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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논의('무아와 윤회' 즉 '연기와 인과'의 문제)와... 앞에서 인과를 논할 때 <A와 B를 연관짓는 연기 즉 인과는 마음의 내적 작용>이라고 지적한 내용으로... 오늘날 일반인의 관점에 비추어 불교유심론을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선 불교입문의 주제에 맞추어... 불교유심론과 같이 마음을 내는 것이 가능한 까닭의 하나를 말하게 될 것이다.
먼저... 불교유심론 성립 당시에는... 요가등을 통해 드러난 소위 무의식의 세계가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소위 무의식의 영역을 소위 현실이라고 이름하는 것보다 더욱 근본적인 세계로 보았다는 점을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무아와 윤회' 즉 '연기와 인과'에 대해... 일반인의 산냐에 따라 제기되는 형식적인 모순에 대한 혼란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인과란 기본적으로 마음의 내적 작용 즉 명색이라는 이름에서 명(名)이 지칭하는 영역에서의 문제였다.
따라서... <명색에서 색이 지칭하는 부분> 즉 <소위 현실> 곧 <중생이 자성적으로 파악하려고만 하는 이 세계>를... 명(名)의 작용에 따른 환상으로 간주하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방법은 신심을 상대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던 중관학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였다.
누차 강조하듯... 불법은 기본적으로 불법에 따라 마음을 일으킬 때에야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유심론이 그러한 길을 선택한 것은 분명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위 내적 체험에 의해 불법이 왜곡될 수 있는 또 다른 단초를 제공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불교유심론을 세웠던 많은 분들은 그러한 우려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 분들은 명색에서 색을 명의 작용에 따른 환상으로 간주하더라도 불법을 왜곡할 우려가 없는 분들이었다.
사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제대로 알기만 해도 불법을 왜곡할 우려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명색이란 표현 역시 연기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명색은 명(名)과 색(色)의 연기이다. 즉...
< 명(名)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색(色)이 있다. > 혹은
< 색(色)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명(名)이 있다. >라는 연기를 명색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업보, 인과, 연기 모두 같다.
업보는...
<업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있다.> 혹은
<과보가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업이 있다.:과보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업이 있다.>...
인과는...
<인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과가 있다.> 혹은
<과가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인이 있다.:과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인이 있다>...
인연은...
<인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연이 있다.> 혹은
<연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인이 있다.>
를 각각 의미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인,연,과,업,보,명,색 이렇게 하나씩만 말하면 부적절하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을 보던 연기를 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라는 부처님의 반문을 기억하고 있다면... 하나씩 따로 떼어 말할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무엇이 있음도 기억할 것이다. 더구나 일차적 의미의 공(空)이나 무시무종(중중무진)임을 기억하고 있다면... 인, 연,과, 업, 보, 명, 색이라고 하나씩 칭할지라도 그 자체가 공함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공'하다는 것은 연기라는 말이다. '인연'등을 말하기 전에 이미... '인'등이라 이름하는 것 자체 역시 연기이다. 연기에 따르지 않은 것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법의 모든 표현은 연기를 떠나 이루어진 언명이 아니다. 만약 연기를 떠나 이루어진 언명이 있다고 한다면... 부처님께서 무엇을 보던 연기를 보라고 말씀하시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무아라고 하든 윤회라고 하든 그 무엇이라고 하든 연기를 떠나 '의미지어지는' 즉 '의미로 조건지어지는' 그러한 개념은 없다.
불법의 용어는 불법에 맞게 해석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마음을 떠나 설해진 불법은 없기 때문이다. 즉 불법에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불자의 마음을 떠나 설해지는 불법은 없으며... 불법에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불자의 마음을 떠나 드러나는 불법의 언명이나 표현 역시 없다.
이와 같다면... 즉 명색도 연기의 표현이라면... 색과 명(이름)은 어떠한 형태이든 서로를 조건짓고 있을 것이다. 즉 불교유심론은 이 세계가 환상과 같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가 환상과 같다고만 말한다면... 그것은 불교유심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샹카라의 베단따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불교유심론에 따르더라도... 이 세계가 자성적으로 실재한다는 산냐가 일어날 때... 이름(명)의 작용일 뿐 실재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불교유심론에 따르면... 이 세계가 환상과 같은 헛것이라는 산냐가 일어날 때... 역시 이름(명)의 작용으로 헛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이게 불교유심론이다. 왜 그런가? 명색이란 하나의 연기이기 때문이다. 불교유심론은 마음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유심론에 따를 때 허무주의는 없다. 허무함도 이름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냐를 이름이라고 칭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명(名)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작용을 상온(산냐)으로 보는 사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느낌을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느낌 즉 수온을 강조하는 나의 입장에서... 그러한 명(名)에 있어 상온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사고에 동의할 수 있는가?
