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뿌리를 찾아 우리나라에는 현존하는 심씨가 풍산심씨 외 청송, 삼척, 부유, 전주 심씨가 있다고 하나 부유, 전주 심씨는 보지 못했고 주로 청송심씨가 많고 전국 심씨는 다 합하여 24만 명쯤 된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풍산심씨만이 950여 년 전(서기 1110년)에 중국 절강성 오흥현 능호진 죽돈촌에서 나신 만승(滿升)조께서 한국에 건너와 정착하였다는 근거가 족보를 통해 밝혀져 족보를 근거로 후손인 우리가 3년 전에 현지를 방문, 족보로 한 자손임을 확인하고 양국간에 우의를 다져오고 있다. 중국 종친이 2003년에 다녀갔고 금년에는 우리가 두 번째로 재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3박 4일간의 짧은 여정을 기행문으로 쓴다.(2005. 3. 15-2005. 3. 18까지) 우리 일행 26명이 상하이 공항에 내렸을 때 많은 종친들이 나와서 열렬히 환영했다. 비행기 연착으로 한 시간이나 늦게 갔음에도 종친 모두가 반가운 얼굴이었다. 중국 종친들은 [한국풍산심씨대종회심근방문단환영(韓國豊山沈氏大宗會尋根訪問團歡迎)]이라고 빨간 바탕에 하얀 글씨로 쓴 플랜카드를 펼쳐 올리고 환영의 함성을 올렸다. 도착 예정시간이 너무 늦어 우리는 서둘러 대기하고 있는 국제여행 소속 대형 버스에 올랐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우리 앞에 관용차와 경찰차가 가고 있었는데 그것이 우리를 안내하는 행렬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초 계획은 상하이의 명승지를 관람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도착시간이 어긋나서 통역자의 설명을 들으며 상하이 중심가를 주마간산으로 관람하기로 했다. 차는 상하이 번화가 이곳 저곳을 두루 돌아 서쪽 호주를 향해 도시 중심에서 10킬로가 넘는 고가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저 빌딩은 상하이에서 두 번째 높은 88층, 저것은 125층짜리 초고층 건물인데 지금 100층을 넘어 올라가는 중입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본 상해는 우리 서울처럼 빌딩이 숲을 이루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안내원이 물었다. "한국에는 있는데 여기에는 없는 것 두 가지가 있고 여기서는 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맞추어 보시지요." 안내원의 말에 모두가 머리를 돌려보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 역시 멍텅구리. 안내원이 자문자답했다. "한국에는 있는데 여기서 볼 수 없는 것은 교회 십자가와 상하이를 떠나 사방 백리를 달려도 안 보이는 산이랍니다. 그리고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저 아파트 창문에 내 걸린 빨래입니다." 오, 그런가? 하고 살펴보니 뾰족한 지붕은 많이 보이는데 십자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낮은 아파트는 더 심하고 20층이 넘는 아파트에도 창에서 기다란 쇠막대기를 밖으로 길게 쭉쭉 빼내어 설치하고 이불을 비롯한 각종 빨래를 매달아 놓았다. 각색 빨래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안내원이 웃으면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저 빨래 넌 것만 보면 이웃집 아줌마 허리 사이즈가 몇인지 옆집 아가씨가 무슨 팬티를 잘 입는지 다 알게 됩니다." 이 말에 빨래 모양을 바라보던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손자 증손자가 항렬을 잊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2 오후 3시, 상해 포동 국제공항을 출발한 차는 잣대를 깐 듯 외줄로 쪽 뻗은 서쪽 지평선 끝을 향해 달렸다. 상해 중심가에서 한 시간쯤 달렸을 때 우측 멀리 찾아보기 힘든 작은 교회 십자가 하나가 보였다. 참 보기 힘들고 반가운 보물 같은 십자가였다. 잠깐 사이에 십자가는 뒤로 숨고 길 양편으로 똑같은 모양의 이층집들이 길 양쪽에 줄달아 올망졸망 어깨를 비비대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그늘지고 우중충한 집들.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마당도 없는 집집마다 아래층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조선족 안내원이 집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는 모든 집들이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집에 한 가구가 삽니다." 이 말은 한국은 한 집에 여러 가정이 살지 않느냐 하는 소리로 들렸다. "여기는 습기가 많기 때문에 아래층에서는 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층에 침대를 놓고 거기서 잡니다. 전기장판을 깔고 자면 몸에 해롭기 때문에 겨울에도 두껍게 속옷을 입고 이불을 덥고 떨면서도 전기 담요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누가 물었다. "가정마다 전기 담요가 있기는 있나요?" "필요 없는 걸 왜 가지고 삽니까." 나는 옆 사람에게 말했다. "전기 담요가 있어 보라지. 추어도 안 깔고 잘까요?" "그렇지요. 얼어죽을 판에 몸에 해로운 것이 문제겠습니까." 한국은 산과 산 사이에서 사람이 살고 중국은 웅덩이와 웅덩이 사이에서 사람이 산다고 할 만큼 아득한 들판이 모두 연못들의 연속이었다. 차가 3시간을 달려도 산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하늘과 땅이 맞붙어 커다란 차일을 친 것 같고 머리 위에서 빛을 뿌리던 해가 어느새 우리를 앞질러 멀리 서쪽 지평선 끝에 불그레하게 내리고 있었다. 한국은 석양에 물든 진한 놀이 아름답다. 그러나 절강성 광야는 해가 내리는 지평선 끝이 기대한 꿈을 빼앗아갔다. 땅 끝에서 뿌연 안개 그늘이 올라와 해를 어물어물 삼켜 버렸다. 석양이 아름다운 건 구름이 있기 때문이다. 3 저녁 8시 30분경 우리는 호주시(湖洲市)에 도착했다. 찌푸렸던 날씨가 안개비를 뿌리고 도시는 회색이 자욱했다. 호텔 호주빈관(湖洲賓館)에 우리 일행 차가 당도했을 때 길 양옆으로 경찰들이 도열하고 길을 열어 주었다. 혹 어떤 고관이라도 오기 때문에 경찰들이 나와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과분하고 고맙게도 우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경찰들이 동원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호텔 2층 객실에 짐을 풀고 1층 홀에서 호주시정부가 베푸는 만찬에 참석했다. 4개의 대형 원탁 식탁에는 참석자의 명패가 놓여 있고 준비된 음식이 줄줄이 나왔다. 빙글빙글 도는 식탁에는 각종 주류가 오르고 중국 종중 대표 심석명(沈石銘)씨가 까뻬이(乾杯)를 제창했다. 그 말뜻을 모르는 우리는 웃으며 '위하여'로 화답하고 술잔을 들었다. 까뻬이가 뭔지도 모르던 우리는 이국의 주도(酒道)를 비로소 익히고 까뻬이를 거듭하며 잔을 비웠고 더불어 화기 애애한 핏줄의 우정도 가슴을 열고 어우러졌다. 밤이 깊어갈수록 자리는 점점 넘치는 정으로 뜨거워졌다. 천년 동안 못 만났던 일가가 아닌가. 참으로 뜻깊은 해후였다. 만찬이 끝나고 객실로 들어 상해에서 호주까지 그리고 상해에서 한국까지 얼마나 먼 거리일까 상상해 보았지만 내 지혜로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였다. 비행기로 1시간 40분, 자동차로 4시간, 우리의 조상 할아버지는 그 먼 길을 무슨 수단으로 어떻게 여행하여 한국 고려(예종 때)까지 오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절강성 오흥에서 상해까지는 천리 길이 가깝고 상해서 한국까지는 바다로 3천리가 넘는 거리 같은데 그 먼 길을 어떻게 오셨으며 그 어려움은 어떠하였겠는가 생각하니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용단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밖에 다른 상상은 가지 않는다. 객실 시설은 좋은데 호텔 방이 생각보다 추었다. 한 방에 두 사람씩 배정, 나는 용인 준기(俊基)씨와 한 방에 들었다. 객실에 냉기가 돌고 으스스했다. "방이 너무 차지요?"하고 내가 말하자, "글쎄요. 아직은 겨울 날씨라 그렇겠지요." "이불도 얇은 편이고 침대도 너무 차게 느껴지네요." "그래도 그냥 자야지 뭐." "그렇지요? 여기 사람들은 추어도 참고 침대에서 두껍게 덥고 잔다고 했지요?" 우리는 각각 침대에 올랐다. 이불도 얇고 침대도 차고, 한동안 뒹굴어 보았지만 침대가 차가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은 몸에 해로워서 전기 담요도 안 쓰고 잔다고 했으니 우리도 그들처럼 자는 수밖에 없지. 