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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주석
잃은 양(누가복음 15:1-10)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면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의 설교에 세리와 죄인들이 부지런히 참석함. 유대인들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갈 때"(14:25), 그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감을 허락 받으리란 확신이 강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헛된 소망을 흔드는 말씀을 하는 것이 필요함을 예수님은 아셨다. 이번에는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나아왔는데, 예수님께 "거절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조심스럽고도 겸손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말씀을 할 필요를 느끼셨다. 더구나 거기엔 그들을 비웃는 오만불손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조공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세리들은" 실제로 "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철저하게 "악명"에 빠진 이유는, 세금징수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 때문 이였다. 그들은 때때로 "창기"(마 21:32)와 같이 취급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사악하고 방탕한 "죄인"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죄인들"이란 "이방인"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때 요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리" 땅에 계셨다고 본다. 이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인들이 "떨어져 나간" 후에(앞장 끝 부분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가까이 나아왔다." 마치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배척한 후에 이방인들이 사도들에게 귀를 기울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지만" 겨우 "들을 수 있는" 곳에까지만 나아왔지 더욱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한 어떤 이들처럼 호기심으로 "그 분을 보려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치료를 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예수님의 놀라운 설교를 듣고자 함이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 다가갈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라는 것을 명심하자. 즉 그 분이 주시는 교훈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임을 명심하자.
Ⅱ. 이를 보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 공격함. 그들은 "투덜거리며," 우리 주 예수님께 비난의 화살을 돌리며,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절)고 말한다.
1. 그들은 자기들에게만 허용된 줄 믿고 은혜가 "세리"와 "이방인"에게도 있으며, 이들도 똑같이 회개하고 죄사함 받도록 촉구되어짐에 화가 치밀었다. 그 이유는, 예언자들은 이방 나라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였고, 특히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서 그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구원의 가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2.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그런 죄인들과 친하시며 친구로 "맞아들이고" 음식을 "같이 나누시는" 것이 욕된 일이며 위엄을 손상 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설교하시는 것"이었지만, 체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장로들의 전통에 가장 어긋나는 "음식을 같이 먹는 것"으로 트집을 잡았다. 비난과 질책은 고결하고 훌륭한 "사람"에게만 아니라, 고귀하고 뛰어난 "행위"에게도 부어진다. 이것은 결코 별로 흔한 일은 아니다.
Ⅲ.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변호하심. 그분은 자신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듣는 사람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하나님께 돌려지는 영광은 더욱 크고 하늘의 기쁨은 더욱 많으리라고 보여 주심으로 스스로를 변호하셨다.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도 좋고 이방인들이 거짓 신이 아닌 참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되는 것과 정숙하고 규율 있는 생활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도 좋지만, 이방인들이 그러한 삶을 살면 하늘에서는 더욱 더 기쁠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뜻이 같은 두 비유로써 예를 드신다.
1. 잃은 양의 비유. 비슷한 것이 마태복음 18장 12절에 나오는데, 거기서는 성도들을 어떻게 잘 인도하여 실족치 않게 할 것인가 하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죄인들이 회개할 때 가지시는 하나님의 기쁨과 그러기에 우리도 그것을 즐거워해야 마땅함을 보여 주려 한다.
(1) 사악한 길로 들어선 죄인의 경우. 그는 "잃은 양"이며 "길 잃고 헤매는 양"이다. 그는 하나님께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영광과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 무리에게도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들과 친교를 나눌 수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도 "잃어버린 바" 되었다. 어디에서 처해 있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방황하며 목자의 보호를 떠나 맹수의 위험을 받고 늘 공포와 불안에 떨며 푸른 풀밭을 찾아 헤맨다. 더구나 그는 무리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불쌍하게 방황하는 죄인에게로 향하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 그분은 헤매지 않는 양들을 "계속" 돌보신다. 그래서 그 양들은 "광야에 있기는 하지만 안전하다." 그렇지만 이 잃어버린 양에 대해선 아주 특별한 보살핌이 있다. 백 마리나 되는 큰 양 무리가 있지만, 그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신다. 양을 따라 좇아가서 풍성한 사랑을 베푸신다.
[1] 찾아 나서심. 목자는 양을 좇아서 탐색해 나간다. 열심히 노력하여 마침내 "찾아 내고야" 만다. 하나님은 뒤로 넘어지는 죄인을 따라가 말씀으로 부르시고 성령의 힘을 입어 마침내 돌아오도록 마음먹게 만드시고야 만다.
[2] 집으로 데려 오심. 비록 양이 지치고, 아마도 귀찮을 성싶고, 방황으로 너무 상해서 집으로 데려 올 가치조차 없을지라도, 그러나 목자는 내버려 두어 멸망당하도록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에 둘러메고," 온유하고 애쓰는 심정으로 무리 가운데로 데려 오신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위대한 사업에 견줄 수 있다. 인간들은 모두 각기 체질로 가버렸다(사 53:6). 인류의 가치래야 백 마리의 양을 가진 목자에게 한 마리 양의 가치보다 더 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에게야 그들 모두가 멸망한들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아흔 아홉 마리의 양 같은 거룩하고 고상한 천사들의 무리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신다"(19:10). 그리스도는 "그의 팔로 양들을 모아, 가슴에 안아 나르신다"고 얘기된다. 그의 동정과 온유함을 불쌍한 죄인들에게 나타내시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깨에 메고" 돌아오신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을 지지하고 원조해 주시는 힘을 뜻하고 있다. 그분의 어깨에 매여 돌아오는 이에겐 결코 멸망이 없다.
(3)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가지시는 하나님의 기쁨. 찾으려는 노력아 헛되지 않았음을 "기뻐하여 양을 어깨에 얹으신다." 더욱 기쁜 것은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도 찾았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벗과 이웃을 부르고," 또 양들을 지키는 목자들도 초청하여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하신다. 목자들이 즐겨 자주 부르던 목가 가운데서는 이런 경우에 부르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 중에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를 자주 불렀다. 그렇지만 결코 "나와 함께 즐기자 나는 잃은 것이 아무 것도 없노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는 설령 양이 "곁질"로 나가 "방황한다"고 해도 "나의 양"이라고 불렀음을 명심하자. 그는 그렇게 부를 권리(모든 영혼은 나의 것이라고)를 가지고 계신다. 또한 그 권리를 주장하시고 회복하시려 한다. 그러기에 스스로 찾아 나서서 "나는 양을 찾았다"고 하신다. 그는 종을 보내시지 않고 그 자신의 아들을 즉 위대하고 선한 목자를 보내셨다. 이분은 찾으려는 것을 찾으실 것이며, 자기를 몰라서 찾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 언제나 계실 것이다.
2.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1) 잃어버린 사람은 여기서 "어느 여자"로 가정되어 있다. 은전을 잃은 자는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가 이런 경우를 당했을 때보다 더욱 슬퍼했을 것이다. 또 찾았을 때는 남자들보다 기쁨이 더 컸을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이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는 사실은 비유의 효과를 더욱 극적으로 과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그녀는 "열 잎의 은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만 잃어버렸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인류의 죄악과 참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 그 순진성을 유지하며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고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열에 아홉이라는 것, 더구나 바로 앞의 비유에서는 백에 아흔 아홉이라는 비율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그분의 선하심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우리들이 잘은 모르지만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그 법도로부터 떠나지 않고 창조의 목적에는 어긋나지 않으며 잃어지지도 않은 채일까!
(2) 잃어버린 것은 단 돈 은전 한 잎. 곧 dracmh`n- ¼세겔 이었다. 인간의 영혼이란 그 고유의 중요성과 가치에서 "은"과 같다. 철이나 납같이 천한 금속이 아니라 은이며, 은이 이같이 귀하기에 그래서 은광은 "왕실의 광산"이었다. 히브리말로 "은"이란 "바람직스러움"이란 말에서 왔다. 은은 곧 "은전"이고, "드라크마"의 뜻과 같았다. 겉면에는 왕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지고, 따라서 "왕에게" 바쳐져야만 했다. 그러나 돈으로써의 가치는 비교적 적어서 단지 7펜스 반 페니에 불과했다. 그래서 죄인을 이 은전에 비유한다면 죄인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진다해도 하나님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은전이 "먼지 속"에 잃어졌다. 이것처럼 한 영혼이 세상 속에 빠져,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 떨어지고 그것만에 좇게 된다. 누구라도 한 영혼이 "거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길 것이다.