어떨 것 같은가? 기본적으로 본질적 작용을 산냐로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왜 느낌을 그토록 강조했는가?
느낌이 산냐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즉 느낌도 산냐를 떠나 있지 않다.
소위 <다섯가지 분류> 즉 <오온>의 원칙적 뜻은... 인터넷에서 백과사전을 뒤져 보면 나오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터넷 백과사전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오온이 무엇인가는 극히 어려운 것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론 백과사전에 나오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이 오온의 원칙적인 뜻을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온 역시 불법에 따라 마음을 일으킬 때 그 원칙적 의미를 보다 온전하게 알 수 있다.
사실 오온은 그 자체가 산냐다. 현상계는 오온이라 이름할 다섯가지 각기 다르기만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따라 현상계를 볼 때 그룹화할 수 있는 다섯가지 분류인 것이다. 그리고 분류란 산냐와 함께 한다. 산냐가 일어났기에 분류를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온은 사실 그 자체가 산냐라고 적은 것이다.
불법은 지극히 교묘하게 설해졌기에 그 뜻을 구체적으로 제대로 아는 것조차 실제 수행을 떠나 가능하지가 않다. <수행> 즉 <불법에 따라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떠나 원칙적인 뜻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온의 원칙적인 뜻은 뭔가?
오온 중 무엇을 가지고 시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많다. (오온도 공하다!!!) 내가 아는 것은... 나의 마음을 떠나 아는 것이 아니다. 즉 그러한 조건하에 분별하여 오온의 뜻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그러한 조건하에서 오온의 뜻을 간략히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식온이 있다.
식온이란 흔히 인식 내지는 의식이라고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많은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식온이 가장 원칙적인 마음을 일컫는 것이라고 산냐를 일으키기에... 인식 내지는 의식이라고 뜻을 설명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식온이란 기본적으로 감지하는 기능이지 인식이거나 의식이 아니다. 즉 식온은 반응할 수 있는 작용이란 뜻이다.
예로... 안식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한 <감각기관 즉 눈>의 조건하에서 빛이라고 하는 것을 감지한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없다면... 안식이 있어도 빛을 감지할 수 없다. 결국 안식이 없다고 이름할 수 있다. 하지만 안구이식을 통해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형성되면... 빛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빛을 감지할 수 있다면 안식이 있다.
안식은 과연 있었는가 없었는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떠나 안식이 있었다고 해야 옳은가 없었다고 해야 옳은가? 가장 원칙적인 불법의 입장에 따라 판단한다면... 그것은 말해질 수 없다.
왜?
안식은 자성이 있는 무엇이 아니다. 안식은 자성이 없다. 그것은 철저하게 그에 상응하는 조건에 따라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다.
만약 '눈'과 같은 감각기관을 배제하고 안식을 설명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조건에서는 말해질 수 없는 무엇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희론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안구이식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이식하여...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던 안식이 제대로 작용하도록 하겠다는 뜻인 것만은 아니다. 안구를 이식한다는 것은 안식까지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산냐와 함께 한다. 이미 안식은 있기에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이식하여 안식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흔하다. 자성적 사고이다.
물론 불법을 이야기할 때 일반인이 보다 쉽게 납득하도록 설명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누차 강조한 바 있듯... 그것은 그럴 듯한 것이지 실제로도 그러하다는 뜻은 아니다.
왜?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것은... 안구이식을 통해... 빛을 감지할 수 없던 사람이 빛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빛을 감지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 안식이 있었는가는 알 수 없다. 왜? 안식은 그에 상응하는 감각기관과 함께 빛을 감지하는 기능에 대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단순화시킨 것이다. 실제로 안식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안식의 감각기관은 아주 복잡하다. 안식이 빛만을 감지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며 안식의 감각기관이 눈만인 것도 아닐 것이다.
식온이 어떠한 것인지 감이 올지 모르겠다. 위에서 중생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사트바(sattva)를 이야기할 때... 유정과 무정을 구별하는 기준인 마음은 원칙적으로 식온을 말하는데 중생이 아니기만 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 바 있다.
왜 그런가?
식온은 감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찰하기에 돌덩어리도 다양한 반응을 한다. 아니 다양한 반응구조하에 놓여 있다. 만약 감지할 수 없다면 반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반응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감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감지는 생물학적인 뉘앙스가 나긴 하지만 그 본질은 반응에 있다.
그리고 아직 반응하지 않는 그 무엇을 본 바가 없다. 반응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없음조차 있음과 있음을 통해 알려진다. 알려진다는 것은 반응한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연기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A가 있을 때 B가 있다. A와 B가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A와 B를 조건하에 놓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연기란 것은 하나의 반응구조이다. 반응구조를 떠나 드러나는 것은 없다. 그리고 홀로 반응하는 무엇 역시 없다. 과학도 그러한 것은 알지 못한다.