몇 번이나 추워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설치며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옆방에서 온 조카가 하는 말. "도대체 추어서 잠을 못 잤어요.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살지요?" "조카님도 못 주무셨습니까?" 이때 다른 방에서 또 나온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다. 알고 보니 모두가 새우잠을 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젊은 여종업원이 말뜻을 알았던지 나를 끌고 방으로 들어서더니 벽에 작은 스위치 3개가 있는데 그것을 꾹 누르면서 온풍이 나오는 것을 보여 주며 웃었다. "오! 저게 온풍기 스위치네!" "어디요?" 모두가 온풍기 스위치를 눌러 보면서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씩 했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중국이라지만 허허허허……" 바보짓을 한 우리는 어제 안내원이 가르쳐준 말, "중국 사람들은 추어도 전기 담요를 사용하지 않고 침대에서 이불이나 옷을 두껍게 뒤집어쓰고 잔다." 는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 바보짓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4 누군가가 큰소리로 복도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 8시 티브이 방송 체널 1에서 우리가 도착하여 저녁에 파티하는 장면가지 모두 나왔습니다. 중국 전국 네트웍에 뿌리를 찾아 중국에 온 한국 심씨 일가의 소식과 함께 우리 모두의 얼굴이 비쳤다고요." 했다. 그러나 나는 체널 5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지만 우리의 방중이 그렇게 방송 기사거리가 될 만큼 대단할 줄은 몰랐다. 방중 이틀째는 호텔 뷔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우리 앞에는 경찰차가 가장 앞서고 이어 관용차 세 대가 그 뒤를 따랐으며 우리 일행의 차는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달렸다. 이십 분 정도면 된다고 하던 길이 30분이 지나도 이차선 직진 도로를 계속 달렸다. 어제 저녁부터 흐린 날씨는 안개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 우중충한 길을 40분쯤 달렸을 때 도로 건너편에 몇 대의 승용차가 서 있고 경찰이 안개비를 맞으며 길을 막고 도열해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교통사고가 난 모양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두리번거리는 사이 우리 차는 좌회전을 하여 동네가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층집들이 길게 늘어선 마을 입구에는 빨간 천에 하얀 글씨로 [한국풍산심씨대종회심근방문단열렬환영(韓國豊山沈氏大宗會尋根訪問團熱烈歡迎)]이라는 플랜카드가 걸려 동네 길을 환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복을 한 경찰들이 길 양쪽으로 서 있고 그 사이로 어깨에 촬영기를 멘 사람들 수십명이 렌즈를 우리 쪽으로 비치고 있었고 그 뒤로 수백 명의 인파가 새까맣게 나와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올렸다. 알고 보니 여기가 바로 한국으로 처음 오신 할아버지 만승(滿升)조께서 사시던 죽돈촌(竹墩村)이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같은 후손이며 환영 나온 종친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반가움에 차안에서 그 군중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차가 완전히 섰을 때 내 앞에 함께 촬영을 하며 따르던 젊은이가 내리고 통역 안내원이 내렸다. 앞자리에 앉았다가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며 차에서 내리다가 나는 기절을 할 뻔했다. 5 내가 차에서 내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한편 비어 있는 길가 땅바닥에서 꽝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따따따 따따따 땅땅! 하고 요란한 축포가 터졌다. 그 순간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자욱한 포연이 하늘을 덮었다. 길가에 길게 매설한 폭죽은 차에서 일행이 다 내리도록 연속하여 터지고 겹겹이 서서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의 환성이 온 동네에 가득했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말은 안 통해도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아름다운 말은 없었다. 환영 나온 늙은 촌장이 우리를 마을 안으로 안내했다. 수백 년 전에 조상들이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는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이층보다 높고 오래 묵은 기둥이며 서까래와 벽이 수백 년 역사를 안고 진한 향으로 우리를 맞았다. 벽에는 울긋불긋한 중국 고유풍의 그림이 그려 있고 넓은 홀에는 다과상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과자며 사탕과 과일이 차려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못 본 것이지만 중국 음식점에서도 보지 못하던 순수한 토속 다과였다. 나는 잠깐 의자에 앉아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이는 60이 채 안 돼 보였지만 중국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치아가 상하여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내가 악수를 청하고 명함을 내밀자 그도 명함을 내밀었다. 서화(書畵)를 한다는 심건창(沈健昌)으로 우연히 내 이름 혁창(赫昌)의 창과 글자가 같다고 더욱 반가워했다. 나는 아침 식탁에서 심석명씨와 주고받은 시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再會親顔笑滿面 交情友愛滿杯酒 昨夜施餐美甘食 欲報恩昊天剛極 (다시 만난 반가운 얼굴 웃음이 가득하고 정 나누는 술잔에는 사랑이 넘치네 지난밤 베풀어주신 맛있고 좋은 대접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一根血族兩國沈 千年後孫相逢禮 以後萬年永久存 (한 뿌리 양국 심씨 천년만에 후손 만나 예를 갖추었으니 이후에도 천만년 이렇게 살아갑시다) 내 글을 받은 심석명씨가 다음과 같은 시로 화답했다. 九百年前舊古土 今日後孫訪尋根 脈脈親情濃如酒 沈家事業正靑春 (구백 년 전 오랜 옛터 뿌리 찾아 이제야 후손이 찾았으니 한결같이 친한 정 술과 같이 진하네 심가마다 하는 사업 날로 청청하소서) 이 글을 보자 건창씨가 환호하며 노트를 꺼내들고 내가 쓴 시를 베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시가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훌륭하다고 하며 서예 작품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그가 시를 옮겨 적는 동안 한편에서는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등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6 문중 사당인 승지당(承志堂)에서 예를 올리고 일행은 수백 년 역사를 지켜온 고색 창연한 예술적인 고옥들을 돌아보며 마을 종중이 모시는 사찰까지 둘러보았다.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라 동네 분위기가 모두 절간에 들어온 기분이었고 대웅전 앞에는 향을 묶음째 피워 놓아 향내가 진동했다. 마을 안에는 여기저기 빨간 글씨로 '열렬환영'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우리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고 폭죽을 땅에 매설하는 등 환영 준비를 위해 수고한 많은 종인들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11시 수백 명이 한 줄로 서서 마을을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뽕나무 밭 사이 길을 따라 우리는 목적지인 심근비(沈根碑)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뽕나무밭 한가운데 정남향으로 우뚝 선 심근비는 높이가 칠척(2미터)에 너비가 다섯 자(150센티) 두께가 한 자 반(45센티)이고 두 자 높이의 석조 울이 둘러쳐 있었다. 