 이미 조사를 받은 자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가만히 그들 뒤를 따라나섰는데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권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였읍니다.
그는 연거푸 저를 부르고 있기에 통행권은 벌써 내보였다고 대답한 후 그들이 저를 추격하는 줄로 알고 저는 그만 달아나 읍내 옆 작은 길로 나왔읍니다. 거기서는 저를 맞아 줄 아무런 집도 없기에 밤새도록 길을 걸어 대략 백 리 가량 나온 후 새벽에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어떤 주막에 들어갔읍니다.
그랬더니 거기 앉아 있던 여러 사람들이 제 얼굴과 의복을 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 보고는 외국 사람이라고 단정하였읍니다. 결국 그네들은 진상을 알아보려고 제 머리를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 버선을 검사한 뒤에, 저를 동정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고 모두 제가 어디를 가든지 잡히리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비록 잡힌다 할지라도 맘은 편안하니 아무 죄가 없는 몸이라 자기를 변명하기가 힘들지 않다고 하였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는 저를 내쫓았읍니다.
그들은 제 말을 듣고 제가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가는 줄로 알고 간교하게 뒤로 사람을 놓아 제가 가는 방향을 정탐하였읍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의 손아귀를 피할 확신이 없어 만일 잡히는 날에는 제 몸에 지닌 돈 한 가지만 보더라도 도적이란 의혹을 받게 되어(도적은 국법에 의하여 다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사형을 받게 될 염려가 있어 정탐군이 도로 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저를 서울로 가는 줄 알것이라 생각하고 그만 멀리 인가를 피하면서 다시 중국을 향하여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무성한 산 속에 숨었다가 해가 떨어져 어두움이 땅을 내리덮으면 길을 빨리 걸어 의주에 도착한 때는 새벽 두시쯤이었습니다.
거기서 바다와 반대쪽에 있는 읍의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으로 방황하면서(이런 곳에도 항상 지붕이 보이기에 제 생각에는 국경을 지키는 파수병이 있는 것 같았고)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올라 사방을 비추고 있었읍니다.
첫째 강을 건너고 둘째 강을 건넌 뒤에 황막한 들로 나서 길을 걸으니 여기는 낮이 되면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곳이었읍니다.
저는 옷을 중국 의복으로 갈아 입느라고 그 날을 다 보냈으며 또 일어나서 약 백 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높이 솟았읍니다. 다시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고 몇 가지 준비를 해서 5일만에 백가점에 있는 공경하올 매스트르 신부님께 귀환하였읍니다.
지금은 3월에 방지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기구 중 천주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하여 주심을 바라는 바입니다.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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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겸비한 소생 안드레아 김해 김 |
제7신 리브와 신부 좌하 ---------.1843년 2월 16일 |
경애하올 신부님!
먼저 써 놓은 편지를 아직 부치지 못하였으므로 새로 들은 소식을 동봉합니다. 12월 23일에 매스트르 신부님이 분부하신 대로 4일이 걸려 무사히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온 안내자 김 방지거는 벌써부터 변문에 와 있어 저희와의 상봉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는 중국인 안내자들이 안 온 줄로 알고, 자기와 같이 온 외교인 친구들의 호의와 후원으로 중국에 들어갈 허가를 얻어, 조선 임금이 보내는 사신들과 함께 북경으로 들어가는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답니다.
천주님의 안배로 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신 일행과 함께 가는 그를 만났으나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읍니다. (8년 전에 서로 본 일이 있었을 뿐이니까요.)
마침내 교우냐고 물었더니, 교우이며 본명은 김 방지거라고 대답하기에 저도 역시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북경행을 중지하고 도로 변문으로 가서 전교 신부를 조선으로 인도하여들일 방침을 의논하자고 청했더니 그는 그렇게 하면 외교인 동료들이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군난이 다시 일어날 위험도 없지 않은즉, 그렇게 할 수는 없으나 이후에 다른 교우들과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하여 그 준비를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이 온 중국인 안내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며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 보면, 신부들은 다 그리스도의 성교회를 위하여 순교하셨고 교우도 2백여 명이나 순교하였는데, 유력한 자가 대부분이며, 저의 친구 도마의 부모도 죽었는데, 부친은 곤장으로 모친은 칼을 받고 두 분 다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합니다.
