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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年 성경적인 신앙뿌리 깊이내려 하늘곳간 알곡되는 해(後)
† 使徒바울 ☆ (敎理書信)
롬11:1-12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
Ⅱ.하나님의 계획(중)
구약 이스라엘 역사(歷史)나 초대교회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복음(福音)을 거부(拒否)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신 것 같은 생각(生角)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 버리셨느냐?' 고 질문(質問)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 이스라엘 역사(歷史)가 이스라엘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노력(努力)과 타락(墮落)하려는 이스라엘 사이의 줄다리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墮落)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先知者)를 보내시고, 또 재앙(災殃)을 내리셔서 징계(懲戒)하시고 똑바로 잡으십니다.
그런 일을 수없이 반복(反復)하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抛棄)하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즉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滅亡)했습니다.
이것을 비유(比喩)로 든다면, 어떤 사람들이 함께 등산(登山)하다가 한 사람이 바위에서 미끄러져 밧줄에 매달렸을 때, 끌어 올리려고 애를 쓰다가 안 되면, 줄을 놓쳐서 그 사람이 떨어져 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미끄러져서 추락(墮落)하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끌어올리려고 애를 쓰시다가 *아무래도 안 되니까 결국 포기(抛棄)하셔서 떨어지게 하셨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엘리야의 예(例)를 통해 이렇게 설명(說明)하고 있습니다.
11:2-5절)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야 때, 얼마나 우상(바알)신앙(信仰)이 기승(氣勝)을 부리는지, 아합 왕과 이세벨이 하나님의 제단(祭壇)을 모두 부수고,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들을 다 죽였으며, 지금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자기(自己) 혼자인데, 이제는 자기(自己)도 잡아 죽이려고 한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 지금 이스라엘 안에 우상(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보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아직도 많이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망했습니다. 특히 이 사람들은 외국에 종으로 팔려가자 말자 혼혈(混血)이 되어 이스라엘 자손들의 정체성(停滯性)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손들의 *머릿속에는 아무리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나에게는 몇 방울의 이스라엘의 피가 섞여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몇 방울의 피 때문에 많은 이방인(異邦人)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滅亡)했습니다. 하지만 *멸망(滅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수술(手術)하시고, 치료(治療)하시는 과정(課程)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捕虜)되어 가서 회당(會堂)에서 성경(聖經)을 가르치고 배웠는데, 이것이 결국 *신약(新約) 교회의 기초(基礎)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포로(捕虜)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에 성전(聖殿)을 건축(建築)했는데, 거기에 주님이 오셨고, 성령이 임(臨)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生角)하기에 *이스라엘이 죽었다'고 생각(生角)되는 시점(時點)이 오히려 이스라엘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거듭나기 위해 진통(鎭痛)을 겪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어떤 사람의 상태에 대해 어느 한 순간만 가지고, 판단(判斷)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긴 시간을 통해 서서히 백성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救援)하시는 것은 거대(巨大)한 작전(作戰)과도 같습니다. 2차 대전 때, 연합군(聯合軍)이 노르망디 상륙작전(上陸作戰)을 실시(實施)할 때, 그냥 한 순간에 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계획(計畫)을 세우고, 연습(演習)한 후에 실행(失行) 에 옮겼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救援)하실 때, 즉흥적(卽興的)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중에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인도(引導)하셔서 예수를 믿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舊約) 성경(聖經)에서 룻은 모압 여자였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도 없었고,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베들레헴에 흉년(凶年)이 드니까 좀 잘 먹고, 잘 살려는 마음에 모압으로 도피성(逃避性) 이민(移民)을 갔는데, 거기에서 두 아들을 모압 여자와 결혼(結婚)시켰던 것입니다.
두 여자 중 하나가 룻이었는데. 룻은 남편이 죽고, 시집이 몰락(沒落)했을 때, 모압에서 재혼(再婚)해 잘 사는 길을 선택(選擇)하지 않고, 과부(寡婦) 시어머니의 신앙(信仰)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행(不幸)이나, 가난(家難)이나, 고난(苦難)을 사용(使用)하실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몰락(沒落)하고, 고난(苦難)을 받아도, 세상(世上) 사람들과는 비교(比較)할 수 없는 고상(高尙)함과 존귀(尊貴)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11:5-6절)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을 의무적으로 구원(救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도 정상적(正常的)으로 하면, 너무나도 부패(腐敗)하는 경향(傾向)이 강해서 도저히 아무도 구원(救援)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기적적(奇蹟的)으로 순전(純全)한 믿음의 사람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성경(聖經)은‘남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남은 자’들은 보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즉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면,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마셨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母親) 마리아라든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라든지,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양(羊)을 치던 자들이 모두 다‘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세상(世上)의 정치(政治)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通)해 메시아 나라를 소망(所望) 했습니다.
또한‘남은 자들’은 죄에 대(對)해서 *아주 민감(敏感)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자신(自身)의 죄에 대(對)해 고민(苦悶)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몸부림을 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福音)을 들었을 때, 말씀으로 자기(自己) 안에 있는 죄(罪)가 시원하게 씻겨 지는 것을 체험(體驗)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前)에 일곱 귀신(鬼神)이 들렸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귀신(鬼神)들이 떠나가고, 너무나도 귀(貴)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 발에 입 맞추고 비싼 향유(香油)를 부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前)에 많이 방황(彷徨)하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마음의 평안(平安)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배(船)와 그물을 모두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기(自己)와 생각(生角)이 맞지 않다고 등을 돌리고, 떠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들도 가려고 하느냐?' 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영생(永生)하는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면서 절대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방황(彷徨)하고 싶지도 않고, 더 이상 죄짓는 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하여 고민(苦悶)하고, 번민(煩悶)하는 것이 굉장히 복(福)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구원(救援)으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죄(罪)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아직 입구(入口)를 찾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체험(體驗)때문에 예수를 믿거나,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믿거나, 정치(政治)나 장사하는 데 이익(利益)이 될 것 같아서 믿는 것은 아직 예수님을 올바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恩惠)입니다.
정상적(正常的)으로 생각(生角)하면, 이런식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眞理)의 생명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올바른 믿음으로 나아올 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사람들이 너무나도 이교적(異敎的)이고, 세속적(世俗的)이어서 도저히 복음(福音)으로 성공(成功)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도 복음(福音)으로 성공(成功)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도시(都市)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결심(決心)하기를 고린도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전(傳)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십자가만 전(傳)했는데도 고린도에 큰 부흥(復興)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특히 방언(方言)과 은사(恩賜)가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많은 필요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어렵고, 심각(深刻)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罪)문제입니다. 인간적(人間的)인 생각(生角)을 버리고, 진리(眞理)의 생명의 말씀만 전(傳)하면, 하나님의 능력(能力)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恩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은혜(恩惠)의 능력(能力)을 체험(體驗)하게 될 것입니다. 즉 인간적(人間的)인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쓰지 않아도 생명의 말씀만으로 부흥(復興)이 일어나며, 축복(祝福)이 일어나며, 기적(奇蹟)이 일어나며, 성령의 역사(役使)가 일어날 것입니다.아-멘
찬송가 441장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매일 새벽(夏)4-5시 ✫ 주님께 도움의 기도하는 습관. ✫ 저녁엔 주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습관(살전5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지옥)에 태우시리라(눅3:17절)
카페,카톡회원(후(後)반기①) *그물의 비유(마13:47-50)*를 정회원과 비회원 chart로 구별하여 정리하는 기간 아-멘, 댓글은 은혜 받은 성도의 기본, ⟺ 감사와 仲保祈禱는 정회원 될 대상 ※어느 누구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