그리고 비문 정면에는 가로가 10미터에 길이가 30미터쯤 되는 사각 탁석이 깔려 심근비의 위용을 떠받치고 있었다. 기념비를 중심으로 한중 종인이 첩첩이 둘러선 가운데 중국 대표 심석명 씨가 준비한 심근비 건립 경위와 환영사를 하고 한국 대표로는 최연장자이신 심창기 명예회장께서 답사를 했다. 그리고 비의 건립을 위해 수고한 종인들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한 후 심근비 앞에서 한중 대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비에 씌운 천을 끌어내림으로써 제막식은 극치에 이르렀다. 심근비에 씌워진 빨간 천이 벗겨지는 순간 주변에서 또 한 차례 폭죽이 꽝꽝 터지며 지축을 흔들었다. 화약 연기를 일으키며 높이 쏘아 올린 폭죽은 하늘 높이 구름 속에서 화려한 불꽃으로 아름답게 꽃수를 놓으며 퍼졌다. 축포 소리 속에 나는 심근비에 빨간 글씨로 새겨놓은 비문을 읽어보았다. 문구는 이러했다. 韓國 山沈氏尋根門祖 到此吳興竹墩村確認 天下之沈同根一源發祥聖地 受將盛韓中合土之磁器埋藏 於此以證後世 (한국풍산심씨가 조상을 찾아와 이곳 오흥 죽돈촌이 원향임을 확인하고 천하의 심씨가 다 한 뿌리로 이곳이 발성 성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도자기에 흙을 담아 여기에 묻고 이것을 후세에 전한다) 참석자 모두가 불꽃 축제에 환호성과 박수로 기쁨을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사진을 찍고 담소하며 뜻깊은 행사를 축하했다. 桑田吉地沈根碑 韓中一族同席禮 沈氏一門集姓村 千代萬代世世榮 나는 곁에 선 연로한 촌장에게 이런 글을 써서 보여드리고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분은 몇 번씩 허리를 숙여 보이며 답례를 했다. 우리 일행은 길을 재촉하는 안내원을 따라 길가에서 만나는 종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7 우리를 태운 차는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남쪽으로 삼십분쯤 달려 능호진이라는 도시에 당도했다. 넓은 주차장이 있는 대규모 음식점이 있었고 건물 전면에는 빨간 천에 하얀 글씨로, 菱湖鎭迎接大韓民國 山沈氏大宗會尋根訪問團歡迎會라고 쓴 대형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파란 제복의 안내양들이 입구 양편에 서서 웃는 얼굴로 맞았고 이층으로 오르자 거기에는 노란 제복의 아가씨들이 양편으로 서서 접견실로 안내했다. 접견실에는 회의용 타원형 탁자에 참석자의 명패와 과일과 차가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오십여 명의 한중 참석자가 자리를 잡자 지방 행정부 담당자가 나와 능호진의 특산물과 지역 소개, 지역 사업에 관하여 소개하고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인사한 후 식당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 오찬은 호주 정부에서 준비했다는데 네 개의 회전 원탁에는 테이블마다 참석자의 명패가 중국 안내원들과 교차하여 놓여 있었다. 능호진 특산물로 차려진 음식이 나왔다. 산해진미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말이로구나 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다양하고 진귀한 음식이 끝없이 나와 어떤 것은 맛도 볼 수 없었다. 음식중에 거지닭이라는 요리가 있었는데 이름이 이상하여 먹어보았더니 매우 연하고 특이한 맛이 있었다. 오찬이 끝나고 우리는 식당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후 절강성에서 대표적으로 부유하게 산다는 모범 마을로 안내를 받았다. 규모 있게 세워진 건물도 좋고 도로도 말끔하게 정돈된 것이 살기 좋아 보였다. 마을 입구에는 우리를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도로에는 비를 맞으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거기도 심씨가 많이 사는 곳이라고 하였다. 차에서 내려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였으나 찌푸린 날씨에 비가 내려 아무데도 못 가고 종합 안내소에 들러 마을 전체와 인근 지역 조형도를 보는 것으로 관람을 대신하고 말았다. 안내원이 그 지역을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고 유명한 곳이라면서 세상이 생기기 전에 하늘에 달이 여덟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별이 여기 떨어져서…… 어쩌고 진짜처럼 설명하는데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라 전하기도 싫어 적지 않기로 한다. 주택 건물 주변마다 화단이 있었는데 유독 기이한 꽃이 있어 비를 맞으면서도 사람들은 그 꽃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국화빵보다 작고 먼지가 묻어 변색한 것처럼 누르스름한 색깔의 꽃이었는데 날이 좋으면 꽃송이가 하늘을 향하고 비가 오면 꽃송이가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향하는 영리한 꽃이라고 한다. 나는 차에서 내다보았지만 모두들 그 향이 너무 좋다고 찬사를 보냄으로 못내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는 꽃이었다. 일행을 태운 차는 이리저리 마을을 돌아 아침에 왔던 길로 되돌아 달렸다. 나는 거지닭이라는 요리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조선족 안내원에게 물었다. 안내원은 질문을 받자 기꺼이 마이크를 잡더니 질문을 했다. 8 "여러분 거지닭 맛있게 잡수셨습니까?" 아직 음식 이름을 듣지 못한 누군가가 물었다. "거지닭이 뭐지요?" "거지닭을 못 잡수셨군요. 점심에 닭찜이 나왔는데 그걸 못 잡수셨다고요?" "그거요? 먹었지요. 맛이 좋던데, 그게 거지닭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거지닭 맛을 봇 보고 가시면 후회하십니다. 제가 거지닭에 얽힌 전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지닭 전설은 여기 호주 절강성 지방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호주는 동으로 상하이, 남으로 항주, 북으로 소주, 북서로 남경에 이르는 절강성 요지에 위치한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부촌입니다." 그는 차창 밖으로 손짓을 해가며 계속했다. "하늘에는 천국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세상에서 항주를 보지 못하고 죽으면 세상에 살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유명한 곳입니다." 그는 지방 자랑을 한참 하다가 이었다. "청나라 시대 황제가 절강성을 들렀다가 풍요한 대접을 받고 황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 지방을 다녀보았지만 절강성만큼 기름지고 좋은 음식을 내놓는 곳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한번은 미복을 하고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민생을 살피려고 이 지역을 돌아보다가 가지고 온 돈이 떨어져 맨주먹이 되었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돈이 없으면 거지가 되는 것이지요. 배가 고파 어느 마을을 찾아갔더니 한 곳에 거지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닭을 굽고 있더랍니다. 배가 고픈 터라 그 냄새에 혼이 빠졌답니다. 그래서 거지보고 닭고기 한 점만 달라고 구걸을 했답니다. 처음에는 거지가 혼자 먹기도 모자란다고 안 주더라는 거예요. 그러나 가만히 보니 거지인 자기한테 구걸을 하는 거지만도 못한 사람이기는 해도 얼굴이 귀상이라 불쌍히 여겨 고기 한 점을 주었답니다. 배가 몹시 고팠던 왕은 그 닭고기를 받아먹었답니다. 거지가 준 닭고기 맛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일찍이 맛보지 못한 천하 진미더랍니다. 왕은 후에 궁전으로 돌아가 일등 요리사에게 닭고기 요리를 해 올리라고 명하였답니다. 궁중 요리사가 갖은 정성을 다하여 만든 닭고기를 먹어본 왕은 아무리 해도 그때 거지한테 얻어먹던 맛이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왕은 그 거지를 불러들여 궁중 요리사로 만들고 요리를 시켰는데 그때 거지가 만든 닭 요리가 바로 점심에 먹은 거지닭이랍니다."