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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20
남산으로 흰 사슴을 매어둔 시루(時樓)를 찾아
글: 조장빈(한국산서회), 사진: 임영수(한국산서회)
올해 인문산행 대상지로 서울을 둘러싼 북한산, 백악, 인왕산, 낙산의 문화유산을 찾았고 마지막 산행으로 남산을 정했다. 남산은 오랫동안 서울 시민들이 여가생활을 즐기던 곳이다. 북쪽 산자락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산정에는 팔각정이 자리하고 남산타워가 높게 서있다. 사방으로 탁 트인 경관에 마음이 상쾌해지고 산아래 이곳저곳을 눈으로 짚어보면서 그곳에 얽힌 추억을 떠올린다.
조선시대 남산은 능선을 따라 한양도성이 축성되었고 봉수대가 설치되었으며 산정에는 목멱대왕을 모신 국사당이 있었다. 산을 보호하고자 산지기를 두어 벌목과 채석을 못하게 하고 소나무를 심고 가꾸어 숲이 우거진 경관을 갖추었다. 그 자락으로 목릉성세(穆陵盛世)’를 대표하는 시인인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비파정(琵琶亭)과 시단터 그리고 영조의 탕평책을 따른 소론계 문신인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귀록정(歸鹿亭)터를 찾아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에 오른 후 숭례문으로 내릴 예정이다.
작년 5월 인문산행에서 도봉산 해등촌(海等村, 방학동)으로 두 분의 별서(別墅)터를 둘러보았고 남산에서 다시 만나게 된 셈인데, 누정은 선비들의 수양과 독서의 공간이자 벗들과 함께 즐긴 사교와 문학의 장으로 누정의 현판은 주인의 인생과 세계관이 담겨 있다. 시를 노래하고 신선이 되고자 했던 두 선비가 거닐던 비파정과 귀록정은 이미 바위글씨마저 깨어져 없고 그나마 남아있는, 자획도 희미한 바위글씨는 남의 집 마당 한 켠의 바위벽에 있어 그 조차도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곳곳에 남아 있는 아픈 근대의 흔적
태극당 제과점 앞으로 자투리 땅인 남소영(南小營) 광장에 초겨울의 햇살이 의외로 따사롭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라는 태극당은 이름만 들어봤을 뿐, 노량진 달동네에 살던 촌놈이 태극당 ‘모나카’나 ‘카스테라’를 먹어봤을 리가 없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 모인 참여자들과 육각정 앞에 모여 인사를 나누고 류백현 강사의 안내에 따라 길을 나섰다.
장충단(奬忠壇)은 5군영의 하나로 왕을 호위하고 도성을 지키던 어영청(御營廳) 관할의 파견부대인 남소영이 있던 곳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을미사변·임오군란으로 순국한 충신·열사를 제사지내던 제단이 건립되면서 장충단이라 불리웠다. 봄가을로 제향을 지냈는데, 지금의 신라호텔 자락에 자락에 제각과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1910년 일제는 이를 폐하고 한일병합을 강요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세웠고 절의 정문으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옮겨다 썼다고 한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는 남산 북쪽으로 일인 거주지가 형성되고 산자락으로 왜성대공원을 시작으로 도성 안쪽을 모두 공원화 하였고 이후 일본 신사와 신궁으로 변화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서울의 근대 도시화를 식민지 체제로 운영하고자 한 그 중심에 남산이 있었고 그 치욕의 흔적이 아직도 산자락 곳곳에 남아있다.
순종의 친필인 “奬忠壇” 비를 보고 제자리를 잃고 선 수표교(水標橋) 위를 ‘다리밟기’하며 그 아래로 내려섰다. 잎을 거의 떨군 개울가의 미루나무는 지난 봄을 그리워하는듯 한두방울 떨어지는 눈송이를 피하려 흐느적거린다. 봄에 이 개울가에 싹튼 버들강아지 순도 제법 굵어졌다. 우리나라의 냇가나 우물가, 마을 어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쓰임새도 많은 버드나무는 예로부터 건강과 충만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나무로 믿었다는 류백현 강사의 말을 흘려 들으며, 다리 주변으로 수표를 찾다가 문득 청량리 홍릉수목원 가는 길에 세종대왕기념관에서 본 기억이 떠오른다. 다리 중간에 ‘丁亥改造’(정해개조)라 개축한 해를 새겨놓았다.
