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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두고 간 여자
16부 ―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
김태식이 죽은 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2007년 4월 19일. 아침부터 햇빛이 좋았다. 아버지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다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미정아.”
“응?”
“오늘 저녁에 시간 있니?”
나는 식탁에 앉아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왜?”
“같이 밥이나 먹자.”
“갑자기?”
“아빠가 딸하고 밥 먹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나는 웃었다.
“오늘은 약속 있어.”
“그럼 내일.”
“내일은 돼.”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먹자.”
그것이 내가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들었던 평범한 말이었다.
내일 먹자.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언제나 특별한 말을 남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은 대개 일상 속에 숨어 있었다.
내일 보자.
전화할게.
밥 먹어.
조심해서 가.
그리고 그 내일이 오지 않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십구 년이 지나서야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
김하영의 집 거실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판독기 화면에는 손상된 영상이 멈춰 있었다.
김하영.
어머니.
윤상호.
그리고 나.
네 사람이 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전화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김태식 씨는 사고 직후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나입니다.
나는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만날 거야.”
어머니가 곧바로 말했다.
“안 돼.”
“만나야 해.”
“그 사람은 위험해.”
“엄마.”
“미정아.”
“이제 위험하다는 말도 그만해.”
어머니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위험하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어.”
“그래서 살아 있었잖아.”
“그게 사는 거였을까?”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하지만 거두지 않았다.
“엄마는 죽은 사람이 되어 살았고, 한재수 씨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살았고, 한정희 씨도 자기 이름을 버렸어. 아빠는 진실을 숨기다가 죽었고.”
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았어.”
김하영이 조용히 내 손등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끝까지 가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같이?”
“같이.”
어머니가 김하영을 바라보았다.
“하영아.”
“저도 알아야 해요.”
김하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녀는 나를 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우리 아버지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윤상호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판독기 앞으로 다가갔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볼 게 있습니다.”
“뭘요?”
“김태식의 마지막 하루.”
“어떻게?”
윤상호가 2007년 필름을 되감았다.
“장부는 돈만 기록하지 않았어요.”
화면에 숫자와 코드가 빠르게 지나갔다.
“이 조직은 사람을 기록했습니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로 이동했는지, 언제 신분을 바꿨는지.”
그가 화면을 멈췄다.
2007.04.19 / K.T.
김태식.
“여기 있습니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하루가 열렸다.
⸻
오전 7시 12분.
김태식이 집을 나섰다.
내 기억과 같았다.
오전 7시 48분.
대구역 인근 다방.
만난 사람.
H.J.S.
“한재수.”
내가 말했다.
윤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 옆에 짧은 메모가 있었다.
신분 이전 최종 확인.
그날 아버지는 이미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재수에게 자기 이름을 넘길 준비를 했다.
“그럼 아침부터 죽음을 준비한 거야?”
김하영이 물었다.
“아마도.”
윤상호가 말했다.
“정확히는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을 준비한 거겠죠.”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나에게 내일 밥 먹자고 했던 사람.
그 사람은 몇 시간 뒤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다음.”
내가 말했다.
오전 9시 26분.
대구지방법원 인근.
만난 사람.
C.E.S.
김하영이 몸을 일으켰다.
“최은숙.”
아버지의 법적 아내.
김하영의 어머니.
훗날 한정희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여자.
메모.
필름 1~11 전달.
“장부를 맡긴 시간이 이때였구나.”
김하영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죽던 날 두 딸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 딸에게는 기록을 남겼고, 다른 딸에게는 이름을 남겼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오전 11시 03분.
만난 사람.
Y.S.H.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내 친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남자.
“여기서 뭘 했어?”
내가 물었다.
윤상호가 기록을 읽었다.
협상 결렬.
그 아래 한 줄.
K.T. 원본 공개 경고.
김태식이 그 남자에게 장부 공개를 경고했다.
“그래서 아빠를 죽인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기록은 계속됐다.
오후 12시 41분.
김태식 혼자 식사.
장소는 작은 국밥집이었다.
나는 그 대목에서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왜?”
김하영이 물었다.
“아니.”
나는 웃었다.