이야기를 듣는 동안 차는 호주시에서 가장 크다는 국제관광호텔에 당도했다. 9. 호텔에는 이미 회전 원탁식탁에 자리마다 명패가 놓여 있었다. 내 자리는 가장 안쪽 주 원탁에 놓여 있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통역을 맡은 안내양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호주시에서 준비하였고 이 자리는 부구장님께서 접견하십니다. 부구장님은 한국의 부시장과 같은 지위에 계신 분입니다." 안내양의 말이 떨어지자 안쪽에서 젊고 밝은 인상의 사십대 여자가 걸어나왔다. 중국에서는 처음 보는 미인의 등장에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했다. 안내양이 바로 통역해 주었다. "한국의 풍산심씨 여러분, 오늘 우리 호주시를 방문하여 주신데 대하여 깊이 감사 드립니다. 오늘밤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술이 가득한 잔을 높이 들고 까베이를 제창했다. 우리 일행은 까페이라는 말만 나오면 따라서 까베이 하고 와글와글 웃었다. 말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웃기도 했지만 오후 2시에 점심을 먹었는데 금방 또 먹는 것이냐고 기가 차서 웃는 웃음이었다. 여자 부구장은 잔을 높이 들고 단숨에 잔을 비우고 좌중 앞에 빈잔을 내밀었다. 잔을 단숨에 마시는 것을 본 좌중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자리는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그녀의 우측에는 명예회장이 앉고 그녀와 나 사이에는 조선족 통역 원은화(元銀花)양이 앉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는데 아주 편리했다. 그리고 바로 왼편에는 조근영(曹根榮)이라는 남심구청 직원(주임)이 있었는데 그가 내 노트를 달라더니 이런 시를 적어 주었다. 雖是兩國人 實爲一家親 相聚三四天 友誼存長遠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실제는 한 가족 일가일세 잠깐(삼사일) 서로 만나지만 우의는 영원하리라) 나는 한자로 좋은 시라고 칭찬해 주고 당신이야말로 나와 성은 다르지만 형제 같은 우의를 느낀다고 한문으로 써서 보여 주었더니 매우 흡족해 하였다. 이때 부구장이 나한테 잔을 내밀었다. 나는 포도주를 잔에 채우고 그녀는 백주를 들고 까뻬이를 했다. 잔을 비워 보여주자 아주 좋아하면서 일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 잔씩을 권하였는데 그녀는 누구하고든 잔을 비웠다. 술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술을 많이 든 그녀는 얼굴이 분홍 화장을 한 듯 홍조를 띠어 처음보다 더 아름다웠다. 통역을 통하여 나에게 호주에 온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산 하나 보이지 않고 광활한 평야만 생각이 나서 이렇게 적어 보여주었다. 日出太陽東地平 日沒夕陽西地平 廣大無邊湖洲城 於湖釣魚肥沃野 (아침 해는 동쪽 지평선에서 뜨고 저녁 지는 해 서쪽 지평선에 내리네. 끝없이 넓은 호주성, 호수에서 고기를 낚고 들판은 비옥하도다) 10 이 말에 부구장은 경이롭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한마디 더 써서 넘겼다. 湖洲美人逢笑話 此機與席得雲龍 中國沈氏深記憶 萬事佑護相和合 今夜厚誼久不忘 醉顔紅潮加美艶 (호주 미인을 만나 담소를 하니 이야말로 용이 구름 만난 기쁨 아닌가. 마음 깊이 중국 심씨 새겼다가 매사에 도움을 주소서. 오늘밤 후의는 오래 잊지 못하리. 취하여 발그레한 얼굴 더욱 요염하구려.) 이 시에 그녀는 즉시 답시를 내놓았다. 天下沈氏一家親 中韓友誼永久深 今日有幸逢先生 才學歷博令人欽 (천하 심씨는 모두가 하나, 중국과 한국의 우의는 영원히 깊어지리. 오늘 운 좋게도 선생을 만나 해박함을 보고 흠모합니다. ) 나는 과분한 칭찬이라고 인사를 하고 그 글을 곁에 있는 조근영 씨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대단한 의미의 답시라면서 흠자를 강조하여 짚어 주고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어 보였다. 전양금 씨는 내 노트를 당겨 태호삼보(太湖三寶;호주에 있는 바다만큼이나 큰 호수)라고 쓰고 은어(銀魚) 백하(白蝦) 백어(白魚)를 적어 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백어라면서 먹어 보기를 권하였다. 그리고 호주는 어미(魚米)의 고장이라는 것도 설명했다. 나는 그의 명함을 보다가 전양금(錢兩琴)이라는 이름이 재미있다고 생각되어 이런 농담을 하였다. 訪中二天珍味宴 湖洲美人錢兩琴 兩琴彈奏與錢夜 旱中甘雨於喜悅 (방중 이틀에 좋은 자리에서 호주 미인 전양금을 만났네. 두 거문고가 전과 밤새 어울리니, 가뭄에 단비보다 즐겁고 기쁘도다) 그녀는 수줍다는 듯 이렇게 적어 넘겼다. 先生誇奬不敢當 (선생의 지나친 칭찬 감당키 어렵습니다.) 나는 천학비재(淺學菲才)하나 한시는 좋아한다 좋아하는 한시 한 수 적어 주시오 하였더니 주저하지 않고 내 노트에다 시 한 수를 적었다. 靜夜思 (李白-唐朝) 床前明月光 疑是地上霜 擧頭望明月 低頭思故鄕 (평상에 비친 달빛, 서리인가 의심스러, 고개 들어 밝은 달 보니 고향 생각 젖어드네) 우리가 글로 주고받는 대화를 지켜보던 조영근이 이런 글을 노트에다 적었다. 11 조영근 씨는 나를 당황하게 하는 문구를 넘겼다. 遇中文古詩文高手, 難得! 是! 硏究中國詩詞的專家 (이 말은 내가 중국 한고시에 조예가 깊은 실력자로 잘못 알고 추켜세운 것으로 중국 시를 더 깊이 공부하여 대가가 되라는 권고) *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 설명에는 내가 중국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다소 오류가 있을 것임. 이때 전양금 부구장이 이런 글을 내게 넘겼다 明天我送 一本 '漢詩三百首' 可? 贈敬 (내일 당신에게 책 [당시삼백수] 한 권 드리고 싶은데 좋습니까?) 나는 기뻐서 내 기분대로 快快歡歡이라고 써 주었다. 그녀는 통역을 시켜 내일 직원 편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흥취 도도한 좌중을 한 바퀴 돌았다. 가는 곳마다 술을 권하는 사람들이 당신 최고라는 제스처를 해가며 술을 권하였다. 그녀는 사양하는 일 없이 잔을 받으며 흥을 돋구어 주었다. 그녀가 내 곁으로 돌아왔을 때는 얼굴이 복숭아꽃이었다. 나한테 마지막 잔을 권하며 오늘밤은 이렇게 끝내자고 했다. 내가 작별 인사를 썼다. 今夕相會 歡喜寸刻 (오늘 밤 우리 만남은 너무 짧고 즐거웠소) 그녀도 간단히 대답했다. 告別一杯 留情萬歲 (이별주 한 잔에 깊은 정을 남기네) 대강 이런 풀이가 될 말을 남기고 만찬회의장에서 헤어졌다.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차에 올라 호주시내를 구경하고 우리 선조 만승(滿升) 할아버지가 족보에 기록하신 아름다운 고장 오흥(吳興)으로 향했다. 12 호주 시내를 빠져 교외로 나가는데 한 시간 이상 결렸다. 차가 제 속도를 못 내고 엉금엉금 기어가고 그 사이를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뒤엉켜 차도가 인인도인지 정신이 없고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는데도 거기는 비워 두고 자동차 도로로 달린다. 모터 자전거가 엔진을 끄고 발로 페달을 밟을 수 있도록 만든 양용 자전거가 이색적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반은 넘었다. 그런 자전거는 우리나라에도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왜 안 만드는 것일까? 신호등도 있으나마나다. 좌회전 신호에 직진하는 차, 우회전하는 차, 신호등이 왜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교통신호를 사람들이 지키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 것도 이상할 정도이고 화내는 사람이 없어 신기했다. 자동차 경적 소리도 없었다. 일터로 나가는 씩씩한 남녀 일꾼들의 행렬이 살아있는 도시라는 인상을 줄 뿐 다른 것은 배울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나중에 중국 안내원이 호주시의 인상을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人道車道 交叉亂麻 信號燈立 有耶無耶 奔走市民 無故活氣 巨動中國 起寢如虎 (차도고 인도고 엉망진창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활기찬 시민 사고 없이 바쁘게 잘 살고 크게 움직이는 중국 잠깬 범과 같다) 이렇게 써 주니 그는 기가 살아 좋아했다. 구경하라고 안내하는 곳은 거의가 고 사찰이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 문 앞에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만 했다. 