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포늪 왁새」와 비화벌의 하루
개암 김동출
망팔(望八)을 넘긴 거제고 21기 동기들과 함께한 오월의 창녕은, 송현동 고분군의 푸른 잔디와 눈 부신 햇살로 내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했다. 그날 우리는 봄나들이로 창녕 관룡사와 군립 창녕박물관, 송현동 고분을 차례로 둘러보고 점심과 찻집에서 우정을 나눈 뒤 마지막으로 우포늪을 찾았다. 그러나 그날의 늪은 배한봉 시인이 「우포늪 왁새」에서 그려낸 절창의 순간과는 달랐다. 자운영 꽃불이 활짝 타오르는 장관도, 왁새의 울음이 절창으로 울려 퍼지는 순간의 계절을 놓쳤던 탓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등을 내건 관룡사에서, 해설가가 들려준 역사와 보물 이야기는 천년 고찰의 고요함과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주었다. 특히 건강이 허락되는 친구들이 마주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1981년 6학년을 인솔해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겹치면서, 세월의 무게와 삶의 궤적이 한순간에 교차했다. 군립 창녕박물관 로비에 전시된 5세기~6세기경 비화벌 송현동 고분군 15호분에서 발견된 순장 소녀 ‘송현이’의 복원 상은, 천5백여 년의 오랜 역사를 넘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였다. 고분 속에 잠들었던 그녀가 다시 빛을 입어 서 있는 모습은 고고학적 연구와 복원 기술의 성과 덕분이었다. 그 눈빛은 마치 오월의 햇살 속에서 되살아난 듯, 내 앞에 서서 묵묵히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사진 앞에서 오랫동안 묵상에 잠겼고,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송현이는 단순한 유골의 복원이 아니라, 비화벌의 역사와 인간 존재의 무게를 상징하는 소녀였다.
점심으로 나눈 쇠고기 청국장의 구수한 맛과 찻집에서의 우정 어린 대화는 시의 여운과 어우러져 내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주었다. 인생 제2막을 시 낭송의 즐거운 속에 살아가는 친구 윤경이는, 창녕 대지면 너른 들판 어귀의 소박한 집에서 꽃밭을 가꾸며 ‘화왕산 미나리’ 농장을 경영하는 농부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삶은 문학과 농업이 어우러진 풍경이었고, 그 모습은 곧 배한봉의 시와 부족한 나의 시가 서로 대화하는 배경이 되어주었다.
배한봉의 「우포늪 왁새」는 득음을 이루지 못한 소리꾼의 영혼이 왁새의 울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통해 예술과 자연의 합일을 보여준다.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항산 솔밭을 다 적시고 /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라는 구절은, 인간의 한계와 실패가 자연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 순간을 상징한다.
그날의 탐방에서 나는 직접 그 장관을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 아쉬움이 내 안에서 새로운 시를 낳았다. 「오월 우포(牛浦)」라는 제목으로 쓴 시는 따오기와 개개비, 가물치와 왜가리 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생명의 합창을 이루는 모습을 담았다. “눈부신 비단 물비늘 위로 / 지금 세포분열 하는 빛의 속도로 / 수만개의 씨앗이 뿌려지는 / 생명의 함성”이라는 대목은, 배한봉의 시가 예술혼의 승화를 노래했다면, 내가 본 우포늪은 생명의 원초적 힘과 현장의 감각을 시적으로 포착한 순간이었다.
창녕에서 보낸 하루는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었다. 관룡사에서의 역사적 울림, 송현동 고분에서 느낀 인간의 덧없음, ‘송현이’의 눈빛이 전해준 역사의 진실과 생명의 메시지, 친구들과 나눈 우정, 그리고 우포늪의 아쉬운 풍경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엮여 내 삶과 문학적 감각을 자극했다. 배한봉의 「우포늪 왁새」와 나의 「오월 우포 牛浦」는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같은 늪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예술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교차하는 무대라는 공통된 진실을 드러냈다. 그날의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하게 했다. 언젠가 이른 아침이나 석양 무렵, 배한봉 시인의 시를 낭송하며 우포늪의 정취를 온전히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시와 그의 시가 함께 울려 퍼지며 늪을 가득 채우는 또 하나의 합창이 될 것이라 믿는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단순한 여행의 지혜를 넘어, 인생의 의미를 담고 있다.
창녕 비화벌에서 고등학교 동기들과 함께한 하루는 이 속담을 가장 아름답게 증명한 순간이었다. 혼자였다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풍경들이, 여럿이 함께였기에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송현이의 눈빛 앞에서, 우포늪의 물비늘 위에서, 그리고 찻집의 웃음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과 청춘을 겹쳐 떠올렸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동기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었다.
“먼 길을 가려거든 여럿이 가라.” 2024년 7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Biosphere Reserve)’으로 공식 지정된 창녕에서 보낸 오월의 하루는 이 속담을 가장 아름답게 증명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인생의 긴 여정에서 함께 걷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늪의 풍경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앞으로의 길을 더욱 멀리, 더욱 깊게 이어줄 것이라 기대하며, 윤경이가 소개해 준 배한봉 시인의 「우포늪 왁새」를 되뇌어 본다.
배한봉, 「우포늪 왁새」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 장이나 떠돌던 소리꾼이 있었다
신명난 한 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의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항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매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작가 노트>>
이날 친구 윤경이는 모처럼 창녕을 찾은 동기들을 위해 바쁜 농사일을 잠시 뒤로하고 일정을 정성껏 안내하며, 손수 재배한 미나리까지 선물해 주었다. 그의 깊은 우의와 따뜻한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울러 거제고 21기 동기생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2026-05-16