(3) 이 때문에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수고와 고통이 행해진다. 여인은 "등불을 켜고" 문 뒤와 책상 아래를 찾아보고, "비로 쓸며" 집안 구석구석을 뒤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잃은 영혼을 우리에게로 오시는 자신의 길을 비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로 향하는 우리의 길을 비추시기 위해 "복음의 등불"을 켜신다. 또한 말씀에 대한 확신으로 "집을 쓰신다." 마음을 오직 잃어진 영혼을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함에 집중하여 그는 "부지런히 찾으신다."
(4) 그러기에 그것을 찾았을 때 큰 기쁨이 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은전을 찾았노라"(9절).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다른 사람도 함께 즐거워하기를 바라는 법이며, 유쾌한 사람은 같이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누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녀는 잃었다 찾은 돈을 거기에 다 써 버릴 것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즐거워하자"고 이웃을 불러모았다. 찾았다는 놀라운 기쁨이 즉시 그녀를 정신없게 만든 것이다. e[urhka e[urhka-즉 찾았다, 찾았다 란 기쁨의 언어이다.
3. 이 두 비유의 설명은 같은 목적에서 되어진다(7,10절). 즉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 세리와 죄인 중의 몇 사람이(아니, "단 한 명"이라도 그리스도는 값있게 여기실 것이지만) 회개할 때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수많은 사람이 하는 것"보다 더욱 기뻐하신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이 땅 위"에서의 "회개"와 "개종"은 "하늘에서의" 기쁨의 주제이며 즐거움이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회개에 이르는 것은 가능하다. 생명이 잇는 곳엔 희망이 있고, 죄악의 사태라도 절망해선 안 된다. 그래서 가장 나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면 자비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1]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죄인들에게 들인 수고의 대가로 그들의 회개만을 보신다. 거기엔 항상 "천상의 행복"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업을 즐거워하시지만" 특히 은총을 베푸심을 그리하신다. 전심과 전인격으로, 회개한 죄인에게 선을 행하시기를 즐겨하시며, 교회들이나 국가들의 회심만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까지도 기뻐하신다.
[2] 하나님의 사자들은 자비가 죄인들에게 베풀어질 때 비난하기는커녕 기뻐할 것이다. 물론 죄악 된 성벽의 천사들이라면 멸망당하고 아무런 자비를 못 입겠지만, 그렇기 때문만도 아니고, 회개하는 죄인들이 보잘 것 없고 악하지만 회개만 하면 곧 천사들과 함께 교통하며 그들을 닮게 되고 동등한 지위에 오를 것을 알면서도 기뻐한다. 죄인들의 회개는 천사들의 기쁨이요, 그들은 즐겨 회개한 영혼들을 지도하는 영이 된다. 인류의 구원은 천사들 앞에도 기쁜 일이기에 "높이 계신 주님께 영광"(2:14)이라고 노래했었다.
(2) 뿐만 아니라 더욱 큰 기쁨이 있으니,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한" 것보다, "너무나 사악했던 생활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죄인에 대한" 것이다.
[1] 천사처럼 신앙을 늘 보존하고 확증함으로 회개가 필요 없는 것에 보다도 타락한 인간의 구속과 구원에 대한 기쁨이 더욱 크다.
[2] 찬양과 기도 생활 가운데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바리새인이나,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회개할 필요"를 못 느끼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들을 더욱 기뻐 여기신다 믿으며, 스스로 "사랑하고,"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에게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이방인이나 세리들의 기쁨이 더욱 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거꾸로 말씀하시기를, 자신들에겐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길게 중언부언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기도보다는 천대받고 미움받는 죄인들의 회개하며 애통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더욱 칭찬하시며 기뻐하신다고 선포하신다. 바울이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죄인이었던 것같이 아주 큰 죄인이 회개할 때, 항상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행동하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회개할 필요"를 가지지 않으며, 큰 죄인처럼 삶의 큰 변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의 의례적인 회개보다, 기쁨은 더욱 크다. 물론 타락하여 곁길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 힘과 감화에서 볼 때, 타락하지 않는 사람을 "통치하는" 쪽보다는, 죄인들을 "감소시키는" 쪽에 더욱 크게 나타나진다. 사실상 여러 번 회개하기 전에 큰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회개한 후엔 더욱 뛰어나게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그 예인데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크게 "영광 받으셨다"(갈 1:24). 많은 용서함 받은 자가 더욱 많이 사랑할 것이며 그것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도 늘 가지고 즐기던 것을 항상 그대로 유지하는 것보다, 잃어버렸다 찾을 때 더욱 기쁨을 느낀다. 늘 건강한 것보다 아팠다가 건강을 되찾을 때 더욱 기쁜 것도 그러하다. 그것은 마치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다. 늘 꾸준한 신앙 생활도 그 자체로 귀중한 것이지만, 악한 길과 죄된 생활에서 급격히 돌이켜서 새 생활하는 것이 더욱 놀라운 즐거움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들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쁨"이 큰데, 이러한 하늘의 뜻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방해하며 분노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격분을 하고 있었다.
탕자(누가복음 15:11-32)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의 비유를 듣는다. 앞의 얘기들과 같은 내용인데 죄인들 특히 큰 죄인들의 회개가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하는가를 보여 주며 그들이 회개할 때 그것을 받아 주시고 얼마나 즐거워하시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복음의 은총이 참으로 풍성함을 앞의 비유들보다 더욱 넓고 충분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언제나 불쌍한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지도하며 격려하는 데에 말할 수 없이 필요했었고 또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자세히 살펴보자.
Ⅰ. 이 비유는 하나님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 "공통의 아버지"이심을 보여 준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소생(所生)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졌고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다"(말 2:10). "그분에게서" 우리의 존재를 "부여받았으며," "그분 안에서" 지금도 우리는 존재를 "유지해 간다." 또한 그분으로부터 늘 존재 유지의 힘을 얻는다. 그분은 "아버지이시기에" 우리가 충실한 자녀인가 아닌가에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명을 부여하시며" 그의 언약 가운데 우리를 "넣어 주시고" 또는 "떼어놓으신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로써 바리새인에게 알려 주시기를 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그들이 멸시하지만, 그들의 형제요 같은 본성을 가졌으며 따라서 이들도 주어지는 어떤 친절과 자비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롬 3:28). 즉 "자비가 풍성하여 누구든지 그에게로 부르시는 모든 이의 주님"이시다.
Ⅱ. 이 비유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공동의 한 아버지로 모시고 있지만 저마다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을 보여 준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견실하고 엄숙하며 "내성적"이고 "검소한" 또한 침착한 젊은이였으나, 그렇다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교육받은 대로 잘 따르며 좀처럼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들뜨고" "쾌할하며," 긴장을 잘 참지 못하고, 유랑하며, 행운을 붙잡으려고 애쓰다가, 악한 손에 빠지면 방탕아가 되기 쉽고, 덕스런 교육을 받아도 별 소용없는 이였다. 바로 이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이들을 회개시키려고 애쓰셨다. 또한 이 둘째 아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사도들은 그들에게 "회개를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첫째 아들은 일반적인 유대인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죄인들에게도 제공되고 부여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납득시키려고 애쓰셨다. "작은아들"은 방탕한 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 성격과 경위를 이와 같이 묘사한 의도는 죄인이 가지고 있고 또 우리 모두 다 자연적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그것들을, 특히 어떤 사람에게는 심하게 나타나는 그 성격과 경위들을 보여 주려는데 있었다. 이제 바로 이 사람에게 대하여 고찰해 보자.
1. 탕자로서의 그의 "분방"과 "방황" 또한 그가 빠진 "낭비"와 "비참"을 살펴보자.