몇 개의 절을 구경시켜주고 오흥구 청사 내의 초상국(招商局)으로 안내 받았다. 그곳 역시 우리를 환영한다는 플래카드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심지영(沈志榮)이라는 사람이 초상국장으로 있었다. 그는 같은 자손이 만났다는 기쁨의 인사를 하고 오흥의 산업과 미래 바전상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가 설명하는 내용을 적어 두리라 생각하고 주머니 속에 있을 수첩을 찾았다. 그런데 주머니를 다 뒤져도 수첩이 나오지 않았다. 수첩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동안 일들을 기록한 메모장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급히 안내원에게 아침 식사를 한 호텔에 연락하여 수첩을 습득했으면 찾아달라라고 부탁했다. 환영 겸 설명회를 마치고 나오자 아무데서도 수첩은 찾을 수 없다고 했다는 대담이었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한테는 중요한 물건이다. 내가 끄적거려 놓은 문구며 전양금이 써준 화답시와 한시 등이 없어진 것이다. 순간 황금 덩어리라도 잃어버린 듯한 허탈감이 가슴에 큰 구멍을 내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13 우리 일행은 스케줄에 따라 오흥 청사를 돌아보고 그들이 가장 자랑하는 비영탑(飛英塔)을 찾았다. 탑은 어림짐작으로 십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탑 안쪽으로는 넓은 호수, 호수에는 탑 그림자가 평화롭게 드리워졌고 탑 뜰에는 80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느릿느릿 팔다리를 꼬고 접으면서 요가를 하고 있었다. 무협영화에서나 봄직한 장면에 '이것이 중국의 면모로구나' 하는 감회를 안고 탑 아래쪽에 난 문으로 앞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탑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 안에는 거대한 석재 칠층탑이 우뚝 서 있었다. 석조 칠층석탑은 귀가 여기저기 떨어진 채 콘크리트 껍데기 보호 탑의 도움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외탑(外塔) 축성은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비영탑 안쪽 연못 맞은편에는 수면에 둥실 뜬 듯한 비룡당(飛龍堂)이 그림처럼 고풍의 품위를 갖추고 서 있고 그리로 가는 길가에는 소잔등 우모보다 고운 잔디가 봄맞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곳에 공중화장실이 있어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소변보는 곳과 큰일 보는 곳이 같이 있었는데 큰일 보는 사람이 문짝도 가리개도 없이 뻥 뚫린 구멍 위에 쭈그리고 앉아 태연히 끙끙거리고 있었다. 민망해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일을 보고 나와 잔디밭 길을 걸어가는데 젊은이 둘이 촬영 카메라를 메고 다가왔다. 통역하는 사람이 말했다. "방송국에서 취재하러 나왔답니다. 인터뷰할 분을 찾고 있는데 누구 안 계십니까?"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벗어나려고 옆으로 물러섰다. 이유는 내 차림이 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중국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온 적이 있는 딸이 중국은 여기서처럼 양복에 넥타이를 매면 안 된다면서 평소에 입지 않던 헌 옷가지를 입고 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거기는 아직도 춥고 눈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선배 말을 들어야겠지?" 하고 농담을 하면서 평소에 집에서도 안 입는 오리털 잠바에다 허름하고 두꺼운 누런 스웨터에 적당히 입는 와이셔츠에 바지도 통바지 차림이었다. 그러나 비행장에 나왔을 때 나만 그런 차림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정장을 하고 있었다. 이런 꼴로 어떻게 텔레비전 앞에 서겠는가. 그래서 피했던 것이다. 내가 곁으로 피하자 인천 현창 씨가 멋진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능숙하게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마치자 심석명 씨가 나를 가리키며 방송기자와 무어라고 주고받더니 카메라맨이 나를 따라왔다. 통역자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호주에 오신 소감을 시로 써 주셨으면 좋겠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이 카메라 앵글이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차림새가 우리가 말하는 중국 사람 차림보다 더 중국 사람 같은 모습으로 카메라에 찍히고 있었다. 참 부끄러웠다. 방송기자가 백지 한 장을 주면서 한 수 쓰라는데 갑자기 생각은 나지 않고 잃어버린 수첩이 더 아쉬워졌다. 거기에는 첫 소감이 씌어 있고 전양금씨와 주고받은 시도 있지 않은가.
14 나는 수첩을 잃어버렸고 썼던 것마저 잊어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취재를 사양했다. 호주방송국 티브이 국제부 편집부 변굉량(卞宏梁)이라는 기자는 시간을 줄 터이니 느긋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그 순간 죽돈촌에서 서예가 심건창 씨를 만났을 때 그가 시 하나를 베껴간 것이 생각났다. "죽돈촌에 전화를 하면 심건창 씨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 하나를 카피해 놓은 것이 있으니 전화를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는 곧 심건창 씨에게 핸드폰을 걸었다. 좋은 대답이 나왔다. 지금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붓으로 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주 잘되었습니다. 오늘 그 작품이 다 되면 방송국으로 가져오기로 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 우스운 옷차림으로 카메라에 찍혔고 일이 이상하게 되어 심건창 씨가 텔레비전에 글씨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전화위복이라는 것이 이런 게 아닌가 생각하고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변기자는 떠나면서 인사했다. "즐겁게 관광하고 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관광하시는 모습이 티브이에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어제 묵었던 호텔로 갔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가 수첩을 찾아보았다. 종업원들도 전화를 받고 이미 찾아보았지만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잠시 실망. 언뜻 내가 투숙했던 방으로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투숙했던 2층으로 올라가 안내실로 갔다. 잠깐이지만 얼굴을 익혔던 여자 종업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말은 통하지 않고, 글씨가 말이니 종이에다 혹시 여기서 수첩 보지 못했느냐고 적어 보였다. 통통하고 귀엽게 생긴 아가씨가 활짝 웃으면서 간직하고 있던 것을 꺼내어 내놓았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주인을 기다렸다고 하는 듯 저희들끼리 깔깔거렸다. 나는 그것을 되돌려 받으면서 얼마나 고마운지 아가씨들한테 사례를 하려 했다. 그러나 절대 사양. 끝내 감사 표시는 못 하고 하루만에 배운 감사의 말만 하고 돌아섰다. "셰셰 셰셰 셰셰" 그렇게 하여 수첩을 찾음으로 이렇게 긴 기행문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못 찾았더라면 나는 중국에 마음을 두고 와 지금까지 우울했을 것이다. 나는 황금덩어리라도 얻은 기분이 되어 기분 좋게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남심(南 )이라는 도시로 안내를 받았다. 15 차가 남심을 향해 가는 길목은 우리나라처럼 길가에 공장과 물류창고가 대형으로 세워지고 있었다. 조선족 안내원 함성권 씨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기 절강성 호주는 실크로드의 발원지이기도 하지만 양잠업이 성한 지방입니다. 