저의 부모도 역시 많은 참변을 당하여 부친은 참수하셨고, 모친은 의탁할 곳이 없는 비참한 몸으로 교우들 가운데 떠돌아 다니고 있다 하며, 이 밖에 방지거가 제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 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공경하올 주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배신자와 포졸들의 추격을 받으시어 수원이라는 곳에 은신하셨다가 유다스가 지옥문의 포졸들을 거느리고 그 곳에 당도하자, 주교님께서는 쉽게 더 피신할 수 없음을 보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아가시어 포도청으로 끌려가셨다 하며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진멸시키겠다는 말을 주교님이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어 두 분의 신부님을 불러 올리시어 다 같이 한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 합니다. 오! 이분들은 얼마나 찬란한 영광을 받았을까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전투하여 승리를 얻은 후, 붉은 옷을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불행한 조선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 없이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 가며 신부님들을 맞이하였는데, 오!불행하고 가증스러운 조선이여! 이제 일시에 모든 목자를 잃었으니!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 두었더라면!
그러나 모두 다 살켜 버렸으니, 오! 잔인한 조선이여! 요새는 박해가 그치어 교우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나, 신부님들을 잃고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탄식하며 방황한다 합니다.
근년에 교우가 되었다가 유력한 배신자가 된 김 여생이는 사형을 당하였다 하며, 그 이유는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악한이라는 것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보아도 이따위 인물은 사형을 받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유다스 하나는 자기 장인을 고발하였으므로, 국법에 의하여 교살당하였으며 신부님과 무수한 교우들을 잡아 가던 포졸 두목도 남에게 불의한 짓을 한 죄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뒤 사형을 받았다고들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에게, 어째서 여러 해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였더니 첫해(1839년)에는 배신자들의 음모가 무서워서 감히 생각도 못 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연락을 취할 교우를 보냈더니 중도에서 객사하고, 두 번째 보낸 자는 변문까지 가기는 했으나, 중국인 안내자를 아무도 만나지 못해서 그대로 돌아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방지거가 변문에 와서 중국인 안내자를 아무도 만나지 못해서, 자기가 북경까지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형편이 허락지 않아 더 오래 물어 볼 수도 없었으며 이쯤 듣고 나서 방지거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아가지고 그와 작별한 후 변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리하여 1년 후에야 신부님을 조선으로 모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는 2월 전후하여 즉시 신부님을 인도할 준비를 할 마음으로 제가 곧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극난하다기 보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였으며, 오직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는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튿날 오전 한시쯤 일어나, 전에 준비해 두었던 조선 옷을 내어 입고 중국인 아내자들을 하직한 후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안 가서,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지 몰라 숲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무슨 짐승이 가까이 오기에 생각하니, 나무할 칼을 변문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다시 도로 가 보았으나 찾자 못하였습니다.
