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1926년 울산 生 ·49년 범어사서 동산스님 은사로 득도 ·해인사 범어사 강원서 이력마침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 및 중앙종회의원, 범어사 주지(78년) 역임·78년 부산불교연 합회 창립
오늘 법회에서 나는 방생의 참의미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어느새 가을이 오고 중추가절이 다가왔습니다. 이때쯤이면 많은 절에서 방생법회를 주관하지 않습니까. 방생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바로알고 바른 방생을 해야 공덕 이 되는 것입니다. 의미도 모른채 잘못된 방생을 하면 악업만 더 쌓는 것입니다. 방생은 글자 그대로 생명을 놓아 주는 것입니다. 뭇 중생을 죽음의 공포에서 병마 의 고통에서 천재지변의 고난에서 건저 주는 것이 방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 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사는데 이 방생 하나만 잘 행해도 무량한 성불의 근기를 쌓 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생은 이론도 필요없고 계획도 필요없고 연습도 필요없 습니다. 오직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 나 다 똑 같이 행해야 할 일인 것이지 어떤 이유나 조건이 있어서도 안되는 것입 니다. 어떤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도 방생의 마음을 해치는 것이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하는 방생은 더욱 안될 일입니다.
물고기를 사서 물에 놓아주는 방생은 이제 그만 둬야 합니다. 오히려 환경을 해치 는 방생이 될 뿐이니 무슨 공덕이 되겠습니까. 관광버스를 타고 가서 물고기 몇마 리 놓아 주고 소원을 빌지만 그것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 을 받고 공덕이 쌓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나마 안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진실로 자기와 중생을 자유롭게 하는 방생은 될 수 없다는 것입 니다. 축생과 미물을 볼때마다 “어서 그 축생미물의 탈을 벗고 좋은 세상으로 환 생하라”고 축원 한마디 해 주는 것이 더 바른 방생일 것입니다. 방생은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무조건의 방생이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걸 제대로 하 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수행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방생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육도를 윤회하는 자신의 업장으 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이 있습니 다. 우리는 이 긴 윤회의 굴레에서 수많은 업을 지으며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얽어 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고의 사슬은 길기만 한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해 방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이 먼저 이 중생의 사슬을 벗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 니다. 물론 그 사슬을 벗는 일은 하루이틀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끝없는 수 행과 선업을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이치 를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혜를 구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둘로 갈라 놓아서는 안됩니다.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이웃(중생)의 고통을 돌보는 큰 마 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 큰 마음이 바로 보살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 큰 마음을 내기 쉬운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를 사는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 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나 많은 일을 합니까. 그 복잡한 생 활 속에서 스스로 사슬을 풀어내는 지혜를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 다. 그러나 불자들은 그 어려운 일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의 마음을 갖길 서 원 하면 됩니다. 서원하는 그 순간 이미 보살의 마음은 갖춰집니다. 얼마나 착실히 유지하고 쓰느냐하는 것이 문제이겠지만 말입니다. 보살의 마음은 지혜와 어리석 음을 따로 두지 않습니다. 모두 어여쁜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갖기 위해 부지런히 수행해야 합니다.
세상을 어여삐 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여쁜 세상이 보이고 흉하게 보는 사람의 눈에는 흉한 세상만 나타납니다. 여기에 중생과 보살의 차이가 있는 것이 니 모든 것이 한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방생을 하는데 있어서도 나 자신을 방생하는 것과 다른 생명을 놓아 주는 일을 따로 두고 분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번뇌의 사슬에 묶여 있 는데 어떤 생명을 편케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그 마음을 가져 오너라”라고 함으로써 제자의 눈을 번쩍 뜨게 했던 일을 잘 알고 계실 것입 니다. 이미 편안하게 구족된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은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가 이 미 방생의 실천입니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상을 보고 거북하거나 짜증스럽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상 그 자체가 우리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은 그 분은 이미 생노병사의 굴레를 다 뛰어 넘으신 대각의 상을 스스로 갖추셨기 때문 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며 좋은 낯빛을 하는 것도 이미 중요한 방생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말 한마디 웃음 띤 표정 하나가 다 방생입니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순간 순간이 다 방생의 과정입니다. 내가 있으므로 이웃이 있고 일체 만물이 있습니다. 나의 한 동작이 죄악이면 법계가 죄에 휩싸이고 나의 말 한마디가 선하면 법계가 착해집니다. 나는 법계의 모습이고 법계는 나의 거울 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삶이 방생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렇듯 방생은 실천인 것입니다. 불자 한사람 한사람이 웃음띤 얼굴을 갖는 방생에서 고 통속의 이웃을 돌보는 방생에 이르기까지의 작고 큰 방생을 생활화 한다면 우리 사회는 그대로 불국정토가 될 것입니다. 실천력이 없는 방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조건을 따지는 방생만 하는 사회는 오히려 지옥도에 죄악을 덧칠하는 격이 될 것 입니다.