어제 잠사 생산공장을 둘러보셨지만 여기는 양잠업이 성하여 예부터 실크 생산량이 세계적으로 가장 많고 질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그는 조선족으로 우리나라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중국의 산업을 광고하고 있었다. "한국 속담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 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 이야기가 어떻게 하여 생겼는지 아십니까?" 나도 몰랐지만 다른 사람도 모르는 듯했다. 안내원은 특유의 억양을 구사했는데 귀에 거슬리지 않고 아주 듣기에 좋았다. 그도 그렇지만 여자 통역 조선족 아가씨도 서울말에 가까운 부드러운 말씨가 친밀감을 주어 좋았다. 남자 안내원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 이야기입니다. 당시 중국 전토의 젊은이들은 모두 축성 부역을 나갔습니다. 어느 고을에서 결혼하고 단꿈도 채 깨기 전에 남편이 부역에 끌려가고 혼자 남은 새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새댁만 혼자 남아 사는 집을 찾아들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젊은 아가씨가 친절하게 맞아 주어 거기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답니다." 그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짓궂게 웃어 보이며 물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뻔한 얘기 아닙니까. 예쁜 아가씨에게 반한 나그네는 그 날 밤 그 여자와 달콤한 밤을 보냈습니다. 하루 밤 깊은 정을 나눈 나그네는 다음날 아침에 그 여자로부터 그녀가 남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남편이 결혼하고 바로 만리장성 공사장에 나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창 밖을 내다보며 사이를 두었다가 이었다. "나그네는 그녀가 처녀인 줄 알았다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고 여자에게 사과한 다음 그 남편이 어디서 부역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길을 떠났답니다. 그리고 축성하는 곳으로 가 그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자기가 대신 일생 동안 부역을 했다 합니다. 그래서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재미있습니까?" 그 순간 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을 생각했다. 그에 비추어 볼 때 중국인의 의협담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살인도 하는 내연 남자가 있다는데 자기 죄를 뉘우치고 남편을 위해 힘든 노동 현장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16 호주시는 중국 동부의 최대 교통 요새이며 부유한 지방이다. 엄청나게 큰 호수를 끼고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항주(杭州)를 곁에 두고 관광명소 소주(蘇州)에 근접해 있으니 중국의 전설이 숨쉬는 역사의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는 것을 귀국해서야 알았다. 남심(南 )이라는 곳에는 역대 중국의 대부호들이 대저택을 짓고 영화를 누리던 고장으로 100년 이상 고택들이 보존되어 있어서 지금은 관광 명소로 구경꾼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중국은 넓은 들판에 물을 대고 물류 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운하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 안내원이 중국에서 가장 큰 운하라고 하면서 수양제가 고려와 싸울 때 군량미를 운반하기 위하여 수로를 건설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수양버들이라는 이름도 수양제가 이 운하를 유람하다가 늘어진 버드나무가 아름다워서 '나무 이름이 무엇이냐' 하자 '아직 이름이 없다'고 하자 내 이름을 따라 수양으로 하라 하여 수양버들이 되었다는 전설을 들려주며 주마간산으로 명승지를 자동차로 둘러 보여주었다. 돌아다니며 관광한 중에 보고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백년 전 중국부호들이 몰려 살았다는 궁궐 같은 고택들은 둘러볼 만한 곳이었다. 장(張)씨와 고(顧)씨와 유(劉)씨가 살았다는 고택은 모두가 백 칸이 넘는 저택으로 장씨가 살았다는 집 하나만 예로 든다면 건축은 1890년대이고 정원이나 호수 등은 별도로 하고 고택의 대지만도 4792㎡(160평)에 건평이 6137㎡(205평)이다. 세 고택을 둘러보다가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큰 호수를 사이에 두고 각기 그 세력을 겨루기라도 하듯 집을 웅장하게 지었는데 어느 집이든 집안에 호수가 있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어떤 부자는 호수에 고기를 키우면서 가장 사랑하는 애첩과 여름이면 나체로 물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면서 여자가 물고기를 잡으면 즉석 요리를 해 먹으면서 사랑을 즐겼다는 못도 있고 어느 곳에는 길이 200여 미터, 너비가 50미터는 될 법한 호수가 있고 물가에 배가 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나룻배에 오리처럼 생긴 새들이 오그르르 서서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중국 조근영 주임에게 글씨로 저 물새들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속어로 목어(木魚)라 하는데 조어( 魚)라고 필답했다. 그래서 내 맘대로 득어조(得魚鳥)? 조어조(釣魚鳥)? 했더니 웃으면서 *자(* )라고 컴에도 옥편에도 없는 글자를 써 주었다. 한참 동안 필답을 하다가 깨달은 것은 그 가금(家禽)은 고기 잡는 가마우지라는 새로 물가에 서 물 속을 지켜보다가 물고기가 나타나면 날쌔게 고기를 낚아챈다. 그러면 사람이 고기를 빼앗는단다. 주인이 새의 목을 졸라매어 새가 물고기를 못 먹게 해 놓았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 고기 잡아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지만 가혹한 방법에 희생당하는 새들이 불쌍해 보였다. 고씨 고택에 들어서자 이런 문구가 첫눈에 들어왔다. 17 고건린 선생 처세격언이라는 것이었다. 顧乾麟先生處世格言 得諸社會 還諸社會 (사회에서 얻은 모든 것을 모두 사회로 되돌려라) 以孝事業(효심으로 사업을 하고) 以誠待人(정성으로 사람을 대하며) 以信爲本(신의를 본으로 하여) 以忍處世(인내로써 세상을 살라) 또 한 곳에는 방씨(方氏) 장서루(藏書樓)라는 큰 개인 도서관(?)이 있었는데 매우 인상에 남는 곳이었다.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 건물의 창살과 뜰을 돌아가며 세운 쇠 난간이 모두 가업장서루(嘉業藏書樓)라는 글자를 창살로 만들어 설치한 것이었다. 쇠를 깎아 무늬로 사용한 문자 디자인은 놀라운 솜씨였다. 고택들은 손님 접대실, 안주인 거실, 바깥주인 거실, 하인 거처 등이 거의 비슷하게 웅대하게 지어져 있고 컴컴하고 음울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귀신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어 어디고 혼자 머물러 있고 싶은 곳이 없었다. 어느 고택인가에 양팔이 없는 족화가(足畵家)가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화가의 얼굴이 얼마나 곱고 밝던지 중국 돈 25원에 세 개를 사서 조선생 하나, 전양금 씨 하나, 나 하나씩 나누어 갖기로 하고 샀다. 고택 관람 마지막으로 부부나무를 보았다. 3층 높이에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였다. 나무를 결혼시켰다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그런 나무를 집안에 두고 산다는 것이 타인에게 위화감을 준다 하여 나무 높이만큼 높은 담을 쌓아 올려 밖에서는 나무를 보지 못하게 가두어 놓은 것도 흥미 있는 볼거리였다. * 별나고 이상한 것들이 많았지만 이미 아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없는 이야기겠기에 그만 줄이기로 한다. 둘러보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조영근 주임이 가방을 열고 오동나무 꽃 색의 예쁘게 포장한 물건을 내놓으면서 말했다.