일대를 한바퀴 돌아 내리다 이준 열사 동상에 참배하고 길을 내리는데 작은 석호정 표석이 보인다. 1894년 갑오 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황학정과 함께 국궁의 대표적인 활터였던 석호정이 이곳에 있었나 보다.
청학이 노닐던 동천(洞天)의 선비들
이어서 동국대학교 교정으로 들어섰다. 찾고자 한 동악시단터는 지금의 학림관 인근이었다고 하는데, 근래까지도 이안눌의 현손인 이주진(李周鎭, 1691~1749)이 영조 연간 초에 새긴 ‘東岳先生詩壇(동악선생시단)’ 바위글씨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당시 깨어진 글씨를 탁본하여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남산의 필동·묵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청학동이라 부를 만큼 우거진 숲과 맑은 물로 도성십영(都城十詠) 가운데 남산의 옛 이름을 딴 목멱상화(木覓賞花)라는 시가 있을 정도로 수려한 경관을 보이고 있어 많은 사대부들이 저택과 정자를 마련하여 독서와 풍류를 즐겼다.
중종 때의 문신으로 청학도인(靑鶴道人)을 자칭하던 문장가 이행(李荇)은 살면서 자주 시회(詩會)를 벌였고 그의 증손인 이안눌은 지금 동국대학교 경내에 해당하는 곳에 단을 쌓고 권필(權韠)· 홍서봉(洪瑞鳳) 등 당대의 문장가들과 시회를 즐겼다. 이렇듯 남산 기슭에는 천우각(泉雨閣), 쌍회정(雙檜亭), 화수루(花樹樓), 재산루(在山樓), 홍엽루(紅葉樓), 녹천정(綠泉亭) 등 수많은 정자들이 있었다.
. 동국대 학립관 자리의 바위에 새겨진 “東岳先生詩壇” 바위글씨 탁본으로
비파정에 걸어두었던 율절(律絶) 시도 함께 새겼다고 한다.
이상향을 의미하는 청학동의 비파정은 이안눌이 시를 읊었던 시루(時樓)다.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삼명시집(三溟詩集에 비파정은 이안눌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시단이 묵동(墨洞)에 있다고 했으며,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단 옆에 중국에서 가져온 홑꽃잎의 홍매나무(紅梅樹)가 있다고 한다. 이안눌의 후손인 이석(1701~1759)은 동원기(東園記)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동악 선생은 날마다 당대 명류인 오봉(五峰, 이호민), 석주(石洲, 권필), 학곡(鶴谷, 홍서봉) 등과 어울려 단(壇)에 모였다가 누(樓)에 오르기도 하니 사람들이 신선 같다며 부러워하였다. 글 외우고 시읊는 소리가 마냥 따뜻하고 부드럽게 어울렸기에 그 다락을 가리켜 시루(詩樓)라 하고 그 단을 일컬어 시단(詩壇)이라 하였다. 도헌공(都憲公, 이주진)이 마침내 그 동산에 담장을 두르고 거칠고 더럽혀진 곳을 가지런히 다듬고 흙을 보태서 단을 수리하고 물을 끌어 연못도 파고, 바위에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푸른 대나무, 붉은 단풍나무, 철쭉 따위를 고루 갖추어 연못 둘레 섬돌 계단 사이사이에 옮겨 심기도 하였다”-출처: 김영상, 「서울육백년」
이안눌은 1571년(선조 4) 진사과 초시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나 시기와 모함으로 등과에 뜻을 접고 권필 등 벗들과 시를 노래했는데, 특히 권필과 우의가 깊고 시의 명성이 높아 세상에서는 두 사람을 이백과 두보에 비유하였다. 누정의 이름이 비파정인 것은 사람의 영고성쇠의 무상함을 읊었던 백낙천(白樂天)의 비파행(琵琶行)을 떠 올리게 한다.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시절의 이안눌은 산림에서 벗들과 시로 서로의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흰 사슴을 매어둔 귀록정
경희궁의 숭전전 건물인 정각원을 먼 발치로 보고 대학 교정을 걸어 소월로(남산둘레길)로 올랐다. 그사이 가는 눈발이 길을 살짝 덮었다. 흰눈을 배경으로 노랗고 붉은 잎이 남아있는 경관은 늘 새로워 마치 안개꽃으로 감싼 장미꽃 다발을 선물 받은 듯하다. 곧이어 둘레길을 벗어나 주택단지를 헤집고 돌아올라 연립주택 앞에 섰다.