자신을 먼저 방생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아셨을 겁니다. 이제 불자들은 사회 를 방생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부단한 자기수행과 서원 그리 고 조건 없는 실천을 통해 사회의 방생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늘 이 너무 많습니다. 그 그늘 속에서는 반드시 가난과 질병과 범죄가 독초처럼 자라 나고 있습니다.
보살의 마음을 낸 불자들의 손길은 그런 독초를 제거하는데로 모아져야 합니다.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님처럼 우리의 손과 눈을 이 사회의 그늘로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스스로 죄업의 사슬을 푸는 수행이 필요하고 서원을 세 우는 것이 필요 합니다. 물론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것이 나중이란 분별을 해서는 안됩니다. 보살심을 내는 것과 그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보살심을 낸 불자 오백명이 모이면 그대로 천수천안이 아닙니까. 관세음 보살님은 하늘에 있지 않고 지장보살님은 땅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 을 내면 그대로 관음보살이요 지장보살인데 그래서 그 원행을 행하면 이곳이 불국 토인데 어디 가서 찾고 있습니까.
방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입니다. 해탈은 자유이고 무애자재입니다. 윤회의 사 슬을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실상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사회를 방생 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슬을 푸는 것도 사회를 향해 방 생의 실천을 쉬지 않는 것도 다 해탈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해탈을 향해 정진 하는 가운데 이웃과 함께 해탈의 길을 열어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사회가 해탈한다는 것은 온 법계가 해탈한다는 것이니 그 자리야 말로 불국토가 아니겠습 니까.
그런데 우리는 불국토는 커녕 지옥문을 넓히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그늘 은 해질녁의 산그림자처럼 넓어지고 범죄 소식은 끝이 없습니다. 지옥이 죽어서 가는 곳인줄 알지만 이미 죄악이 들끓는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이 사회가 지옥으 로 변해 버리는 이유는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이 사는 곳이 지옥일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옥을 벗어나는 지혜가 필요 합니다. 그 지혜는 마음을 닦는데서 시작됩니다. 티끌이 가득한 마음은 지옥을 지을 뿐이니 스스로 짓는 윤 회의 사슬을 어느 세월에 벗어던진단 말입니까.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해 수행정진 하는 것은 마음의 티끌을 닦아내고 청정한 법계 를 짓는 일임을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고통의 근본을 모른채 무심히 살다 가는 것은 축생미물의 윤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 러 불자님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해 자신의 실상과 생노병사의 고통이 왜 오 는 것인지를 알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수행정진 하는 사람들이니 얼마나 복된 일입 니까. 이 생을 받아 불법에 귀의 한 것도 무수한 전생의 선덕이 있어서 가능 한 것입니다. 다음생에서는 한 걸음 더 해탈로 나아간 모습으로 태어 날 것을 의심하 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는 것은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며 얼마나 많이 닦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닦으며 이웃의 사슬을 풀어 주는 보살행 을 한시도 쉬지 마십시오.
방생은 보살행입니다. 나와 이웃이 함께 해탈하는 실천의 길입니다. 방생법회에 참 가 하는 것만 방생이 아닙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이 방생이고 나를 위해 수행하는 일도 방생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방생이 아닐 수 없습 니다. 나와 일체 중생의 위대한 해탈을 향한 방생의 원력을 굳게 세우고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