그 후 130리나 된다는 길을 가니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보였으며 과연 무사히 통과할까 하는 걱정이 저를 억눌렀습니다. 그러나 천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 다고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가까이 나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사가 서 있어,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권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기에, 저는 그 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오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 끼어 지나가, 그 소들에게 가리어 많은 편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읍니다. 하나씩 세관장 앞으로 나아가(어두우므로 불을 켜 놓고) 성명을 고하라 하며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은 높은 곳에 서서 혹시 누가 달아나는가 하여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저는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몰랐으며, 한편에서 이미 조사를 받은 자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가만히 그들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권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기에 저는 귀먹은 체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그는 연거푸 저를 부르고 있기에, '무엇 말씀이오? 통행권은 벌써 내보였는데.' 하고 대답한 후 그들이 저를 뒤쫓는 줄로 알고 저는 그만 달아나 읍내 옆 작은 길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맞아 줄 아무런 집도 없기에, 밤새도록 길을 걸어 대략 백 리 가량 나온 후, 새벽에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어떤 주막에 들어갔읍니다. 거기 앉아 있던 여러 사람들이 제 얼굴과 의복을 보고 또 말 소리를 들어보고는 외국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그네들은 진상을 알아보려고 제 머리를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 버선을 검사한 뒤에 저를 동정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고 제가 어디를 가든지 잡히리라고 모두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비록 잡힌다 할지라도 맘은 편안하니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변명하기가 힘들지 않다고 하였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는 저를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듣고, 제가 조선의 수도 서울로 가는 줄로 알고, 간교하게도 뒤로 사람을 보내어, 제가 가는 방향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의 손아귀를 피할 확신이 없어, 만일 잡히는 날에는 제 몸에 지닌 돈 한가지만 보더라도 도적이란 의혹을 받게 되어(도적은 국법에 의하여 다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읍니다) 사형을 받게 될 염려가 있겠기에 정탐군이 도로 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저를 서울로 가는줄 알 것이라 생각하고 그만 멀리 인가를 피하면서 다시 중국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무성한 산 속에 숨었다가 해가 떨어져 어두움이 땅을 내리덮은 후 길을 빨리 걸어 의주에 도착한 때는 새벽 두시쯤이나 되었습니다.
거기서 바다와 반대쪽에 있는 읍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으로 방황하면서(이런 곳에도 항상 지붕이 보이기에 제 생각에는 국경을 지키는 파수병이 있는 것 같사온데) 압록강에 도착하였습니다.
벌써 해는 떠올라 사방을 비춥니다. 첫째 강을 건너고 둘째 강을 건넌 뒤에 황막한 들로 나서 길을 걸으니, 여기는 낮이 되면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옷을 중국 의복으로 갈아 입느라고 그 날을 다 보냈으며 또 일어나서 약 백 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솟았습니다. 다시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 도착하여 모든 사람이 웃는 중에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후 천주님과 동정 성모의 보호하심으로 몇가지 준비를 해서 5일 만에 백가점에 도착하여 경애하올 매스트르 신부님을 만났는데 이날은 1월 6일이었습니다
지금은 3월에 방지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사정은 파견하셨던 신부님들의 편지를 보시면 더 자세히 아시게 될것이고 받으신 첫 조선 사람들의 편지는 물리 신부님께로 보낸 줄로 저는 아옵니다. 기구 중 천주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하여 주심을 바라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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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겸비한 소생 김 안드레아 |
제8신 리브와 신부 좌하 ---------1844년 5월 17일 |
공경하올 신부님,
5월 15일부로 신부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를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읍니다. 작년 음력 3월과 9월경에 장상의 분부대로 저는 다시 변문으로 갔으며 거기에서 조선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읍니다.
조선에 있는 교우들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으나 목자 없이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해자인 왕비는 아직 생존해 있고 소문대로 황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천주께서 허락하신다면 교우 가족을 의주로 옮겨 조선에 입국할 사람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해 볼까 합니다. 저희들은 천주님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그분의 섭리에 맡겨 날마다 입국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지극히 공경하올 고 주교님과 같이 몽고에 체류하고 있으며 2월 4일 공경하올 주교님의 사명을 받들어 북방을 통한 조선 입국의 길을 탐색하고자 약 두 달 동안 큰 장애 없이 모든 여정을 답사하고 돌아왔습니다.
만주어로 훈춘이라 불리는 홍시개 촌락은 우리가 체류했던 팔가자에서 2천 리나 떨어져 있읍니다. 훈춘과 영고탑 사이에는 5백 리나 뻗어 있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으며 이 사막에는 주막이 없고 유목민들이 일정한 지점에 체류하면서 나그네들을 자기 움막에 유숙케 한다고 합니다.