‘조씨노기(趙氏老基)’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는 주택은 관리인이 없어 양해를 구하지 못하고 열린 문틈으로 글씨가 새겨진 바위벽을 가르키며 안내문의 사진을 번갈아 볼 수 밖에. 주택 윗쪽으로 노인정 표석이 있고 그 앞의 물류센타 뒷마당 바위에 조현명의 ‘유묵록선기제석(遊墨麓先基題石)’ 시가 새겨져 있다. 맑은 날엔 자획을 알아보기 힘든데 살짝 내린 눈으로 일부 글자의 형태가 드러났다.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이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남산의 옛터를 방문하고 이곳에 두어 칸의 집을 지으리라 다짐하는 내용의 시를 바위에 새겨 놓았고 일찍이 풍양 조씨 집안의 터전에 조문명·조현명 형제는 노인정(老人亭)과 귀록정(歸鹿亭)을 지었다.
조현명은 도봉산 아래 시루봉 자락에도 귀록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이 일대 명월동도 이안눌 집안의 소유였고 그의 현손인 이주진과 친분이 두터웠 별서를 서로 이웃하고 있었다. 우이동으로 이어진 고개마루 음식점 앞 개천 바위에 “明月洞門(명월동문)”이라 새겨져 있고 정자가 있던 계류에는 ‘歸鹿溪山(귀록계산)’이라 바위글씨가 남아있다.
조현명은 산행도 즐겨, 정선의 옥동척강도(玉洞陟崗圖)에서 지팡이를 짚고 앞장서 인왕산을 오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도봉산 원통암의 ‘相公岩(상공암)’ 바위글씨는 그의 도봉산행을 기려 새긴 것이다.
흰 사슴을 매어둔 남산의 귀록정은 조현명이 붕당에 속하지 않고 탕평책을 펴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던 휴식의 장소였을 터이다.
조씨노기(趙氏老基)와 유묵록선기제석(遊墨麓先基題石) 바위글씨
선인이 덕을 펴시던 곳이 / 先人種德地, 황폐해진 지 몇 해나 되었는가 / 荒廢幾多年, 두 시내가 모이는 옛터에는 / 襟帶雙溪合, 안개와 노을이 둥그렇게 감쌌네 / 煙霞一局圓, 어찌하여 이 좋은 곳을 버리고 / 胡爲捐白壁, 끝내 옛터를 잃고 부끄러워하나 / 終愧失靑氊, 여기에 집을 지을 책임이 있으니 / 是有堂構責, 내 장차 두어 칸 집을 지으리라 / 吾將結數椽, 녹옹 조현명 / 鹿翁-출처: 한양바위글씨전, 서울역사박물관, 2004.
조현명 형제의 누정은 후에 조인영·조만영 형제의 묵계산장(墨溪山莊)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노인정(老人亭)은 한양의 대표적인 누정 가운데 하나로 이암(李壧)이 쓴 노인정기(老人亭記)에는 이곳의 경관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종남산의 치솟은 절벽 봉우리 가운데 가장 외진 곳이 자각본(紫閣峰)이다. 자각봉 아래는 첩첩 산길이 빙빙 감돌고 있는데, 형세가 마치 옹기를 세워놓은 것 같다. 산이 내달리다 가파른 비탈이 되니, 길을 따라 위태로운 곳으로 옮겨 가다 보면 열 걸음에 백 번은 꺾인다. 꺾이는 곳마다 정신이 피로해지고 지치는데, 그런 후에야 산이 조금 완만해지고 땅이 조금 평평해진다. 왼쪽으로는 청류(淸流)를 끼고 오른쪽으로는 백비(白賁)를 끌어당기며, 남영(南營)을 등지고 있다. 활 모양으로 높이 솟은 곳은 언덕이고, 입을 벌린 것처럼 깊숙한 곳은 골짜기인데, 거기에 몇 무 정도 의 넓은 터가 있으니, 이른바 노인정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은 상서조공의 별장이다.”-김근태, 「雲石趙寅永의 교유 양상과 墨溪山莊」
묵계산장의 노인정은 선비들의 유상처(遊賞處)로 황희지의 난정(蘭亭) 모임을 본뜬 시회가 자주 열렸으며, 언제고 여흥 민씨 가문의 민영준의 소유로 바뀌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로 대군을 출병시킨 일본이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한 회담이 노인정에서 열려 치욕의 장소가 되었지만, 이곳의 귀록정과 노인정 등의 누정은 여러 시인묵객들이 들러 풍광을 감상하며 시를 짓고 거문고와 바둑을 즐기던 조선 선비들의 문화공간이었다.