(1) 아버지에 대한 그의 요구는 무엇인가?(12절) 그는 교만하고도 뻔뻔스럽게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내게 주소서" 하였다. 그는 좀더 상냥스럽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오니 저에게 주소서" 하거나 "아버지여 원하신다면 저에게 주소서." 그러나 그는 건방진 태도로 요구를 하였다.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 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내게 할당된 것으로 아버지 생각에 맞는 듯한 것이 아니라, 내 몫으로 내게 속한 것을 주소서" 하였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빚처럼 생각해서 "내게 속한 자식으로서의 몫을 주소서"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며, 더 악한 것으로의 출발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나에게 조금만 기회를 주시어서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나 보시고 다음에 더 많이 맡기어 주시옵소서" 하는 태도가 아니고 "현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소서. 다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이후에도 절대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하는 자세이다. 우리는 다음을 명심하자. 죄인들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결국 그것이 그들을 망치는 것인데, "그들 손에 돌아온 몫"에 자만해 있고, 이생에서 "그들이 누릴 멋진 것들"에 대해 방심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단지 보이는 것, 일시적인 것에만 관심하고 현재의 만족만 탐한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의 미래에 올 지복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어째서 그는 제몫을 손에 넣고 싶어할까? 사업에 투자해서 장사하여 더 많이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전혀 그건 생각이 없다. 오히려
[1] 그는 "아버지의 지도 밑에서" "가정의 질서와 좋은 양육 받는 것"을 싫증내고 있었다. 오히려 소위 "자유"라고 하는 것, 사실상 "죄짓는 자유"이고, 가장 무서운 노예생활인 그것을 좋아하고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의 어리석음을 잘 살펴 보라. 그들은 신앙적으로 잘 교육받으나, 교육이 금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신들이 스스로의 인생의 주체자요 참 사람임을 모르고서 마침내 하나님의 묶는 줄을 떼어놓고 그 띠를 끊으며 대신에 자기들의 육욕의 줄로 묶어 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의 변절의 시초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법에 매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스스로 "신처럼" 되려 하며 자신들이 즐기는 것 외에는 "선악"을 알려하지 않는다.
[2] 그는 "그의 아버지의 보살핌 밖으로" 벗어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자신에게 제약이었고 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부끄러워하고 그의 전지 하심을 불신하려는 마음이 악한 자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사특 함이다.
[3] 그는 "아버지의 경영"을 불신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아버지는 그의 장래를 위해 저축하려 하고 그러면 자연히 현재 그의 이용에 제한이 오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자신의 몫"을 자기 손으로 가지고 싶었다.
[4] 그는 "스스로 자만하고" 동시에 "자기의 넉넉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각엔 자기가 몫을 받으면 더욱 잘 경영해서 아버지보다 더 훌륭하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엔 탐욕보다는 "교만" 때문에 파멸하는 젊은이가 많다. 우리들의 첫 조상도 이 "독립" 하고자 하는 헛된 욕망에 의해서 자신들과 그 기업을 망쳤던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은총에도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죄를 고집하는 죄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고, 결국 그들은 그들 "혼자 힘으로써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2) 아버지는 아들에게 얼마나 친절했는가? "아비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다." 그는 두 아들간에 어떻게 재산 처분 할까를 계산해서 작은아들에게 "제몫"을 주었고, 또한 큰아들에게도 작은아들보다 관례대로, "두 곱"이 되는 재산을 양도했다. 그러나 큰아들은 그것을 계속 아버지께서 관리하라고 부탁했고, 그가 그로인해 무엇을 얻었는지를(31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라고 쓰여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자기 몫을 아버지에게 비축하여 둠으로 모든 것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젊은 아들에게 요구하는 대로 주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재산분배 과정에서 불평할 게 전혀 없었다. 예상했던 만큼, 아니 오히려 더 많이 그는 받았다.
[1] 아버지의 친절은 아들로 하여금 후에 아버지가 자비로운 분이며 얼마나 아들을 위해 주며, 편리를 베풀고, 더구나 너무 자상한 분이어서 떠나겠다는 말씀을 선선히 말씀드릴 수 있는 자비로운 분임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2] 아버지의 자비는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 하고,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이 현명치가 못함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에게 자비하신 아버지이심을 명심하자. 모든 이들에게 심어지는 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까지도, "생명"과 "호흡"을 또 "모든 사물"을 주신다. diei/len avuto.i/j to.n bi,on -즉 그분은 모두에게 생명을 나눠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예배하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
(3) 몫을 받았을 때, 그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쓰기 시작해서 모든 탕아들이 그렇듯이 얼마안가 거지가 되었다. 즉 "그 후 며칠이 못 되어" 거지가 된 것이다(13절).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내어 주신다면 우리가 그분을 떠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우리를 제어하는 은혜의 고삐가 벗겨지면 우리는 곧 떠나버린다. 작은아들이 결정한 것은 곧 떠나는 것이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그는 "있는 재산을 다 모았다." 하나님을 떠나 헤매는 죄인은 "가진 것 전부"를 걸고 모험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 둘째 아들의 "방탕"이 알려 주는 죄악의 상태, 즉 타락한 인간이 빠지는 "비참한" 상태를 알아보자.
[1] 죄악의 상태는 하나님과 "헤어져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 죄악의 죄성이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나와 "여행을 떠났다."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닌 사교에 미혹되어 놀아난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고 도망치는 노예처럼 또는 남편을 배반하고 떠나는 아내처럼, 그들은 하나님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반역하면서 말하기를 "헤어집시다" 한다. 그리고는 가능한 한 멀리 떠난다. 이 세상은 그들이 거취 하는 장소로 삼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먼 나라"이고, 그들에겐 집과 같은 곳이다. 거기서 즐기고 놀아나다가 모든 것을 허비한다.
"둘째는" 모든 선한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점점 멀어지는 것이 바로 죄인들의 "비극"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랴?
[2] 죄악의 상태란 "허비하는" 상태이다. 세상에서 "허랑 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하고"(13절), "창기와 함께" 재산을 날려버리고(30절) 얼마안가 "모든 것을 없이하였다"(14절). 그는 좋은 옷을 입고 술과 고기로 살며 그의 재산을 탕진하도록 부추기는 무리들을 환대하며 어울렸다. 가진 것들을 방탕하게 써 없애는 그들은, 자신과 가족들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정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재화를 헛된 욕망을 위해 탕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풀이해 보자. 멋대로 행하는 죄인들은 집안의 재보까지도 "황폐케 한다." 그들은 지성과 영적 능력을 잘못 사용하고, 시간과 기회를 놓쳐버리며, 주인(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도록 맡겨진 재능까지도 파묻어 놓을 뿐 아니라, 횡령 착복한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고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마련된 "섭리의 선물"도 탐욕의 재료와 연료로 쓰고 있다. 세상과 육신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도록 되어진 영혼은 "그(실체)를 허비하고," "허망하게 살아간다."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한다"(전 9:18). 그가 파괴하는 선은 가치 있는 것이요, 자신의 것도 아닌 것이다. 그가 "낭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재화"이며, 마땅히 죄인이 책임지고 보상해야 할 것이다.
