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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1.20.PM2시)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세계 성취의 10종사
오늘 2시 화엄경 공부하는 시간이다. 잘 오셨다.
세계의 의주(依住) 의지해서 머물다, 세계가 의지해서 머무는 모습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앞에서 열 게송을 우리가 살펴보았고, 열 두 개의 게송이 아직도 남아있다.
어떤 의미에서인지 다른 것은 다 아홉 게송 또는 열 게송 많아야 열 한 게송으로 대부분 열 게송을 중심으로 하는데 여기는 스물 두 게송이나 나온다.
의지해서 머물다, 세계가 의지해서 머무는 일에 대해서 스물 두 개의 게송이 있다.
오늘은 열 한 번째 게송부터 공부할 차례다.
혹수혹단무량종(或修或短無量種)이요 기상선환역비일(其相旋環亦非一)이라
묘장엄장여세수(妙莊嚴藏與世殊)하니 청정수치내능견(淸淨修治乃能見)이로다
혹은 길고 혹은 짧고 그 종류 한량없으며
그 형상이 둥글게 돌듯 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라
미묘한 장엄 창고 세간과 다르니
청정하게 닦아야 이에 능히 보도다.
혹은 길고 혹은 짧고 그 종류 한량없으며
그 형상이 둥글게 돌듯 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라
미묘한 장엄 창고 세간과 다르니
청정하게 닦아야 이에 능히 보도다
수행을 청정하게 잘해야 그러한 사실들도 다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모든 것을 자기 안목대로만 본다.
‘청정하게’라고 하는 말은 ‘공(空)하게’ 하고, ‘비운다’는 의미다. 그렇게 자기를 비워야 그러한 사실들이 다 보인다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데도 정말 다른 사람의 일, 남의 일은 제대로 그 사정을 속속들이 정확하게 알아서 판단하기가 쉽지가 않다. 자기를 비워야 된다.
모두가 ‘객관적으로 본다’ ‘객관적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절대 그것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 세계에서 아주 큰 나라에서 대통령 선거를 해서 대통령이 바뀌는데, 기존의 대통령은 곧 죽어도 ‘자기가 부정선거 때문에 졌다’ 고 생각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의사당을 침범해서 차지하고 거기서 사람들이 네 명인가 다섯 명인가 죽는 일까지 있었다.
그것이 전부 자기를 청정하게 하지 못한 것, 자기를 비우지 못해서 판단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판단이 흐리게 된 것이다. 판단을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 너무 자기에게 국집해 있으면, 자기에게 집착해 있으면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다.
세상 사람이 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잘못인 줄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해서, 다른 나라에서는 전부 그 나라의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삼고 정치를 하고 그랬는데 이제 그런 위신도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미개한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 지도자 한 사람의 집착 때문이다.
그동안 쌓아놓았던 위신과 권위가 다 종이짝처럼 되어버리고 미개국이나 개발도상국보다도 훨씬 더 못한 나라처럼 되어버리는 것, 거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 배울 점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 봐야할 점이 적지가 않다.
자기한테 너무 집착해 있으면 보이지가 않는다.
자기를 비우는 것, 청정이라고 하는 말이 글자대로라면 ‘깨끗하게’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텅 비었다’는 뜻이다. 비운다. 깨끗하게 비운다. 비워져야 깨끗하지 비우지 아니하고는 깨끗할 수가 없다.
뭐든지 마음에 다 비워야 되고 그래야 깨끗하다.
이런 구절 하나에서도 그러한 것을 우리가 엿볼 수가 있다.
여시종종각차별(如是種種各差別)이여 일체개의원해주(一切皆依願海住)라
혹유국토상재공(或有國土常在空)이어든 제불여운실충변(諸佛如雲悉充徧)이로다
이와 같이 가지가지로 차별함이여
모두가 다 서원바다에 의지해 머무는지라.
혹 어떤 국토는 항상 허공에 있으니
모든 부처님이 구름처럼 다 충만하도다.
