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여행]
서양 세력의 동아시아(중국) 진출: 아편전쟁과 난징조약(1842)
아편에 무너진 아시아의 맹주 ‘격랑(激浪:게센파도)의 시대로…'
영국 인도산 아편 밀수출 삼각무역체계 확립
중국 아편전쟁 패배 불평등조약 맺고 문호 개방
아편전쟁 시 해전 장면. 필자 제공
난징조약문
아편을 흡연 중인 중국인들.
청태조 누르하치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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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총 31회에 걸쳐서 주로 서양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번 회부터는 19세기 이래 거세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침탈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대응 양상과 그 결과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같은 시기에 유사한 경험을 한 우리의 역사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누르하치의 영도 하에 만주 지방에서 흥기한 여진족은 17세기 초반부터 그 힘을 사방으로 과시하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주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조선은 두 차례(정묘호란·병자호란)에 걸친 여진족의 침략을 겪었다. 명과의 대결에서 승리, 1644년 중원 대륙을 석권한 여진족(1636년 만주족으로 개칭)은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해 정복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더구나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까지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와 같은 탁월한 리더들이 연이어 등장해 안정되고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과 본격적으로 접하기 이전 시기에 중국은 이민족 왕조인 청(?)의 지배하에 있었다. 만주족은 정복왕조였으나 중국의 전통적인 제도와 유교사상을 거의 대부분 수용했다. 이로써 청조는 유교문화권 속의 문인 중심사회라는 기존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갔다. 과거제도를 매개로 해 형성된 신사층(紳士層)이 지속적으로 사회의 지배세력을 이뤘다. 경제적으로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를 유지했으나,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 세력이라는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중화 의식에 입각해 주변국과 수직적 관계를 설정한 조공 제도를 통해 자국의 우위를 유지하고 과시했다.
서구 열강, 노골적으로 교역 확대 시도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청조 지배의 쇠퇴 현상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황제 중심의 전제 체제가 갖는 한계성이 심화됐다. 절대 권력이 무능한 황제에게 집중된 탓에 행정 능률은 떨어지고 관료사회는 부패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심지어는 만주족 통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팔기군(八旗軍)마저 기율은 이완되고 무기체계는 낙후돼 약화 일로에 있었다. 여기에 100여 년의 평화 시기에 크게 늘어난 인구(1711년 1억4000만 명→1850년 4억1000만 명)에 비해 거의 일정한 농경지(1723년 730만 경→1824년 756만 경)는 심각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농민들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민초들의 외침은 백련교의 난과 같은 대소 규모의 민란으로 표출됐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내우(內憂)의 상황 속에서 외환(外患)이 닥쳐왔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 열강은 노골적으로 중국과의 교역 확대를 시도했다. 그 선두에 당시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이 있었다. 원래 서양과 중국 간의 교역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유럽인들의 해외 팽창 이전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중개무역을 통해 주로 중국산 도자기와 비단 등이 유통됐다. 16세기에 이르러 직접 교역이 가능해지면서 교역 품목도 다양화되고 교역량도 크게 늘어났다. 이러한 아시아, 특히 중국과의 교역에서 마카오를 교역 근거지로 확보한 포르투갈과 마닐라를 개척한 스페인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네덜란드·프랑스·영국 등이 가세하면서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졌고, 이러한 와중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교역의 체계화를 이룩한 네덜란드와 영국이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중국과의 교역에 관한 한 18세기 이래 영국이 단연 선두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영국과 중국의 교역은 극히 제한된 규모로만 이뤄졌다. 1699년 이래 중국은 남부지방의 광저우 항구에서만 외국과의 교역을 허용하는 일명 ‘광둥(廣東)무역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 상인들은 항구의 제한된 지역에 살면서 거래조차도 청 정부가 허가한 총 13개의 공행(公行)이라는 특허상인을 통해서만 할 수 있었다. 교역 품목도 차·비단·목면 제품 등 중국 측에 유리한 물품으로 한정돼 있었고, 청 관리들에 의한 각종 잡세 징수와 잦은 간섭도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19세기 이전까지 영국 상인들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국의 차와 비단을 수입하고 영국산 상품을 판매하면서 그런대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총 13개 특허상인만 교역 가능
그런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영국의 산업혁명이 질적 및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영국 상인들은 중국과의 통상 확대를 갈망하게 됐다. 기존의 폐쇄적인 교역으로 인해 구조적인 문제점이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영국인들의 소비 수준이 높아져서 차(茶)를 비롯한 중국산 물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그로 인해 급증한 무역 적자는 영국정부의 골칫거리로 대두했다. 이 문제 해결에 골몰하던 영국은 인도산 아편(양귀비)을 중국에 밀수출하는 편법을 고안해 냈다. 즉 인도에는 면직물과 같은 공업제품을 수출하고 중국에는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밀매하며 여기서 얻은 수익으로 중국산 차와 비단 등의 수입대금을 지불하는 일종의 ‘삼각무역체계’를 확립했던 것이다.
이는 곧 영국 측에는 엄청난 행운을, 중국 측에는 지난(至難)한 불행을 초래했다. 중국의 은(銀)이 영국으로 유출되는 무역수지의 역전 현상이 발생하고 점차 심화됐다. 이는 전적으로 중국인들의 아편 흡연 풍조가 만연하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부 유출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건강 문제가 심각해지자 급기야 청조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아편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한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으로 임명, 광둥지방으로 파견해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현장에 도착한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이 보유한 다량의 아편을 몰수, 이를 소각하는 초강경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중국의 강경 조치는 중국과의 통상 확대를 갈망해 온 영국에게는 오히려 호기로 작용했다.
영국도 강공으로 맞섬에 따라 1839년 양국 간에 일명 ‘아편전쟁(Opium War)’이라 불리는 충돌이 벌어졌다. ‘잠자는 사자’라던 소문과는 달리 중국은 영국 함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1842년 청 정부는 난징에서 영국과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국은 거액의 배상금을 영국에 지불하고 공행제도를 폐지함을 물론, 홍콩 할양에 더해 5개 항구를 개항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이 조약은 중국 측에 관세 자주권의 상실, 영사재판권의 인정, 최혜국 조항의 수용 등을 강제한 ‘불평등조약’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시아의 맹주’ 중국의 허약함을 목도한 서구 열강은 경쟁적으로 동아시아로 몰려들었다. 이처럼 거세게 밀려오기 시작한 격랑(激浪)을 중국과 일본은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Songs From a Secret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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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Songs From a Secret Garden
Secret Garden 1995–present
No.1 - Noct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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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Songs From a Secret Garden - Secret Garden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Audio CD (April 16, 1996) Label: Polygram Records / PHILIPS (P) 1995 PolyGram A/S Norway (C) 1996 Philips Classics Marketed in the UK by Philips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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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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