“그냥.”
죽음을 준비하던 사람이 점심에는 국밥을 먹었다.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슬펐다.
사람은 세상이 무너지는 날에도 배가 고팠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계산을 했다.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뜨거운 국물을 불어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영이를 생각했을까.
나를 생각했을까.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국밥만 먹었을까.
오후 2시 08분.
대구 외곽 창고.
만난 사람.
J.M.S.
정민수.
나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메모는 짧았다.
충돌.
그리고—
K.T. 부상.
“여기서 이미 다쳤어?”
“그런 것 같습니다.”
“어디를?”
“기록에는 없습니다.”
오후 2시 47분.
김태식 이동.
오후 3시 19분.
저수지 도착.
나는 숨을 멈췄다.
“그날…….”
기억이 돌아왔다.
아버지와 내가 만난 날.
벤치.
단팥빵.
초록색 사진첩.
“오후 세 시였어.”
나는 중얼거렸다.
그날 나는 일찍 퇴근했다.
아버지가 만나자고 했다.
저수지 벤치.
아버지는 먼저 와 있었다.
나는 그때 몰랐다.
아버지가 불과 한 시간 전에 누군가와 몸싸움을 했다는 것을.
“피.”
갑자기 기억이 났다.
“뭐가요?”
김하영이 물었다.
“아빠 손.”
나는 내 손등을 바라보았다.
“상처가 있었어.”
‘아빠, 손 왜 그래?’
‘긁혔다.’
‘어디서?’
‘일하다가.’
아버지는 웃었다.
그리고 단팥빵 봉투를 내밀었다.
‘먹어.’
‘나 다이어트 중이야.’
‘네가 무슨 다이어트야.’
나는 결국 받아 먹었다.
아버지는 내가 빵을 먹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때는 몰랐다.
왜 그렇게 오래 바라보는지.
지금은 알 것 같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눈물을 닦았다.
“계속해요.”
⸻
오후 4시 02분.
김태식과 김미정 헤어짐.
그 아래 메모가 있었다.
K.T. 물품 전달 확인.
초록색 사진첩.
카세트테이프.
열쇠.
“그게 다였을까?”
윤상호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 손바닥에 적었던 숫자.
아직 완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오후 4시 38분.
김태식 대구 시내 공중전화 사용.
수신자 미상.
오후 5시 10분.
차량 이동.
오후 5시 52분.
다시 저수지 인근.
만난 사람.
기록이 지워져 있었다.
“누구야?”
김하영이 물었다.
윤상호가 화면을 확대했다.
검게 덧칠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삭제했습니다.”
“누가?”
“관리 권한을 가진 사람.”
어머니가 말했다.
“이름을 바꾸던 여자.”
이선희 행세를 했던 여자.
“그 사람이 지웠을까?”
“아니.”
윤상호가 말했다.
“이 기록은 그 사람 권한으로도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최상위 관리자.”
나는 웃었다.
“또 있어요?”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게 누구인데요?”
윤상호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김태식.”
나는 멈췄다.
“아빠가 자기 기록을 지웠다고?”
“가능합니다.”
“왜?”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또 보호.
나는 이제 그 단어가 싫었다.
“다음 기록은?”
윤상호가 화면을 넘겼다.
오후 6시 31분.
김태식 차량 출발.
오후 6시 47분.
교통사고.
공식 사망 시각은 오후 7시 05분.
그런데 기록에는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오후 7시 12분.
나는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사망 뒤잖아.”
“그래요.”
“뭔데요?”
윤상호가 읽었다.
K.T. 이동.
김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가 살아 있었어.”
전화 속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어디로 이동했는데?”
다음 줄.
목적지: 우로역.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시 우로역.
모든 길이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오후 7시 38분.
우로역 도착.
오후 7시 41분.
305호.
나는 숨을 삼켰다.
어머니가 숨어 있던 방.
“그때도 305호가 있었어?”
“원래 보호실이었어.”
어머니가 말했다.
“신분을 바꾸기 전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곳.”
“아빠가 거기로 갔어.”
“그래.”
“누구랑?”
기록에는 없었다.
그러나 다음 줄은 있었다.