훈춘에서부터 조선 사람들의 촌락과 집을 볼 수 있으며 장이 열리는 날 외에는 일체의 교섭이 인정되지 아니합니다. 그후 훈춘에서 안내자와 같이 조선인 마을에 가서 8일을 묵고 거기에서 조선인 안내자를 만났읍니다.
이들은 전교 신부님의 도탁을 기다리며 한 달 이상을 머물고 있었다 합니다. 존경하올 신부님께 모든 것을 사뢸 수는 없으며 상세한 것은 신부님들이 그들의 서한에서 알려 드릴 것입니다.
존경하올 신부님, 만일 가능하시다면 성경책과 영신 생활을 위한 매일 묵상책, 그리고 성로신공책, 상본, 특히 성모님의 무염 시태 상본과 십자고상과 묵주, 그리고 붓을 깎는 칼과 함께 보내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이번에 도마는 상서 못하오며 신부님께 정성껏 문안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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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장 천하고 불초한 소자 안드레아 김해 김 |
제9신 |
주교님의 강복을 받은 후 판리(널빤지로 된 얼음이나 눈을 타는 썰매)를 타고 눈이 쌓인 길을 빨리 달려 몇 시간 만에 장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이튿날 장책(말뚝을 꽂아 몽고와 만주 국경을 분계한 것)을 지나서 만주로 들어 갔읍니다.
넓은 들에는 눈만 쌓였을 뿐 별로 볼 만한 것은 없었으며, 여럿이 판리를 타고 여기저기 빨리 달리는 것이 장관이었읍니다. 그 들을 지나 먼저 도착한 도시가 길림인데, 그 곳에는 감사와 대대장이 있고, 송화강은 그때까지 얼음이 풀리지 않았었읍니다.
송화강 북편에는 큰 산 하나가 있는데, 그 산 꼭대기에는 엷은 구름이 둘러 있고, 그 산이 서편에서 동편까지 연이어져 있어, 길림으로 불어오는 북풍을 막아 주고 있었습니다.
길림에는 벽돌과 흙으로 지은 집이 많으나 다 초가집이오 단층이었고 연기가 집 위로 올라 어리어 온 읍내는 검푸른 망토로 덮인 것 같았고 만주 사람과 청국 사람이 섞여 사는데 청국인의 수가 더 많은 듯하였습니다.
호적을 하는 법이 없어, 인구 수효가 60만이라 하나 청국 사람의 말에는 과장이 많아 믿을 수 없으며 대개 그들 말의 3분의 1밖에 안 될 듯합니다. 시장은 남쪽 읍내와 같이 번화하여 여거 가지 직물과 백목, 비단과 부인들 머리 꾸미는 데 쓰이는 여러가지 꽃과 나라에서 관리하는 산림에서 나온 재목 등이 대규모로 매매되고 있었읍니다.
봉산은 길림에서 멀지 않으며 흰눈 위에 검은 봉우리를 들고 있는 그 자태는 여기서도 볼 수 있어, 마치 청국과 조선 사이에 넓은 울타리와 같이 양국의 통행을 막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이 산이 북에서 남쪽까지 몇 리나 되는 지 알 수 없사오나, 동에서 서 까지는 길이 6백 리나 된다 합니다. 만일 북에서 남으로 조선을 향하여 직선으로 갈 수만 있다면 길이 빠를 것이나, 수목이 울창하여 영고탑 읍으로 둘러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몰라 걱정이었는데, 마침 천주님의 안배로 그 지방 어떤 고관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만나 그들의 인도로 길림을 떠나 송화강 얼음을 타고 얼마 동안 그 강 원류로 올라갔읍니다.
땅은 평탄치 못하고 산도 험악하고 수목도 울창하여 길이 잘 보이지 못하고 산도 험악하고 수목도 울창하여 길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 강에서 갈려 북쪽으로 강물과 합류되는 냇물을 따라갔습니다.