이와 같이 가지가지로 차별함이여
의지해서 머무는 것, 세계가 의지해서 머무는 것이 각양각색이다. 우리처럼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사는 것이 꼭 옳다고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다 서원바다에 의지해 머무는지라
다 서원으로 의지해서 머문다.
혹 어떤 국토는 항상 허공에 있으니
모든 부처님이 구름처럼 다 충만하도다.
그런 국토도 있고 또
혹유재공현부주(或有在空懸覆住)하야 혹시이유혹무유(或時而有或無有)하며
혹유국토극청정(或有國土極淸淨)하야 주어보살보관중(住於菩薩寶冠中)이로다
혹 어떤 것은 허공에 매달려 덮어서 머물고
혹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없으며
혹 어떤 국토는 지극히 청정해서
보살의 보배관(冠) 속에 머물도다.
중국에는 ‘하늘에 매달린 절’이라는 현공사(懸空寺)가 있는데 그 넓은 땅도 많은데 굳이 높디높은 절벽에 매달아서 지은 사찰이다. 아마 화엄경의 이 구절을 생각하여 지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자연계에는 벌집과 같이 매달린 집들도 많으며, 인공위성이나 외계에서 온 비행접시와 같은 종류들도 매우 흔하다.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없다.”라고 한 것도 외계에서 온 비행접시를 상상하게 한다. ‘하늘에 매달린 절’이라는 현공사(懸空寺)는 그 뜻으로 보면 일체 존재가 모두 그 근본이 공한 공성에 매달려있다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설로 달았다.
시방제불대신통(十方諸佛大神通)이여 일체개어차중견(一切皆於此中見)이라
제불음성함변만(諸佛音聲咸徧滿)하시니 사유업력지소화(斯由業力之所化)로다.
시방 모든 부처님의 큰 신통이여
일체를 다 이 속에서 봄이라
모든 부처님의 음성 다 두루 가득하니
이는 업력(業力)으로 인하여 변화한 바로다.
시방 모든 부처님의 큰 신통이여
일체를 다 이 속에서 봄이라
모든 부처님의 음성 다 두루 가득하니
이는 업력(業力)으로 인하여 변화한 바로다
업력(業力)으로 인하여 변화한 바로다
업력(業力)이라고 하면 흔히 중생들의 악업만을 떠올리는데 불업(佛業)도 있고 보살업(菩薩業)도 있다. 선과 악에 관계없이 모든 생명들이 하는 일을 모두 업이라 한다. 부처가 아니면 어찌 부처님의 신통을 알 것이며, 부처님의 음성이 가득함을 알 것인가.
혹유국토주법계(或有國土周法界)하니 청정이구종심기(淸淨離垢從心起)라
여영여환광무변(如影如幻廣無邊)이며 여인다망각차별(如因陀網各差別)이로다
혹 어떤 국토는 법계에 두루 하며
청정해서 때를 여읜 것이 다 마음에서 일어났네.
그림자 같고 환술 같아 끝없이 넓으며
인다라 그물처럼 각각 차별하도다.
혹 어떤 국토는 법계에 두루 하며
청정해서 때를 여읜 것이 다 마음에서 일어났네.
그림자 같고 환술 같아 끝없이 넓으며
인다라 그물처럼 각각 차별하도다.
업 따라서 사람들이 사는 형식도 다 다르지 않은가? 우리 사람들이 거의 비슷하게 살지만 속속들이 가정가정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너무 다르게 산다. 비슷하게 사는 것 같지만 다르게 산다. 아주 다르게 산다.
스님들 생활이 단순해서 거의 같을 줄 알 것이다. 스님들 생활도 속속들이 가만히 들여다보면 전부 너무너무 다르게 산다. 세상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화엄경에서도 이 세계가 의지해서 머물고 사는 모습들 그것을 한 번 자세히 짚어보면 이러한 이야기로 연결될 것 같다.