오후 8시 03분.
K.T. 음성 기록 시작.
“테이프.”
내가 말했다.
우리가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는 사고 뒤에 녹음을 남겼다.
그러니까 그 목소리는 죽음을 예감하며 미리 녹음한 것이 아니었다.
죽어 가면서 남긴 것이었다.
가슴이 무너졌다.
“아빠가 그때 살아 있었어.”
김하영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응.”
오후 8시 21분.
의료 지원 요청.
거부.
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부?”
“누가?”
김하영이 물었다.
윤상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치료를 막았어요?”
기록 옆에 승인자 코드가 있었다.
S-01.
어머니가 그 코드를 보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아?”
내가 물었다.
“이 코드는…….”
“누구?”
어머니가 입술을 떨었다.
“S는 선영.”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
어머니가 뒤로 물러났다.
“아니야.”
“엄마 코드야?”
“맞지만 내가 아니야.”
“무슨 말이야?”
“그날 나는 거기 없었어.”
“그럼 누가 엄마 코드로 거부했는데?”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윤상호가 말했다.
“코드를 도용한 겁니다.”
“누가?”
“그건 마지막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화면을 넘겼다.
오후 8시 44분.
K.T. 상태 악화.
오후 8시 51분.
방문자 입실.
이름 없음.
오후 9시 07분.
K.T. 사망.
나는 시계를 보듯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사고로 죽지 않았다.
사고 후 두 시간 넘게 살아 있었다.
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 치료를 막았다.
그리고 죽기 십육 분 전 누군가 305호에 들어갔다.
“그 사람이 죽였네.”
내가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사람.”
김하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누구야?”
기록에는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아래 아주 작은 파일 표시가 있었다.
CAM-305.
“영상?”
윤상호가 파일을 열었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잠시 뒤 흐릿한 영상이 나타났다.
2007년 4월 19일.
오후 8시 50분 43초.
우로역 지하 복도.
305호 앞.
나는 숨을 멈췄다.
한 사람이 걸어왔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문 앞에 멈췄다.
잠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영상이 끊겼다.
“그게 끝?”
“아니.”
윤상호가 다음 파일을 열었다.
오후 9시 09분.
305호 문이 열렸다.
그 사람이 나왔다.
모자를 벗었다.
얼굴이 보였다.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김하영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화면 속 사람.
김태식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305호에 들어간 사람.
그 사람은—
최은숙이었다.
김하영의 어머니.
김태식의 법적 아내.
그리고 훗날 한정희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여자.
김하영이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 엄마가…….”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영상에 있잖아요!”
“죽였다는 뜻은 아니야.”
“아빠 죽기 십육 분 전에 들어갔다가 죽은 뒤에 나왔잖아요!”
김하영이 울면서 소리쳤다.
“왜?”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영상 속 최은숙이 복도 끝으로 걸어가다가 멈췄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나는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영상을 반복했다.
최은숙의 입술.
천천히.
분명한 세 음절.
김하영이 먼저 알아차렸다.
“태식아.”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영상을 확대했다.
최은숙이 말했다.
살아 있어.
나는 숨을 멈췄다.
“뭐?”
김하영이 화면을 다시 보았다.
맞았다.
살아 있어.
그녀는 카메라를 향해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후 9시 09분.
기록상 김태식은 2분 전에 사망했다.
그런데 최은숙은 말했다.
살아 있어.
윤상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사망 기록이 또 조작된 겁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9시 7분에도 안 죽었다고?”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언제 죽었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판독기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삐.
우리가 열지 않은 파일 하나가 나타났다.
2007_04_20_0510
다음 날 새벽 5시 10분.
윤상호가 파일을 열었다.
우로역 승강장.
새벽.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절뚝거리고 있었다.
김하영이 입을 막았다.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얼굴은 흐렸지만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김태식이었다.
“살아 있었어.”
내가 속삭였다.
새벽 5시 10분.
아버지는 우로역을 걸어 나갔다.
혼자였다.
손에는 작은 가방 하나.
그리고—
우산.
보라색 우산.
나는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저 우산…….”