[3] 죄악된 생활은 "결핍된" 상태이다. "가진 것 전부를" 창기들과 함께 탕진했을 때, 그들은 다른 먹이를 찾으러 그를 떠났다. 그리고 "그 나라엔 크게 흉년이 들었다." 모든 물건이 귀하고 소중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궁핍해졌다"(14절). 깊이 생각해보자. 제멋대로 하는 낭비는 처참한 궁핍을 낳는다. 한때의 호사한 생활은 아마도 얼마인가 "한 조각의 빵"도 귀하게 만들고, 특별히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면, 부지런한 남편이라면 "미리 준비해 뒀을" 그런 일을 "게으른 남편"은 당황해서 맞는 그런 사태에 직면한다. 이것은 "자신의 공덕"과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 영적인 노력, 양심의 훈계를 내동댕이친 죄인들의 비극을 나타낸다. 이런 것들을 말초적인 쾌락과 세상의 부귀에서 내어 주고, 곧 다시 그게 없어서 멸망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른다. 죄인들은 영혼을 위해 필수품들을 필요로 하나 입을 옷과 먹을 빵도 없고, 후에라도 준비하도록 마련되어 있지 않다. 죄악된 상태란 마치 "기근이 몰아닥친 아주 극심한 흉년을 당한" 땅과 같다. "하늘은 놋쇠와 같고"(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이슬이 걷히고 그것들이 우리는 늘 궁핍하게 된다) "땅은 철과 같다"(죄인의 마음밭을 말하는데, 그것은 늘 좋은 것들을 산출해야 하지만, 마르고 박해져서 아무 선한 것도 그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죄인들은 "지독하고 비참하게" 가난한데, 더욱 괴로운 사실은 스스로 그런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이며, 또한 제공되는 물자를 거절하고 그렇게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4] 죄악된 상태는 "아주 나쁜 노예 상태이다." 이 젊은이의 방탕이 결국은 그를 먹고 살기 위해 종살이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게 되었다"(15절). 전에는 "방탕한 생활"로 나타나던 죄악된 생활이 이제는 "노예의 생활"로 표시된다. 왜냐하면 죄인이란 완전한 노예이기 때문이다. 마귀는 "그 나라 백성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도시에나 시골에나 다 있고 죄인들은 "그들과 연합하고," 스스로 종노릇하여 "마귀의 짓"을 하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몫을 받기 위해 늘 마귀에게 의지한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다(요 8:34). 이 젊은 신사가 종살이를 하고 마귀를 주인 섬겨 살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자신을 낮추고 헐뜯게 되었을까! 이 백성은 "그를 들에 보내었다." 그것도 양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이런 일에 약간의 면목이 있다. 야곱, 모세, 다윗도 양을 쳤었다) "돼지를 치게"하기 위해서였다. 마귀의 일이란 "육을 위해 준비하고 그 위에 탐욕을 채우는 것이다." 그것은 먹기를 탐하고 더러우며 시끄러운 돼지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성적이고 영원한 영혼이 어떻게 이보다 더한 수치를 스스로 당할 수 있으랴.
[5] 죄악된 상태란 "끊임없이 불만족스런" 것이다. 이 탕아가 궁핍하여져서 스스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집이 아니라 들판이라도 만족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은 족하지 않았다. 그는 굶주림을 메우고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기꺼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곤 했다"(16절). 이 젊은 귀공자가 돼지와 같이 먹는 사람이 되었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변화인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이 죄인들은 자신있게 이젠 "만족스럽다"고 하지만 분명히 실망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헛된 것을 위해 수고하며"(사 55:2) 그들 죄악의 걸림돌은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한다(겔 7:19). 쥐엄열매는 돼지의 먹이지 사람이 먹는 것은 아니다. 세상부귀와 육신의 즐거움은 몸은 위하지만 "고귀한 영혼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사람의 본성에 맞지 않고 그 바라는 것들도 채우지 못하며, 그 요구에도 응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취하는 자는 "바람을 먹으며"(호 12:1), "재를 먹고살게 된다"(사 44:20).
[6] 죄악된 상태란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서 구원함을 바랄 수 없는" 상태이다. 이 탕자는 "일해서" 먹고 살 수 없게 되자, "구걸" 행각에 나섰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스스로 비극을 자초한 것과, 그가 품행이 좋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쌍해진 사람은 "동정을 거의 받지 못한다." 이 비유를 적용해 보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도움을 입을 수 없음을 고시(告示)한다. 헛되이 우리는 세상과 육신에 외친다(그것들은 우리가 섬기는 우상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혼에게 "독"을 주지 영혼을 "먹이고 기르지는" 못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절한다면 어떤 피조물이 당신을 도울 수 있겠는가!
[7] 죄악된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다." "이 아들은 죽었다"(24,32절). 죄인은 율법 아래에서 죽음의 정죄를 받은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죄와 허물로, 영적인 삶이 결여된 채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이 없고, 영적인 체험이 없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음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죽어 있다." 탕자는 그 "먼 나라"에서 그의 아버지와 가족에 대하여 "죽었고" 그들과 관계가 끊어졌다. 마치 나무에서 떨어져나간 가지가 결국 죽듯이 말이다. 이것이 결국 그가 당하는 마지막이다.
[8] 죄악된 상태는 "잃어버려진" 상태이다. "이 내 아들은 잃어졌다."-선한 모든 것에 대하여-그의 아버지의 집에 대해서도 잃어졌다. 그것들은 그를 즐겨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분리어진 영혼들은, 제길을 벗어난 "여행자"와 같이 또한 무한한 자비가 지켜 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바다에 곧 침몰한 배처럼 잃어버려졌고 돌이킬 수 없이 잃어진 것이다.
[9] 죄악된 상태는 "광기"와 "착란"의 상태이다. 이 사실은 "그가 스스로 돌이켜"(17절)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즉 "스스로 돌이켰다"는 말은 그가 전에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다. 또 스스로 먼 나라의 백성 중의 한 사람이 된 것 모두가 미치광이의 짓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광기"는 "죄인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씀되고 있다(전 9:3). 사탄은 그의 영혼을 차지한다. 그러니 군대 귀신이 들렸던 사람은 얼마나 지독하게 광란했겠는가. "미친" 사람들과 같은 죄인들은 "어리석은 욕심"으로 그 스스로를 파멸케 한다.
2.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 "방랑"으로부터 "돌아오는 것" 즉 아버지께로 참회하며 "돌아오는 것"을 본다. 그는 가장 절박한 위기에 몰렸을 때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이로운가를 생각해 냈다. 생각해 보자. 죄악의 사태에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삶이 있는 곳엔 희망은 있다. 하나님의 은총은 가장 굳은 마음도 부드럽게 하시며, 타락의 극심한 흐름 속에도 새로운 전기(轉機)를 주신다. 이제부터 살펴보자.
(1) 그의 부귀와 회개의 기회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이었다. "궁핍" 속에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다. 다음을 주의하자. 고통이란 하나님의 은총으로 정화될 때 잘못된 길에서 죄인이 돌아오는 다행한 수단이 된다. 그것에 의해 귀는 뜨여 가르침을 듣게 되고, 마음은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열려진다. 또한 그것은 세상의 헛됨과 죄악의 사악함을 직접적으로 증명한다. 영적으로 그것을 적용해 보자. 우리는 피조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데에 충분하지 못함을 발견하고, 모든 수를 써도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면, 그때서야 하나님께 돌아갈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 외에는 죄악의 권세 밑에서 신음하는 영혼에게 어떤 의사도 소용없고 어떤 위로자도 쓸 데 없으며, 우리가 원한다는 것을 "아무도 줄 수 없음을 알 때에야" 비로소 우리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게 되는 것이다.
(2) 돌아옴을 준비케 한 것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심사숙고였다. 그는 바른 마음을 회복하고 스스로 말하며 마음에 이르기를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17절) 하였다. 깊이 생각해 보자. 심사숙고는 회심에의 첫걸음이다. "그가 헤아리고 돌이켜 떠났다"(겔 18:28)는 말씀도 있다. 심사숙고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물러가서 반성해 보고, 그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그가 심사숙고한 것은 무엇이었나?
[1] 그의 처지가 얼마나 불리한 가를 생각했다. "나는 굶주려 죽는구나." "나는 배고프다"만이 아니라, "구원을 바랄 길이 전혀 없게 되었으니 나는 굶어 죽는구나" 한 것을 보라. 죄인들은 죄에 매달려 살다가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섬기려 돌아오게 된다. 그와 같은 심사숙고는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시키고야 만다.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가 죽나이다." 우리가 이렇게 되어서 그리스도께 끌려나오게 되어도 그것 때문에 거절하시지 않으며 또한 불쾌히 여기시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처럼 절망적인 상태에서 자신이 소용 있게 될 것을 그는 자랑으로 여기신다.