열반을 왜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언명했는가? 알려지지 않은 것만이 조건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무르지 않게 된다.
없음을 발견할 때... 행자는 이것은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산냐를 일으킨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조건지어지지 않은 속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조건지어진 것은 없다는 사실조차 알게 된다.
위에서... <안식이 있을 때... 그에 상응한 감각기관 즉 눈의 조건하에서 빛이라고 하는 것을 감지한다.>고 하였다.
빛은 뭔가?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색온이다. 즉 색온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눈은 뭔가? 위의 언명에서 '눈'은 안구만을 칭한게 아니다. 즉 안식이라 이름할 것이 작용하여 빛이라 이름할 무엇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적절한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자... 빛이라 이름할 무엇... 산냐이지 않은가? 산냐를 떠나 색온이란 이름이 드러나는게 아니다. 수온, 행온, 식온 더 나아가 상온조차 그렇다.
색온에서 특히 주의할 점은... 심식의 감각기관을 마음이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감각기관으로서의 마음의 대상이 되는 것 즉 관념등 역시 색온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즉 관념은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념은 원칙적으로 상온(산냐)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위에서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색온으로 분류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관념은 상온으로 분류하지 않는 것이다.
관념과 매칭시키는 기능이 상온(산냐)이다. 아래에서 간략히 다룰 시간과 공간이라고 이름하는 관념 역시 색온이다. 물론 상온을 떠나 관념이라는 것 역시 있는게 아니다. 자성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은 없기 때문이다.
불법에서 특히 오온과 관련된 논의는 극히 정밀하다. 제대로 알기도 어렵고 그나마 아는 것을 온전하게 적어 내는 것조차 어렵다.
수온은 뭔가?
위의 예에서... 안식과 그에 상응하는 감각기관이... 그 대상을 만나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어떠한 작용이 바로 수온이다. 이러한 수온은 감각기관이라 이름하는 무엇의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다. 결국 수온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식온이 있어 반응할 수 있는 구조에 놓일 수 있고... 그 식온에 상응하는 감각기관에 따라 반응하는 구조에 놓이게 되었는데... 반응할 수 있는 구조에 놓였다는 말은 곧 어떠한 형태로든 반응을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수온 즉 흔히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느낌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즉 산냐의 개입)'해서 말한 것이... 유괘한 느낌, 유쾌하지 않은 느낌, 유쾌하지도 않고 유쾌하지 않은 것도 아닌 느낌이다.
이러한 수온은... 기존의 반응구조와 다른 어떠한 구조라고 할 수도 있으며... 기존의 반응구조하에서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떻게 일어나는 반응이 기존의 반응구조와 다른 어떠한 구조라고 할 수 있는가? 일어나는 반응을 떠나 있지는 않지만 일어나는 반응과 상응한 무엇을 수온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이다.
그러한 느낌에 상응하여 의도 즉 행온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미 지적하였듯... 그 느낌은 산냐를 떠나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느낌 그 자체도 산냐를 떠나 있지 않지만... 느낌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뜨거운 불이지만 무조건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산냐 즉 상온의 작용은 아주 미묘하고 복잡해서 일일이 열거하기는 힘들다.
어쨌건 행온은 반응에 대한 반작용과 같은 것의 하나이다. 즉 반응을 통해 새로운 반응구조로 드러나는 것은 행온의 작용이다. 즉 행온은 반응이 일어나 기존의 반응구조가 아닌 새로운 조건 즉 반응구조로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어떠한 작용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것은 수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반응구조와 다른 어떠한 구조라고 할 수도 있으며 기존의 반응구조하에서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판단을 하는 것이 산냐(상온)이다.
산냐는 산냐 그 자체를 포함하여 오온에 따라 붙는 무엇을 칭하는 것이다.
예로... 산을 볼 때... 안식이나 눈은 산을 알지 못한다. 감지한 가시광선에서 산이라는 유의미한 형상을 특정지우는 것은 상온이다.
물론 그러한 상온은 행온을 떠나서 있지만은 않다. 그러니 오온은 서로 서로가 얽혀 드러나게 된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뜻을 말해야 하니... 상온이라는 것에 중심을 두어 설명하는 것 뿐이다.
이러한 인식과 사유와 판단등의 작용이... 인간 이외에 어떻게 일어나는지, 소위 생명현상 이외라고 이름할 영역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전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나의 마음이라 이름하는 조건하에서의 인간의 경우이며... 그것마저 불완전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조차 미묘한 작용 일체를 감지하지 못하는 나의 입장에서... 오온을 바르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렇기에 오온을 설명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어쨌건 오온을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의 단초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