우리가 지금까지 쫓아온 바로 그 우산이었다.
아버지는 승강장 끝에서 잠시 멈췄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5시 13분.
화면 오른쪽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보라색 우산을 건넸다.
여자가 받았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아버지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얼굴이 보였다.
나는 숨을 멈췄다.
“엄마……?”
이선영.
내 어머니였다.
나는 천천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화면을 보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엄마.”
대답이 없었다.
“엄마, 저거 뭐야?”
“미정아.”
“엄마는 그날 우로역에 없었다고 했잖아.”
“…….”
“아빠를 못 봤다고 했잖아.”
어머니가 얼굴을 들었다.
십구 년 동안 감춰 온 얼굴이었다.
“미안하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모든 것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봤구나.”
어머니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빠가 살아 있는 걸 알았어?”
“그래.”
“그런데 왜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말할 수 없었어.”
“왜!”
어머니가 내 손을 잡으려 했다.
나는 물러났다.
“왜 그랬어?”
“태식 씨가 부탁했어.”
“뭘?”
어머니는 화면 속 보라색 우산을 바라보았다.
“자기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살아 있으면 너희가 죽는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태식 씨를 데리고 떠났어.”
가슴이 멎는 것 같았다.
“어디로?”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바다.”
“무슨 바다?”
“포항.”
“거기서 어떻게 됐는데?”
어머니가 울었다.
“사흘을 같이 있었어.”
나는 의자를 붙잡았다.
아버지는 사고 당일 죽지 않았다.
우로역에서도 죽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포항으로 갔다.
사흘.
“그럼 아빠는 4월 22일까지 살아 있었어?”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
“하려고 했어.”
“그런데?”
“못 했어.”
“왜?”
“네 목소리를 들으면 돌아갈 것 같다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 말이 너무 아버지다워서 더 아팠다.
“마지막 날.”
어머니가 말했다.
“태식 씨가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어.”
“어디?”
“호미곶.”
새벽이었다.
바람이 심했다.
아버지는 걷기도 힘들었다.
내부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신분을 확인하는 순간 조직이 알게 될 것이었다.
“살릴 수 있었잖아.”
내가 말했다.
어머니가 울었다.
“알아.”
“병원에 갔으면 살 수도 있었잖아.”
“알아.”
“그런데 왜 안 갔어?”
“태식 씨가 안 간다고 했어.”
“그래도 데려갔어야지!”
“알아!”
어머니가 처음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무너졌다.
“그래서 내가 십구 년을 죽은 사람처럼 살았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가슴을 두드렸다.
“그날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어. 경찰서로 갔어야 했어. 너한테 전화했어야 했어.”
울음이 터졌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 했어.”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알았다.
어머니가 숨어 산 것은 누군가에게 쫓겨서만이 아니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아빠가 뭐라고 했어?”
어머니가 한참 울다가 말했다.
“우산을 너한테 돌려주라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미정이가 언젠가 이 우산을 받으면 그때는 모든 게 끝났다는 뜻이라고.”
그래서 우산이 내게 왔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최은숙에게.
한정희의 이름으로.
한재수에게.
그리고 마침내 나에게.
“아빠는 어디 있어?”
내 질문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미정아.”
“무덤.”
나는 말했다.
“어디 있어?”
어머니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했다.
“없어.”
“뭐?”
“무덤이 없어.”
“그럼?”
어머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태식 씨는 바다로 갔어.”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죽기 전에 부탁했어.”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어떤 이름도 남기지 말라고.
김태식도.
한재수도.
아무 이름도.
그냥 바다로 보내 달라고.
나는 눈물을 닦았다.
“어디에?”
“호미곶.”
“정확히 어디?”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알려 줄게.”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모든 것이 끝나면 그곳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하겠다고.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제는 괜찮다고.
당신이 누구의 남편이었든, 누구와 어떤 비밀을 나눴든—
나는 끝까지 당신 딸이었다고.
⸻
그때 윤상호가 말했다.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나는 눈물을 닦았다.
“뭐가요?”
그가 화면을 가리켰다.
새벽 5시 10분 영상.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라색 우산을 건네기 직전이었다.