이 내를 청국말로 '무딴'이라고 하는데, 서양 지도에는 '우르디아'라 합니다. 이 말은 '달다리아'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가에는 간간이 주막이 있사온데, 하루는 여교우의 주막을 만나 그 주인이 청국 다른 교우들처럼 저희를 형제처럼 후대했고, 식사대도 받지 않을 뿐더러 가다가 먹을 음식까지 주니 오직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지방에서 오는 형제들을 할 수 있는데까지 후하게 대접해 보내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그 주막을 떠나 덜 험한 길을 골라 가느라고, 혹은 얼음을 타고 가기도 하고 혹은 강 양편 기슭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였읍니다.
좌우로 수목이 울창한 높은 산에는 표범, 이리, 곰 등 온갖 맹수가 진을 치고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을 습격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무서운 벽지를 혼자 지나가다가는 얼마 못 가서 곧 맹수의 밥이 된다고 하는데, 작년에도 행인 80여 명, 우마 백여 필이 맹수한테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합니다
그러기에 행인들은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다니는데, 저희도 역시 적을 압도할 만한 강대한 군대를 편성하여 행군했읍니다. 도중에 때때로 굴 속에서 맹수가 나타났지만 저희 일행의 위력을 보고는 감히 덤비지 못했습니다.
맹수가 사람을 습격하니 사람 역시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서둘러, 맹수를 멸종시키려고 해마다 가을이 되면 천자께서 포수들로 조직된 원정군을 이 산림 지대로 보내신다 합니다.
작년에도 포수 5천 명이 왔다고 하며, 이런 용사들 중에도 종종 맹수들한테 생명을 빼앗겨 죽음을 당하는 자도 많이 있다 합니다. 저희가 지날 때도 천 리 밖에 사는 사람이 시체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짐승을 잡은 보람이 있어 널 위에 사슴 뿔과 호랑이 가죽 등 전리품을 싣고 가며 호상군들은 죽은 자의 영혼의 노자라고 하는 지전을 길에 드문드문 뿌리고 가는데, 이는 천주교 교리의 생전선행이 사후 노자가 되는 줄 모르고 하는 노릇이오니, 참으로 가련하게 여겨지는 바였습니다.
봉산에서의 사냥은 천자께서만 하도록 되어 있으나 조선인과 청국인들이 사사로이 사냥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봉산 안에는 동편 바다로 통하는 길이 있으며 그 길에 다다르기 전에 길이 7,80리나 되는 방축이 있었고 지금은 다른 냇물과 같이 얼어붙었으나 해마다 여름이 되면 천자가 사용할 값진 구슬을 많이 건져 낸다고 하여 호수 이름을 '흑호'라고도 하고 '추희먼'이라고도 합니다.
그 뜻은 '검은 구슬문'이라는 것으로 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곳입니다. 저희는 호수 사이에 있는 주막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는 중국인들의 제일 큰 명절인 설날이 임박했기 때문에 길 가는 행인들이 적었고, 주인이 저희를 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읍니다.
저희는 장춘에서 훈춘으로 가는데 길을 몰라 걱정이라 하였더니 그는 7,8일 동안 여기 머물다가 자기가 훈춘까지 식료품을 실어 보낼 마차편이 있으니, 그 때 저희들의 봇짐을 수레에 싣고 그 뒤를 따라가도록 해 줄 터이니 그 동안 여기서 푹 쉬라고 하였읍니다.
저희는 퍽 감사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였읍니다. 사실 저희의 말들도 너무 지쳐 며칠 쉬게 할 필요도 있었던 것입니다. 설날에는 이상스러운 이단 예식을 지내는데 그들은 설날에 잠을 자지 않았고 이단 예식을 주관하는 사람이 이상한 옷을 입고 밤중에 저한테로 왔읍니다.
저는 그 의도를 짐작하고 잠이 든 체하였더니, 그 사람이 저를 깨우려고 여러번 제 머리를 흔들어 댔읍니다. 저는 깊이 든 잠에서 깨는 체하며 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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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불초한 신자 김해 김 상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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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교자 영성 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