노인정이라 알려진 사진(左)과 이전에 계류 중간에 놓였던 노인정(右, 1920년대 화보집)
다시 둘레길로 올라 제갈공명의 사당인 와룡묘(臥龍廟)를 찾았다. 근대에 지어진 제갈공명의 사당은 국사당이 산정에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다. 믿고 의지할 데 없는 민간에선 대상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걷기 좋은 길이 끝나면 ‘국치(國恥)의 길’을 따라 돈까스 전문점들이 즐비하다. 가는 눈발이지만 근처 식당에서 중식을 하고 서둘러 산정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에 올랐다.
추억의 케이블카를 얘기했더니, 서울 살면서 케이블카를 처음 타본다는 참여자도 있었다. 한편 이해가 가는 일로 그 참여자는 오늘 산행이 추억이 되겠다. 3분여 짧은 시간 동안 보이는 주변 풍광은 온통 붉은 열매의 팥배나무로 산자락이 뒤덮혔다.
남산 자락에 6대에 걸쳐 살던 홍경모(洪敬謨, 1774-1851)는 “푸른 빛을 모으고 파란 빛을 바른 듯한 자태와 아침의 구름과 저녁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경관은 비록 공교로운 글솜씨와 뛰어난 그림 솜씨라 하더라 도 비슷하게 그려내기는 어려울 듯하다.”고 남산의 멋진 경관을 노래했다.
내려선 케이블카 정류장이나 남산타워는 온통 언약의 자물쇠가 난간마다 채워져 변치 않을 무엇인가를 다짐해 놓았고 국사당 자리의 팔각정을 배경으로 현수막을 펼쳐 산행 기념사진을 찍으려니 괜스레 멋쩍다. 가까이 서울 도심을 보고 동쪽으로 한강의 줄기가 산봉우리들 사이로 아득해지는 지점까지 눈에 담고 백범광장으로 길을 내리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인문산행을 마쳤다.
복잡한 남대문 시장을 헤집고 자리하여 매콤한 갈치조림에 탁배기 한 잔을 서로 권하는데, 다들 내년 3월에 시작될 인문산행을 기다리기보다는 겨울 산행을 하자고들 야단이다.
첫댓글 글이 서툴러 지송스럽네요.ㅎ 3년간 인문산행 마무리 글을 쓰자니 정신없는 와중에도 지난 시간의 많은 일들이 떠오르고 참여자 분들께 감사하네요. 즐건 연말연시 되세요. 3월에 뵙겠습니다~
격조있는 깊은 글 나눠보게 해주셔서 우선 감사드립니다
누대에 걸친 풍양 조씨와 이씨(이안눌)들의 양반가 생활을 엿봤다고나 할까요
민족의 아픔까지 간직한 남산길 인문산행에
발걸음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지금껏 인문산행 후기중 최고의 후기네요~~ 내년도 "사람과 산" 후기 경쟁자중 한명이네요^^
그날 듣고 배운것이 정리가 안됐었는데 이 후기글을 읽으니 화~악 정리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후기글입니다. 후기는 제게 주제 넘슴다.ㅎ
인월골짜기에서 올라와 노량진 촌구석에서 사셨군요...^^
노량진을 거닐면서 옛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한번 만들어 주세요...~
흐릿한 기억. 한국모방, 대화작크..송학대교회ㅎ
좋은 자료입니다. 조장빈 이사 수고했습니다.
즐겁게 감상합니다.
세종때 '정이오'가 지은 '남산팔영'(南山八詠) 을 내가 '정격 단시조'로 한번 읊어보려 했으나, 500년이 훨씬 지나 당시의 모습을 볼 수도 없거니와, "지어 본들 현 시점에서는 감흥이 없다" 판단되어 아예 포기해버렸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