혹현종종장엄장(或現種種莊嚴藏)하야 의지허공이건립(依止虛空而建立)하니
제업경계부사의(諸業境界不思議)여 불력현시개령견(佛力顯示皆令見)이로다
혹은 갖가지 장엄 창고를 나타내서
허공에 의지하여 건립했으니
모든 업의 경계가 부사의함이여
부처님의 힘으로 나타내어 다 보게 하네.
혹은 갖가지 장엄 창고를 나타내서
허공에 의지하여 건립했으니
모든 업의 경계가 부사의함이여
부처님의 힘으로 나타내어 다 보게 하네
개인의 집이나 방도 그 사람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가지가지로 꾸미고 장엄한다. 혹은 나무로, 혹은 돌로, 혹은 금이나 은으로, 혹은 그림이나 조각품으로 장엄한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사람의 업이라는 것이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허공에 의지하여 건립된 것이므로 공으로 돌아간다. 그것을 마음부처의 힘으로 나타내 보여 모두가 본다.
나타내 보여 모두가 본다.
일일국토미진내(一一國土微塵內)에 염념시현제불찰(念念示現諸佛刹)호대
수개무량등중생(數皆無量等衆生)하니 보현소작항여시(普賢所作恒如是)로다
낱낱 국토의 작은 먼지 속에서
생각 생각에 모든 부처님 세계를 나타내 보이되
그 수가 모두 한량없어 중생과 같으니
보현보살이 짓는 것이 늘 이와 같도다.
낱낱 국토의 작은 먼지 속에서
생각 생각에 모든 부처님 세계를 나타내 보이되
낱낱 먼지 속에서 많고 많은 먼지 속에서 순간순간 모두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내 보인다. 먼지 먼지마다 부처님의 세계를 그대로 다 나타내 보인다.
한 사람을 이 드넓은 우주에 비교하면 역시 하나의 먼지다. 그 한 사람의 신체가 오척이니 육척이니 해봤자 먼지만한 정도의 크기인데 그러나 그 속에 또 백 조의 세포가 있다. 백 조의 세포 하나하나마다 또 백 조의 세포가 있어서 그대로 자기 가치를 다한다. 그것에 어떤 조건과 인연을 가하면 역시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또 환생할 수가 있다. 그런 이치들을 보면 참 기가 막힌 표현들이다.
생각 생각에 모든 부처님 세계를 나타내 보이되
그 수가 모두 한량없어 중생과 같다
그 숫자가 중생 수와 같다는 것이다.
모두 모두 중생이고 중생 숫자 그대로다.
보현보살이 짓는 것이 늘 이와 같도다
전부 보현의 힘이다. 보현보살의 힘이다.
그 원리, 그 이치를 보현보살이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위욕성숙중생고(爲欲成熟衆生故)로 시중수행경겁해(是中修行經劫海)하니
광대신변미불흥(廣大神變靡不興)하야 법계지중실주변(法界之中悉周徧)이로다.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위한 까닭에
이 가운데서 수행하여 겁의 바다를 지나니
광대한 신통변화 모두 다 일으켜서
법계 가운데 다 두루 하였도다.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위한 까닭에
이 가운데서 수행하여 겁의 바다를 지나니
중생들을 전부 성숙시키기 위해서 이 가운데서 수행하여 겁의 바다를 지난다. 오랜 세월을 지난다.
광대한 신통변화 모두 다 일으켜서
신통변화를 다 일으켜서
법계 가운데 다 두루 하였도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보현보살의 행원이든 모두가 목적하는 바는 중생성숙(成熟衆生)에 있다.
중생들을 철들게 하는 데 있다. 철 좀 들라고 하는 것이다. 지혜를 순수우리말로 바꾸면 철이다. 정말 중생들이 지혜가 좀 나도록 하는 데 있다.
중생을 성숙시킨다는 말은 얼마나 따뜻한가. 부처님의 오랜 수행도 그리고 불교도들의 일체 수행도 중생들을 성숙시켜서 모두가 정직하고 선량하고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광대한 신통변화다.