(글씨를 써 보임) 18 "전양금 부구장님이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셰셰(謝謝)" "지난밤에 약속하신 漢詩집입니다." "헌셰.( 謝)" 나는 전양금 씨가 보내준 책이 너무 고마워서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보니 내가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정성 들여 아름답게 포장한 책 선물은 처음 받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풀었다. 46배판 양장 원색의 [唐詩 三百首]였다. 국내에서 보지 못한 귀한 책으로 CD까지 부록으로 있어서 중국의 출판 흐름을 짐작하게 하였다. 첫 장을 열었다. * 첫장에 올려 있는 작품은 [야망]이라는 시로 백이 숙제를 회상하며 쓴 시. 감상할 만한 가지가 있는 것이었다. 그 시는 이 글의 맨 마지막에 원문과 함께 내가 아는 대로 해설을 붙여 함께감상해 보도록 하겠음. 오후 4시 30분 우리는 남심구에서 접대하는 만찬 연회장으로 안내 받았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큰 건물 4층이었다. 원탁 회전 식탁에는 참석자의 명패가 배석되어있었고 상석 테이블 상단 중앙에는 환영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시내 관광할 때도 내 곁에만 있던 조근영 주임이 식당에서도 내 곁에 앉았다. 환영문구가 다른 곳과 달리 시적이어서 좋았다. 脈脈親情 濃似美酒 中韓友誼 萬代千秋 맥맥히 이어온 그리운 정 좋은 술맛처럼 진하고 중국과 한국의 우정 천년만년 이어가세 나는 조주임이게 환영사 문구가 시적이고 좋은데 누구의 작품이냐고 써서 물었다. 그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공보실 조주임이라고 자기를 가리켰다. 역시 그는 문장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대단한 문구라고 칭찬하자 '不當! 請指敎'라고 적어 내밀었다. 19 내 곁에는 통역 아가씨가 있고 그 곁에 호주시 남심구위회 서기주임 호청청(胡菁菁)이라는 몸집 좋고 느긋하게 보이는 여장부가 앉았고 그 곁에는 우리 일행의 최고령 심창기 명예회장, 그 곁에 政協湖州市委員會 沈榮林 主席이 앉았다. 심영림 주석이 호주시에서는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나는 여자 서기(중국서는 당서기가 대단한 지위임) 胡菁菁 씨가 술 마시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여걸다워서 농담 한 마디 하겠다며 이렇게 몇 자 써서 넘겼다. 胡豪傑女丈夫 菁菁氣恒高稟 菁氣槪萬里香 호 : 믿음직한 호걸 여장부 청 : 부추 빛 높은 품위 청 : 젊은 기개 만리 향 자기 이름으로 글을 주니 즉석에서 웃으며 답시를 썼다. 中韓友誼長 沈姓天地魂 眞情人間留 昌盛萬史垣 중국과 한국의 깊은 우정 천지가 심씨 혼일세 사람은 깊은 정을 남기고 번창한 가문은 역사에 길이 남으리 나는 그 자리가 중국 관리 일행과 마지막 자리라는 것을 느끼고 좌석에 있는 그들에게 기념사 한 마디씩 남겨줄 것을 요청하고 노트를 돌렸다. 脈脈親情濃似美酒 中韓友誼萬代千秋 天下沈氏是一家 맥맥히 이어온 정 맛좋은 술처럼 진하고 중국과 한국의 우정 천년만년 이어가리 천하 심씨는 모두가 일가일세 중국/절강성/남심구인민정부 周建明 또 다른 사람의 글 中韓友誼源遠長 竹墩沈氏遍天下 同根同宗共發展 望來竹墩常看看 중국과 한국의 우정은 길고도 깊도다 축돈촌 심씨 천하에 편만하고 한 뿌리 한 후손 다함께 발전하여 죽돈을 언제나 찾아주기 바랍니다 중공/호주시/남심구/능호진위원회 閔建國 常回家看看 常回家走走 언제고 찾아와 만나 봅시다 언제나 돌아와 함께 뜁시다 沈榮林 故鄕永遠居于 們, 友誼 萬古長靑 고향은 영원히 살아갈 곳 당신들 우의는 만고에 푸르리라 중공/호주시/남심구위 卞利强 상무부구장 우리를 안내하고 도와준 중국 정부직원들은 錢寶榮 曹根榮 金玲玉 戴益民 閔建國 朱國良 張根榮 凌菌芳 沈石銘 元銀花 등 10명이었다. 만찬이 끝날 무렵 내가 조근영 주임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일천한 한문 실력으로 무례했다는 말을 했다. (我們不學漢字於學校, 故我獨自學漢文, 以淺學菲才 們前非禮) 그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是長者老師! 見識 榮幸 (당신은 훌륭한 선생이다. 당신은 매우 영화롭고 행복해 보인다.) * 과분한 답글을 받으니 미안하고 몇 자 아는 한자 가지고 잔재주를 부린 것이 더 부끄러웠다. 진심으로 고백하지만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실력으로 대화가 안 되는 안타까움을 벗어나고자 한자를 무례하게 응용한 점은 여러분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20 6시에 만찬을 끝내고 우리는 중국 정부 파견 직원들과 이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만 이틀 동안 함께 했지만 아주 오랜 친구가 된 듯 헤어지기가 섭섭했다. 공식 환영잔치는 여기서 끝났다. 이별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다음 휴식지 소주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저녁 8시 소주시(蘇州市)에 도착하여 호텔에 짐을 부려놓고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중국까지 와서 족욕(足浴;발 마사지) 한번 못하고 가면 왔다 간 보람이 없다고 모두가 가잔다. 그런 곳이 서울에도 있다는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족욕탕이라는 곳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 정도의 것이라면 대야에 빙초산 한 방울 떨어뜨리고 30분쯤 발을 담갔다가 씻어내는 편이 더 상쾌하다. 발을 남이 씻겨주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 것이랄까. 족욕실은 한번에 30명이 들어가는 방이었다. 비스듬히 누인 의자에 기대앉으면 아가씨들이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들어와 발을 씻겨주는 것이었다. 아가씨들은 남자 손님을 맡고 총각들은 여자 손님의 발을 씻겨주었다. 아가씨들 가운데는 예쁜 얼굴도 있었는데 나를 맡은 아가씨는 그들 가운데 가장 키가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한족이었다. 대야를 들고 낑낑거리고 오더니 땀을 뻘뻘 흘렸다. 내 발을 씻겨 달라기보다는 내가 그녀를 안마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앉았다 가라고 했더니 안 된단다. 한국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몰라도 우리말을 엉터리로 조금씩 하면서 우리가 하는 말은 거의 다 알아들었다. 바로 내 옆에는 50대 후반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은 총각이 발을 씻겨주었다. 그 중국 총각은 아주 귀엽고 능청스러웠다. 부인의 하얀 다리를 쓸어 올리고 주무르면서 지껄였다. "아가씨, 살 곱다." "나 아가씨 아니야." "젊은 아가씨다." 부인은 그 말에 기분이 좋았던지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기 와서 젊다는 말 들으니 싫지는 않네." 이때 내 발을 주무르던 아가씨가 그 총각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 "바람둥이 자식 지랄하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바람둥이가 뭔데?" "저 놈은 여자만 보면 바람둥이 짓 해요. 바람둥이." 총각은 들은 체도 않고 자기 일에만 열심히 하면서 또 지껄였다. "아가씨 예쁘다. 시원하니?" "나 너 같은 아들이 있는 아줌마야.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줌마가 아가씨 이름이냐?" "이런 멍텅구리." "멍텅 구우리?" 이때 내 담당 아가씨가 또 쏘아붙였다. 21 "자꾸 지랄하네. 바람둥이." 부인은 귀엽게 생긴 총각이 발을 시원하게 안마해 주자 기분이 아주 좋아진 듯 2천 원을 꺼내어 주었다. 그러나 총각은 받지 않았다. "이거 안 받는다." "작아서 그러니?" 부인이 돈을 찔러 넣어주자 받아들인 총각 기분이 좋아져서 더 열심이었다. "아가씨, 결혼했니?" "별꼴이야, 나 아줌마야." "예쁘다. 발 예쁘다." 내 담당 아가씨는 내 발 마사지에는 관심도 없고 그 총각만 쏘아보며 삐죽거렸다 "바람둥이 지랄한다." 부인도 따라서 한 마디 했다. "정말 지랄이야." "지랄이 뭐냐?" "이게 꼭꼭 반말짓거리란 말야." "아가씨 발 예쁘다." 부인 혼잣말로 지껄였다. "지랄한다는 말 들어도 싸군." "지랄이 뭐냐?" "지랄도 모르냐?" 저쪽에서 듣고 있던 그 옆 사람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며 한 마디 했다. "이게 지랄이다." 