“손.”
“뭐요?”
“김태식 손을 보세요.”
영상을 확대했다.
아버지는 우산을 건네면서 어머니 손바닥에 무언가를 썼다.
숫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도 했어.”
저수지 벤치.
아버지가 내 손바닥에 적었던 숫자.
같은 숫자였다.
기억이 돌아왔다.
417.
나는 말했다.
“417.”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맞아.”
“무슨 뜻이야?”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윤상호가 필름 기록을 검색했다.
결과 하나.
URO-417.
“우로역?”
“네.”
“417호가 있었어?”
어머니 얼굴이 굳었다.
“없었어.”
“305, 306은 있는데?”
“지하는 306까지였어.”
윤상호가 화면을 확대했다.
URO-417 / 영구봉인
그리고 그 아래.
접근 권한: K.T. 단독.
나는 웃었다.
“아빠는 정말 끝까지 뭘 남겼네.”
그런데 다음 줄을 읽는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
보관 대상: 1인.
사람이었다.
장부도.
필름도.
서류도 아니었다.
한 사람.
그리고 상태.
생존.
기록 날짜는 오늘로 갱신되어 있었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오늘?”
누군가 아직 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다.
윤상호 얼굴이 굳었다.
“이건 자동 기록이 아닙니다.”
“그럼?”
“오늘 누군가 417의 생존 상태를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김하영이 물었다.
“누가?”
윤상호가 기록을 열었다.
확인자 이름.
K.T.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K.T.
김태식.
나는 화면을 바라보다 웃었다.
“말도 안 돼.”
어머니가 의자를 붙잡았다.
“태식 씨는 죽었어.”
“엄마가 봤어?”
어머니가 멈췄다.
“뭐?”
“아빠가 죽는 걸 직접 봤어?”
어머니의 입술이 떨렸다.
“나는…….”
“봤어?”
긴 침묵.
“아니.”
“그럼?”
“잠들었어.”
“누가?”
“내가.”
어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날 밤 태식 씨가 차를 끓여 줬어.”
“그리고?”
“마셨는데 너무 졸렸어.”
“눈을 떴을 때는?”
“태식 씨가 없었어.”
나는 숨을 멈췄다.
“그럼 화장은?”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한재수가 처리했다고 했어.”
모든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한재수.
김태식의 이름으로 살아온 남자.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도 몰랐던 마지막 진실을.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우진에게 전화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받지 않았다.
네 번째.
우진이 받았다.
“누나.”
“아버지 깨어났어?”
“네. 조금 전에요.”
“바꿔 줘.”
“왜요?”
“지금.”
잠시 뒤 한재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힘이 없었다.
“미정 씨.”
나는 숨을 골랐다.
“417이 뭐예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알고 있죠?”
한재수가 대답하지 않았다.
“김태식 아빠.”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죽었어요?”
긴 침묵.
그리고 한재수가 말했다.
“미정 씨.”
“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대구.”
“혼자예요?”
“아니요.”
“누구하고?”
“엄마, 김하영 씨, 윤상호 씨.”
한재수가 숨을 내쉬었다.
“잘됐군요.”
“뭐가요?”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어서.”
또 그 말.
혼자 하지 마라.
혼자 열지 마라.
혼자 보지 마라.
나는 눈을 감았다.
“대답해요.”
한재수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김태식은 죽었습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가 말을 이었다.
“적어도.”
잠시 침묵.
“김태식이라는 이름으로는.”
나는 눈을 떴다.
“무슨 뜻이에요?”
한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를 남겼다.
“보라색 우산을 가지고 417로 가세요.”
“417이 어디인데요?”
“처음 우산을 발견한 곳.”
전화가 끊겼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 우산을 발견한 곳.
그 벤치.
모든 것이 시작된 저수지.
나는 보라색 우산을 집어 들었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 가?”
나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처음으로.”
“뭐?”
“모든 게 시작된 곳.”
밖에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펼쳤다.
보라색 천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툭.
툭.
툭.
십구 년을 돌아온 우산.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시작은 우산을 두고 간 여자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우산을 두고 간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자신의 딸이 여기까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우산을 보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