중생을 성숙시키는 데 있다. 철들게 하는 데 있다. 사람이 좀 익어야 한다. 사람이 덜 익어서 그렇다. 덜 익은 상태로 아직도 철들지 않은 상태로 그만 일생을 어영부영하다가 끝나는 수도 있다.
우리는 다행히 그래도 부처님 같은 성인의 가르침을 만나서 우리 마음자세만 잘 관리하면 정말 빠른 시일내에 철들 수 있다. 지혜가 날 수 있다.
법계국토일일진(法界國土一一塵)에 제대찰해주기중(諸大刹海住其中)이어든
불운평등실미부(佛雲平等悉彌覆)하시니 어일체처함충만(於一切處咸充滿)이로다
법계에 있는 국토의 낱낱 먼지에
모든 큰 세계바다가 그 속에 머무는데
부처님의 구름 평등하여 다 덮으시니
모든 곳에 다 충만하였네.
법계에 있는 국토의 낱낱 먼지에
온 우주법계에 있는 국토, 거기 낱낱 먼지에
모든 큰 세계바다가 그 속에 머문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한 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가득히 들어있다. 요즘은 핸드폰만 가지고 설명해도 되고, 컴퓨터에서 잘 쓰는 칩을 가지고 설명해도 그렇고, 작은 인체 하나에서 백 조 세포가 있고, 백 조의 낱낱세포가 또 백 조의 세포를 가지고 있는 이치, 그런 원리만 가지고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부처님의 구름 평등하여 다 덮으시니
모든 곳에 다 충만하였네
부처님의 구름이라는 것이 뭔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여일진중자재용(如一塵中自在用)하야 일체진내역부연(一切塵內亦復然)하니
제불보살대신통(諸佛菩薩大神通)을 비로자나실능현(毘盧遮那悉能現)이로다
한 먼지 속의 자재한 작용처럼
일체 먼지 속에도 역시 그러하니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큰 신통을
비로자나 부처님이 다 나타내도다.
한 먼지 속의 자재한 작용처럼
일체 먼지 속에도 역시 그러하니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그런다. 한 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있는데 어떤 특정한 먼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진중, 모든 먼지 속에서도 다 역시 그러하다.
일체 먼지 속에도 역시 그러하니
일체진내역부연(一切塵內亦復然) 본문을 그렇게 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큰 신통을
비로자나 부처님이 다 나타내도다
과학이 발달해서 2600년 전에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치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학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을 때는 이런 이치들이 ‘부처님 말씀이니까 뭔가 일리가 있겠지’ 이렇게만 생각하고 믿었지 그것을 연관시켜서 어떤 오늘날 과학의 발전 현상에 연관시켜서 우리가 이렇게 설명할 수도 없었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불과 얼마 안되는 세월이다.
제가 심청전을 참 좋아하는데 심청전 중에서도 특히 눈뜨는 대목,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을 좋아한다.
심청이가 연꽃에서 다시 태어나서 왕비가 되었는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맹인잔치를 벌이지 않는가. 전국에 공포를 해서 맹인들이 다 와서 며칠이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쉬었다가 가도록 전국적으로 맹인잔치를 벌여서 맹인들이 다 왕궁에 올라와서 대접받고 가도록 진치를 공포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오늘이나 올까, 내일이나 올까 하고 기다렸는데 어느날 문득 아버지가 온 것이다.
심청이가 왕비가 되어서 보니까 아버지라. 그래서 반가와서 ‘아버지’하고 막 소리내 부르니까 이 맹인 심봉사가 뭘 볼 수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딸이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서 임당수에 몸을 던져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렇게 죽은 딸이 ‘아버지’하고 부르니까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래서 막 눈을 껌뻑껌뻑하고, 보려고, 딸을 보기 위해서 눈을 껌뻑껌뻑 하다가 얼마나 용을 썼는지 눈이 쩍 하고 떨어지면서 딸을 보게 되지 않는가.