그 총각은 따라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복창했다. "지랄! 지랄! 아저씨 지랄!" 곁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눈을 돌려 오른쪽에 중국 사람 발을 주무르는 아가씨를 보았다. 그 순간 아가씨의 눈길과 마주쳤다. 예쁜 얼굴이었다. 그녀는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다. 나는 뚱뚱하고 무뚝뚝하게 생긴 내 담당 아가씨를 보았다. 그 아가씨는 옆 총각에게 바람둥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 발은 적당히 주물럭거렸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곁에서 수줍게 웃으며 눈길을 주는 아가씨한테 빠졌다. 왼쪽의 총각 녀석은 여자 손님 발을 주무르면서 '지랄지랄' 하고 중얼거리다가 우리말 가운데 몇 마디 아는 '발 예쁘다'를 합쳐서 웃겼다. "지랄, 발 예쁘다 지랄. 발 예쁘다 지랄." 옆의 예쁜 아가씨를 가리키며 뚱뚱이 아가씨한테 물었다. "저 아가씨는 몇 살인가?" "손가락으로 스물 하나를 가리켰다." "스물 하나?" 그녀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니는?" "스물 여섯을 손으로 꼽아 보였다." "스물 여섯?" "나이가 가장 많아. 나." "이 안에서?" 고개 끄덕. "한국 대통령 이름 아나?" "모른다." "한국 사람 중에 아는 사람 있나?" "빈, 손지창, 욘사마……" 나도 모르는 가수 배우 이름을 줄줄이 댔다. 대통령은 몰라도 연예인 이름은 많이 알고 있는 데 놀랐다. "한국 사람하고 일본 사람하고 누가 좋은가?" "한국." "중국 사람과 한국 사람 중엔 누가 좋은가?" "한국 사람. 중국 사람 싫다." 이때 옆 총각이 큰 소리로 목청을 올렸다. "대∼한 민국!" 그는 손뼉을 짝짝 짝짝짝 치면서 또 대∼한민국. 그러는 사이 한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나왔다. 22 길이 막히는 것은 한국이나 상해나 마찬가지. 우리는 비행장 도착 시간을 넉넉히 잡고 소주에서 1시 반에 떠났다. 안 막히면 한 시간 반, 막히면 2시간으로 잡았는데 길이 얼마나 막혔던지 비행장을 4킬로 앞두고 1시간이 걸렸다. 5시까지도 못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초조함으로 모두가 가슴을 태웠다. 다행히 5시 출발을 앞둔 4시 20분에 비행장에 도착했다. 짐 부치고 출국 절차 밟자면 40분은 너무 짧았다. 출국장에는 우리 외에도 아직 못 들어간 사람들이 앞에 서서 길을 막았다. 비행기 뜰 시간이 임박하니 사람들은 긴장하여 더 바쁘게 서둘러댔다. 우리를 끝까지 따라온 호주 심석명(沈石銘;고위 간부) 선생이 염려스럽게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에 쫓기는 가족들을 보면서 염려하는 빛이 역력했다. 일행은 모두 제 정신이 아닌 듯 우왕좌왕. 나는 그분 가까이 다가가 종이에다 그 동안 고마웠다는 말과 고별 인사말을 썼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라고 했다. 그분도 다시 호주로 돌아가자면 3시간 이상이 걸린다. 우리를 보내놓고 혼자 돌아갈 길은 얼마나 멀고 쓸쓸할까. 위로의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은 안 통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안타까웠다. 그래서, "爾 過勞!" 하고 급히 적었더니 받아서 대답했다. " 高興!" (아주 좋습니다.) 하고 웃어 보이는데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이별의 아픈 그림자가 그의 얼굴과 내 얼굴에 눈물처럼 어렸다. 우리는 정이 가득한 손을 마주잡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의 눈빛에 마음을 묻고 돌아서서 출구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빠져나가고 내가 가장 뒤에 처져 있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출국 검사장을 통과하여 돌아보지도 못하고 달려가 비행기에 올랐다. 380명 좌석이 만석인데 맨 마지막으로 올라 맨 뒷좌석으로 가는 나를 모두 바라보아 여간 민망스럽지 않았다. 비행기는 우리를 기다렸던지 시간이 약간 지나서야 대지의 나라 중국을 힘차게 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비행기가 고도를 잡자 조용히 전양금 씨가 준 [당시삼백수]를 펼쳤다. 불과 3시간도 못 사귄 사이지만 한 권의 책으로 이렇게 마음을 건네 받을 수 있다니 이번 방문여행은 즐거운 추억으로 그녀와 함께 오래 남을 것이다. 첫 장에 실린 한 수는 이런 시였다. 23. 東皐薄暮望 徙倚欲何依 樹樹皆秋色 山山唯落暉 牧人驅犢反 작馬帶禽歸 相顧無相識 長歌 采薇 -王績- 지음 (컴퓨터에는 '작'자와 '환'자가 없음) 황혼에 동쪽 언덕에 올라보니 어둠이 내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몸 의지할 곳 없는 신세 나무는 가지마다 가을빛에 물들었고 산들은 빛을 잃고 어둠에 묻혀 가네 목부(牧夫)는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고 몰이 개는 말 오리를 몰고 돌아오는데 대면하여 바라봐도 아는 얼굴 하나 없어 서둘러 고비 뜯으며 슬픈 노래 부르네. 내 나름으로 풀어서 미진한 구석이 있으리라 생각되나 이 시의 배경사가 가슴 아파서 몇 자 적고 싶어졌다.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69의 열전 가운데 첫 번째 伯夷列傳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오늘날 하북성의 후(侯) 고죽(孤竹)의 자식들로 형제는 의가 매우 좋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 아들 숙제를 후사로 삼겠다고 늘 말해 오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자 숙제가 형님에게 '동생이 후가 된다는 것은 예에 어긋납니다. 형님이 맡으셔야 합니다' 했다. 그러나 형 백이는 '아버지의 유적에 위배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극구 사양하다가 자기가 거기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평소에 존경하던 서백(西伯 ; 周의 文王)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한편 아우 숙제도 형처럼 자기가 없으면 형이 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길을 떠나 주나라로 갔다. 그리하여 후(侯)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었고 형제는 문왕을 그리며 찾아갔지만 이미 문왕은 죽고 그 아들이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칭하고 전쟁을 일삼고 있었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주왕(紂王)을 치려고 자기 아버지 문왕의 위패를 수레에 모시고 가는 것을 본 형제는 무왕의 길을 막고 '부왕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는데 그 제사도 지내지 않고 전장으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일렀다. 그러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형제는 그런 부끄러운 왕의 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 하여 그 땅에서 나는 조 한 톨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멀리 떨어진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은둔하며 고비(薇)를 뜯어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 * 이 시에 얽힌 사연을 생각하며 당시 삼백수의 첫 장을 덮고 훗날 마음에 울려오는 시가 보이면 함께 감상할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조상의 뿌리를 찾아 절강성 한 모퉁이를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보고 장님 코끼리 다리 하나 만진 지식으로 어울리지 않게 자랑을 크게 늘어놓아 부끄럽기도 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곽용남 선생님, 강현종 선생님, 금반석님, 파도님, 비전 목사님, 솔뫼님, 석두님, 작은풀꽃님, 그리고 이따금씩 들여다보신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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