[2] 돌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생활이 나아질 것인가 하는 것을 심사숙고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고용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 가장 천한 자라도 설령 하루 품군이라도 그의 집에서는 "먹고도 남을 충분한 양식이 있는데," 그는 그런 훌륭한 집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자세히 고찰해 보자. 첫째, 우리들의 "아버지 집에는" 모든 식구를 위한 빵이 마련되어 있다. 각 지파별로 성모의 거룩한 식탁에 항상 놓여 있는 열두 덩어리의 진설병(陳設餠)으로 알 수 있다. 둘째, 모두가 각 개인, 나아가 집안 일에 종사하는 사람, 더 나아가 자선을 위해 쓰고도 남을 만하게 충분히 있다. "그뿐이 아니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있어, 그것으로도 많은 사람이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집에서는 "고용된 종들"이라도 좋은 대접을 받고 있고, 가장 천한 인간이라도 스스로 그 집에 고용되어 일하고 보수를 받으며 좋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도 이것을 생각해 보면 돌아올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음녀가 새 애인에게서 실망시켰을 때에 혼자 생각한 것이다. "내가 본 남편에게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호 2:7)
(3) 돌아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상황이 그렇게 나쁘고 집에로 돌아감이 훨씬 나을 것 같았기에 그의 심사숙고는 마침내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자"로 결론 지어졌다. 선한 목적도 선한 일이지만 선한 실행은 그 중에 으뜸인 것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무엇을 할지를 결정함. "일어나 아버지께 가자." 이 생각을 하는데 더 이상 길게 하지 않고 "즉시로" 일어나 가려 했다. 비록 "먼 나라"에 있고, 아버지의 집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으며 아득히 멀었지만, 그는 돌아가려 한다. 이같이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뒷걸음질 친 모든 걸음걸음을 돌이켜 뒤밟아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비록 "그 나라 백성 중의 하나와 연합했었지만," 그와의 거래를 끊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육신에게 빚진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애굽의 노예 감독들 밑에서 강제 받으며 살 의무는 없다. 원한다면 마귀를 섬기는 일을 그만 둘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 어떤 결심으로 그가 말하는 지를 눈여겨보자. "일어나 아버지께 가자." 그것은 곧 여기 "머물러" "굶주리느니" 차라리 어떻게 되든 나는 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표시되어 있다.
[2] 무엇을 말할지 결정함. 진정한 회개는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와", 보소서, 우리가 당신께 나아왔나이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하는 것일까? 그는 여기서 그것을 심사숙고한다. 잘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 우리가 말씀을 드릴 때에, "말씀 드려야 할 이유를 정리하고 조리 있게 얘기하기 위해"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언어의 자유"가 있지만, 그것을 최상으로 사용하지 남용하지 않기 위해서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이제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그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고백하려고 결심했다. 즉 "저는 죄를 지었읍니다."라고 말하려 했다. 다음을 명심하자.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까닭에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마땅하며 적합하다. 죄의 자백은 평안과 용서의 필요한 조건으로써 요구되고 주장된다. 만약에 "죄 없다"고 탄원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성결의 계약 앞에서 시험받을 것이며 분명히 정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죄 있다"고, 후회하고 참회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고백한다면, "죄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베푸는 은총의 약속에로 나아가게 된다.
둘째, 죄 지은 것에 대한 중벌을 받고자 하였다. 즉 죄를 변명하여 벌을 경감시키려 하기는커녕, 그 일에 대해 스스로 "무거운 부담"을 지으려 했다. 그러기에 그는 나는 "하늘과 당신 앞에" 죄 지었습니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육신의 부모님께" "불(不)충성하는" 자들은 이것을 생각해 보라. 즉 그들은 "하늘과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고 것이다. 부모들에 대한 잘못은 하나님께 대한 잘못이다. 부모에 대한 죄는 대단히 큰 죄와 그 잘못에 대해 우리가 치를 대가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a. 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데서 범해진다. "우리는 하늘에서 죄졌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하늘로 불리어 지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들보다 높이 계시며, 우리를 통치하심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죄의 나쁜 점은 그것이 높은 곳을 겨냥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죄는 "하늘에 대하여" 짓는 것이다. 그래서 방자한 죄인은 "하늘을 쳐다보며 욕설을 퍼붓는 자"(시 73:9)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을 해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악의는 "무력한" 악의에 불과할 뿐이다. 아니, 어리석은 악의이다. 하늘을 향해 침 뱉으면 결국은 자기 머리에 떨어질 것이니까(시 7:16). 죄는 "하늘의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고, 하늘의 영광과 기쁨을 몰수하는 것이고 하늘나라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다.
b. 죄는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멸시하는 데서 저질러진다. "나는 하늘에 대해서 더구나 당신 앞에서 당신이 지켜보시는 데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은 없는 것이다.
셋째, 그는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고 정죄 하려 작정했다. 나아가 가족이 가지는 특권까지도 모두 몰수당해야 함을 인정하려 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21절)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부자 관계를(그가 신뢰해야 하는 전부이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아버지가 그것을 부정할지라도 또 그를 맞지 않고 문을 닫아걸어도 옳은 것이라고 승인하였다. 그는 자기의 요구대로 자기 몫을 받았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죄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전혀 없음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겸비하고 낮춤이 합당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에 가장 천한 자리로라도 들어갈 것을 허락해 주심을 간청하려 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그것만으로 충분하며 제게는 너무도 좋습니다." 꼭 기억하자.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큰 가치가 있으며, 그곳의 특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게만 된다면,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설령 "문지기"로서(시 84:10) 있게 될지라도 그는 기뻐하게 된다. 만약에 그에게 종과 같은 위치로 대접받도록 강요된다해도 그는 순종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위치를 생각하여 오히려 특혜로 생각할 것이다. 자신들이 배반하여 떠났던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그 분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용되기를 원할 수밖에 없고, 그분을 받들고 영광 돌리는 것을 원할 수밖에 없다. "나를 품군으로 만들어 주소서. 그래서 내가 예전에 경홀히 여겼던 만큼이나 이제는 아버지의 집을 사랑함을 보이겠나이다" 하면서 다섯째, 위의 모든 것에서 그는 자기의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바라보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그는 "일어나 나의 아버지께로 가자. 그리고 아버지여! 라고 말하자"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그리고 우리들의 아버지로서 봄은 회개하고 그 분께 돌아가는 더 큰 소용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슬픔을 순수하게 만들고, 다시는 죄 짓지 않으리란 결심을 강하게 하며, 용서받으리라는 희망을 크게 해 준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나 간청하는 자들에게서 "아버지"라고 불리어짐을 너무도 기뻐하신다. "에브라임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냐."
(4) 그는 이 결심을 어떻게 실행했나?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절). 그는 이 선한 결심을 지체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쇠뿔을 단김에 빼듯이,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지 않았다. 확신이 들면 곧 응하는 것이 이익임을 기억하자. 일어나 가자 라고 말했는가? 그러나 곧 바로 그렇게 실행하자. 그는 도중에서 피곤하고 더 이상 갈 수 없는 척하지 않았고, 약하고 지쳤지만 끝까지 실행해 나갔다. "오 이스라엘아, 네가 나에게 돌아오려 한다면 끝까지 해라."
3. 다음에 그를 반겨 맞아들이고 즐거워하는 아버지를 본다.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반가었는가? 그렇다 뜨거운 마음으로 환영했다. 사실 말이지만, 이것은 어리석고 불순종하는 자녀를 둔 모든 부모들에게 주는 좋은 교훈이다. 부모들은 비록 나쁜 자녀라도 그들이 뉘우치고 부모에게 고개 숙이고 돌아오면 아이들에게 거칠고 엄하게 할 것이 아니라 상냥하고 온후하게 그들은 다스려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써 그 결과 자녀들도 부모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고 또 온후한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불쌍한 죄인에게 쏟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나타내시며 그들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데 주된 목적이 있는 말씀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말씀을 살펴보자.
(1)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큰사랑과 애정.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를 보고" (20절)라는 표현을 보라. 아들이 참회를 표시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자비를 나타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선함의 축복으로 우리를 보호하신다.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응답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기를 고백하리라 했는데 당신은 이미 용서하셨나이다." 여기 표현된 이 형상이 얼마나 선명한가.
[1] 여기 "자비의 눈"이 있다. 그 눈은 재빨리 보았다. "아직도 서로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아들을 보았다." 다른 식구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마치 높은 망대에 올라가 "저기 떠나간 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속에 아들이 떠난 길을 지켜보았던 것처럼 그는 재빨리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죄인의 회개를 하나님이 얼마나 바라고 계시며 그에게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맞을 채비를 단단히 하고 계신 것을 알려 준다. 그는 사람들이 떠나가면 다시 돌아올까 아시고자 늘 "지켜보고 계시며," 돌아오려는 마음이 생기는 그 첫 순간도 알고 계신다.