심봉사는 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딸의 얼굴을 환하게 알고 있다. 매일 밤 꿈에 심청이를 보니까, 보고 살았으니까 심청이는 꿈에서 보던 그 얼굴이 그대로다. 처음 봤는데도 그대로 보던 얼굴이다. 그래서 얼마나 크게 용을 썼는지 그런 극적인 순간, 그런 계기가 있어야 모든 사람들이 깨닫는다.
그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인가? 진짜 눈뜨는 소식이다. 도를 통하는 소식이다. 그래서 용을 쓰다 보니 눈이 쩍 하고 떠졌는데 정말 꿈에 보던 심청이 그대로다.
그러니까 심학규 심봉사가 눈을 쩍 뜨는데 심봉사 한 사람만 눈을 뜨는 것이 아니고, 그 잔치에 왔던 모든 맹인들이 다 한순간에 그저 쩍 쩍 쩍 쩍 하고 눈을 뜨는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잔치집에 와서 술 마시다가 뜨는 사람, 밥 먹다가 뜨는 사람, 화장실에 가다 뜨는 사람, 화장실에서 오다가 뜨는 사람, 친구들하고 웃다가 뜨는 사람, 울다가 뜨는 사람, 여기도 저기도 봉사들의 눈뜨는 소리가 쩍쩍쩍 하고 소리가 나고 그 잔치 소식을 듣고 올라오다가 뜨는 사람, 잔치에 초대받아서 실컷 얻어먹고 내려가다가 뜨는 사람, 잔치가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마저도 눈을 뜨고 온 세상 맹인들이 전부 눈을 뜬다.
심청전 이야기가 그 대목이 하이라이트다. 또 마지막 부분이기도 하다.
얼마나 멋진가, 이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눈을 뜬다. 이런 소식이 능엄경에도 있다. ‘일인(一人)이 발진귀원(發眞歸元)하면 시방허공(十方虛空)이 실개소운(悉皆銷殞)이라’ 한 사람이 제대로 꿈을 깨고 마음을 깨닫게 되면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다 동시에 깨닫는다. 다 동시에 눈을 뜨고 다 동시에 마음을 깨닫게 된다.
내 한 사람이 눈을 뜨면 모든 사람이 전부 눈을 뜨게 되어 있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 도리다.
그런 도리는 기가 막히지 않는가?
여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런 이치가 그대로 경전이 되어 있고, 그것을 또 심청전에서, 아주 심청전 소설 잘 썼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눈을 뜨는 이치, 그런 이치가 분명히 있으니까 그런 이치를 표현했는데, 그 대목이 아주 근사하다. 그와 같은 것이다.
한 먼지 속의 자재한 작용처럼
일체 먼지 속에도 역시 그러하니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큰 신통을
비로자나 부처님이 다 나타내도다
일체광대제찰토(一切廣大諸刹土)가 여영여환역여염(如影如幻亦如焰)하니
시방불견소종생(十方不見所從生)이며 역부무래무거처(亦復無來無去處)로다
일체 광대한 모든 세계가
그림자 같고 환영 같고 불꽃 같으니
시방에서 찾아도 생긴 곳을 볼 수 없으며
또한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네.
일체 광대한 모든 세계가
그림자 같고 환영 같고 불꽃 같으니
시방에서 찾아도 생긴 곳을 볼 수 없으며
광대한 모든 세계가 전부 그림자 같고 환영같고 불꽃과 같다. 어디에서도 찾을 곳이 없다.
또한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네
이런 이치가 신기하고 수긍이 된다. 우리는 줄기차게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 나도 없고, 내가 누리고 있는 세상도 없다, 이런 것을 아침 저녁 줄기차게 외운다. 반야심경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치에만 딱 머물러 있으면 아무 할 일이 없고 아무 할 말이 없고, 그렇게 되어 버린다.