[2] "연민 어린 자비"가 있다. 속에서 맴돌던 연민과 아들을 보고 싶어하던 열망이 같이 있다. "그는 측은히 여겼다"(20절). 비참함은 그것이 죄인의 비참이라도 동정의 대상이 된다. 비록 죄인이 그것을 자초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동정하신다. "이스라엘의 아픔을 향한 내 마음의 긍휼이 불붙는 듯하다"(호 11:8; 삿 10:16).
[3] "자비의 발길"이 있다. 그 발은 재빨리 달려간다. "그는 달려갔다." 이것은 하나님이 긍휼을 보이시는데 얼마나 빠른가를 나타내 준다. 방탕한 아들은 수치와 두려움의 무거운 짐 아래에 천천히 왔지만, 상냥한 아버지는 용기 있게 달려나가 맞았다.
[4] "자비의 팔"이 있다. 그 팔은 아들을 끌어안았다. "목을 안았다"(20절). 죄에 젖어 있고, 두드려 맞아야 마땅하며 돼지를 치다 오는 더럽고, 추한 아들이지만, 그래서 아버지같이 강하고 부드러운 연민이 없는 사람이라면 손대기도 싫은 것이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안아 가슴에 뉘었다. 이처럼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사랑받고 주 예수께 환영받는다.
[5] "자비의 입술"이 있다. 그 입술은 벌집이 꿀을 내는 것처럼 사랑과 자비를 낸다. "입을 맞추니"(21절). 이 입맞춤은 그가 "환영받는다"는 것을 "확신시켜"줄 뿐 아니라, 용서받음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즉 전의 어리석음은 모두 용서되고 꾸중이나 그를 책망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을 것이라는 표시였다.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을 입맞춤 것과 같다(삼하 14:33).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엾게 회개하여 돌아오는 죄인들을 얼마나 기다리시며 자유롭게 또 기대하시는가를 나타내 준다.
(2) 이 불쌍한 탕자가 아버지께 보인 참회의 복종.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21절). 아들이 회개를 표시를 하기 전에 아버지가 자비를 나타내 보여 주듯이, 아들은 아버지가 그리도 많은 자비를 보여 준 후에 회개를 나타내었다. 아들은 그의 용서를 확증하는 입맞춤을 받은 후에도 "아버지여, 제가 죄를 지었나이다"하고 말했다. 죄의 용서와 사유 받음의 평안을 받은 사람들일지라도 그 마음엔 죄에 대한 참다운 통회가 있어야 하며 그 입술로는 통회의 자백을 해야만 한다. 그 죄가 설령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고 생각되더라도 말이다. 다윗은 나단에서는 "주께서 네 죄를 없이 하셨다. 너는 죽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들은 후에도 시편 51편을 썼다. 아니 오히려 죄를 평안스런 느낌으로 용서받는다는 것은 더욱 더 우리의 죄에 대한 슬픔을 크게 해야 한다. 그와 같은 생각에 의해 더욱 증가되는 것이 우리의 순수한 복음적 슬픔이다. 에스겔 16장 63절을 보면,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예언하고 있다. "우리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준비를 보면 볼수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용서하기가 더욱 더 어려워진다.
(3) 이 자비한 아버지가 돌아오는 탕자를 위해 예비한 놀라운 준비. 아들은 복종하는 마음으로 가고 있었다. 하기로 마음먹은 말(19절) 즉 "저를 품군의 하나로 여기소서"라는 말 외엔 그는 다른 말은 하나도 않았다(21절). 우리는 아들이 그 말을 잊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하물며 마음이 변했다거나, 이제는 처음 결심할 때 보다 식구가 되기를 바라지 않거나 혹은 종이 되기를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중단시키며, "아들아, 더 이상 너의 무가치를 얘기하지 말아라. 나는 너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비록 네가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어도 나는 너를 사랑하는 아들, 귀여운 자식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환대 받는 사람은 굳이 "고용된 품군"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필요는 없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슬퍼했을 때" 하나님은 위에처럼 위로하셨다(렘 31:18-20).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꾸짖음이 한 마디도 없다는 점이다. "왜 창기와 돼지하고 놀아났느냐! 네 스스로 화를 당하고서야 집에 돌아올 생각이 났느냐?"는 말이 없다. 정말로 여기엔 이런 것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참 회개하는 자를 용서할 때,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시며 더 이상 기억치 않으심을 말한다.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라"(겔 18:22). 이것뿐만이 아니라 거기엔 아들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자격을 따라 옛날에 받았던 아니 바랬던 정도 이상으로 풍성하고도 훌륭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아들은 아버지가 그를 알아보고 부엌으로 가게 해서 종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했어도 감지덕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행해 주신다. 이 탕자는 거절당하지나 않는 두려움과 용납 받을까하는 희망을 안고 돌아왔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려웠던 이상으로 뿐만 아니라 바랐던 것보다 훨씬 이상으로 잘해 주었다. 즉 그를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경애하는 마음으로 맞아들였다.
[1] 그는 "누더기"를 입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옷을 입혀 줄" 뿐만 아니라 "치장까지 " 시켜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옴을 알고 대기하고 있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하였다. 집안에 있는 가장 낡은 옷이라도 괜잖고, 그에게는 이것도 충분 할텐데, 아버지는 "겉옷"이 아니라, 왕자들이나 높은 사람들이 입는 "예복"을 th,n sto,lhn th.n prw,thn -즉 가장 좋은 예복을 명했다. 여기엔 이중의 강조가 보인다. 즉 내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너희들이 아는 "그 예복, 가장 훌륭한 예복"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가 집을 나갈 때 입었던 그 옷, "제일 좋은 옷"(이렇게 읽힐 수도 있는데)이다. 타락자들이 회개하고 "제일 좋은 일"(여기서는 회개와 돌아옴을 의미함)을 행할 때, 그들은 용납 받으며 동시에 "제일 좋은 옷"을 입을 것이다. "여기로 그 예복을 가져와 그에게 입혀라. 그 옷을 입기를 아들이 부끄러워하고, 더럽고 땟국 흐르는 옷 입고 돌아온 자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옷을 입혀라. 뿐만 아니라 식구 중의 한 사람으로 대우받는다는 표시로 가족이 가지는 권력을 상징하는 반지인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주라"고 말하신다. 부자들은 가락지를 끼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의 한 몫을 내버렸지만, 그가 회개한 것에 보답해서 또 다른 것을 주려고 결심한 것이다. 아들은 맨발로 집에 찾아왔다. 아마도 여행으로 부르텄을 것이다. 그러기에 "발에 신을 신기워 편하게 해줘라"고 말하신다. 이처럼 참 회개하는 자에겐 하나님의 은혜가 예비 되어 있다.
첫째, 본문의 "제일 좋은 옷"은 "그리스도의 의"인데 이는 죄인들이 입어야 할 "가장 중요한 예복"이다. 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한다. 즉 그의 "태양"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의의 예복"은 바로 구원의 옷이다"(사 61:10). "새로운 성품"은 이 "제일 좋은 옷"인데, 참 회개하는 자들은 이것으로 입고 완전히 성화된다. 둘째, "손에 가락지를 끼웠다"는 성령의 인치심을 나타낸다. 성령에 의해 우리는 구원의 날에 인침을 받는 것이다. "네가 믿은 후로 인침받았다." 성화되는 사람들은 존경과 위엄을 받는다. 또한 요셉이 바로에게 반지를 받으며 "가락지를 끼워 나의 친절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해서 그가 잊지 않도록 하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권력에 있게 된다.
셋째, "발에 신을 신기웠다"함은 "평안의 복음을 예비하였다"는 뜻인데(엡 6:15) 이 말씀은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심으로 다른 죄인들도 회개한 그를 보고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고자 하심을 뜻한다.
다윗은 용서받으므로 하나님의 길을 죄인들에게 가르쳤고, 베드로는 회개하므로 다른 사도들을 격려했다. 사람이 맨발로 갈 때보다 신을 신고 가면 더욱 즐거운 것처럼, 죄인들도 신앙 생활을 할 때, 더욱 즐겁고 또 흔들리지 않으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 경우는 알려 준다.