그런데 화엄경은 그것만이 아니다. 거기에서 원력의 삶으로 다시 되살아나야 되는 것이 바람직한 불자다운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원력을 버리지 못하고 부처님이 설법하신 설법을 배워서 불법을 설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중생교화 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중생 성숙시키는 일을 버리지 못하는 보살의 마음, 그것이 있기 때문에 화엄경이 위대한 것이다.
다른 경전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600권이나 되는 반야부 경전들은 전부가 공(空)하다, 허망하다, 없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이치가 분명히 있다. 그런 이치가 있지만 그런 이치에만 딱 머물러 버리는 가르침이다.
반야부 경전이 600권 양이 제일 많다.
또 부처님이 49년간 설했다고 할 때 이십일재담반야( 二十一載談般若)라고 해서 21년간 반야부 경전을 설한 기간으로 계산을 한다. 그 길고 긴 세월동안 그저 무상하다, 공하다, 없다고 하는 그것만을 설했다. 사실 그런 부분이 있다. 세상사가 사실 딱히 있다고 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동안 여러분들 그만치 살아 봤으면 알지 않는가. 저 대국에서 떵떵거리던 최고의 자리를 그렇게 누리고 끝까지 버티고 안 나가려고 하지만 시간 되니까 그 많은 세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저렇게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 못난 모습, 같이 앉아서 대화 한 번 나누지 않고 취임식에 참석도 안 하고 도대체 무슨 짓인가? 촌놈들 쫄따구들 깡패 그것도 제대로 된 깡패들도 아니고 아주 하찮은 못난 동네 깡패들 중에서 대장쯤 되는 사람이 그저 심통만 있고 시기심 질투심만 잔뜩 있어서 제멋대로 안되면 무조건 훼방놓고 하는 것이 너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자리에까지 올랐는지 불가사의하다.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그런 자리에 오를 만한 인연들이 또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참 불가사의하다.
지금 하는 일을 보면 너무너무 가소로운데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런 자리에 오를 만한 인연들이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체 광대한 모든 세계가
그림자 같고 환영 같고 불꽃 같으니
시방에서 찾아도 생긴 곳을 볼 수 없으며
또한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네
이러한 이치가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이 화엄경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가운데서 또 보살의 원력을 버려서는 안된다, 허망한 줄 알면서도 허망한 것을 딛고 원력의 삶을 살아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화엄경의 위대한 점이다.
멸괴생성호순복(滅壞生成互循復)하야 어허공중무잠이(於虛空中無暫已)하나니
막불개유청정원(莫不皆由淸淨願)과 광대업력지소지(廣大業力之所持)로다
괴멸과 생성이 서로 순환하고 반복하여
허공 가운데서 잠깐도 쉬지 않나니
모두 다 청정한 서원과
광대한 업력으로 유지되도다.
괴멸과 생성이 서로 순환하고 반복하여
허공 가운데서 잠깐도 쉬지 않나니
모두 다 청정한 서원과
광대한 업력으로 유지되도다
일체존재는 왕복이 끝이 없다. 계절에는 춘하추동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생명체에는 생로병사가 무한히 반복하며, 모든 물질에는 생주이멸이 쉬지 않고 돌아가며, 지구와 모든 위성들에는 성주괴공이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치는 일체존재의 타고난 서원이며, 일체 존재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광대하고 청정한 법력의 작용이다.
이렇게 제가 강설을 달았다. 세상 이치를 화엄경에서 잘 밝히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해서 아주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늘 저에게는 숙제이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늘 낮에 105명이나 지금 이렇게 계신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세계가 의지해서 머물다 하는 내용으로 오늘 여기까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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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고맙습니다._()()()_
세계 성취의 10종사. 세계가 의지해서 머무는 것이 각양각색이다. 업 따라서 사는 형식이 다르다.
중생들이 성숙하면 지혜가 나고 지혜가 나면 철든 삶을 살아 다른 이를 잘 이해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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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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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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