[2] 그는 "굶주려" 집에 왔지만, 아버지는 "그를 먹여 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잔치를 베풀었다"(23절). "외양간에서 기르고, 특별한 일에 쓰려고 준비해 놓은 그 살진 송아지를 이리로 가져 오라. 그리고 우리가 가진 제일 좋은 것으로 배를 채우도록 잡아라." 찬 고기나 먹다 남은 음식이 제공될 수도 있었지만, 신선한 고기, 따스운 음식, 더구나 그럴 수 없이 좋은 살진 송아지가 제공되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자"고 하는 사람에겐 하늘 아버지가 준비하신 놀라운 음식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떡"이다. 그의 살은 진정한 음식이며, 그의 피는 참 음료수이다. 예수님 안에선 영혼을 위한 축제와 모든 살진 것이 준비된 잔치가 있는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쥐엄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우던" 이 탕자에게 이 잔치란 얼마나 큰 변화인가! 피조물에게서 만족을 찾으며 "헛되이 애쓰던" 사람들에게 새 언약이 주어지고, 그 평강의 맛이 풍겨지면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이제서야 이 아들은 "내 아버지 집에는 먹고도 남을 충분한 음식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4) 아들이 돌아옴으로 생겨진 기쁨과 즐거움. 살진 송아지를 가져옴은 아들을 위한 "잔치"일 뿐만 아니라 식구들을 위한 "축제"이기도 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방탕한 생활 속에 처해서 이 내 아들은 죽었었는데, 돌아왔으니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다시 얻었으니 오늘은 기쁜 날이다. 우리는 그의 소식을 오랫동안 못 들어 죽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보라 그가 살아 있다. 우리는 그를 잃어버린 자로 포기하고 소식을 들으려니 생각을 아니했는데 잃었다가 이제 찾았다."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한 영혼이 죄에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섬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 영혼을 들어올리는 것이며, 잃어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것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하고 놀라우며 행복한 변화이다. 그 자체로 "죽은" 것이 "살아나고," 하나님과 교회에게 "잃어졌던" 것이 다시 찾아지며, "무익하던" 것이 유익하게 된다(몬 1:11). 그것은 마치 봄이 돌아와 대지의 표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2] 죄인들의 회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크게 기쁘신 일이며, 동시에 그의 식구에 딸린 모든 사람들도 기뻐해야 한다. 하늘에서 "기뻐하면" 땅 위에서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생각해 보자. 기뻐하심을 시작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기뻐하도록 부추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보내셨으며 영원히 영광 받으실 그리스도에게로 사람들을 데려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너희를 인하여 기뻐한다"(살전 3:9)고 했고 가족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너희들이 거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다"(살전 2:19)라고 말했다. 이제 가족들은 주인과 함께 모여 "즐기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종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4. 우리는 여기서, "큰아들의 불평과 시기"를 본다. 이것은 세리와 죄인들의 회개와 신생에 불만족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베푸는 은총을 못마땅히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꾸짖기 위해 표현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건을 악화시키기 위해 내놓으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자의 특권, 즉 유대인들이 그 특권을 가졌으며(비록 이방인들이 사랑을 받지만) 따라서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시려 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꾸짖으실 때 온유하게 말을 거셨으며 불쌍한 세리들에게 그들이 좋은 감정을 갖도록 누구러뜨리셨다. 그러나 "큰아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이 참으로 선한 사람들이었으며 젊어서부터 그래 왔고 악한 삶으로 절대로 빠지지 않았으며, "비교적" 회개할 것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의 끝머리에 "아들아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고 한 것은 어렵지 않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제 큰 아들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1) 동생을 맞아들이는 일에 그가 얼마나 "어리석고" "화를 냈는가," 또 얼마나 싫어했나. 동생이 돌아왔을때 형은 시골에 있는 "농장"으로 출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환희의 잔치"는 시작되었었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25절). 저녁이 준비되었는지 아니면 배불리 먹고 충만해 있었든지 했을 것이다. 형은 "이 무슨 일인가"(26절) 물었고, 그의 동생이 돌아와 "집에 돌아옴을 환영"하여 아버지가 큰 잔치를 열었으며 특히 "무사하게" 돌아옴을 아버지가 매우 기뻐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문에는 단어 하나로써 표현되어 있다. 즉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u`giai,nonta-즉 건강하게, 즉 몸과 마음 다 건강하게 "맞았다"고 쓰여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몸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돌아오며 아버지 집에 화해하고 악하고 더러운 성벽을 고치며 돌아온 것을 맞아들인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그렇게 무작정 맞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극도로 형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28절) 한 것은 단순히 형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기로 한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싫어함을 보여 주므로 아버지로 하여금 동생을 집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리려 한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도 우리가 어디서고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이다.
[1] 사람 사는 가정에서 우리는 이런 경우를 보게 된다. 부모에게 늘 위안이 되어 주는 사람들은 부모의 총애를 자신들이 독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매섭게 쏘기"가 쉽고 부모들이 그들에게 베푸는 자비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쉽다.
[2]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도 이런 경우를 볼 수 있다. 비교적 "죄 없는" 이들은 드러나게 "참회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동정을 베풀지를 거의 모른다. 그와 같은 말이 "형"이 말한 것에 드러나 있다(29,30절).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쁜 죄를 짖지 않고 덕스럽고 정숙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큰아들과 같은 죄를 짓지 않게 하도록 경고하기 위해 쓰여졌다. 형의 죄를 상세히 생각해 보자.
첫째, 그는 "자신을 뽐내어," "자신의 덕과 순종"을 자랑했다. 그는 동생처럼 집을 뛰쳐나가지도 아니했고, "종"으로 일했으며, 오랫동안 그리 해왔다. "보소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나이다"(29절). 이웃보다 더 나은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까지, 마치 하나님도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뻐기는 일이 허다하다. 나는 형이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 자랑하면서 말했을 때, 사실보다 과장했다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가 지금 "간청하는데"는 그렇게 완강하지 말아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비교적 인정해야 할 점은 그는 아우처럼 그렇게 불순종하지는 않았다. 오! 정말로 선한 사람들은 교만함과 또 다른 사람의 타락을 볼 때 생기는 자신의 타락함을 경계해야 한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큰 죄악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정말로 겸손히 감사해야 하며 교만하게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그는 마치 그렇게도 충성스러웠던 자기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랑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께 불만을" 터뜨렸다.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라고 말한 것을 보라. 그가 평상시의 마음이었더라면 이런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다른 때 이런 요청을 했더라면 그 즉석에서 응답 받았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가 정말 그것을 바래서가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것이 이와 같이 토라진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감정에 휩싸이면" 평상시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하기가 쉬운 법이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식탁에서 커왔고,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져왔었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살진 송아지"와 비교할 때, 애정의 표시로써는 하잖은 것에 불과한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었다. 잘 생각해 보자. 자신과 자신의 일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주인을 "각박하게" 생각하거나 주인의 사랑을 하찮게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맞다 여기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야 마땅하며, 더군다나 그분 생각엔 불필요하다 생각하시는 것들을 받기엔 더욱 더 과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해서는" 안 된다. 형은 멀리 있는 "친구들과 즐기기 위해" 염소새끼를 가질 수 있었겠지만, 반면에 못마땅히 여긴 "살진 송아지"는 멀리 있는 "친구들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안 "식구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아우에게 주어졌다.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잔치는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교제 속에서 집안 아버지와 식구들과 같이 이뤄져야 하지 "다른 친구"들과 이뤄져서는 안 된다.
셋째, 형은 동생에 대해서 매우 "기분이 상했고," 동생에 대해 생각하고 또 말하는 것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떤 선한 사람들은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아니 오히려 너무도 자주 여기에 빠진다. 즉 무슨 일을 했지만 그 칭찬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혐오감으로 쳐다보고, 분명히 회개와 개혁의 선한 증거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시큰둥하고 뽀루퉁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정신이다. 형의 생각을 살펴보자.
a. 동생이 "쫓겨나지" 않으면 자기는 "들어오지 않으려 했다." 그는 아우와 같이 한 집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 집은 "아버지 집"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투의 말이 바로 바리새인의 말투이다.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8:11). 생각해 보자. 우리는 물들 위험이 있는 죄인들의 사회를 피해야 당연하지만 참회하는 죄인들의 무리를 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통해 선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가 나와 "권했지만,"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고 또 그의 은총에 참여하도록 허락한 자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거나 또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고 귀히 여기고 계신다는 충분한 증거가 보이는 사람과 사귈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b. 그는 아우를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것은 교만하고, 마치 아버지의 총애가 그를 탕자로 만든 것처럼 생각없이 하는 말이다. "그는 당신의 아들,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외다." 생각해 보자. 우리들이 형제를 형제로 대하는 관계를 잊어버리거나 부인하는 밑바닥에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자리잡고 있고, 그 의무 자체에 대한 부정이 있다. 우리는 육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형제 관계로서의 합당한 칭호를 부르자.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형제여"라고 부르고, 순결한 이는 회개자에게 "형제여"라고 부르십시다.
c. 형은 "아우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고," 나쁘게 만들며, 그래서 아버지로 하여금 분노케 하려고 애썼다. "그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당신의 아들이나이다." 사실 그렇다. 아우는 그 자신의 몫을 매우 어리석게 내버렸다. "창기와 함께"였는지 아닌지는 형은 알 수 없다. 아마도 형의 시기와 악한 뜻에서 나온 것일게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전 재산"을 다 먹어치웠다는 것은 잘못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충분할 재산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를 비난할 때 얼마나 쉽사리 사태를 "최악으로만" 보려 하며, 며칠을 완전히 하려드는지를 알게 한다. 우리 자신은 그렇게 취급받기를 원하지 않고 또 악을 극단으로만 보시지는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도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는 데도 말이다.
d. 형은 "아버지가 동생에게 보여 준 호의를 아까워했다." 아우가 그럴 만한 가치나 있는 것처럼,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절)고 말하는 것을 보라. 생각해 보자. 참회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시기하거나,"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눈살을 찌프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현재" 아주 악한 죄인에게 일반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이 있다고 시기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너의 마음으로 죄인을 시기하는 데에 있게 하지 말지어다) "과거에 죄인이었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회개를 통하여 주어지는 언약의 사랑의 은총을 시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받는 죄 사유함, 평화, 안위, 더구나 죄인을 두드러지게 용납 받을 만하고 쓸모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시기해서는 안 된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은 탕자였으며, "교회"를 "파괴"함으로 하나님의 "살림"을 "삼켜버렸었지만" 그러나 회심한 이후에는,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많은 양의 은총과 영예를 받았다. 그러나 바울이 핍박할 때 "그리스도를 섬기던" 바울의 형님격인 사람들이 와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긴 적도 없던 다른 사도들은 바울의 계시나 환상을 시기하지도 않았다. 더욱 뛰어난 사도라고 질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바울)를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영광 돌렸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에게 본받을 일로써 이 비유의 형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2) 이제는 형이 이처럼 시큰둥하고 속상해 있을 때에 아버지는 이 "형에게 몸가짐을 취함에" 얼마나 "상냥하고 다정했나"를 살펴보자. 참으로 큰아들의 태도하고는 다르다. 내 생각으로는, 작은아들로 표현되는 방탕한 죄인들이 회개할 때 맞아들이는 것과 같이 큰아들로 표현되는 "질투하는 성도들"을 참을성 있게 대하시는 아버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밝게 빛난다고 여겨진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고 감정에 격하기 쉬운 사람들이다(살전 2:7 참조).
[1] 형이 들어오려 하지 않자 "아버지는 나와서" 부드럽게 말을 걸며 좋은 말을 하고 그가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간청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그가 들어오려고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바깥에 내버려두고 빗장을 걸어라. 그리고 나가서 그가 찾을 수 있는 거 할 집을 구하라고 해라. 이 집은 내 것이 아니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줄 아느냐? 그 살진 송아지도 내 것이 아니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할 게 무엇이냐?"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셨다. 작은아들을 맞으러 나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큰아들을 맞으려 부드럽게 일러 종을 보내지 않고 그 자신이 직접 나갔다. 자 이제 살펴보자.
첫째,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상하게 고집스럽고 짜증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얼마나 참을성 있고 신사적이신가! 그분은 가인에게 "왜 그리 분노하냐?"고 물으셨고,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를 참으셨다"(행 13:18). 엘리야가 안달할 때 얼마나 부드럽게 하나님은 대하셨으며(왕상 19:46) 특히 본문의 상황과 비슷한 요나에게도 그리하셨다. 본문에서의 형처럼 그는 니그웨의 회개와 그 성에서 주어지는 자비에 불만을 품었었다. 그래서 "네가 성냄이 어찌된 일이냐?" "내가 니그웨는 아끼지 않겠느냐?"는 물음은 본문에서의 형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충고와 비슷하다.
둘째, 이것은 모든 우등한 자들에게 열등한 자들을 온유하고 점잖게 대하도록 가르쳐 준다. 설령 열등자들이 잘못하고 더할 나위 없이 성나게 하며 항변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이른다. 위와 같은 경우에 처해 있을 때, "아버지들은 분노로 자식들을 다루지 말고," "주인들은 관용으로 참도록"하자. 이 모두가 참으로 "온유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아버지는 형에게 자기가 둘째 아들에게 베푼 환대는 큰아들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또는 그를 나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확신시켰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31절). "이 일로 인하여 네게 적은 몫이 돌아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아우를 맞아들이는 것이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 쓰는 것이 네 것을 감소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너는 아직도 pars enitia(영국법)-즉 두 배의 몫(유대법은 장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이렇게 부른다)을 받을 권리가 있다. 너는 hoeres ex asse (로마법은 이렇게 불렀다)-즉 상속자이며, 내 것은 다 네 것이고 그것은 불변하지 않느냐." 만약에 아버지가 형에게 "친구와 즐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에게는 언제나 한 식탁에서 아버지와 같이 식사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친구와 즐기는 것보다"는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복락을 누리는" 것이 더욱 나은 것이다. 잘 생각해 보라. 첫째,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말할 수 없는 행복은 현재나 미래나 늘 아버지의 집에 그분과 함께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믿음으로 그리할 수 있고 저 천국에서는 상급으로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모두 믿는 이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된 자면 모두 상속자이기 때문이다"(롬 8:17). 둘째,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시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은혜에 참여한다고 해서 우리의 몫이 적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로 믿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소유 전부는 "우리의 것"이다. 또 만일에 다른 사람들이 진정한 신자가 된다면, 하나님의 소유는 역시 그들의 것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 때문에 우리의 몫이 적어지는 법은 결코 없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태양의 혜택을 못 받다가 태양의 열과 빛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태양의 혜택이 적게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닌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육체에서의 영혼과 같다. 즉 그리스도는 tota in tota-즉 전부에 대한 전부이며 동시에 tota in qualibet parte-즉 각 부분에 대해 전부이시다.
[3]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어째서 이 일이 모든 가족이 기뻐할 경사인지 이유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32절). 그는 자신의 권위에 의해서 "내가 원하는 일이니 가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Stat pro ratione voluntas-즉 이유는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권위 있는 자라고 해서 매사를 권위로써 단언하고 주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오히려 권위를 값싸고 천하게 만든다. 차라리 이 아버지처럼 분명한 이유를 대는 것이 좋다. 즉 아버지는 착한 자식이 잘하는 것보다 탕자가 돌아온 것을 더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고" 어울리는 것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가족에게 큰 축복이지만 후자는 가족에게 당장에 유쾌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느 가정이라도 많은 아이들이 꾸준한 건강과 목숨을 지켜나가는 것보다도 죽었다가 살아났다 라든지, 죽도록 아팠다가 다시 회복되는 것에 더욱 큰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옮음이 판명되며, 얼마안가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큰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어떤 대꾸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의 뜻에 만족하고 묵묵히 따른 것을 말한다. 또한 그의 방탕한 동생과도 화해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형에게 "이 애가 너의 동생이다"라고 마음에 새겨 주었다. 잘 생각해 보자. 선한 사람이라도, 늘 "자기의 이성을 지키도록" 자신을 다스리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이성을 찾는다." 비록 그는 "실수할지라도, 완전히 넘어뜨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위해서 이 비유는 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마도 여전히 이방인 죄인들과, 그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